그레고리오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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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고리오 선교는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을 위해 켄트 왕국에 파견한 선교 활동이다. 4세기 기독교화되었던 브리타니아와 달리 앵글로색슨족의 침략 이후 켈트 기독교가 남았던 잉글랜드에, 그레고리오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약 40명의 선교단을 파견했다. 켄트 왕 애델베르트와 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아 선교단은 켄트에 정착하여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 대성당 등을 건립했다. 이 선교는 앵글로색슨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계를 강화하고,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문화, 예술, 법률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앵글로색슨족의 성인 숭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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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선교 | |
---|---|
개요 | |
이름 | 그레고리오 선교 |
다른 이름 | 아우구스티누스 선교 |
유형 | 선교 |
날짜 | 596년 ~ |
위치 | 잉글랜드 |
목표 | 앵글로색슨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
방법 | 설교 교육 기적 (전설) |
결과 | 캔터베리 대주교구 설립 잉글랜드의 기독교화 |
배경 | |
발의자 | 교황 그레고리오 1세 |
대상 | 앵글로색슨족 |
이전 종교 | 앵글로색슨족의 종교 |
동기 | 로마 교황권 강화 이교도 개종 |
주요 인물 | |
지도자 | 아우구스티누스 (캔터베리) |
기타 인물 |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켄트의 에텔베르트 베르타 (켄트) |
과정 | |
파견 | 596년, 로마에서 출발 |
경유지 | 프랑스 |
도착 | 잉글랜드, 597년 |
활동 지역 | 켄트 왕국 |
주요 사건 | 켄트의 에텔베르트 세례 캔터베리 대주교구 설립 |
영향 | |
종교적 영향 | 잉글랜드 교회 설립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 |
문화적 영향 | 로마 문화 전파 교육 시스템 도입 |
정치적 영향 | 교황권 강화 왕권 강화 |
평가 | |
긍정적 평가 |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 잉글랜드 문화 발전 기여 |
비판적 평가 | 강압적 개종 (일부) 토착 문화 파괴 (일부) |
관련 항목 | |
관련 인물 | 베네딕토 성인 보보니우스 |
관련 장소 | 캔터베리 로마 |
관련 사건 | 성 아우구스티누스 축일 |
2. 배경
4세기 로마 속주 브리타니아는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펠라기우스라는 이단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9][10] 314년 아를 공의회에 브리튼 주교 3명이 참석하였고, 396년에는 골 주교가 징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리타니아를 방문하였다.[7] 세례 대야와 기독교 상징이 새겨진 유물들은 적어도 360년까지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8]
410년 로마 군단이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한 후,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등(일반적으로 앵글로색슨족이라 통칭) 비기독교도들이 브리타니아 남부에 정착하였다. 브리튼 대부분은 기독교를 유지했지만, 로마와의 단절로 인해 켈트 기독교[9][10]라는 독특한 관습이 발전하였다. 켈트 기독교는 주교구 대신 수도원을 강조하고, 부활절 날짜 계산과 성직자 삭발 방식에서 로마와 차이를 보였다.[10][11] 이 시기 동부 브리튼에 기독교가 계속 존재했다는 증거로는 성 알반 숭배와 지명에 "교회"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eccles''가 사용된 점 등이 있다.[12] 그러나 이들 토착 기독교인들이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13][14]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은 앵글로색슨족이 점령한 지역에서 경제, 종교 구조를 포함한 로마 문명의 잔재 대부분이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15] 이것이 초기 중세 작가 길다스가 주장한 것처럼 침략의 결과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불분명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브리튼에서 도시 로마 문화가 쇠퇴함과 동시에 부족들의 정착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17] 결과적으로 59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착했을 때 앵글로색슨 왕국은 이전 로마 문명과의 연속성이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존 블레어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의 백지 상태에서 선교를 시작했다"고 말했다.[18]
3. 그레고리오 1세와 선교 동기
그레고리오 1세가 앵글로색슨족에게 선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8세기 베다는 로마 노예 시장에서 앵글로색슨족 노예들을 본 그레고리오가 그들을 개종시키기로 결심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레고리오는 노예들이 앵글족이라는 말을 듣고, 그들이 앵글족이 아니라 천사라고 답했다고 한다.[35][36] 이 이야기의 초기 버전은 705년경 휘트비 수도원에서 쓰여진 익명의 '그레고리오 전기'에 나온다.[37]
역사학자 N. J. 하이엄은 그레고리오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었고, 자신이 종말론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선교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레고리오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비기독교인, 아리우스파 유대인, 이교도들의 개종도 촉구했다.[41][42][43]
그레고리오의 주된 동기가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다.[44] 반면, 교황청의 권위를 확장하고 로마의 지도를 바라는 새로운 기독교인을 모집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도 관련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에텔베르트 아래 켄트 왕국의 부상하는 세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장소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31]
켄트와 에텔베르트의 선택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텔베르트가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자유롭게 예배하도록 허용했고, 프랑크 왕국과 에텔베르트 왕국 사이의 무역이 잘 확립되어 있었으며, 언어 장벽도 크지 않았다. 또한, 592년 웨섹스의 체울린 왕이 쇠퇴한 이후, 에텔베르트는 앵글로색슨족의 주요 통치자였고, 험버 강 남쪽 지역에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켄트가 프랑크족과 가까웠기 때문에 기독교 지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었다.[47]
3. 1. 즉각적인 배경
595년, 그레고리오 1세는 앵글로색슨족에게 선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8] 당시 켄트 왕국은 애델베르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588년 이전,[29] 아마도 560년 이전부터[56] 베르타와 결혼한 상태였다. 베르타는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왕 카리베르트 1세의 딸인 기독교 공주였다. 결혼 조건 중 하나로 베르타는 리우드하르트 주교를 자신의 사제로 켄트에 데려왔다.[30] 이들은 로마 시대에 지어진 캔터베리의 교회를 복원했는데,[31] 아마도 현재의 세인트 마틴 교회일 것이다. 애델베르트는 당시 이교도였지만, 아내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30] 리우드하르트는 앵글로색슨족 사이에서 많은 개종자를 만들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32] ''Leudardus Eps'' (''Eps''는 주교를 뜻하는 라틴어 ''Episcopus''의 약자)라는 비문이 새겨진 금화, 리우드하르트 메달리온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는 의심받았을 수도 있다.[33] 베르타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은 애델베르트가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그레고리오에게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한다.[30] 역사가 이안 우드는 그 계획이 켄트 궁정뿐만 아니라 여왕으로부터도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34]
3. 2. 선교 동기
그레고리오가 선교를 시작한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8세기 영국 교회의 역사를 쓴 수도승 베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그레고리오는 로마 노예 시장에서 머리카락이 고운 앵글로색슨족 노예들을 보고 그들을 개종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레고리오는 노예들의 정체성을 묻자, 그들이 대영 제도의 앵글족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레고리오는 그들이 앵글족이 아니라 천사라고 답했다.[35][36] 이 이야기의 초기 버전은 705년경 휘트비 수도원에서 쓰여진 익명의 '그레고리오 전기'에 나온다.[37]
역사학자 N. J. 하이엄은 그레고리오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었고, 자신이 종말론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추측한다. 이러한 믿음은 그가 선교를 보내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레고리오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비기독교인, 아리우스파 유대인, 이교도들의 개종도 촉구했다.[41][42][43]
일부 학자들은 그레고리오의 주된 동기가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44] 반면, 다른 학자들은 교황청의 권위를 확장하고 로마의 지도를 바라는 새로운 기독교인을 모집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도 관련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에텔베르트 아래 켄트 왕국의 부상하는 세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장소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31]
켄트와 에텔베르트의 선택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텔베르트가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자유롭게 예배하도록 허용했고, 프랑크족과 에텔베르트 왕국 사이의 무역이 잘 확립되어 있었으며, 언어 장벽도 크지 않았다. 또한, 592년 웨섹스의 체울린 왕이 쇠퇴한 이후, 에텔베르트는 앵글로색슨족의 주요 통치자였고, 험버 강 남쪽 지역에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켄트가 프랑크족과 가까웠기 때문에 기독교 지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었다.[47]
3. 3. 실질적인 고려 사항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에는 몇 가지 실질적인 고려 사항이 있었다. 애설베르트 왕이 기독교 신앙을 허용한 것은 프랑크 왕국과의 무역 관계 때문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언어 소통 문제가 있었을 수 있다. 따라서 선교는 무역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50] 또한 켄트 왕국은 성장하여 험버 강 남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려는 상황이었고, 이 때 프랑크족의 지원은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31]
프랑크족은 켄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특히 클로타르 2세는 다른 프랑크 왕국들에 맞서 자신의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켄트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했다.[51]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를 지원하는 것은 프랑크족의 정치적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50]
그레고리오 교황은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켜 기독교 세계를 확장하려는 종교적 열망 외에도, 교황청의 권위를 넓히고 새로운 기독교 지역을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정치적 동기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31]
3. 4. 준비 과정
595년, 그레고리오 1세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선교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주교들과 테우데리크 2세, 테우데베르트 2세, 브룬힐다, 클로타르 2세 등 프랑크 왕국의 왕족들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통역관과 프랑크 사제들을 선교에 동행하도록 허가했다.
4. 선교단의 도착과 초기 활동
앨델베르트의 개종은 비드와 그레고리우스가 언급한 날짜는 서로 다르지만,[55] 597년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57]
4. 1. 구성 및 도착
선교단은 약 40명의 선교사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수도사였다.[29] 로마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과업의 성격에 압도되어 멈춰 섰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로마로 돌려보내 그레고리우스에게 귀환 허가를 요청하게 하였지만,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선교사들에게 인내를 격려하는 서신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돌려보냈다.[52] 이러한 일시적인 중단의 또 다른 이유는 선교사들을 도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힐데베르트 2세 왕의 사망 소식을 접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지침과 소개 서한을 확보하고, 골 지역의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 대해 그레고리우스에게 알리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은 론 강 계곡에서 멈춰 섰을 것이다.[40] 그레고리우스는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를 선교단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지침과 함께 나머지 선교사들에게 돌아갔으며, 여기에는 켄트 지역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륙에서 주교 서임을 구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었을 것이다.[53]597년, 선교단은 켄트에 상륙했고,[29] 곧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45][54] 애설베르트 왕은 선교사들이 그의 수도인 캔터베리에서 정착하고 설교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들은 성 마틴 교회를 예배에 사용했고,[57] 이 교회는 주교좌가 되었다.[45]
4. 2. 개종 과정
초기 중세 시대에는 통치자가 먼저 개종해야 대규모 개종이 가능했고, 켄트 지역에서는 선교 시작 1년 안에 많은 수의 개종자가 기록되었다.[57] 601년, 그레고리오 1세는 애설버트와 베르타에게 편지를 보내 애설버트 왕을 아들이라 부르며 그의 세례를 언급했다. 그가 받은 은총을 보존하라영어는 내용의 편지에서 '은총'은 세례의 은총을 의미했다.[57] 15세기 연대기 작가 토마스 엘럼이 기록한 후기 중세 전통에 따르면, 애설버트 왕은 597년 6월 2일 성령강림절에 개종했다. 이 날짜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는 없지만, 다른 증거는 없다.[57] 598년 6월, 그레고리오 1세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율로기우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개종자 수는 언급되었지만, 597년 왕의 세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601년에는 애설버트 왕이 개종했음이 분명하다.[58] 주소 브레히터가 애설버트 왕이 601년 이후에 개종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중세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58][59] 애설버트 왕의 세례는 캔터베리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비드는 그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다.[60]애설버트 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비드는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개종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다른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61] 켄트가 골(Gau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애설버트 왕은 메로빙거 왕조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거나, 당시 골에서 경쟁하던 파벌 중 하나와 손을 잡기 위해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62] 또 다른 이유는 개종 이후 새로운 행정 방식이 도입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새로 도입된 교회로부터 직접적으로든 다른 기독교 왕국으로부터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63]
비드의 기록에 따르면 애설버트 왕은 개종을 장려했지만, 신하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역사가 R. A. 마르쿠스는 왕국 내 강력한 이교도 세력 때문에 왕이 왕실의 후원과 우정 등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개종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64] 마르쿠스는 비드가 왕의 개종 노력을 묘사하면서 신하들이 개종했을 때 "그들의 개종을 기뻐"하고 "신자들을 더 큰 애정으로 대해야" 했다고 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65]
4. 3. 로마로부터의 지침과 선교사 파견
아우구스티누스는 선교에 성공하여 켄트 왕국의 애설버트 왕을 개종시키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이러한 성공 소식과 함께 선교 활동 중 생긴 여러 질문을 담은 서신을 로렌스를 통해 로마로 보냈다.[66] 베다는 자신의 저서 《앵글로족 교회 역사》 27장에 이 서신과 그레고리오 1세의 답변을 기록했는데, 이 부분은 《응답집》(''Libellus responsionum'')으로 알려져 있다.[67][68]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조직, 교회 재산 강탈자 처벌, 결혼 관련 지침, 주교 서임 등 여러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또한 브리튼과 골 지역 교회 간의 관계, 출산과 세례, 성찬과 미사 집전 시기 등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었다.[68]베다에 따르면, 601년에 더 많은 선교사들이 로마에서 파견되었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대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팔리움과 함께 성스러운 그릇, 예배 의복, 유물, 책 등을 가져왔다. 팔리움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 교황청과 일치함을 의미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가능한 한 빨리 12명의 보좌 주교를 서임하고, 요크에 주교를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그레고리오 1세의 계획은 요크와 런던에 각각 대교구를 설치하고, 각 대주교 아래에 12명의 보좌 주교를 두는 것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대주교 관구를 캔터베리에서 런던으로 옮기라고 지시했지만, 이 지시는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다.[72] 그 이유는 런던이 애설버트 왕의 영토가 아니었고,[31] 이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수 있다.[73]
그레고리오 1세는 런던을 남부 대주교 관구로 제안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시대에 런던이 속주의 중심 도시였던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73]
귀환하는 선교사들은 애설버트 왕에게 보내는 서신도 함께 가져왔다. 이 서신에서 그레고리오 1세는 애설버트 왕에게 콘스탄티누스 1세처럼 행동하여 백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강요하고, 모든 이교 사당을 파괴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는 601년 7월에 멜리투스에게 보낸 또 다른 서신인 《멜리투스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이교 사당을 정화하여 기독교 예배 장소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76][78] 그는 앵글로색슨족을 고대 이스라엘인에 비유하며, 이교 축제를 점진적으로 기독교 축제로 바꾸도록 제안했다.[76][77]
4. 4. 교회 건물
베다는 선교단이 켄트에 도착하여 국왕을 개종시킨 후, 옛 로마 교회를 복원하고 재건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기록한다. 그중 하나가 캔터베리 대성당이 된 캔터베리 크라이스트 처치였다.[80] 재건된 다른 로마 교회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희박하지만, 캔터베리의 성 팡크라스 교회는 로마 시대 건물을 핵심으로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오래된 건물이 로마 시대에 교회였는지는 불분명하다.[80] 또 다른 가능한 장소는 켄트 럴링스톤으로, 버려진 교회 아래에서 서기 3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종교 유적지가 발견되었다.[80]아우구스티누스는 도착한 직후 왕이 기증한 부지인 성벽 바로 바깥, 도시 동쪽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45] 수도원을 설립했다.[81] 아우구스티누스 사후, 이곳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82] 이 재단은 종종 이탈리아 외부에 세워진 최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라고 주장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를 설립함으로써 성 베네딕토 규칙을 잉글랜드에 도입했다고 주장하지만, 수도원이 설립 당시 베네딕토회 규칙을 따랐다는 증거는 없다.[82]
5. 남부 지역 활동
604년, 로체스터에 새로운 주교구가 설립되었고, 유스투스가 주교로 서임되었다. 같은 해 에식스 왕이 개종하면서 런던에 또 다른 교구가 설립되었고, 멜리투스가 주교로 임명되었다.[90]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는 켄트의 애설베르트를 방문하는 동안 개종했지만,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서는 이교 신과 기독교 신을 모두 숭배했다.[91] 베다는 래드왈드가 배교한 이유가 여전히 이교도였던 그의 아내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역사학자 S. D. 처치는 개종에 대한 망설임 뒤에는 군주의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보았다.[92] 같은 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하고 로렌스가 대주교직을 계승했다.[93]
616년 애설베르트가 사망한 후 이교도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멜리투스는 런던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107] 유스투스는 로체스터에서 추방되었지만, 갈리아에서 멜리투스와 함께 지낸 후 돌아왔다. 베다에 따르면 로렌스가 프랑키아에 있는 멜리투스와 유스투스에게 합류하려 할 때 성 베드로가 나타나 그의 선교를 떠나려는 계획을 꾸짖으며 채찍질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로렌스가 깨어났을 때 그의 몸에는 기적적으로 채찍 자국이 나타났고, 그는 이 사실을 새로운 켄트 왕에게 보여주어 왕은 즉시 개종하여 추방된 주교들을 소환했다.[98]
역사가 N. J. 하이엄은 멜리투스의 추방에 정치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멜리투스를 추방한 것은 Sæberht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이다. 베다는 그 아들들이 개종한 적이 없으며, 애설베르트가 죽은 후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채 멜리투스에게 성찬을 받으려 했고, 성찬을 마법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베다는 이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 요인에 대한 세부 사항은 제공하지 않지만, 아들들이 멜리투스를 추방함으로써 켄트로부터의 독립을 보여주고, 애설베르트가 동색슨족에게 행사했던 지배권을 거부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멜리투스가 떠난 후 동색슨족 기독교인들이 학대받거나 억압받았다는 증거는 없다.[99]
애설베르트의 뒤를 이어 켄트의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아들 에드발드였다. 베다는 애설베르트가 죽은 후 에드발드는 세례를 거부하고 계모와 결혼했는데, 이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금지된 행위라고 말한다. 베다의 설명에서는 로렌스의 기적적인 채찍질이 에드발드의 세례를 촉발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에드발드가 직면한 정치적, 외교적 문제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베다의 서술에는 연대기적 문제도 있는데, 현존하는 교황 서한이 베다의 설명과 상반되기 때문이다.[100] 역사가들은 에드발드의 개종 정확한 날짜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D. P. 커비는 교황 서한에 따르면 에드발드는 유스투스가 캔터베리 대주교였을 때 개종했는데, 이는 로렌스가 죽은 후이며 애설베르트가 죽은 지 한참 후라고 주장한다.[101] 헨리 메이어-하팅은 베다의 연대기가 정확하다고 받아들이며, 에드발드가 그의 아버지 사망 직후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93] 하이엄은 에드발드가 즉시 개종하지 않았다는 커비의 주장에 동의하며, 왕이 기독교를 지지했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최소 8년 동안 개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02]
5. 1. 영국 기독교인들과의 관계
그레고리오 1세는 토착 영국 주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배를 받도록 명령했고,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는 602년에서 604년 사이에 토착 성직자들과 만남을 가졌다.[86] 그 만남은 나중에 "어거스틴의 오크"라는 이름으로 불린 나무에서 이루어졌으며,[85] 아마도 현재의 서머싯과 글로스터셔의 경계 부근이었을 것이다.[83]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 교회가 부활절 날짜 계산을 포함하여 로마 관행에 따르지 않는 모든 관습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85]약간의 논의 끝에, 지역 주교들은 어거스틴의 요청에 동의하기 전에 자신의 백성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회의를 떠났다. 베다는 토착 주교들이 늙은 은자를 만나 조언을 구했으며, 은자는 어거스틴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서면 어거스틴에게 복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복종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전한다. 어거스틴이 다음 회의에서 일어나지 않자, 토착 주교들은 어거스틴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다.[86] 베다는 이어서 어거스틴이 영국 교회가 앵글로색슨족에게 선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토착 교회가 앵글로색슨족의 손에 고통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하게 했다. 이 예언은 노섬브리아의 에델프리드가 체스터 전투에서 1,200명의 토착 수도사를 죽였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85]
7세기 후반에 글을 쓴 맬즈버리 수도원장 알드헬름은 토착 성직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기독교 의식을 함께 거행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85] 어거스틴의 후계자인 캔터베리의 로렌스는 캔터베리 재임 기간 동안 아일랜드 주교들에게 편지를 써서, 아일랜드 주교 다간이 선교사들과 식사를 나누지 않았다고 밝혔다.[87]
영국 성직자들이 그레고리 선교사들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한 한 가지 유력한 이유는, 선교 당시 토착민들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앵글로색슨족은 여전히 영국 땅을 침범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자국을 침략한 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꺼렸고, 침략자들은 토착민들을 2등 시민으로 여겼으며, 어떠한 개종 노력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선교사들이 침략자들의 대리인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측면도 있었다.[85] 어거스틴은 켄트의 에델베르트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 복종하는 것은 에델베르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영국 주교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88]
5. 2. 주교 관구 확장 및 교회 문제
604년, 로체스터에 새로운 주교구가 설립되었고, 유스투스가 주교로 서임되었다. 같은 해 에식스 왕이 개종하면서 런던에 또 다른 교구가 설립되었고, 멜리투스가 주교로 임명되었다.[90]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 역시 개종했지만, 그의 영토에는 교구가 설립되지 않았다.[107] 래드왈드는 켄트의 에텔베르흐트를 방문하는 동안 개종했지만,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서는 이교 신과 기독교 신을 모두 숭배했다.[91] 베다는 래드왈드가 배교한 이유가 여전히 이교도였던 그의 아내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역사학자 S. D. 처치는 개종에 대한 망설임 뒤에는 군주의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보았다.[92] 같은 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하자, 로렌스가 그의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되었다.[93]역사학자 N. J. 하이엄은 교회의 일과 규칙을 논의하기 위한 교회 회의인 시노드가 초기 선교 기간 동안 런던에서 열렸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603년 직후에 열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륙 작센족에게 선교사가 된 앵글로색슨족 출신 보니파시오는 런던에서 그러한 시노드가 열렸다고 언급하며, 그 시노드에서 결혼에 관해 논의했으며, 74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3세와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하이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레고리오 대제에게 결혼 문제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94] 또 다른 역사학자인 니컬러스 브룩스는 그러한 시노드가 있었는지 확신하지 않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는 보니파시오가 베다의 저작을 최근에 읽고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95]
5. 3. 이교도들의 반발
616년 애설베르트가 사망한 후 이교도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멜리투스는 런던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107] 유스투스는 로체스터에서 추방되었지만, 결국 갈리아에서 멜리투스와 함께 지낸 후 돌아올 수 있었다. 베다는 로렌스가 프랑키아에 있는 멜리투스와 유스투스에게 합류하려 할 때 성 베드로가 나타나 그의 선교를 떠나려는 계획을 꾸짖으며 채찍질하는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 로렌스가 깨어났을 때 그의 몸에는 기적적으로 채찍 자국이 나타났다. 그는 이 사실을 새로운 켄트 왕에게 보여주었고, 왕은 즉시 개종하여 추방된 주교들을 소환했다.[98]역사가 N. J. 하이엄은 멜리투스의 추방에 정치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멜리투스를 추방한 것은 Sæberht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이다. 베다는 그 아들들이 개종한 적이 없으며, 애설베르트가 죽은 후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채 멜리투스에게 성찬을 받으려 했고, 성찬을 마법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베다는 이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 요인에 대한 세부 사항은 제공하지 않지만, 아들들이 멜리투스를 추방함으로써 켄트로부터의 독립을 보여주고, 애설베르트가 동색슨족에게 행사했던 지배권을 거부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멜리투스가 떠난 후 동색슨족 기독교인들이 학대받거나 억압받았다는 증거는 없다.[99]
애설베르트의 뒤를 이어 켄트의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아들 에드발드였다. 베다는 애설베르트가 죽은 후 에드발드는 세례를 거부하고 계모와 결혼했는데, 이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금지된 행위라고 말한다. 베다의 설명에서는 로렌스의 기적적인 채찍질이 에드발드의 세례를 촉발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에드발드가 직면한 정치적, 외교적 문제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베다의 서술에는 연대기적 문제도 있는데, 현존하는 교황 서한이 베다의 설명과 상반되기 때문이다.[100] 역사가들은 에드발드의 개종 정확한 날짜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D. P. 커비는 교황 서한에 따르면 에드발드는 유스투스가 캔터베리 대주교였을 때 개종했는데, 이는 로렌스가 죽은 후이며 애설베르트가 죽은 지 한참 후라고 주장한다.[101] 헨리 메이어-하팅은 베다의 연대기가 정확하다고 받아들이며, 에드발드가 그의 아버지 사망 직후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93] 하이엄은 에드발드가 즉시 개종하지 않았다는 커비의 주장에 동의하며, 왕이 기독교를 지지했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최소 8년 동안 개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02]
6. 노섬브리아로의 기독교 확산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이 애델베르트의 딸 애델버그와 결혼하고 그녀가 기독교 신앙을 계속 유지하도록 허락하면서 브리튼 북부에서 기독교 확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에드윈은 또한 요크의 파울리누스 주교가 애델버그와 동행하여 궁정에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했다. 627년, 파울리누스는 에드윈을 개종시켰고, 에드윈은 그 해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왕의 개종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107] 파울리누스가 북쪽으로 간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103]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통적인 날짜인 625년을 주장하는 반면,[107] 다른 역사학자들은 619년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103]
파울리누스는 에드윈의 권력 기반이었던 데이라 뿐만 아니라 버니시아와 린지 왕국에서도 활동했다. 에드윈은 그레고리오 1세가 브리튼에 두 개의 대주교구를 세우려는 계획에 따라 요크에 북부 대주교구를 설립하려 했다. 에드윈과 에드발드는 파울리누스에게 팔리움을 요청하기 위해 로마로 사절을 보냈고, 팔리움은 634년 7월에 보내졌다. 이스트앵글리아의 에오르프왈드 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이스트앵글리아인들도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했다.[106] 에드윈이 633년[107] 또는 634년[106] 전투에서 사망한 후, 파울리누스는 에드윈의 미망인, 딸과 함께 켄트로 돌아갔다. 파울리누스 일행 중 제임스 데이컨만이 남았다.[107] 유스투스가 노섬브리아를 떠난 후, 새로운 왕인 노섬브리아의 오스왈드는 아이오나의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왕국을 개종시키는 데 힘썼다.[108]
7. 기타 측면
그레고리오 선교사들은 로마 정착지가 집중된 지역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레고리오가 선교사들을 파견했을 때, 당시 프랑크 왕국 교회의 조직을 본떠 잉글랜드에 일종의 로마 문명을 복원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선교의 또 다른 측면은 수도원주의에 거의 기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캔터베리에 수도원 하나가 세워졌고, 이것이 나중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이 되었지만, 어거스틴과 그의 선교사들 중 일부는 수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캔터베리에서 수도사처럼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세속 성직자처럼 대성당 교회에서 봉사하며 생활했고, 로체스터와 런던에 세워진 교구도 비슷한 방식으로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10] 갈리아와 이탈리아 교회는 도시와 그 도시가 통제하는 영토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목회 서비스는 중앙 집중화되었고, 교회는 도시의 영토 지배 지역의 더 큰 마을에 세워졌다. 주교좌는 도시에 세워졌고, 모든 교회는 주교의 성직자가 배치된 교구에 속했다.[111]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베다의 기록에서 그레고리오 선교사들이 노섬브리아의 아일랜드 선교사에 비해 평범하고 지루하게 묘사된 점에 주목하는데, 이는 베다가 정보를 수집한 방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역사학자 헨리 마이어하팅은 또한 대부분의 그레고리오 선교사들이 감정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 로마적인 덕목인 ''그라비타스''(개인적 존엄성)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제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12]
선교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모범을 통한 것이었다. 또한, 그레고리오의 유연성과 선교사들이 전례와 행동을 조정하도록 허용한 점도 중요했다.[32] 또 다른 이유는 에텔베르트가 프랑크인이 아닌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다는 점이다. 왕은 프랑크 주교 리우드하르트가 그를 개종시키는 것을 경계했을 텐데, 이는 켄트가 프랑크의 종주권 주장에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로마 교황의 대리인에게 개종하는 것은 더 안전했을 뿐만 아니라, 라틴 교회의 중심에서 세례를 받아 명성을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 제국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것은 에텔베르트가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113] 다른 역사가들은 선교의 성공을 그레고리오가 성공을 위해 투자한 상당한 자원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는 첫 번째 그룹으로 4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나중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는데, 이는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46]
8. 유산
그레고리오 선교는 잉글랜드에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은 이교도 관습을 점진적으로 없애 640년에 이르러 이교를 불법으로 선언했다. 앵글로색슨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긴밀한 관계를 조성했으며, 이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권한 행사를 위해 팔리움이 필요하다는 관습으로 이어졌다. 이 관습은 윌리브로르드, 보니파시오 등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 대륙으로 전파되었다.[121]
선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숭배 확산에 기여했다. 최초의 그레고리오 ''전기''는 노섬브리아의 위트비 수도원에서 비롯되었으며, 베다의 ''교회사''를 통해 로마에도 그레고리오 숭배가 뿌리내렸다.[124][125] 베다는 그레고리오를 선교의 원동력으로 묘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선교사들이 그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레고리오 숭배 확산에 기여했다.[126] 747년 앵글로색슨 교회 회의는 전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항상 그레고리오 다음으로 언급하도록 명령했다.[128]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호노리우스, 유스투스, 로렌스, 멜리투스, 파울리누스, 베드로 역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135]
선교는 예술, 건축,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캔터베리에는 성 어거스틴 복음서와 같은 선교 관련 유물이 있으며,[136][137][138] 어거스틴은 캔터베리에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과 캔터베리 대성당을 세웠다.[143][144] 선교사들은 미사 때 성가를 영국에 도입했으며, 캔터베리는 훌륭한 성가로 유명해졌다.[150]
선교사들은 잉글랜드 왕들이 자체적인 법전을 반포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헌장 발전에도 기여했다.[153]
8. 1. 이교 관습
선교사들은 성 마르틴 아래 갈리아에서 있었던 선교와는 달리, 이교도 관습을 제거하거나 사원이나 성지를 파괴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서서히 선교를 진행해야 했다.[114] 선교 기간 동안 싸움이나 유혈 사태는 거의 없었다.[115] 이교는 630년대까지 켄트에서 여전히 행해졌으며, 640년에 이르러서야 불법으로 선언되었다.[116] 호노리우스가 펠릭스를 동 앵글리아로 보냈지만, 개종은 대부분 동 앵글리아 왕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117]8. 2. 교황 관련 측면
그레고리오 선교는 앵글로색슨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긴밀한 관계를 조성했다.[119] 그레고리우스는 남부 대주교구를 런던에 두려고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797년 머시아의 켄울프 왕이 캔터베리에서 런던으로 대주교구를 옮기려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자 앵글로색슨족의 "현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설교했던 캔터베리에 대주교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120] 대주교가 권한 행사를 위해 팔리움이 필요하다는 관습은 그레고리오 선교에서 비롯되었으며, 캔터베리에서 확립된 이 관습은 이후 윌리브로르드, 보니파시오와 같은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 대륙으로 전파되었다.[121] 앵글로색슨 교회와 로마의 긴밀한 관계는 7세기에 교황이 타르수스의 테오도르를 캔터베리에 임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122]이 선교는 그레고리우스가 동방에서 벗어나 옛 로마 제국의 서방 지역에 관심을 가지는 움직임의 일부였다. 그레고리우스 이후 여러 교황들은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 대한 지원을 유지했다.[125]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동료, 그리고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선교는 이후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 독일로 파견될 때의 모델이 되었다.[123]
8. 3. 성인 숭배
노섬브리아인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1세를 숭배하게 된 것은 선교의 영향 중 하나였다. 최초의 그레고리오 ''전기''는 노섬브리아의 위트비 수도원에서 비롯되었다.[124] 베다의 ''교회사''가 유포되면서 로마에도 그레고리오 숭배가 뿌리내렸다.[125] 베다의 저술에서 그레고리오는 그레고리오 선교의 원동력이며,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선교사들은 그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26] 베다는 노섬브리아 개종 과정에서 그레고리오 선교사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했으며, 특히 그의 ''대 연대기''에서는 아일랜드 선교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127] 베다는 그레고리오가 선교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중심에 둠으로써 그레고리오 숭배 확산에 기여했다. 그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주요 성인 중 한 명이 되었고, 사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숭배받았다. 747년 앵글로색슨 교회 회의는 전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항상 그레고리오 다음으로 언급하도록 명령했다.[128]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다른 숭배 대상이 되었다.[129] 호노리우스, 유스투스, 로렌스, 멜리투스, 파울리누스, 베드로 역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135] 베다가 언급했듯 사후에도 자신의 백성을 계속 보호한 애델베르트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60]
8. 4. 예술, 건축, 음악
캔터베리에는 전통적으로 선교와 관련된 몇몇 유물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현재 케임브리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MS 286에 소장되어 있는 6세기 성 어거스틴 복음서이다.[136][137][138] 7세기 캔터베리에는 '성 그레고리오 성경' 필사본이 있었지만 현재는 소실되었다.[139]
어거스틴은 캔터베리에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나중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교회는 노르만 정복 이후 새로운 수도원 교회를 짓기 위해 파괴되었다.[143] 선교단은 또한 캔터베리에 어거스틴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세웠고, 이곳은 크라이스트 처치 수도원이 되었다.[144] 로체스터 대성당에도 대성당이 세워졌지만, 676년에 건물이 파괴되었음에도 주교직은 유지되었다.[146][147] 런던, 요크, 그리고 아마도 링컨에도 선교사들이 교회 건물을 세웠지만,[148]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149]
선교사들은 미사 때 로마에서 사용되던 것과 유사한 형태의 음악인 성가를 영국에 도입했다.[150] 7세기와 8세기 동안 캔터베리는 성직자들의 훌륭한 성가로 유명했고, 요크의 주교가 된 윌프리드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가 선생들을 파견했다. 허리퍼드의 주교였던 푸타는 그레고리오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성가 실력으로 명성을 얻었다.[151] 선교사 중 한 명인 제임스 집사는 폴리누스가 켄트로 돌아간 후 노섬브리아에서 성가를 가르쳤다.[152]
8. 5. 법률 및 문서
역사가 앤 윌리엄스는 선교사들이 534년에 반포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로마법 대전''에 의해 최근 법전화된 로마법에 익숙했던 것이 잉글랜드 왕들이 자체적인 법전을 반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153] 비드는 특히 에텔베르트의 법전을 "로마식 법전"이라고 부른다.[154] 초기 잉글랜드 법전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 것은 선교사들이 도입한 구약 성서의 법전이었다. 윌리엄스는 법전 반포를 단지 법률만이 아닌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왕들이 단순한 군벌이 아니라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왕국에서 평화와 정의를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53] 또한 선교사들이 잉글랜드의 헌장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헌장들이 켈트 및 프랑크족의 영향뿐만 아니라 로마적인 요소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헌장을 켄트에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155]참조
[1]
간행물
Gregorian Mission
[2]
간행물
Introduction to the Corpus
[3]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4]
간행물
Decoration of the Leningrad Manuscript of Bede
[5]
간행물
Apostle of the English
[6]
서적
Anglo-Saxon Art
[7]
간행물
Roman Britain
[8]
간행물
Roman Britain
[9]
서적
Brief History of the Anglo-Saxons
[10]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11]
서적
Conversion of Britain
[12]
서적
Conversion of Britain
[13]
서적
Anglo-Saxon England
[14]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15]
서적
Earliest English Kings
[16]
서적
Kings and Kingdoms
[17]
서적
Kings and Kingdoms
[18]
서적
Church in Anglo-Saxon Society
[19]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20]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21]
간행물
Memorializing
[22]
간행물
Memorializing
[23]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24]
간행물
Bede on the Britons
[25]
서적
Conversion
[26]
서적
Making of Early England
[27]
서적
Conversion
[28]
서적
Anglo-Saxon England
[29]
서적
Anglo-Saxon England
[30]
서적
Bertha
[31]
서적
Brief History of the Anglo-Saxons
[32]
서적
Formation of Christendom
[33]
서적
Convert Kings
[34]
간행물
Mission of Augustine of Canterbury
[35]
서적
History of the English Church and People
[36]
서적
Coming of Christianity
[37]
서적
Barbarian Conversion
[38]
논문
Chronology of the Gregorian Mission
[39]
서적
Barbarian Conversion
[40]
서적
Convert Kings
[41]
서적
Convert Kings
[42]
서적
Gregory the Great and His World
[43]
논문
Gregory the Great and a Papal Missionary Strategy
[44]
서적
Anglo-Saxon England
[45]
서적
Augustine
[46]
서적
Reassessing Anglo-Saxon England
[47]
서적
Early History of the Church of Canterbury
[48]
서적
Earliest English Kings
[49]
서적
Early History of the Church of Canterbury
[50]
서적
Early History of the Church of Canterbury
[51]
논문
Mission of Augustine of Canterbury
[52]
서적
Introduction to Anglo-Saxon England
[53]
서적
Convert Kings
[54]
서적
Barbarian Conversion
[55]
논문
Mission of Augustine of Canterbury
[56]
서적
Earliest English Kings
[57]
서적
Early History of the Church of Canterbury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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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iest English Kings
[59]
논문
Chronology of the Gregorian Mission
[60]
서적
Convert Kings
[61]
서적
Convert Kings
[62]
서적
Convert Kings
[63]
논문
Observations
[64]
서적
Gregory the Great and His World
[65]
서적
Gregory the Great and His World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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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lo-Saxon England
[67]
서적
Laurentius
[68]
서적
History of the English Church
[69]
논문
Canterbury Edition
[70]
논문
Background
[71]
서적
Convert Kings
[7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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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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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the Great and Hi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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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arbarian Conversion
[7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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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논문
"'Tabernacula' of Gregory the Great"
[7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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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논문
"Gregory the Great and a Papal Missionary Strategy"
[79]
논문
"Gregory the Great and the Pagan Shrines of Kent"
[80]
논문
"Paganism in Conversion-age Anglo-Saxon England"
[81]
서적
Church in Anglo-Saxon Society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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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Monas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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