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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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만술은 1929년 출생하여 1991년 사망한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이다. 그는 1947년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여 여수·순천 반란 진압 작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동해안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중 의정부 전투, 다부동 전투, 팔공산 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특히 베티고지 전투에서 13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십자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척추 부상으로 예편한 후 동양공과 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으나 자금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고, 상이군경용사촌 건립에도 기여했다. 김만술은 영화 '격퇴'의 소재가 되었으며, 베티고지 전적지, 소위 김만술상, 전쟁기념관 흉상 건립 등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여러 차례 이달의 호국 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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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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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만술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
출생일 | 1929년 10월 28일 |
사망일 | 1991년 5월 28일 |
국적 | 대한민국 |
성별 | 남자 |
현지어 표기 | 金萬述 |
군사 경력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베티고지 전투 |
지휘 | 제1사단 제11연대 제6중대 제2소대장 |
참전 | 한국전쟁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대위 |
서훈 | |
서훈 내역 | 태극무공훈장, 미국 수훈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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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만술은 1929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7년 6월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였고, 여수·순천 사건 진압과 지리산 및 동해안 공비 토벌 작전에 참전하며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2]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의정부 전투를 시작으로 창동 방위선, 미아리 전선, 북한산, 수원, 대전 방어 전투,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 팔공산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 제1사단 소속으로 박격포 교관을 맡기도 했으며, 평양 탈환 전투에도 참여했다.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호남 지역 공비 토벌 작전에도 투입되었다.
1953년 7월 소위로 현지 임관한 직후, 베티고지 전투에서 1개 소대를 이끌고 중공군 3개 대대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며 고지를 사수하는 큰 공을 세웠다.[1][2] 이 공로로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정전 협정 이후 육군보병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1958년 훈련 중 트럭 전복 사고로 척추 신경을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이로 인해 1961년 8월 육군 대위로 예편하였다. 전역 후에는 농민 자녀와 고아들을 위해 1962년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에 동양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으나, 재정난으로 1974년 폐교하였다. 1977년에는 시흥 상이군경용사촌 회장을 맡아 용사촌을 서울 문정동으로 이전하고 건립하는 데 기여했다.
1990년 7월 전쟁 중 입은 상처가 재발하여 서울 중앙보훈병원에 입원하였고, 패혈증 악화로 11개월간 투병하다 1991년 5월 28일 향년 62세로 타계하였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1. 한국전쟁 이전
김만술은 1929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1947년 6월 조선경비대 병으로 입대하여 부산에 주둔하던 제5연대 소속 기관총 사수로 근무하였다.[2]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 작전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참전하여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1949년 8월에는 동해안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경상북도 청송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우측 어깨와 하복부에 총상을 입고 안동 도립병원에 입원하였다.2. 2.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2등중사였던 김만술은 6월 26일부터 의정부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으로부터 현장에서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창동 방위선, 미아리 전선, 북한산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며 수원과 대전 방어 전투에 참가하였고,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는 수류탄과 총검을 사용한 10여 차례의 공방전 끝에 300고지를 지켜냈다.낙동강 전투 이후에는 팔공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무렵에는 제1사단 11연대 기갑소대의 박격포 교관으로 임명되어 2주간 박격포 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당시 교육대장의 명령으로 기마대를 조직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얼마 안 되어 해체되었다.
38선 돌파 이후 평양 탈환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중공군 개입 이후 전투 중 9주간의 하사관 전투 교육을 위해 하사관학교로 파견되었다. 이후 여러 부대로 전출되어 전투를 이어가던 중, 과거 공비 토벌 작전 경험을 인정받아 호남 지역의 공비 토벌 부대로 차출되었다. 토벌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원 소속 부대로 복귀하여 1사단 현지 임관 시험에 응시했다. 베티고지 전투 하루 전인 1953년 7월 14일 합격하여, 1사단 11연대 2대대 8중대 특무상사에서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했다.
2. 3. 베티고지 전투
한국 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15일부터 16일까지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베티고지에서 벌어진 방어 전투이다. 휴전 협정 체결을 앞두고 전략적 요충지였던 베티고지를 사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만약 이곳을 중공군에게 빼앗기면 주저항선이 임진강 남쪽으로 약 3.22km 이상 밀려나 해당 지역이 비무장지대로 편입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1][2]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 소속 김만술 소위가 이끄는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 35명은 1953년 7월 15일, 베티고지의 방어 임무를 맡아 진지에 투입되었다.

약 13시간 동안 이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김만술 소대는 베티고지를 성공적으로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 소대원 36명 중 24명이 전사하고 김만술 소위를 포함한 12명만이 생환했지만, 300명 이상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45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김만술 소위는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의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베티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사에서 소대 규모의 병력이 월등히 많은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2. 3. 1. 전투 배경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의 전초기지였다. 6.25 전쟁의 휴전 협정을 앞두고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서는 지속적인 혈투가 벌어졌다. 만약 베티고지를 사수하지 못할 경우, 주저항선이 임진강 남쪽으로 약 3.22km 이상 밀려나 해당 지역이 비무장지대로 편입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베티고지는 주 방어선에서 가장 북쪽에 돌출되어 있었고, 임진강이 마치 허리띠처럼 고지를 감싸고 흘렀다. 이러한 위치 때문에 적의 제1 공격 목표가 되기 쉬웠으나, 동시에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초기에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전투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중대 단위 병력 대신 정예화된 소대 병력으로 교체하여 고지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이 임무를 위해 김만술 소위가 이끄는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가 선정되었다.
1953년 7월 15일 낮 12시 정각, 김만술 소위는 중대장으로부터 전초기지 교대 명령을 받고 35명의 소대원을 인솔하여 임진강변으로 향했다. 아군의 지원 포격 아래, 6명이 탈 수 있는 고무보트를 이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도하 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소대원 1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가 발생했지만, 같은 날 오후 3시 30분경 성공적으로 도하를 완료하고 베티고지 중앙봉에서 기존에 주둔 중이던 제7중대 제1소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2. 3. 2. 전투 과정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베티고지는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의 전초기지였다. 한국 전쟁 휴전협정을 앞두고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만약 베티고지를 중공군에게 내주게 되면, 주저항선에서 임진강 남쪽으로 약 3.22km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편입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베티고지는 주전선에서 가장 북쪽에 있었고 임진강이 주변을 감싸고 있어 적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지형적 특성상 대규모 병력 투입에는 제한이 있었다. 초기에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중대 병력 대신 정예 소대 병력을 배치하기로 결정했고, 김만술 소위가 이끄는 제2대대 6중대 2소대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1953년 7월 15일 12시, 김만술 소위는 중대장으로부터 전초기지 교대 명령을 받고 35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임진강변으로 이동했다. 아군의 포격 지원 아래, 6인승 고무보트를 이용해 여러 차례에 걸쳐 도하 작전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소대원 1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15시 30분경 성공적으로 도하하여 베티고지 중앙봉에서 7중대 1소대와 진지를 교대했다.
진지 교대 후 김만술 소위는 전면 능선에 2개 분대, 후방 우측 능선에 1개 분대를 배치했다. 17시 30분경, 대대장 김봉건 중령의 공격 명령에 따라 김 소위는 전면 능선의 1개 분대를 직접 지휘하여 중공군이 점령한 서봉을 공격했다. 서봉 동북쪽 기슭으로 나아가 적을 물리치고 8부 능선까지 진격했을 때, 고지 중간에 매복해 있던 적의 공격을 받아 소대원 2명이 전사하고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중앙봉에 남아있던 소대 일부 병력이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퇴하고 포위된 분대원들과 함께 중앙봉으로 복귀했다.
7월 15일 20시 10분경, 중공군이 베티고지 중앙봉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김만술 소위는 적을 진지 앞 20m까지 유인한 후, 수류탄과 기관총, 소총으로 일제히 공격하여 격퇴했다. 중공군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으로, 시체를 방패 삼아 공격해왔다. 소대는 수류탄을 집중적으로 투척하며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 공격을 막아냈다.
22시경, 중공군은 파상공격 대신 병력을 여러 소대로 나누어 교대로 투입하는 새로운 전술로 공격해왔다. 적이 진지 안까지 돌격해 들어오자, 이등중사 박종수가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 총검으로 적을 처치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소대원들도 함께 뛰쳐나가 치열한 백병전과 육박전을 벌여 적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의 수류탄 공격으로 위생병을 포함한 2명이 추가로 전사했고, 무전기가 파괴되어 중대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24시경, 김만술 소위는 통신병 이강로 하사를 중대본부로 보내 전황을 보고하고 통신망 복구를 요청했다. 대대장은 즉시 대대 통신병 4명을 파견했고, 이들은 7월 16일 새벽 2시 30분경 대대 지휘소와의 통신을 다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7월 16일 04시경, 중공군은 다시 서쪽과 서북쪽에서 소대 규모의 병력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소대는 즉시 포격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참호 안에서 수류탄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아군의 포격에 중공군이 잠시 물러났으나, 약 1시간 후 중대 규모 이상의 병력으로 다시 공격해왔다. 병력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김만술 소위와 남은 소대원들은 교통호에서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필사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점차 전황이 불리해져 포위되자, 김 소위는 모든 소대원을 참호 안으로 대피시킨 후 아군에게 진내사격을 요청했다. 치열한 포격이 진지 위에 쏟아졌고, 날이 밝아오자 적은 큰 피해를 입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06시 40분경, 적은 짙은 안개를 틈타 다시 공격해왔다. 소대는 남은 수류탄을 모두 투척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백병전을 벌여 진지를 끝까지 사수했고, 마침내 적은 완전히 퇴각했다. 08시경, 6중대 3소대가 도착하여 임무를 교대한 후 김만술 소위와 생존 소대원들은 마침내 베티고지에서 복귀했다.
2. 3. 3. 전투 결과
김만술 소대는 약 13시간 동안 19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중공군 제1사단 소속 3개 대대 병력의 공격으로부터 베티고지를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전사 314명, 부상(추정) 450명, 포로 3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아군은 24명이 전사하고 김만술 소대장을 포함한 12명이 생환했다.적의 매복 사격으로 인한 부상을 무릅쓰고 본부로 뛰어가 전황을 보고하고 통신 시설 복구를 시도한 이강로 하사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각 분대의 분대장이었던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김만술은 이 전공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의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2. 4. 전쟁 이후
정전 협정 6개월 후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78기로 입교하여 16주간의 교육을 마쳤다. 이후 정래혁 장군의 특명으로 3년간 기간장교 겸 구대장, 출납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4월에는 다시 1사단 11연대로 돌아가 복무하였다.2. 4. 1. 동양공과 기술학교 설립
1958년 4월, 1사단 11연대 복무 중 실탄 사격 훈련 이동 간 트럭 전복 사고로 척추 신경이 손상되어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이 사고로 인해 1961년 8월 31일 육군 대위로 예편하였다.전역 후, 김만술은 농민의 자녀와 고아들을 위한 교육에 뜻을 두고 1962년 6월 20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 130번지에 동양 공과 기술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학교의 이사장으로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열정을 보였으며, 학교 운영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군수사령부의 오물처리권을 양도받고 미8군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학교는 대지 2272평, 교사 10명, 학생 210명 규모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1974년에 결국 학교 문을 닫게 되었다.
2. 4. 2. 상이용사촌 건립
1970년대 당시 일부 상이용사들의 강매나 무단취식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상이용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이용사들은 집단촌 성격의 용사촌에 모여 살면서 공장일을 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김만술 역시 신대방동 재활 용사촌에서 군부대에 양말을 납품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1977년 7월, 그는 시흥 상이군경용사촌 회장직을 맡아 시흥에 있던 상이군경용사촌을 서울 문정동으로 이전하고 새로운 용사촌을 건립하였다.2. 5. 사망
1990년 7월 전쟁 때 생긴 상처가 재발하여 서울 중앙보훈병원에 입원하였다. 세 차례에 걸쳐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으나 패혈증이 악화되어 11개월간의 투병 끝에 1991년 5월 28일 향년 62세로 타계하였다.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3. 상훈
김만술은 베티고지 전투 등에서의 공로로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다수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특히 베티고지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한국과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다.
연도 | 훈장/표창명 | 비고 |
---|---|---|
1950년 | 금성 화랑무공훈장 | |
1953년 | 금성 충무무공훈장 | |
1954년 | 금성 태극무공훈장 | 베티고지 전투 공로 |
1954년 | 미국 십자무공훈장 | 베티고지 전투 공로 |
1955년 | 미일군단장 공로표창장 | |
1956년 | 대한민국 방위표창장 |
베티고지 전투 당시 김만술 소대에서 함께 싸운 부하들도 공적을 세웠다. 적의 매복 사격에도 불구하고 본부와의 통신을 복구한 이강로 하사는 충무무공훈장을, 각 분대의 분대장이었던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4. 기념과 추모
김만술의 베티고지 전투에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 및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의 전투 경험을 소재로 한 영화 '격퇴'가 제작되었으며, 경기도 연천군 베티고지에는 김만술 상사 전적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경기도 파주시 통일공원에는 '소위 김만술상'이 건립되었다. 이 외에도 전쟁기념관, 육군부사관학교, 페루 육군사령부 등 여러 곳에 그의 흉상이 설치되어 업적을 기리고 있다.
4. 1. 영화 '격퇴'
베티고지 전투를 소재로 하여 1956년에 제작된 이강천 감독의 영화이다. 1955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은 김만술에게 반공영화 제작에 협조해 줄 것을 제의했다. 시나리오 작가는 김만술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하려 했으나, 김만술 본인은 이를 반대했다. 이러한 갈등 끝에 작가의 재량에 맡기되 김만술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4. 2. 김만술 상사 전적지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에 위치해 있으며 베티고지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지이다. 현재 비무장 지대에 위치해 있어 직접 방문하는 것은 제한되지만 태풍전망대에서 이를 관측할 수 있다.4. 3. 소위 김만술상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에 위치해 있다. 베티고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김만술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996년 12월 4일 흉상이 세워졌으며, 상이군경회 파주시지회에서 관리하고 있다.4. 4. 그 외 흉상
참조
[1]
웹인용
김만술(金萬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1-06-06
[2]
웹인용
https://www.warmemo.[...]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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