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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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방경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229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서북면 병마판관, 지어사대사 등을 역임하며 항몽 항쟁에서 활약했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에 참여하여 도독사로 활약했으나, 잦은 의견 충돌과 태풍으로 인해 원정은 실패했다. 그는 1276년 원나라에 다녀온 후 첨의중찬에 임명되었으며, 1307년 사망 후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방경은 충신으로 평가받지만, 일본 원정 당시 대마도에서 자행된 살육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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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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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귀족 정보 | |
이름 | 김방경 |
원어 이름 | 金方慶 |
출생일 | 1212년 |
사망일 | 1300년 (89세) |
자 | 본연(本然) |
시호 | 충렬(忠烈) |
성별 | 남성 |
아버지 | 김효인 |
배우자 | 죽산 박씨 |
자녀 | 김선(金愃)·김흔(金忻)·김순(金恂)·딸 4명 |
가문 | 안동 김씨 |
군사 정보 | |
복무 | 고려군 |
작위 | 고려의 첨의중찬 |
참전 | 항몽항쟁 / 삼별초진압전 / 여몽연합 1,2차 일본정벌전 |
2. 생애
1229년 고종 16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 18세에 산원 겸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했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그의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좋아하여, 큰 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1]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1]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다. 그때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김방경은 위도(葦島) 방어에 공을 세웠다.[1] 그는 그곳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하였다.[1] 또한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다.[1]
1263년 원종 4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승진하였고, 진도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이 되었다.[1] 그러나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였으나,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 문무겸직(문관이 무관의 벼슬을 겸함)의 이유로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다.[1]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 얼마 뒤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1]
1270년 6월 배중손 등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자 추도사(追討使)가 되어 참지정사 신사전과 함께 삼별초를 공격했다.[2] 1271년 흔도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고 승화후 온을 죽여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 中書侍郞 平章事)가 되었다.[2]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원나라 장수 흔도, 홍다구와 함께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고 시중에 올랐다.[2]
1274년 원종이 사망하고 충렬왕이 즉위한 후, 원나라는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불응하자 일본 정벌을 단행하였다. 원나라는 마산에 정동행성(征東行城)을 설치하고, 홀돈을 도원수(都元帥), 홍다구를 우부원수, 유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았다. 고려는 김방경을 도독사로 삼고, 휘하 장수들을 임명하여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을 편성하여 원나라를 돕게 하였다.[1]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정벌에서 김방경은 원나라로부터 중봉대부·관령고려국도원수의 직책을 받고, 고려군 도원수로서 10만 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3]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하여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3] 그 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3]
그 뒤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3] 김방경은 64세에 최고 관직인 첨의중찬(수상)상장군 판전리사감찰사사(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事監察司事)가 되고,[3] 72세에는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세자사(三韓壁上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事 上將軍 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했다.[3] 84세에는 첨의령(僉議令) 가자(加資)와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三白戶)를 가봉 받았고,[3] 사후(1307년)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고 시호 '''충렬'''을 받았다.[3]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김민성(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1229년 고종 16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 18세에 산원 겸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 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1]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1]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다. 그때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위도(葦島) 방어의 공로가 있다.[1]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1]
1263년 원종 4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승진하였고, 같은 해 진도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서 문무겸직(문관이 무관의 벼슬을 겸함)의 이유로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다.[1]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1]
2. 2. 항몽 항쟁과 서북면 병마판관 시절
김방경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이 그를 양육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고,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갈 정도여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1229년 (고종 16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 18세에 산원 겸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그의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마음에 들어하여 예우하였으며, 큰 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다. 그때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김방경은 위도(葦島)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하였다. 또한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 (원종 4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승진하였고, 진도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 문무겸직 (문관이 무관의 벼슬을 겸함)의 이유로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 얼마 뒤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2. 3. 지어사대사와 왜구 격퇴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1229년 고종 16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 18세에 산원 겸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 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다. 그때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위도(葦島) 방어의 공로가 있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 원종 4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승진하였고, 같은 해 진도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이 되었다.[1] 그러나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였으나,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서 문무겸직의 이유(문관이 무관의 벼슬을 겸함)로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다.[1]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1]
2. 4. 삼별초의 난 진압
1270년 6월 배중손 등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자 추도사(追討使)가 되어 참지정사 신사전과 함께 삼별초를 공격했다.[2] 토벌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하여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2]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을 제수받고 다시 삼별초 토벌에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2] 1271년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고 승화후 온을 죽여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 中書侍郞 平章事)가 되었다.[2] 김통정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 항전하자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원나라 장수 흔도, 홍다구와 함께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고 시중에 올랐다.[2]
2. 5.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1274년 원종이 사망하고 충렬왕이 즉위한 후, 원나라는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불응하자 일본 정벌을 단행하였다. 원나라는 마산에 정동행성(征東行城)을 설치하고, 홀돈을 도원수(都元帥), 홍다구를 우부원수, 유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았다. 고려는 김방경을 도독사로 삼고, 휘하 장수들을 임명하여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을 편성하여 원나라를 돕게 하였다.[1]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은 병력 2만 5천 명, 함선 9백 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고려 병력은 육군 8,000명, 수군 6,700명이었으나 함선과 군량은 모두 고려가 부담하였다. 연합군은 쓰시마와 이키도를 정벌하고 북큐슈의 다자이후를 공략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태풍으로 인해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병사가 1만 3,500명에 달했다.[1]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정벌에서 김방경은 원나라로부터 중봉대부·관령고려국도원수의 직책을 받고, 고려군 도원수로서 10만 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2차 일본 원정군은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으로 나뉘었다. 동로군은 여·원 연합군으로 총 4만 명의 병력과 900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원나라 군은 3만 명, 고려 군은 1만 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고려가 부담하였다. 강남군은 중국 강남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약 10만 명의 병력과 3,500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다.
1, 2차 일본 원정 모두 실패하였는데, 주된 이유는 태풍과 일본군의 저항,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 저하였다.
2. 5. 1. 1차 일본 원정 (문영의 역)
1274년 원종이 사망하고 충렬왕이 즉위한 후, 원나라는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에 불응하자 일본 정벌을 단행했다. 원나라는 마산에 정동행성(征東行城)을 설치하고, 홀돈을 도원수, 홍다구를 우부원수, 유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았다. 고려는 김방경을 도독사로 삼고, 박지량, 김흔을 지병마사호, 임개를 부사로 삼았다. 김선을 좌군사, 위득유를 지병마사, 손세정을 부사로, 김문비를 우군사,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 반부를 부사로 삼아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을 편성하여 원나라를 돕게 하였다.[1]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은 병력 2만 5천 명, 함선 9백 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고려 병력은 육군 8,000명, 수군 6,700명이었으나 함선과 군량은 모두 고려가 부담하였다.[1] 연합군은 쓰시마와 이키도를 정벌하고 북큐슈의 다자이후를 공략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태풍으로 인해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병사가 1만 3,500명에 달했다.[1]
홍다구는 김방경에게 선단 완성을 재촉했는데, 김방경은 남송 양식의 배로는 기한 내에 건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비용이 저렴한 고려 양식의 배를 건조하였다.[1]
1274년 10월 3일, 김방경 휘하의 고려군 8,000명을 포함한 총 4만 명의 원·고려 연합군 함대 900척은 합포(경상남도)를 출항했다. 10월 5일 쓰시마를, 10월 14일에는 이키 섬에 상륙하여 수호대 평경륭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16일부터 17일에 걸쳐 히라도·노코·다카시마를 습격하고, 10월 19일 저녁, 다자이후를 목표로 하카타만에 침입했다.[1]
원·고려 연합군은 이키 섬과 쓰시마를 제압했지만, 규슈에 상륙하자 막부 고케닌의 활약으로 전황이 불리해졌다. 20일 새벽, 모모치하라에서 상륙한 원군은 마쓰라 당과 하라다 일족을 격파하고 아카사카로 진군했지만, 국부 무방에게 패하여 패주했다. 한편, 이마쓰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원·고려 연합군 본대도 이마즈에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한 후, 다자이후를 목표로 진군을 시작하여 아키즈키 씨와 마쓰라 당을 격파하고 소하라산을 점령했다.[1]
원·고려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20일 저녁 군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군수 물자가 고갈되어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1] 김방경은 총사령관 홀돈에게 재차 싸울 것을 요청했으나, 홀돈은 "피로한 병사를 이끌고 시시각각 증강되는 적과 맞서는 것은 완벽한 계책이 아니다"라며 거절하고 전군 퇴각을 결정했다.[1]
원·고려 연합군은 하카타와 하코자키에서 방화 및 납치·약탈을 자행한 후 배로 철수했다. 그러나 밤을 틈타 하카타만을 출항한 원·고려 연합군 함선에 폭풍우가 덮쳤고, 김방경은 간신히 피했지만 함대는 괴멸 상태가 되었다. 귀환할 수 있었던 배는 400척 정도였다고 한다.[1]
분영의 역에서 귀환했을 때, 몽골 장군 홀돈(쿠둔)은 일본에서 데려온 동남동녀 200명을 새로 고려 국왕으로 즉위한 충렬왕과 비인 쿠빌라이 공주에게 헌상했다.[1]
2. 5. 2. 2차 일본 원정 (홍안의 역)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정벌에서 김방경은 원나라로부터 중봉대부(中奉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책을 받고,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서 10만 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이때 군대는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으로 나뉘었다. 동로군은 여·원 연합군으로 총 4만 명의 병력과 900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원나라 군은 3만 명, 고려 군은 1만 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고려가 부담하였다. 강남군은 중국 강남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약 10만 명의 병력과 3,500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다.
동로군은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 아래 합포를 출발하여 이키도 등 구주 연안의 섬들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공격하였다. 강남군은 원나라 장수 범문호(范文虎)의 지휘 아래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류하여 다자이부를 공격하였다. 일본 히카타(傳多)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일본군이 해변에 흙으로 쌓은 옹벽에 막혀 대치하다가 태풍과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고 돌아왔다(→일본사 홍안의 역).
2차 일본 정벌의 실패는 태풍과 해전 경험 부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군의 사기 저하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남송 유민들이 종군을 꺼려 전의를 상실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5월 3일, 합포를 출발한 일본 원정군 선발대(동로군)는 21일, 쓰시마와 이키를 연이어 습격하여 섬 주민들을 소탕하였다. 6월 6일, 원군은 하카타 만에 침입하여 시카 섬에 상륙, 일본 병사 300명 정도를 격퇴하였으나, 분고·간토 부대의 반격으로 전선이 붕괴되어 해상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홍다구는 죽을 뻔했지만, 아군의 원호로 간신히 퇴각하였다.
그 후에도 원군은 해상에서 산발적인 습격을 받는 등 패퇴를 거듭하였다.
큐슈에 상륙하지 못한 원군은 배 바닥이 썩고 전염병이 유행하며 식량도 부족해졌다. 홍다구 등은 남송군과의 합류가 늦어지는 것에 망설였지만, 김방경은 3개월분 식량이 있으니 1개월은 버틸 수 있다며 남송군과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월, 역병으로 3,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원군은 남송군 10만 명과 합류하여 다카시마 해역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함대는 원구 방루를 방패 삼은 일본 측의 요격과 마쓰우라 당의 습격 등으로 큐슈 상륙을 저지당하고, 7월 말 폭풍우에 노출되어 괴멸되었다.
결국 김방경도 작전 지속을 단념하고, 남은 병사들을 버리고 무사한 배를 골라 합포로 귀환하였다. 파손된 함대에 남겨진 병사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일본 외사』는 "시체가 바다를 덮어,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카시마 등에 버려진 장병들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귀환을 시도했지만, 다케자키 스에나가 등 막부 어고닌에 의해 전멸하였다.
2. 6. 관직 생활과 죽음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3]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하여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3] 그 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3]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이 모반하였다고 무고(誣告)하고, 홍다구(洪茶丘)가 본국(本國) 에 불만이 있어서 김방경으로 하여금 〈원나라에 대하여 모반하였음을〉 무복(誣服)하게 하여 화(禍)를 국가에 전가시키고자 철색(鐵索)으로 그 목을 감고, 곧 이마에도 감으려 하자 왕이 차마 볼 수 없어서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어질고 성스러워 장차 그 사정이 거짓임이 밝혀질 터인데, 어찌 스스로 고통을 계속되게 하는가?’ 하니, 김방경은 ‘왕께서는 어찌 이러하십니까? 신이 어찌 감히 몸을 아껴 무복함으로써 사직(社稷)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끝내 굽히지 않으니, 이에 황제도 석방하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그 뒤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3] 김방경은 64세에 최고 관직인 첨의중찬(수상)상장군 판전리사감찰사사(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事監察司事)가 되고,[3] 72세에는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세자사(三韓壁上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事 上將軍 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했다.[3] 84세에는 첨의령(僉議令) 가자(加資)와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三白戶)를 가봉 받았고,[3] 사후(1307년)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고 시호 '''충렬'''을 받았다.[3]
3. 평가 및 논란
김방경은 원나라의 지배 아래 고통받던 고려를 위해 헌신한 충신이자 애국자로 오늘날 한국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는 몇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1277년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 등은 일본 원정에서의 실책으로 견책을 받자 김방경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모함했다.[3] 이들은 김방경이 모반을 꾀했다고 무고했고, 홍다구 역시 이에 동조하여 김방경은 원나라 다루가치 석말천구에게 구금되었다.[3] 김방경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고, 결국 대청도로 유배되었다.[3] 이후 원나라로 압송되었으나,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에게 끈질기게 상소하여 무죄가 밝혀져 풀려났다.[3]
『고려사』에는 김방경이 대마도에서 많은 사람을 살육했다는 기록이 있다.[3] 원나라 군대는 눈에 띄는 사람들을 죽였고, 섬 주민들은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아이를 죽이면서까지 숨어 도망쳤다고 한다. 니치렌의 서간에는 이키섬, 쓰시마섬 등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붙잡혔으며, 바다에 빠지거나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몇천만 명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안의 역 이후, 일본의 포로가 된 원나라 군대 중 강남군(구 남송) 병사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고려군과 몽골군은 모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쿠리・코쿠리"(몽골・고구려)가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이들의 잔학 행위는 이키섬, 쓰시마섬, 북큐슈 사람들에게 큰 공포를 심어주었다.
3. 1. 긍정적 평가
김방경은 원나라의 지배로 고통받던 고려를 필사적으로 도우려 했던 충신이자 애국자로서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64세에 최고 관직인 첨의중찬(수상)상장군 판전리사감찰사사(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事監察司事)가 되었다.[1] 72세에는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세자사(三韓壁上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事 上將軍 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했다.[1] 84세에는 첨의령(僉議令) 가자(加資)와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三白戶)를 가봉 받았다.[1] 사후(1307년)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고 시호 '''충렬'''을 받았다.[1]3. 2. 부정적 평가 및 논란
1277년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에게 모함을 받아 원나라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아 백령도에 유배되었다.[3] 이후 원나라에 이송되었으나,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에게 상소하여 무죄가 확인되어 풀려나 귀국하였다.[3]>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이 모반하였다고 무고(誣告)하고, 홍다구(洪茶丘)가 본국(本國) 에 불만이 있어서 김방경으로 하여금 〈원나라에 대하여 모반하였음을〉 무복(誣服)하게 하여 화(禍)를 국가에 전가시키고자 철색(鐵索)으로 그 목을 감고, 곧 이마에도 감으려 하자 왕이 차마 볼 수 없어서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어질고 성스러워 장차 그 사정이 거짓임이 밝혀질 터인데, 어찌 스스로 고통을 계속되게 하는가?’ 하니, 김방경은 ‘왕께서는 어찌 이러하십니까? 신이 어찌 감히 몸을 아껴 무복함으로써 사직(社稷)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끝내 굽히지 않으니, 이에 황제도 석방하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3]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는 일본 침공에서의 부실로 견책을 받았고, 김방경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충렬왕 3년(1277년), 흔도로부터의 회견에서 귀환한 김방경을 여러 장수들이 맞이했는데, 노진의가 비위를 맞추려 술을 따르려 하자, 김방경의 측근인 한희유가 "이런 놈의 술은 마실 필요 없다"며 끼어들어 김방경도 무시하고 자리를 떴다. 위득유는 한희유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모욕을 당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여기서 위득유 등은 흔도에게 허위 고발을 했고, 홍다구도 그 참언에 동조하여, 모반과 횡령의 죄로 쿠빌라이에게 체포되었다. 김방경은 쇠줄로 목에 묶여 끌려 다니고, 매질을 당한 후 대청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에게 충렬왕이 필사적으로 김방경의 무죄를 주장했고, 최종적으로 쿠빌라이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될 예정이었으나, 그 직전에 위득유와 노진의가 의문사하여, 용서받고 귀환하게 된다.
『고려사』 권104 열전17 김방경에는 "대마도에 들어가 살육한 자가 매우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나라 군대가 눈에 띄는 자를 죽였기 때문에, 섬 주민 중에는 목숨을 아끼기 위해 젖먹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사랑하는 자식을 찔러 죽이고 숨어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니치렌의 켄지 원년(1275년) 8월의 서간에는 "이키, 쓰시마, 9개국의 병사 및 남녀가 많이 죽거나 붙잡히거나 바다에 들어가거나 벼랑에서 떨어진 자가 몇천만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안의 역 이후, 일본의 포로가 된 원나라 군대 장병 중 강남군(구 남송) 병사는 목숨을 건져 보호받았지만, 동로군의 고려군과 몽골군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목이 베였다고 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무쿠리・코쿠리"(몽골・고구려)가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쳤다고 할 정도로, 그 잔학 행위는 이키・쓰시마・북큐슈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김의화(金義和) | 영가군사호(永嘉郡司戶), 증(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
조부 | 김민성(金敏成/金敏誠) | 행장야서승(行掌冶署丞)·직사관(直史館), 증 우복야(右僕射) |
아버지 | 김효인(金孝印) | 병부상서(兵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지제고(知制誥) |
어머니 |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 낭장(郎將) 송기(宋耆)의 딸 | |
첫째 부인 | 박씨(朴氏) | 기거랑(起居郞)· 지제고 박익정(朴益旌)의 딸 |
둘째 부인 | 손씨(孫氏) | |
장남 | 김선(金愃) |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전법판서(典法判書)·상장군(上將軍), 김방경보다 먼저 사망 |
차남 | 김흔(金忻) |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 |
3남 | 김순(金恂) | 판삼사사(判三司事)·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상호군(上護軍), 문영공(文英公) |
첫째 사위 | 조변(趙抃) | 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상장군·전리판서(典理判書) |
둘째 사위 | 경수(慶綏) |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경복흥(慶復興)의 조부 |
셋째 사위 | 권윤명(權允明) |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상장군 |
넷째 사위 | 채홍철(蔡洪哲) |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순천군(順天君) |
4. 1. 기타 후손들
김사형은 조선의 중신이 되었으며, 응영 3년(1396년) 대마도 정벌 계획의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형 김사렴은 이성계의 찬탈에 반대하여 두문동 72현 중 한 명으로 죽었다.
임진왜란 (문록(文祿) 원년, 1592년)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의 수장인 진주목사 김시민 역시 김방경의 후손이다.
5. 김방경이 등장하는 작품
=== 소설 ===
-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風濤|풍도일본어[4]
- 배영동, 장동익 외 1명, 《충렬공 김방경 (고려를 지키고 안동에 돌아오다)》, 민속원, 2007.01.30
- 김봉석,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라》, 시간의물레, 2006.10.25
- 서찬석, 《삼별초 항쟁 가까이 (우리역사가까이 2)》, 2007.07.23
=== 드라마 ===
5. 1. 소설
- 風濤|풍도일본어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4]
- 배영동, 장동익 외 1명, 《충렬공 김방경 (고려를 지키고 안동에 돌아오다)》, 민속원, 2007.01.30
- 김봉석,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라》, 시간의물레, 2006.10.25
- 서찬석, 《삼별초 항쟁 가까이 (우리역사가까이 2)》, 2007.07.23
5. 2. 드라마
2001년 NHK 대하드라마 호조 도키무네에서 배우 대서화(戴書華)가 김방경을 연기했다.6. 관련 문화재
김방경 묘지석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1호이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단종실록
[3]
서적
단종실록
[4]
뉴스
'인문사회' 여몽연합군의 일본출병 '검푸른 해협'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2-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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