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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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시습은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이며 세종의 칭찬을 받았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승려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하였으며, 금오산에서 은거하며 많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으로는 《금오신화》, 《관동일록》 등이 있으며, 불교와 유교 사상을 융합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해동의 백이로 불리며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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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는 조선 시대 김시습이 지은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몽유 구조와 비극적 결말, 초현실적 존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욕망, 고뇌를 다루며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김시습 - 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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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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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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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김시습 |
한자 이름 | 金時習 |
일본어 가나 이름 | きん・じしゅう |
일본어 가타카나 이름 | キム・シスプ |
로마자 표기 | Kim Si-seup |
다른 이름 | 설잠 |
승려 이름 | 설잠 |
생애 | |
출생일 | 1435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493년 (59세) |
사망지 |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 |
학력 | 1447년 중시 백일장에 장원 급제 |
배우자 | 남씨 부인 |
친척 | 김겸간 (조부) 남효례 (장인) 안씨 부인 (장모) |
부모 | 김일성 (부) 울진 장씨 부인 (모) |
참고 자료 | |
웹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 생애
김시습(金時習)의 ‘시습’이라는 이름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렸으며, 세종이 그의 재능을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기도 했다. 소년기에 이계전, 김반, 윤상 등 당대 석학들에게서 수학하였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의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외숙모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마저 중병을 앓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순탄하지 못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던 중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책을 불태우고 21세에 방랑길에 올랐다. 경기도 양주, 설악, 경주 금오산 등지를 유랑하며 세상의 허무함을 노래했다. 31세에는 경주 금오산에 도착했다.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껴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1466년(세조 12) 유응부 등과 함께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사육신과 단종 관련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1728년(영조 4)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4년(고종 원년)에 다시 세워졌다.[1]
1472년 경기도 양주에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유응부, 한명회의 시를 조롱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47세인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와 혼인하였다. 세조 정변 이후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등은 김시습과 거리를 두었으나, 유응부·남효온 등은 변함없이 교류하였다. 정창손은 세조 때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인물로, 김시습은 길에서 그의 행차를 보면 욕설을 하며 조롱하였다. 서거정, 김담, 김종직 등과 교유하였다.
홍산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유언에 따라 절 옆에 묻혔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여겼으며, 후에 부도(浮屠)를 세웠다.[1]
2. 1. 생애 초기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무반 출신으로 충순위를 역임했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유모가 맷돌로 곡식을 빻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에 경탄하여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린 시절 세종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불러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어 세종을 감동시켰다. 세종이 문학 재능을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김시습은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 가져갔다고 한다.
소년기에 김시습은 이계전, 김반, 윤상 등 당대 석학들에게서 수학하였다.
2. 2. 은둔과 방랑 생활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 환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순탄하지 못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닫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인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정변 이후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등은 김시습과 사귀기를 꺼렸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유응부·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정창손은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인물로, 김시습은 길에서 그의 행차를 보면 욕설을 날리며 조소하였다. 한편 그가 만나 교유하던 인물로는 서거정, 김담, 김종직 등이었다.
2. 3. 생애 후반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1466년(세조 12) 유응부, 김시습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 유응부가 증축한 건물은 1728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1]
1472년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유응부, 한명회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1]
중종은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1493년, 향년 59세). 선조는 이이에게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은 김시습을 해동의 백이(佰夷)라 칭하며 집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김시습은 남효온, 유응부와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으며,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되었다.
김시습은 여러 저서를 남겼다. 다음은 김시습이 생전에 남긴 저서 목록이다.
그의 해학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1]
홍산의 무량사(당시 충청도 공주목 홍산현, 현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위치한 사찰)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1]
3. 사후
윤춘년은 김시습과 유응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명종실록의 사관은 이를 '요사하고 허탄하며 속된 전설 같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며, 김시습(金時習)을 추존하여 공자(孔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고 비꼬는 악평을 남겼다.[2] 윤춘년은 불교와 노장 사상에도 관심을 가져, 당시 조선의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성리학만을 진리라 고집하지 않았다. 윤춘년의 먼 친척인 윤유후는 성삼문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저서와 시문을 수습해 성근보유고를 남겼다. 윤춘년과 윤유후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 쪽 후손들이었다.
4. 가계
증조부 김윤주 조부 김겸간 부친 김일성 모친 울진 장씨 부인 남효례의 딸
5. 저서
5. 1. 사후에 지어진 김시습, 유응부 관련 저서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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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김시습(金時習)
http://encykorea.aks[...]
2023-01-12
[2]
간행물
윤춘년의 졸기
선조수정실록
1567-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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