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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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일순(1871-1909)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종교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는 전라북도 고부에서 태어나 유랑 생활을 거치며 불교, 유교, 도교, 민간 신앙 등을 접했고, 동학농민운동과 일본의 한국 지배 등 격변하는 사회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다. 강일순은 자신이 상제라고 주장하며, 동학의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사후에는 여러 종단으로 분열되었다. 현재 대순진리회, 증산도 등 여러 종단에서 강일순을 신의 화신으로 숭배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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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강일순 |
한자 이름 | 姜一淳 |
다른 이름 | 강증산 |
한자 다른 이름 | 姜甑山 |
본명 | 강학봉(姜鶴鳳) |
출생일 | 1871년 11월 1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현재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객망리) |
사망일 | 1909년 6월 24일 |
사망지 | 대한제국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현재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
국적 | 대한제국 |
민족 | 한민족(진주 강씨) |
거주지 | 대한제국 전라북도 김제군 (현재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
활동 기간 | 1901년 9월 19일 ~ 1909년 8월 9일 |
배우자 | 최후 삼실: 장흥 고판례 (마지막 3혼) 이전 초배: 하동 정치순 (첫번째 이혼) 이전 계취: 김제 김말순 (두번째 이혼) |
자녀 | 2남 3녀 (막내딸 강순임) |
부모 | 강문회(부), 안동 권양덕(모) |
친척 | 고덕삼 (삼취 장인) 강재득 (친남동생) 강선돌 (친누이동생) 강보랑 (친가 증조부) 강두중 (친가 양조부) 강한중 (친가 친조부) 차치구 (삼취 처이모부) 차경석 (삼취 이종처남) 차일혁 (방계 처가친척) 차길진 (방계 처가친척) 김광배 (사돈댁) |
종교 | 증산계열 |
칭호 | 증산상제(甑山上帝) (증산도·증산법종교 등에서 부르는 칭호) 구천상제(九天上帝) (대순진리회·태극도 등에서 부르는 칭호) |
웹사이트 | 강일순 - 두피디아 |
업적 | |
주요 업적 | 약 100개에 달하는 한국 신흥 종교들의 기원이 되는 종교 운동 창시 |
2. 생애
증산 강일순은 1871년 9월 19일(음력) 조선 전라도 고부군(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아버지 강문회와 어머니 안동 권씨 권양덕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강학봉(姜鶴鳳)이었으며, 1877년에 강일순(姜一淳)으로 개명(改名)하였다.[7]
강일순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경전을 암송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9] 1891년 김제군 출신의 정치순(鄭治順, 1874~1928)과 결혼했고, 1894년 매형 정남기의 집에 서당을 열었다.[10] 불교,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에 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주역의 새로운 해석인 '정역(正易)'을 소개한 김일부(金一夫, 1826~1898)를 방문하기도 했다.[11][12]
당시 조선은 동학 농민 운동과 외세의 침략으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강일순은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며,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2. 1. 출생과 가계
증산 강일순은 1871년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1일) 조선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태어났다.[7] 강일순은 여러 성씨 가운데 강(姜)씨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해지지 못하고 풍채, 풍신, 풍골 등 몸의 생김새를 칭하는 말에만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된다. 그러므로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개벽시대를 맞아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다."강일순은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모든 경전을 암송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9] 1891년 김제군 출신의 정치순(鄭治順; 1874~1928)과 결혼했고, 1894년 매형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서당을 열었다.[10] 불교, 유교, 도교, 한국 민간 신앙에 대한 지식으로 명성을 얻어 제자들을 모았다.[11] 주역의 새 해석인 '정역(正易)'을 소개한 김일부(金一夫; 1826~1898)를 방문했고,[12] 김일부의 팔괘 재배열은 강일순에게서 유래한 종교를 포함한 많은 한국 신흥 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13]
2. 1. 1. 증조부 및 조부
강일순의 증조부 강보랑에게는 아들 강두중이 있었는데, 강두중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강보랑의 동생 강한중의 아들 강문회(강일순의 아버지)는 1855년에 강두중의 양자로 입적되었다.[7] 이로 인해 강일순에게 강두중은 양조부가 되고, 강한중은 친조부가 된다.2. 1. 2. 부모
아버지 강문회는 1846년에 태어나 1855년에 백부 강두중에게 양자로 갔다. 어머니 안동 권씨 권양덕은 1850년생으로, 안동이 본관이다. 권양덕은 성품이 착하고 남을 흉보지 않아 주변 마을에까지 칭찬이 자자했고, 48가문에서 강일순에게 선을 보이려 규수를 권양덕에게 보였다고 한다.1866년, 권양덕은 강문회와 혼인하였다. 1870년, 권양덕이 건강이 좋지 않아 친정인 이평면 서산리에 머물던 중,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고 천지가 밝아지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열석 달 뒤인 1871년 9월 19일(음력), 강일순이 전라도 고부군(현재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양조부 강두중의 본가에서 강문회와 권양덕 사이에서 태어났다. 강일순의 아명은 강학봉이었으며, 1877년에 강일순으로 개명하였다.[7] 강일순의 탄생 당시, 두 명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방 안에는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8]
2. 2. 어린 시절과 구도
강일순은 1871년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1일) 전라북도 고부군(현 정읍시 덕천면)에서 태어났다.[7] 그의 추종자들이 쓴 영웅담적 기록에는 그의 탄생을 둘러싼 기적적인 현상들이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탄생 장소는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찼다고 한다.[8] 강일순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모든 경전을 암송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9]1891년, 강일순은 김제군 출신의 정씨(정치순, 1874~1928)와 결혼했고, 1894년에는 매형 정남기의 집에 서당을 열었다.[10] 그는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한국 민간 신앙에 대한 지식으로 명성을 얻어 제자들을 모으기도 했다.[11] 또한 주역(역경)의 새로운 해석인 '정역(正易)'을 소개한 학자 김일부(1826~1898)를 방문하기도 했다.[12] 김일부의 팔괘 재배열은 강일순에게서 유래한 종교를 포함한 많은 한국 신흥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2. 2. 1. 혼란했던 사회상
조선 말기, 안으로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동학운동이,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이 잦아 민심이 혼란했다. 1885년, 강일순은 열다섯 살 무렵부터 이러한 사회상을 살피고 민심을 어루만지고자 유랑을 하였다고 한다.[7]1860년, 최제우는 서구의 영향력 증대, 조선 내 일본 세력 확장, 정부와 기존 종교의 부패, 양반 계급의 권력 남용 등을 우려하여 상제(Shang-ti)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학(Eastern Learning)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후 많은 한국 신흥 종교들의 원형이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종교적 열정과 서울의 높은 세금에 대한 분노가 결합하여 일어났으며, 곧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천년왕국적 비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최제우의 가르침에는 후천개벽(Hu-Cheon Gaebyeok), 즉 동학의 새 시대 낙원인 후천(Hu-Cheon)의 개벽(Gaebyeok)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이는 강일순의 천년왕국적 비전에도 나타난다.[14]
강일순은 자신이 상제이며, 지상 강림 전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상적, 지리적으로 동학 운동과 연관이 깊었는데, 그가 살던 마을은 동학 농민 운동 최초 봉기 장소에서 4km 떨어져 있었다. 강일순은 전라북도에서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며, 그중에는 동학 신자들도 있었다.[15] 그는 동학의 종교 사상에 관심이 있었지만, 동학 농민 운동군의 패배를 예측하고 추종자들에게 가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과 인류 사회의 문제는 무장 봉기가 아닌 영적 각성으로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16]
2. 2. 2. 유랑과 깨달음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강일순은 3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폈다.[17] 당시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부패한 관리들과 동학 운동으로,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웠다. 강일순은 이러한 민심과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느끼고 어루만지고자 하였다.[8]1900년, 강일순은 집으로 돌아와 이후 많은 추종자들을 모으게 된다. 그의 추종자들은 강일순이 1901년 여름 모악산에서 49일 동안의 고행과 단식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한다.[18] 더 나아가, 그들은 강일순이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린 최고의 신인 상제(上帝)이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인간 세상에 내려온 존재라고 믿었다. 강일순을 상제로 믿는 가장 큰 종파인 대순진리회에 따르면, 그가 모악산에서 행한 고행은 천지의 대도(大道)를 열고 신명(神明)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으로, 단순한 고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19][20] 또한 추종자들은 강일순이 이전 세상의 모든 신들을 심판하고 다가올 세상의 길을 열었으며,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한 의례를 통해 완벽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21]
2. 3. 동학과의 관계
1860년, 최제우는 서구의 영향력 증대,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 정부와 기존 종교의 부패, 그리고 양반 계급의 권력 남용을 우려하여 상제로부터 계시를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최제우는 동학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후 많은 한국의 신흥 종교들의 원형이 되었다. 동학은 1894년 실패로 끝난 동학 농민 혁명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전쟁은 곧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천년왕국적 비전과 서울의 높은 세금에 대한 분노가 결합되어 일어났다. 최제우 가르침의 중심에는 후천개벽, 즉 동학의 새 시대 낙원인 후천의 개벽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강일순의 천년왕국적 비전에도 특징으로 나타났다.[14]2. 3. 1. 전봉준과의 관계
강일순은 자신이 상제이며, 지상에 강림하기 전에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강일순은 동학 운동과 사상적, 지리적으로 상당한 연관이 있었는데, 그가 살던 마을은 동학 혁명의 최초 봉기가 시작된 곳에서 불과 4km 떨어져 있었다.[15] 그는 동학의 종교적 사상에 관심이 있었지만, 동학 농민군의 패배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추종자들에게 동학 농민군에 가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과 인류 사회 전반의 문제는 무장 봉기가 아니라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16] 강일순은 전라북도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는데, 그들 중에는 동학 신자들도 있었다.[15]2. 3. 2.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입장
강일순은 동학 농민군의 패배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추종자들에게 동학 농민군에 가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16] 그는 한국과 인류 사회 전반의 문제는 무장 봉기가 아니라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16]강일순은 자신이 상제이며, 지상에 강림하기 전에 최제우에게 그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15] 강일순이 살던 마을은 동학 농민 혁명의 최초 봉기가 시작된 곳에서 불과 4km 떨어져 있었으며, 그는 "사상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동학 운동과 상당한 연관이 있었다".[15] 훗날 강일순은 전라북도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는데, 그들 중에는 동학 신자들도 있었다.[15]
2. 4. 종교 활동과 주요 제자
강일순은 유교(성리학)에서 벗어나 증산도교를 창시했다. 그는 스스로를 증산(甑山)이라 칭하고, 1891년 하동 정씨 정수부와 혼인했다. 정수부는 2남 3녀를 낳았으나, 앞선 자녀들이 모두 단명하고 다섯째 딸만이 살아남았다. 이 딸은 훗날 금평저수지 동곡약방 옆 여섯 번째 도장을 준공한 화은당 선사이다.[45]강일순이 천지공사를 펼치면서 김제 구릿골에 주요 성도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강일순의 조화권능을 체험했다고 전해진다. 주요 제자로는 수석제자인 김형렬, 일제강점기 최대 교단 보천교를 이끈 차경석 외에도 김광찬 등이 있다. 특히 김광찬은 강일순에게 옷을 지어 바쳤는데, 그 옷을 지은 여인이 앉은뱅이였으나 강일순의 도움으로 걷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5]
2. 4. 1. 종교 활동
1891년 강일순은 김제군 출신의 정씨(1874~1928)와 결혼하였다.[10] 1894년에는 매형 정남기의 집에 서당을 열었다.[10] 그는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한국 민간 신앙에 대한 지식으로 명성을 얻어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11] 그는 주역의 새로운 해석인 '정역(正易)'을 소개한 김일부(1826~1898)를 방문하기도 했다.[12]1894년 전봉준이 강일순을 찾아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강일순은 백성만 희생될 것이라며 거절하였다.[7]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유랑하며 동학군을 돕거나, 동학군 가담자에게 귀향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동학의 패배 이후, 강일순은 3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폈다.[17] 1900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강일순이 1901년 여름 모악산에서 49일간의 고행과 단식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한다.[18] 더 나아가 그들은 강일순이 상제(上帝)이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세상에 강림했다고 믿었다. 대순진리회에 따르면,[19] 그가 모악산에서 행한 고행은 천지의 대도(大道)를 열고 신명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다.[20] 또한,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한 의례를 통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21]
2. 4. 2. 주요 제자
강일순의 수제자는 김형렬이며, 일제강점기 최대 교단이었던 보천교를 이끈 차경석도 주요 제자 중 한 명이다.[45] 이 외에도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이치복, 백복남, 김호연, 신경원, 신경수, 이도삼, 안필성, 백남신, 신원일, 신경현, 김광찬 등이 강일순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이들은 강일순의 조화권능을 체험했다고 전해진다.2. 4. 3. 천지공사(天地公事)
강증산(강일순)이 행한 천지공사는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화권능을 체험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김제 구릿골에 주요 성도들이 모였으며, 일제강점기 최대 교단을 이끌었던 차경석의 보천교를 비롯하여 김형렬, 박공우, 문공신 등 여러 제자들이 있었다.[45]강일순은 천지공사를 통해 세상을 개벽하고자 했다. 대순진리회에 따르면, 강일순은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한 의례를 통해 완벽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이루었다고 한다.[21] 그는 모악산에서의 고행을 통해 천지의 대도(大道)를 열고 신명들을 심판했으며, 전세(前世)를 주관하는 모든 신들을 심판하고 후세(後世)의 길을 열었다고 전해진다.[20]
증산도에서는 강일순을 하나님 아버지로, 그의 여제자 고판례(高判禮)를 하나님 어머니로 숭배하며, 고판례 역시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자신의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믿는다.[22]
2. 5. 일본과의 관계
동학 농민 운동 이후 일본의 한국 내 영향력이 커지면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일순은 일본 편에 선 한국인들을 비판했지만,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하고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며, 일본의 한국 지배가 역사적 불만을 해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3]그러나 이러한 평화적인 태도는 일본 당국의 의심을 사, 1907년 12월 25일 강일순은 추종자들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의심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평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당국에 항의하지 않았다.[24] 이후 1908년 2월 4일 석방되어 동곡 병원에서 의례와 설교를 계속하다 1909년 6월 24일 사망했다.[25]
2. 5. 1. 일본의 영향력 확대
최제우가 상제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시작된 동학 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지만 실패로 끝났다. 강일순은 동학의 종교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나, 동학 농민군의 패배를 예측하고 추종자들에게 무장 봉기 대신 영적 각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16]동학 농민 운동 이후, 일본의 한국 내 영향력은 커져갔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이어졌다. 강일순은 일본 편에 선 한국인들을 비판하면서도,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하고 "화해와 평화"를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역사적 불만을 해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3]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인 태도는 일본 당국의 의심을 샀고, 1907년 12월 25일, 강일순은 추종자들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평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당국에 항의하지 않았다.[24] 1908년 2월 4일 석방된 후, 동곡 병원에서 의례와 설교를 계속하다 1909년 6월 24일 사망했다.[25]
2. 5. 2. 체포와 석방
동학 농민 운동 이후 일본의 한국 내 영향력이 커졌고, 이는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일본에 공식 합병되었다. 강일순은 동학 운동 때와 비슷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일본 편에 선 한국인들을 비판했지만,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하고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며, 일본의 한국 지배가 역사적으로 일본이 품어왔던 불만들을 해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3] 그러나 그의 평화적인 태도는 일본 당국의 의심을 피할 수 없게 했다. 1907년 12월 25일, 강일순은 추종자들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킬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도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했고" "어떤 식으로든 당국에 항의하지 않았다"고 한다.[24] 강일순은 1908년 2월 4일 석방되어 의례와 설교를 계속했고, 1908년에 설립한 동곡 병원에서 1909년 6월 24일 사망했다.[25]3. 사망과 계승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1909년 8월 9일)에 병으로 향년 39세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세 번째 부인 고판례는 30세였으며, 이전 부인 김수부는 재가하면 단명하리라는 강일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가하여 사망했다.[17] 강일순의 아버지 강문회는 64세, 어머니 안동 권씨 권양덕은 60세, 장모 밀양 박씨 부인은 53세였다. 강일순 사후, 그의 운동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다.
3. 1. 사망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1909년 8월 9일)에 병으로 향년 39세로 사망했다.[17] 사망 당시, 세 번째 부인 고판례는 30세였으며, 이전 부인 김수부는 재가하면 단명하리라는 강일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가하여 사망했다. 강일순의 아버지 강문회는 64세, 어머니 안동 권씨 권양덕은 60세, 장모 밀양 박씨 부인은 53세였다.3. 2. 부인과 후계자
강일순은 세 번 결혼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첫째 부인 정치순과의 사이에서 얻은 막내딸 강순임뿐이었다. 강일순 사후,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 셋째 부인 고판례를 중심으로 종단이 형성되었으나,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다.[22]강일순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성명 | 출생-사망 | 비고 |
---|---|---|---|
증조부 | 강보랑(姜甫浪) | 진주 강씨 | |
증조모 | 박씨 부인(務安 朴氏 夫人) | ||
양조부 | 강두중(姜斗重) | 강문회(강일순 부친)의 백부이자 양부 | |
양조모 | 임씨 부인(平澤 林氏 夫人) | ||
친조부 | 강한중(姜漢重) | 강문회(강일순 부친)의 생부 | |
친조모 | 박씨 부인(全州 朴氏 夫人) | 강문회(강일순 부친)의 생모 | |
부 | 강문회(姜文會) | 1846년~1912년 | 강한중(친조부)의 차남, 강두중(양조부)의 양자 |
모 | 권양덕(權良德) | 1850년~1914년 | 안동 권씨 |
본인 | 강일순(姜一淳) | 1871년~1909년 | |
초배 배우자 | 정치순(鄭治順) | 1874년~1928년 | 하동 정씨, 1891년 결혼, 1904년 이혼, 슬하에 2남 3녀(막내딸 강순임) |
계배 배우자 | 김말순(金末順) | 1890년~1911년 | 김제 김씨, 1904년 재혼, 1907년 이혼, 자녀 없음 |
삼취 배우자 | 고판례(高判禮) | 1880년~1935년 | 장흥 고씨, 1907년 삼혼, 1909년 강일순 사별, 자녀 없음, 증산도에서 태모님으로 추앙[22] |
남동생 | 강재득(姜在得) | 1874년~1879년 | 6세 때 홍역으로 사망 |
여동생 | 강선돌(姜仙乭) | 1878년~1944년 | |
장인 | 고덕삼(高德三) | 1853년~1883년 | 고판례의 부친 |
빙모 | 박씨 부인(密陽 朴氏 夫人) | 1857년~1927년 | 고판례의 모친 |
처이모부 | 차치구(차중필) | 1851년~1894년 | 고판례의 이모부, 연안 차씨 |
삼취 이종처남 | 차경석(차윤홍) | 1880년~1936년 | 차치구의 아들, 고판례의 이종사촌 동생, 차일혁의 부친, 차길진의 조부 |
3. 2. 1. 세 부인과의 관계
강일순은 세 번 결혼했다. 1891년 6월, 하동 정씨인 정치순(1874년생)과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04년 4월에 이혼했다. 정치순과의 사이에서는 2남 3녀를 두었으나, 막내딸 강순임(1904년생)을 제외한 자녀들은 어렸을 때 병으로 사망했다.[17]1904년 9월, 강일순은 김제 김씨인 김말순(1890년생)과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07년 6월에 다시 이혼했다. 김말순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김말순은 강일순과 이혼 후 1909년 11월 장흥 오씨 집안으로 재가했으나, 1911년에 병으로 사망했다.[18]
1907년 12월 8일, 강일순은 장흥 고씨인 고판례(1880년생)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를 태모님으로 추앙하기도 한다.[22] 고판례는 1893년에 아주 신씨 집안에 첩으로 출가했으나 1907년 7월 사별 후, 같은 해 12월 강일순과 재혼했다. 강일순과 고판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강일순은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1909년 8월 9일)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 고판례의 나이는 30세였다.[19]
3. 2. 2. 고판례와 종단 분열
고판례(高判禮)는 강일순의 세 번째 부인으로, 강일순 사후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22] 강일순은 1907년 12월 8일 고판례(1880년생, 장흥 고씨)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약 2년 후인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1909년 8월 9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17] 강일순이 사망한 후, 그의 운동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다.1911년, 고판례(수부, 首婦)는 가장 큰 파벌 중 하나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이 파벌은 결국 고판례의 남성 사촌인 차경석(1880~1936)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차경석의 계파는 보천교(普天敎)로 알려졌으며,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동안 600만 명 이상의 신도를 확보하며 다른 어떤 종교보다 많은 추종자를 확보했다.[26] 그러나 보천교는 빠르게 쇠퇴하였다.
고판례는 1919년 차경석과 결별하고 자신의 조직을 설립했으나, 이 조직은 그녀의 사후 여러 경쟁 파벌로 나뉘었다. 강일순의 또 다른 주요 제자인 김형렬(1862~1932)은 원래 차경석을 지지했지만, 1914년 그를 떠나 강일순의 미망인 정씨의 도움으로 또 다른 계파를 설립했다. 이 계파 역시 여러 독립적인 그룹으로 분열되었다.[27]
결과적으로 강일순의 유산을 주장하는 약 100개의 서로 다른 그룹이 생겨났지만,[28]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룹은 거의 없다. 증산도는 강일순이 하나님 아버지였다면, 증산도에서 태모님으로 추앙받는 고판례(1880년~1935년)는 하나님 어머니였고,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자신의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믿는다.[22]
4. 종단
강일순(강증산) 사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러 종단들이 생겨났다. 강증산이 천지공사를 본 후, 주요 성도들이 전라북도 김제 구릿골에 모여 그의 조화권능을 체험했다고 전해진다. 주요 제자로는 김형렬, 차경석의 보천교,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이치복 등이 있었다.[45]
강일순은 고판례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사후 그의 운동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다. 1911년 고판례는 차경석과 결별하고 자신의 조직을 설립했으나, 사후 여러 경쟁 파벌로 나뉘었다. 김형렬은 차경석을 지지하다 1914년 그를 떠나 강일순의 미망인 정씨와 함께 또 다른 계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여러 그룹으로 분열되었다.[27]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특히 1938년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려 민족종교를 해산시켰다. 이때문에 증산계 교단은 지하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1938년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강일순을 따르는 종교는 해방 전까지 조직적인 신앙 활동과 애국 독립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대 활동이 기록된 친필 '대순전경'과 함께 발견된 32장의 서간체 문건은 국사편찬위원회와 문화재관리청의 연구를 거쳐 출판되었다.
강일순의 유해는 그의 딸 강선임이 설립한 증산법종교에 안치되어 있다.[31] 현재 주요 종단으로는 증산법종교 외에도 증산도, 태을선도, 태극도, 대순진리회 등이 있다. 대순진리회는 강일순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1917년 강일순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조정산으로부터 유래했다.[29] 증산도는 강일순을 하나님 아버지, 고판례를 하나님 어머니로 믿는다.[22]
강일순은 자신의 구원 메시지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33] 대순진리회와 증산도는 해외 선교 활동도 하고 있다.
4. 1. 종단 분열과 발전
강일순 사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러 종단들이 생겨났다. 강일순의 수석 제자인 김형렬을 비롯하여, 차경석의 보천교,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이치복 등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45]강일순은 고판례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의 사후 운동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다. 1911년 고판례는 차경석과 결별하고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으나, 이 조직은 그녀의 사후 여러 경쟁 파벌로 나뉘었다. 김형렬은 차경석을 지지하다가 1914년 그를 떠나 강일순의 미망인 정씨와 함께 또 다른 계파를 설립했지만, 이 역시 여러 그룹으로 분열되었다.[27]
대순진리회는 강일순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1917년 강일순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조정산으로부터 유래했다.[29] 증산도는 강일순을 하나님 아버지, 고판례를 하나님 어머니로 믿으며, 그녀가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자신의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믿는다.[22] 강일순의 외동딸인 강선임은 증산법종교를 설립하여 강일순의 유해를 확보하고 전라북도에 본부를 두고 있다.[31]
결국 강일순의 유산을 주장하는 약 100여 개의 그룹이 생겨났지만,[28]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룹은 많지 않다. 그중 가장 큰 그룹은 대순진리회이며,[29] 대순진리회와 증산도는 미국 등 해외 선교 활동도 하고 있다.[33]
4. 1. 1. 일제강점기 종단 상황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민족종교를 탄압하기 위해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철저히 통제했다. 1930년대 후반, 대륙 침략을 감행하면서 이러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특히 신사참배 강요와 '유사종교 해산령'을 통해 민족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45]조선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준은 한국의 민족종교들을 5계파 66교로 분류했는데, 그중 증산도 계열은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교 등 11개 교단으로 분류되었다.[45]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부 민족종교들은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특히, 보천교는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1935년 고수부가 사망하고, 1936년 보천교 교주 차경석마저 사망하면서 보천교는 급격히 쇠퇴했다. 일본은 보천교 건물을 해체하여 조계사와 전주역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45]
이 시기 증산계 교단은 지하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1938년 유사종교 해산령 이후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의 활동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는 한국 민족종교사상 최대의 시련기였다.[45]
강일순 사후 그의 제자들은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등 여러 교파로 갈라졌으며, 보천교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4. 1. 2. 해방 이후 종단 상황
1938년 '유사종교 해산령' 이후, 증산계 교단은 공식적인 활동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지하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이어갔다.[45] 이는 한국 민족종교사상 최대의 시련기였지만, 일부 종단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며 신앙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해방 이후 강일순을 따르던 여러 종단들이 재건되거나 새롭게 형성되었다. 강일순의 제자들은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등 다양한 교파로 나뉘었다.[45] 차경석의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최대 교단으로 성장하여 조선총독부 기록상 650만 명의 신도를 거느렸으나,[45] 1936년 차경석 사후 일본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고판례는 1911년 차경석과 결별하고 자신의 조직을 설립했으나, 사후 여러 경쟁 파벌로 나뉘었다.[26] 강일순의 또 다른 주요 제자인 김형렬은 1914년 차경석을 떠나 강일순의 미망인 정씨와 함께 또 다른 계파를 설립했지만, 이 역시 여러 독립적인 그룹으로 분열되었다.[27]
대순진리회는 강일순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1917년 강일순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조정산으로부터 유래했다.[29] 강일순의 외동딸인 강선임은 증산법종교를 설립하여 강일순의 유해를 확보하고 전라북도에 본부를 두었다.[31]
이처럼 강일순의 사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종단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격변 속에서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 개혁에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대순진리회를 비롯한 여러 종단들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일부는 해외 선교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32]
4. 2. 현재의 주요 종단
강증산(강일순) 사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러 종단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강증산을 신격화하고 그의 가르침과 천지공사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한다. 강일순의 운동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는데, 1911년 그의 여제자 고판례(수부)가 가장 큰 파벌 중 하나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파벌은 고판례의 남성 사촌인 차경석의 보천교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는 600만 명 이상의 신도를 확보하며 크게 성장했지만 빠르게 쇠퇴했다.[26] 고판례는 1919년 차경석과 결별하고 자신의 조직을 설립했지만, 그녀의 사후 여러 경쟁 파벌로 나뉘었다. 강일순의 또 다른 주요 제자인 김형렬은 또 다른 계파를 설립했고, 이 계파 역시 여러 독립적인 그룹으로 분열되었다.[27]현재 강일순의 성골은 그의 딸인 강순임(화은당선사)을 중심으로 하는 증산법종교에서 모시고 있다. 주요 종단으로는 증산법종교 외에도 증산도, 태을선도, 태극도, 대순진리회, 대진성주회 등이 있으며, 이들은 후천선경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순진리회는 강일순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1917년 강일순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조정산에게서 유래했으며,[29] 증산도는 강일순을 하나님 아버지, 그의 여제자 고판례를 하나님 어머니로 믿는다.[22]
강일순은 자신의 구원 메시지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33] 대순진리회와 증산도는 미국 등 해외에서도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4. 2. 1. 주요 종단 목록
강일순 사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러 종단들이 생겨났다. 주요 종단과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28][31]종단명 | 특징 |
---|---|
증산법종교 | 강일순의 딸인 강二淳 (화은당선사)을 중심으로 형성, 강일순의 성골을 모심[31] |
증산도 | 강일순을 하나님 아버지, 제자 고판례(고수부)를 하나님 어머니로 믿음, 고판례도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주장[22] |
태을선도 | |
태극도 | 도주 조정산이 강일순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시작[29] |
대순진리회 | 조정산의 계시 주장을 계승, 가장 큰 종단[32] |
대진성주회 |
이들 종단 외에도 강일순의 유산을 주장하는 100여 개의 종단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수만이 남아있다.[28] 차경석의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600만 명 이상의 신도를 가졌다고 알려졌으나, 빠르게 쇠퇴했다.[26]
각 종단은 강일순을 신격화하며, 그의 가르침과 천지공사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한다.
4. 2. 2. 성골 보존과 종단 활동
강증산(강일순)의 유일한 자손인 딸 강순임(화은당선사)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이 강일순의 성골을 모시고 있다.[31] 2024년 현재, 성골을 모시고 있는 증산법종교(화은당선사)를 중심으로 증산도(고수부), 태을선도, 태극도(도주 조철제), 대순진리회(도전 박한경), 대진성주회 등 6개의 종단이 후천선경의 덕을 펴기 위해 상생포덕사업에 주력하고 있다.[31]대순진리회는 강일순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1917년 강일순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조정산(1895~1958)에게서 유래했다.[29] 조정산의 추종자들은 1909년 강일순이 기차를 보았는데, 그 기차에는 당시 십 대였던 조정산이 가족과 함께 봉천(만주)로 망명 생활을 하러 가는 중이었고, 강일순이 “사람이 15세에 호패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조정산의 제자들은 이 말이 강일순이 조정산을 후계자로 지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0] 강일순의 외동딸인 강순임(1904~1959)은 원래 조정산을 받아들였지만 나중에 자신의 계파인 증산법종교를 설립했다. 증산법종교는 전라북도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다른 계파와의 소송 끝에 강일순의 유해를 확보하여 현재 본부에 안치하고 있다.[31]
증산도는 강일순이 하나님 아버지였다면, 증산도에서 태모님으로 추앙받는 그의 여제자 고판례(1880~1935)는 하나님 어머니였고,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자신의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믿는다.[22]
강일순은 자신의 구원 메시지가 한국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것이 전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가르쳤다.[33]
5. 경전
강일순의 사상과 가르침은 여러 경전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초기 경전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발간되었으며, 언론 및 종교 활동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초기 경전들은 특정인의 시각에서 기록되거나 교단 간 경쟁으로 인해 내용이 불완전한 경우가 많았다.[1]
1970년대 이후에는 생존 제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수집, 대조하여 통합 경전이 만들어졌다. 특히 강일순을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김호연의 증언이 추가되면서 내용이 보강되었다.[1] 통합 경전은 초기 경전의 한계를 극복하고 강일순의 사상과 행적을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5. 1. 초기 경전
일제강점기에는 언론과 종교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초기 경전 간행이 어려웠다. 이는 민족 종교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한민족 구원 사상을 담은 증산 사상이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 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의 군자금 조달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17]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2년 김형렬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상호가 《증산천사공사》를 간행하였다. 이상호는 이후 《대순전경》을 간행하고 동화교를 창립, 보천교의 고판례를 영입하였다. 대부분의 초기 경전들은 1945년 해방 이후에 간행되었으며, 교단 간 경쟁 속에서 강일순의 행적이 전수되었다.[17]
한편, 동학의 패배 이후 강일순은 3년간 한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폈고,[17] 1900년 집으로 돌아와 추종자들을 모았다. 1901년 여름, 모악산에서 49일간의 고행과 단식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18] 대순진리회에서는 이 고행이 천지의 대도(大道)를 열고 신명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19][20] 또한, 강일순이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한 의례를 통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완벽히 이루었다고 주장한다.[21] 증산도에서는 강일순의 여제자 고판례가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자신의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믿는다.[22]
5. 1. 1. 초기 경전의 한계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초기 경전들은 식민지 지배 하의 민족 종교 탄압 정책으로 인해 언론과 종교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경전 간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증산 사상은 한민족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고, 민족 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의 군자금 조달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는 민족 종교를 탄압하고 집회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분열을 조장했다.[1]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간된 최초의 경전이 《증산천사공사》이다. 1922년 수석성도인 김형렬(강일순의 두 번째 전처 김말순의 친정아버지)의 증언을 받아 미륵불교에서 최초의 경전을 간행하려 했으나, 자료를 수집한 이상호가 미륵불교를 탈교하면서 개인 이름으로 발간했다. 이상호는 이후 《대순전경》을 간행하고 동화교를 창립, 보천교 차경석에게 있던 고판례를 동화교로 데려왔다.[1]
대부분의 초기 경전들은 1945년 일제강점기 말기나 8·15 해방 이후 간행되었다. 경전 간행의 자유는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나, 교단이 해체된 상태에서 강일순의 직전 제자들이 만든 교단들을 중심으로 강일순의 행적이 전수되었다. 각 교단은 서로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중요한 내용들이 타 교단에 알려지지 않거나, 알려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
5. 1. 2. 주요 초기 경전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경전들이다. 식민지 지배 하에 민족 종교 탄압 정책으로 인하여, 언론과 종교활동에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경전 간행이 비교적 자유롭지 못했다.[17] 성격상 한민족이 인류를 구원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동시에 민족 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의 군자금 조달처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민족종교 탄압과 집회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발간된 최초의 경전이 증산천사공사이다. 1922년 수석성도인 김형렬(강일순 교조의 두번째 전처 김말순 여사의 친정아버지.)의 증언을 받아서 미륵불교에서는 최초의 경전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륵불교의 경전으로 간행되기 전에 김형렬의 증언을 받아 자료를 수집한 이상호가 미륵불교를 탈교하였다. 그후 이상호는 증산천사공사를 개인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상호는 이후 《대순전경》을 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동화교를 창립한 후 보천교 차경석 교주에게 있던 고판례를 동화교로 모셔오게 된다.대부분 1945년 일제강점기 말기나 을유 광복(8·15 해방) 이후 간행된 서적들이다. 경전 간행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정작 교단이 해체된 상태여서 강일순의 직전제자들이 만든 교단들을 중심으로 강일순의 행적이 전수 되었다. 그리고 각 교단이 서로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이 타 교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5. 2. 통합 경전
1970년대 이후 강일순(강증산)의 제자들이 거의 대부분 사망하면서, 생존 제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고 대조하여 만든 경전이 통합 경전이다. 강증산을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김호연의 증언이 추가되어 내용이 보강되었다.[1]동학 실패 이후, 강일순은 3년간 민심을 살폈고, 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많은 추종자를 모았다.[17] 추종자들은 강일순이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린 상제(上帝)이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강림했다고 믿었다.[19] 대순진리회는 강일순이 모악산에서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고 신명들을 심판했으며,[20]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다고 주장한다.[21] 증산도는 강일순을 하나님 아버지, 그의 여제자 고판례를 하나님 어머니로 믿으며, 고판례가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본다.[22]
5. 2. 1. 통합 경전의 필요성
1970년대 이전 초기 경전들은 강일순의 가르침을 기록했지만, 교단마다 내용에 차이가 있거나, 특정인의 시각에서 서술되어 내용이 불완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1]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증언자들의 교차 검증과 현장 답사를 거친 통합 경전 간행이 필요하게 되었다.[1]통합 경전에는 강일순을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김호연의 증언이 추가되어, 초기 경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1] 특히 강일순의 수석 제자 김형렬의 증언에만 의존하던 내용에서 벗어나, 강일순의 사상과 행적을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1]
고판례에 대한 경전은 일부 있었으나, 현장 답사가 부족했다.[1] 이에 증산도의 안경전 종도사가 통합 경전의 필요성을 느껴 30년간 현장 답사와 확인 작업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강일순의 마지막 제자 중 한 명인 김호연을 만나 9년간의 천지공사 과정을 증언받아 증산도 도전 개정판에 추가했다.[1]
현재 각 교단에서 초기 경전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통합적인 답사와 확인 작업을 거친 경전은 《증산도 도전》이 유일하며, 강일순의 가르침을 총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
5. 2. 2. 주요 통합 경전
강일순의 제자들이 거의 대부분 사망한 이후인 1970년대에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고 대조하기 시작한 경전이다. 1970년대 이전에 간행된 초기 경전들은 같은 구절에 대해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시기와 참여자에 대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특정인 한 명의 시각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빠진 내용이 많고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불가능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증언자들끼리 수차례에 걸친 교차 검증과 현장 답사를 거쳐 경전 간행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합 경전은 강일순을 가장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김호연의 증언이 수집되어 추가되었다. 오히려 초기 경전 전체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내용이라고 한다. 강일순의 수석 제자인 김형렬의 증언에만 의존하던 내용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판례에 대한 경전은 고판례의 직전 제자인 고찬홍 등과 고민환 등에 의해 자필로 제작되어 영인된 일부 경전이 있었으나 역시 답사를 거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증산도의 안경전 종도사가 통합 경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30년 동안 현장 답사와 확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강일순을 직접 따르던 제자 중 마지막 제자에 속하는 김호연을 만나 9년 동안의 전반적인 천지공사 과정을 증언받아 현재의 증산도 도전 개정판에 추가하였다고 한다.각 교단에서 초기 경전을 사용하는 곳은 있으나, 통합적인 답사와 확인 작업을 거친 경전은 최초로 발간된 경전이자 총집대성본(總集大成本)인 《증산도 도전》이다.
6. 유산과 영향
동학의 혹독한 패배 이후 강일순은 3년 동안 한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폈다.[17] 1900년, 그는 집으로 돌아와 이후 수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추종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1901년 여름 그는 49일간의 고행과 단식 끝에 모악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18] 사실 추종자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에 대해 깨달음을 넘어선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그가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린 최고의 주(主)인 상제이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세상에 강림했다고 믿었다. 강일순을 상제로 인정하는 가장 큰 종파인 대순진리회에 따르면,[19] 그가 모악산에서 행한 고행은 천지의 대도(大道)를 열고 신명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단순한 고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20] 추종자들은 또한 그가 전세(前世)를 주관하는 모든 신들을 심판하고 후세(後世)의 길을 열었으며,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한 의례를 통해 완벽한 "천지공사"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21] 대순진리회는 그의 계승자인 종교 정통파 조정산과 박우당이 완수해야 할 천지공사의 잔여 작업이 있었다고 믿는다. 증산교의 또 다른 분파인 증산도는 강일순이 하나님 아버지였다면, 증산도에서 태모님으로 추앙받는 그의 여제자 고판례는 하나님 어머니였고,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자신의 천지공사를 수행했다고 믿는다.[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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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hng-jeh-nim and Tae-mo-nim
http://www.js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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