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한 인물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군에서 복무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73년 중앙정보부 차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0.26 사건 이후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김재규의 암살 동기는 자유민주주의 회복, 독재 국가 이미지 개선 등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민주화 운동의 애국자 또는 일시적인 암살자라는 상반된 시각이 공존한다. 2024년에는 김재규의 10.26 사건에 대한 재심이 예정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동문 - 김무연
김무연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시대까지 관료와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경상북도 문경군수, 영덕군수, 금릉군수, 경상북도 부지사, 대구시장, 강원도지사, 경상북도지사, 부산직할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 및 중앙정부 고위직을 역임하고 안동문화방송과 대구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동문 - 김광림 (정치인)
김광림은 경제 관료 출신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국회 주요 위원회와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며 정책 결정에 관여했으나 2020년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 대한민국에서 교수형된 사람 - 문세광
문세광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와 육영수 여사 살해를 저지른 범인으로, 조총련의 영향을 받아 좌익 사상에 심취하여 범행을 계획했으며 사형 집행되었다. - 대한민국에서 교수형된 사람 - 최인규 (1919년)
최인규는 연희전문학교와 뉴욕대학교를 졸업 후 대한교역공사와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4대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3·15 부정선거의 총책임자로 지목되어 4·19 혁명 이후 구속,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김재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재규 |
한자 표기 | 金載圭 |
로마자 표기 | Gim Jaegyu |
출생일 | 1924년 4월 9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
사망일 | 1980년 5월 24일 |
사망 장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
사망 원인 | 교수형 |
안장 장소 | 능평동, 광주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 |
종교 | 불교 |
직업 | 군인, 정무직 공무원 |
배우자 | 김영희 |
학력 | 한양대학교 대학원 공학 석사 육군사관학교 |
호 | 덕산(德山) |
가족 | 부: 김형철 모: 권유금 자녀: 김수영 (딸), 김민수 (양자) 형제: 김항규 (남동생), 김재선 (여동생), 김재숙 (여동생), 김정숙 (여동생), 김단희 (여동생), 김순희 (여동생), 김영규 (남동생) |
군사 경력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6년 ~ 1974년 |
최종 계급 | 중장 |
지휘 | 6사단 보안사령부 3군단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중앙정보부 차장 | 임기: 1973년 1월 6일 ~ 1973년 9월 6일 대통령: 박정희 총리: 김종필 |
건설부 장관 | 임기: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총리: 김종필 최규하 |
중앙정보부장 | 임기: 1976년 12월 6일 ~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 총리: 최규하 전임: 신직수 후임: 윤일균 (직무대행) |
범죄 정보 | |
죄명 | 내란죄 (내란 목적 살인) |
형벌 | 사형 (교수형) |
기타 | |
한국어 이름 (한글) | 김재규 |
한국어 이름 (한자) | 金載圭 |
로마자 표기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Gim Jaegyu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Kim Chaegyu |
로마자 표기 (한글) | 덕산 |
로마자 표기 (한자) | 德山 |
로마자 표기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Deoksan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Tŏksan |
2. 생애
김재규는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시대 단종의 충신이자 문신이었으며 삼중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의 27대손이다. 1945년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다 새롭게 독립한 대한민국 정부가 군대를 창설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자, 1946년 12월 박정희와 같은 해에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54년 연대장을 역임했고, 1957년에는 김계원이 총장으로 있던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했을 때, 김재규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반혁명분자로 의심받아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다가 박정희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1979년 박정희 암살 때까지 박정희의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근무했다.
박정희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며,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동기생이지만, 9살 연하이다. 박정희의 인맥을 통해 승진하여 출세하였고, 1973년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제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0] 1974년 9월 18일 건설부 장관, 1976년 12월 4일에는 중앙정보부 장관이 되어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
2. 1. 군인 생활과 박정희와의 관계
박정희와 같은 경상북도 구미 출신으로 육사 2기 동기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으로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다가 소위 임관 직전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했다.[12] 부대 내 사망사고 책임으로 면직되었다가 김천중학교, 대륜중학교 교사 생활 후 복직했다. 1952년 육군대학을,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1950년 3월 소령으로 진급, 제3사단 22연대 2대대장을 역임했다.[13] 한국 전쟁에서 포항 전투 등에 참전했다. 제5사단 참모장, 36연대장을 거쳐 제3사단 부사단장을 지냈다.[13] 1957년 8월 제1군 사령관 송요찬에게 부대 상황 보고 중 "제1군 휘하에 이런 무능한 장교가 있다니. 24시간 안에 짐을 싸서 군을 떠나라"는 질책을 받고 전역하려 했으나, 이종찬의 만류로 육군대학교 학생 감독관이 되었다.[14] 이후 준장 진급과 함께 육군대학교 부총장이 되었다. 당시 총장이던 김계원과는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하며 박정희 암살 순간까지 함께 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국방부 총무과장이었으나,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아 혁명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13] 부정할 사실이 없어 석방된 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다.[13] 1963년 9월 원대 복귀하여 제6사단장에 임명되었다.[13]
1954년부터 1966년까지 6사단장, 육군 5사단 36연대장, 101연대장을 역임했고, 1956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협조했다.
1964년 박정희가 비밀리에 추진하여 한국 어민에게 불리하다고 평가된 한일 조약 체결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김재규의 사단은 학생 시위 진압을 위해 서울에 파병되었다. 김재규는 군을 민간인 체포에 개입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경찰에 임무를 맡긴 채, 부대에 거리와 대학 캠퍼스 청소를 명령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방식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1]
1965년 1월 소장으로 진급, 제6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8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13] 1971년 9월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3선에 도전했고,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 임기임을 유권자에게 약속하도록 설득했다. 전두환 등 젊은 장교들이 박정희와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한 비밀 조직 하나회 결성에 반대하며 사병(私兵)이라고 비판했다. 하나회는 박정희 암살 후 전두환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기존 군부 장성들을 축출했다.[1]
1972년 10월,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정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을 알게 된 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그의 부하 장교들은 증언한다.[2]
1973년 예편 후 박정희의 인맥으로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고, 같은 해 제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0]
2. 2. 박정희 정권 시절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으로 부임한다. 1964년 6ᆞ4계엄령이 선포되어 6사단은 서울의 계엄을 책임지게 된다.[24] 이때 6사단장은 김종필 제거에 앞장서고 계엄령하의 경찰업무에 군을 동원하는 것을 거부한다.[24]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1월 6일 중앙정보부 차장에 취임하였으며, 1973년 4월 25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박정희 독재 시절, 1963년 제6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한일 조약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김재규의 사단은 학생 시위 진압을 위해 서울에 파병되었다. 김재규의 사태 처리 방식은 박정희의 신임과 호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군대를 민간인 체포에 개입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경찰에게 그 임무를 맡긴 채, 자신의 부대에게는 거리와 대학 캠퍼스 청소에 집중하도록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 1966년 육군 제6군단장, 1968년 방첩사령부 사령관, 1971년 3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3선에 도전했는데,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임기임을 약속하도록 설득했다. 전두환 등 젊은 장교들이 박정희와 자신에게 개인적인 충성 서약을 한 비밀 조직인 하나회 결성에 반대하고, 이를 사병(私兵)으로 비판했다. 하나회는 박정희 암살 후 전두환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기존 군부 장성들을 축출했다.[1]
1972년 10월,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그 목적은 (a)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대의원 간접 선거 제도로 대체하고, (b)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대통령에게 할당하며, (c) 대통령에게 긴급 명령 발동 및 헌법 정지 권한을 부여하고, (d) 대통령에게 모든 판사 임명 및 국회 해산 권한을 부여하고, (e) 대통령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선 자금으로 예산의 10%를 사용했음에도 야당 대표 김대중에게 패배할 뻔했다. 유신헌법은 박정희의 종신 독재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3군 사령부의 김재규 부하 장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신헌법을 알게 된 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2]
체포 후 김재규는 서예로 7년 만에 결심을 이루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유신헌법이 그를 박정희에 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재판에서 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박정희가 매년 군부대 순시차 3군사령부를 방문할 경우 박정희를 구금하고 사퇴를 강요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의 처남이자 3군사령부 작전참모였던 오수춘에 따르면, 김재규는 사령부 내 작은 건물 주위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외부에서 진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탈출을 막도록 설계했다고 한다.[2]
장준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준하는 독립군 출신, 야당 의원, 월간지 ''사상계'' 발행인으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장준하의 장남이자 현재 ''사상계'' 발행인인 장호권에 따르면, 장준하는 김재규를 언젠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일할 애국적인 군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 1979년 김재규는 변호사에게 박정희 암살을 처음 시도한 것은 건설부 장관에 임명된 1974년 9월 14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뉴스릴에는 김재규가 박정희와 악수할 때 주머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유신헌법 반대 서명운동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장준하와 함께 수감되었던 이해학 목사에 따르면, 장준하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고, 계획이 실행되지 않자 "장관이 그렇게 좋으냐"며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1975년 장준하가 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김재규는 그의 가족에게 비밀리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된 후, 그는 장준하의 아들에게 장준하의 죽음이 공식 발표처럼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고, 정권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깊은 유감과 함께 밝혔다.[3]
김수환 추기경에 따르면,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는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1975년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 "제3의 길", 즉 박정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유신헌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에는 약한 약이 필요한 "병든 환자"에 비유했다.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만이 박정희에게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믿었고, 그 대화가 거의 성과 없이 끝나자 실망했다고 한다.[2]
건설부 장관(1974~1976) 재임 시 한국 건설업체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73년 4500만달러였던 한국의 중동 수출액을 1976년 9억달러로 20배 증가시켰고, 사우디아라비아를 4번째로 중요한 해외 시장으로 만들었다.[4] 이는 한국이 1973년 석유 파동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6년 2월 4일, 박정희의 부름을 받아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 임명되었다. 중앙정보부는 1961년에 설립되어 군사정보를 포함한 국내외 정보 활동을 조정하는 기관으로, 공산주의와 북한에 맞서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 중앙정보부는 광범위한 권한을 이용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내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법원의 허가 없이 도청, 체포, 구금을 자행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고문, 정치적 살인, 납치 등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 이후 김재규는 자신이 부장직을 원하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고 유신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부장 재임 기간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김재규는 최소 3번 이상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행위를 1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제9차 비상계엄령 철폐를 요청하였고, 결국 제9차 비상계엄령은 제10차 비상계엄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제10차 비상계엄령은 제9차 비상계엄령의 많은 제한을 완화하였다. 그는 또한 제9차 비상계엄령에 따라 체포된 많은 운동가와 학생들을 석방하였다.[1] 해제된 미국의 외교 문서는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하는 특이한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여겨졌고, 인권 문제에 대한 워싱턴의 메시지를 박정희에게 전달하는 더욱 다가가기 쉬운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5]
반면 김재규는 전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 암살, 야당인 신민당의 내부 선거 방해 공작, 그리고 YH무역 여공들의 강제 진압 등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발생한 중앙정보부의 활동에 책임이 있었다. 1979년 8월 11일, YH무역에서 일하는 약 200명의 여성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2,000명의 경찰이 신민당 당사를 급습하는 과정에서 한 여공이 사망하고, 10명의 노동자, 30명의 신민당 당원, 12명의 기자를 포함한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해는 특히 격동의 시기였다. 1978년 선거에서 박정희의 언론, 자금, 모든 정부 기관에 대한 완벽한 장악에도 불구하고 1.1% 차이로 승리한 신민당(NDP)의 반대가 거세졌다. 유신헌법으로 인해 박정희가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박정희의 민주공화당(DRP)은 계속 집권했다. 1979년 5월, 중앙정보부(KCIA)의 치밀한 움직임으로 더 유순한 후보인 이철승을 지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신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의 지도 아래 신민당은 유신헌법 폐지 전까지 박정희와 타협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 강압적인 체포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의 살인적인 정권이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곧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희는 김대중과 같이 김영삼을 정치 무대에서 제거하려 했다. 1979년 9월, 중앙정보부는 신민당 의원 3명을 움직여 김영삼의 당수 선출을 법적으로 문제 삼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게 했고, 법원은 김영삼의 신민당 당수직 정지 명령을 내렸다.
정치적 긴장은 김영삼이 ''뉴욕 타임즈'' 기자 헨리 스톡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군사 독재와 한국 국민 중 하나를 선택하고 박정희 정권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을 명령했고, 이는 김재규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 사건이었다. 1979년 10월 3일, 김재규는 그러한 상황을 피할 방법을 찾고자 김영삼을 만났다. 김재규는 마지못해 김영삼을 “국가를 위해” 중앙정보부로 오라고 요청하며 박정희의 적개심이 제명이나 체포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며, 인터뷰에 오해가 있었다고만 말해달라고 간청했다. 김영삼에 따르면, 김영삼이 거부하자 김재규는 그 일이 국가와 김영삼 자신, 그리고 박정희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다음 날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은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의 사퇴서 제출과 미국이 항의의 표시로 주한 미국 대사를 소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0월 16일, 부산에서 김영삼의 고향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고, 수일간 30개 이상의 경찰서가 방화되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 시대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10월 19일에는 인근 마산과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었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유신헌법 폐지를 요구했다. 김재규는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고, 시위가 일부 대학생들의 폭동이 아니라 정권에 저항하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민중봉기”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시위가 서울을 포함한 다른 5개 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희는 상황이 악화되면 자신이 직접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며,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동기생이지만, 9살 연하이다. 1973년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제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0] 1974년 9월 18일 건설부 장관, 1976년 12월 4일에는 중앙정보부 장관이 되어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
3. 10.26 사건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등 계속된 정국 불안 사건을 수습하면서, 김재규는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참석한 연회에서 김재규는 발터 PPK 권총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시해했다. (10.26 사태)[2] 김재규는 사건 직후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살해한 후 김계원에게 은신처를 확보하도록 지시하고,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기다리고 있던 인근 중앙정보부 건물로 갔다. 정승화는 총소리를 듣고 중앙정보부 차장 김정섭과 상황을 논의하던 중 김재규로부터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박정희가 사망했다고 알렸지만, 자세한 경위는 설명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계원이 쿠데타를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정승화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김재규와 공모자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김재규는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3. 1. 암살 배경 및 동기
김재규는 건설부 장관 시절부터 이미 유신정권의 독재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들이 시위로 연행되거나 구속될 때 영향력을 행사하여 석방시킨 사례도 있었다. 방송에 따르면, 건설부 장관 재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하는 자리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전역 당시 소지하고 있던 권총이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10.26 혁명의 목적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 자유민주주의 회복
# 국민들의 희생 방지
# 적화 방지
# 미국과의 관계 회복 및 강화
# 독재 국가 이미지 개선 및 국제 사회 명예 회복
김재규는 부마민주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면 4·19 혁명보다 더 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승만과 달리 박정희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100만~200만 명을 못 죽이겠느냐'고 발언했고, 박정희 또한 '자유당 때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려 사형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누가 대통령을 사형시키겠느냐'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거사를 단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급조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30]
하지만,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석방하여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 거사 이전의 행적과 미국의 기록을 보면, 김재규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어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된다.
암살 당시, 안가 '가'동에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신옥 변호사에게 자신도 속아서 궁정동으로 왔다고 진술했다.[31] 그곳에는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도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24]
박정희 독재 시절, 김재규는 1963년 제6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한일 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김재규의 부대는 시위 진압을 위해 서울에 파병되었다. 김재규의 사태 처리 방식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김재규는 군을 민간인 체포에 개입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경찰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는 이야기도 있다.[1] 이후 그는 1966년 육군 제6군단장, 1968년 방첩사령부 사령관, 1971년 3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3선에 도전했을 때, 김재규는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임기임을 약속하도록 설득했다. 또한 하나회 결성에 반대하며 이를 사병(私兵)으로 비판했다. 하나회는 박정희 암살 이후 전두환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1]
1972년 10월,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유신헌법은 (a) 대통령 직선제 폐지 및 간접 선거, (b) 국회 의석 1/3 대통령 할당, (c) 대통령의 긴급 명령 및 헌법 정지 권한, (d) 대통령의 판사 임명 및 국회 해산 권한, (e) 대통령 임기 제한 폐지를 골자로 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예산의 10%를 사용했음에도 야당 대표 김대중에게 패배할 뻔했다. 유신헌법은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재규의 부하 장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신헌법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2]
체포 후 김재규는 서예로 7년 만에 결심을 이루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유신헌법이 그를 반(反) 박정희로 돌아서게 만들었음을 시사한다. 재판에서 그는 유신헌법에 반대했으며, 박정희가 3군사령부를 방문할 때 그를 구금하고 사퇴를 강요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의 처남 오수춘에 따르면, 김재규는 사령부 내 작은 건물 주위에 울타리를 설치하여 내부 탈출을 막도록 설계했다.[2]
김재규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 장준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에 따르면, 장준하는 김재규를 언젠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일할 군인이라고 말했다.[3] 1979년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을 처음 시도한 것은 1974년 9월 14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뉴스릴에는 김재규가 박정희와 악수할 때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장준하와 함께 수감되었던 이해학 목사에 따르면, 장준하는 김재규의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고, 계획이 실행되지 않자 실망했다고 한다. 1975년 장준하가 의문사하자, 김재규는 가족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된 후, 그는 장준하의 아들에게 장준하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었고 정권이 개입되었다고 밝혔다.[3]
민주화 운동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에 따르면, 김재규는 정치적 위기 때마다 그를 찾아왔다. 1975년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박정희와 만나 유신헌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만이 박정희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고 믿었고, 대화가 성과 없이 끝나자 실망했다.[2] 김재규가 장준하, 김수환 추기경과 관계를 맺었던 사실은 그의 암살 동기에 대한 재고를 불러일으켰다.
김재규는 건설부 장관(1974~1976) 재임 시 한국 건설업체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을 추진하여 한국의 중동 수출액을 1973년 4500만달러에서 1976년 9억달러로 20배 증가시켰고, 사우디아라비아를 4번째로 중요한 해외 시장으로 만들었다.[4] 이는 한국이 1973년 석유 파동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1976년 2월, 김재규는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 임명되었다. 중앙정보부는 군사정보를 포함한 국내외 정보 활동을 조정하는 기관이었으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 김재규는 자신이 부장직을 원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를 설득하고 유신 체제를 개혁할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 재임 기간은 모순적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제9차 비상계엄령 철폐를 요청했고, 제9차 비상계엄령은 제10차 비상계엄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제10차 비상계엄령은 제9차 비상계엄령의 많은 제한을 완화하였다. 그는 또한 제9차 비상계엄령에 따라 체포된 많은 운동가와 학생들을 석방하였다.[1] 미국의 외교 문서는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하는 특이한 중앙정보부장으로 여겨졌다고 밝히고 있다.[5]
반면 김재규는 김형욱 암살, 신민당 내부 선거 방해 공작, YH무역 여공 강제 진압 등 중앙정보부 활동에 책임이 있었다. 1979년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경찰 2,000명이 당사를 급습하여 여공 1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당했다.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과 김계원은 김재규가 YH사건에 대해 강경 대응을 추진했다고 증언했지만, 다른 증언들이 거짓으로 드러났고, 김재규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1978년 선거에서 신민당은 1.1% 차이로 승리했다. 1979년 5월, 김영삼이 신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유신헌법 폐지 전까지 박정희와 타협하지 않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 김영삼은 박정희의 살인적인 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1979년 9월, 중앙정보부는 김영삼의 당수직 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도록 신민당 의원 3명을 움직였고, 법원은 김영삼의 당수직 정지 명령을 내렸다.
김영삼이 ''뉴욕 타임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군사 독재와 한국 국민 중 하나를 선택하고 박정희 정권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을 명령했고, 김재규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79년 10월 3일, 김재규는 김영삼을 만나 인터뷰에 오해가 있었다고 말해달라고 간청했다. 김영삼이 거부하자 김재규는 그 일이 국가와 김영삼, 박정희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호소했다. 다음 날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은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의 사퇴서 제출과 미국의 주한 미국 대사 소환을 초래했다. 10월 16일, 부산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10월 19일에는 마산과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학생들과 시민들은 유신헌법 폐지를 요구했다. 김재규는 시위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민중봉기”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시위가 서울을 포함한 다른 5개 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희는 상황이 악화되면 자신이 직접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의 입지는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경쟁, 박정희와의 악화되는 관계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 차지철은 중앙정보부(KCIA)의 영역을 침범하고 김재규를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차지철은 1974년부터 박정희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그의 총애를 받는 조언자가 되었다. 차지철은 육군으로부터 탱크, 헬리콥터, 병력을 할당받아 대통령 경호 기구가 사단급 화력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박정희의 승인 하에 정치적 책략에 개입했고, 이는 중앙정보부와의 잦은 충돌로 이어졌다. 1979년 신민당 당 대표 선거에서 중앙정보부는 김영삼의 당선을 막기 위해 이철승을 지지했지만, 차지철은 자신의 비밀 공작으로 중앙정보부의 정치 공작에 개입했다. 김영삼이 당선되자 차지철은 책임을 중앙정보부에 돌렸고, 이는 김재규를 격분시켰다. 차지철은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는데,[6] 김재규는 이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 차지철은 그의 강경한 태도가 박정희의 지지를 받으면서 쉽게 승리했고, 악화되는 상황을 김재규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차지철이 박정희의 회의와 보고 일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중앙정보부의 보고는 오후로 밀려났다. 10월에는 김재규가 곧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는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사살했다. 살해 동기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차지철의 강경책이 채택되면서 김재규의 입지가 위협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이후, 김재규의 변호인이 항소심에서 동기의 하나로 “최태민씨의 의혹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사실이 밝혀졌다.[16] 실제로 최태민과 박근혜가 방에 들어가면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정보 보고를 했기 때문에 박정희가 두 사람을 불러 직접 질문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을 열렬히 옹호했고, 최태민은 ‘우리는 영적인 가족이나 부부와 같은 사이이며, 육체적인 추잡한 이야기는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정보를 올리려면 제대로 해라’라고 말했다.[17]
3. 2. 암살 실행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했다. (10.26 사태)[2]김재규의 살해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박정희의 측근인 차지철의 강경책이 채택되면서 김재규의 입지가 위협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0]
암살 당일, 박정희와 수행원들은 사평천 댐 준공식과 당진 KBS TV 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관할인 TV 송신소 준공식에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차지철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헬리콥터에 타는 것을 막아 불참했다.
이후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연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중앙정보부 국장 박선호에 따르면, 한 달 평균 열 번의 연회가 있었다. 연회는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그리고 가수 심수봉과 대학생 신재순이 참석했다.[5] 김재규는 연회 소식을 듣고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안가로 초대하고, 중앙정보부 부국장 김정섭과 인근 건물에서 식사하도록 준비했다. 저녁 식사 직전,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차지철을 제거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김계원은 김재규의 말을 오해하거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만찬 중 부산 시위와 야당 대표 김영삼 등 정치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차지철은 강경한 입장을, 김재규는 온건한 조치를 촉구했고, 김계원은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박정희는 시위대와 김영삼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다며 김재규를 질책했다. 차지철은 중앙정보부가 위기를 종식시키지 못했다며 시위대와 야당 의원들을 "탱크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질책에 김재규는 격분하여 측근들과 "참모총장과 부국장도 와 있다. 오늘이 그 날이다."라고 말하며 거사를 결심했다. 박정희가 표적에 포함되는지 묻자 김재규는 그렇다고 답했다.[7] 김재규는 발터 PPK 권총을 들고 방에 들어와 차지철의 팔에 총을 쏜 후 박정희의 왼쪽 가슴에 총을 쏘았다. 총이 걸리자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쳤고, 김재규는 부하의 총으로 차지철의 복부와 박정희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첫 발포 소리에 박선호는 대기실 경호원들을 제압하고, 박흥주 대령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부엌의 경호원들을 사살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차지철, 대통령 경호원 3명, 대통령 운전기사가 사망했다.[2]
4. 논란과 의혹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대한민국에서는 일시적인 정신착란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암살자라는 평가와 18년간 이어진 군사 독재 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화 운동가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10·26 사건(박정희 암살 사건)의 진상과 동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2]
2004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이 민주화에 기여했는지 여부를 논의했으나, 전두환의 쿠데타 및 이후 독재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어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18]
2012년 인터뷰에서 민주화운동가이자 신부인 함세웅은 "김재규는 우리 민족 전체의 은인이다. 33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과 역사가들이 김 부장의 진의를 깨닫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19]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이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그의 묘소에 헌화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의 명예회복을 내세운 어떤 단체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공원에 있는 박정희 동상 옆에 김재규의 흉상을 세우겠다며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20] 2004년 당시 재평가에 반대했던 역사학자 한홍구는 2013년에 김재규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와 함께 "보수우익 의사"로 분류하며 "김재규의 의거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여성 연예인이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일만큼은 확실히 사라졌다"고 평가했고,[21] 2016년에는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최선을 다해 최태민을 막으려 했다"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20]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전 국회의원 이철은 "10·26 의사 38주기 합동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청학련 사건 이후 김재규가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등학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매우 옳은 일을 했다.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을 전하며 김재규를 추모했다.[22]
박정희를 살해한 후,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기다리고 있던 인근 중앙정보부 건물로 갔다. 정승화는 총소리를 듣고 중앙정보부 차장 김정섭과 상황을 논의하던 중, 김재규로부터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박정희가 사망했다고 알렸지만,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계원이 쿠데타를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승화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김재규와 공모자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본부로 가지 않은 것을 결정적인 실수라고 평가한다.[2]
1979년 12·12 사태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경위를 보고받은 정승화의 명령으로 김재규를 체포하고 사건을 조사했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과의 면담이라는 명목으로 육군본부 밖 외딴 곳으로 유인된 후 체포되었다. 결국 암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나중에 처형되었다.[2] 김재규 자신은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을 당했다.[2]
김재규는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의 산비탈 묘지에 묻혀 있다. 2020년 5월 26일, 김재규의 유족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는데, 그 이유는 원래의 수사와 재판이 불법이었고 김재규가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8]
4. 1. 암살 동기를 둘러싼 논쟁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10·26 혁명의 목적을 다섯 가지로 밝혔다. 첫째, 자유민주주의 회복, 둘째, 국민들의 희생 방지, 셋째, 적화 방지, 넷째, 미국과의 관계 회복, 다섯째, 독재 국가 이미지 개선 및 국제 사회에서 명예 회복이었다.[30]김재규는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면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승만과 달리 박정희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고, 박정희도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려 사형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누가 대통령을 사형시키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암살을 실행했다고 주장했다.[30] 하지만 차지철과의 분쟁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급조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30]
그러나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행동, 그리고 미국의 기록을 보면 김재규가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김재규는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10·26 이전에도 서너 차례 대통령 시해 준비를 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고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31]
박정희 독재 시절, 김재규는 1964년 한일 조약 반대 시위 진압에 참여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군대를 민간인 체포에 개입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경찰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는 이야기도 있다.[1] 그는 하나회 결성에 반대하고 이를 사병(私兵)으로 비판했다.[1]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 김재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그의 부하 장교들이 증언했다.[2] 체포 후 김재규는 서예로 7년 만에 결심을 이루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유신헌법이 그를 박정희에게서 돌아서게 한 계기임을 시사한다. 그는 박정희를 구금하고 사퇴를 강요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2]
김재규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 장준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준하는 김재규를 언젠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일할 애국적인 군인이라고 평가했다.[3] 김재규는 장준하의 의문사 이후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고, 중앙정보부장이 된 후에는 장준하의 죽음에 정권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밝혔다.[3]
김수환 추기경에 따르면, 김재규는 정치적 위기 때마다 그를 찾아왔다. 1975년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박정희와 만나 유신헌법 개정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만이 박정희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대화가 성과 없이 끝나자 실망했다.[2]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 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을 명령했고, 김재규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김영삼의 제명은 신민당 의원 전원 사퇴와 미국 대사 소환으로 이어졌다.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하자, 김재규는 시위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민중봉기”와 같다고 판단했다. 그는 박정희에게 시위가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박정희는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는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했다. 살해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부마항쟁 대응 과정에서 차지철의 강경책이 채택되면서 김재규의 입지가 위협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재규는 10월 28일 전두환에 의해 체포되었고,[10] 1980년 1월 28일 사형 판결을 받고,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유언에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글이 있었다.[15]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의 변호인이 항소심에서 최태민 의혹을 박정희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실이 밝혀졌다.[16]
10·26 사건의 진상과 동기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김재규는 일시적 정신착란에 빠진 암살자라는 평가와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화 운동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2004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김재규의 암살이 민주화에 기여했는지 결론내리지 못했다.[18]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졌다. 그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묘소에 헌화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홍구는 2013년 김재규를 "보수우익 의사"로 분류했고,[21] 2016년에는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최선을 다해 최태민을 막으려 했다"고 평가했다.[20]
4. 2. 미국의 개입 의혹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42]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42]2011년 1월 18일,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43]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해는 특히 격동의 시기였다. 1978년 선거에서 언론, 자금, 모든 정부 기관을 완벽하게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1.1% 차이로 신민당(NDP)에 승리했다. 유신헌법으로 인해 박정희가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박정희의 민주공화당(DRP)은 계속 집권했다. 1979년 5월, 중앙정보부(KCIA)의 치밀한 움직임으로 더 유순한 후보인 이철승을 지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신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의 지도 아래 신민당은 유신헌법 폐지 전까지 박정희와 타협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강경 노선을 취했고, 특히 YH사건과 같은 여러 문제에서 정면으로 맞섰다. 강압적인 체포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의 살인적인 정권이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곧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희는 김대중과 같이 김영삼을 정치 무대에서 제거하려 했다. 1979년 9월, 중앙정보부는 신민당 의원 3명을 움직여 김영삼의 당수 선출을 법적으로 문제 삼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게 했고, 법원은 김영삼의 신민당 당수직 정지 명령을 내렸다.
정치적 긴장은 김영삼이 ''뉴욕 타임즈'' 기자 헨리 스톡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군사 독재와 한국 국민 중 하나를 선택하고 박정희 정권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을 명령했고, 이는 김재규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 사건이었다. 1979년 10월 3일, 김재규는 그러한 상황을 피할 방법을 찾고자 김영삼을 만났다. 김재규는 마지못해 김영삼을 “국가를 위해” 중앙정보부로 오라고 요청하며 박정희의 적개심이 제명이나 체포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며, 인터뷰에 오해가 있었다고만 말해달라고 간청했다. 김영삼이 거부하자 김재규는 그 일이 국가와 김영삼 자신, 그리고 박정희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다음 날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은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의 사퇴서 제출과 미국이 항의의 표시로 주한 미국 대사를 소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3. 김형욱 암살 지시 의혹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2005년 5월 26일,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44]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연수생 A는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갔고, 제3국인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낙엽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연수생 B는 제3국인 2명에게 100000USD를 지급하였다. 관저에서 연수생 A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이상열은 증거를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귀국한 A는 19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결과를 보고 받은 김재규는 A를 중앙정보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 원과 20만 원이 든 봉투 두 개씩을 지급하며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44][45]하지만 2020년 2월 3일 김재규의 셋째 동생 김정숙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자신이 아는 한 김재규가 관여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46]
5. 평가
10·26 사건(박정희 암살 사건)의 진상과 동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한국에서는 김재규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한쪽에서는 일시적인 정신착란에 빠진 암살자라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18년간 지속된 군사독재 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화 운동의 애국자라고 평가한다.
2004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이 민주화에 기여했는지 여부를 논의했으나, 전두환의 쿠데타와 이후 독재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어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18]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이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그의 묘소에 헌화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어떤 단체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공원에 있는 박정희 동상 옆에 김재규의 흉상을 세우겠다며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20]
5. 1. 긍정적 평가
함세웅 신부는 "우리 시대 가장 큰 희생자는 김재규 부장이다. 김재규 부장이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확인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이는 언론에서 민주 인권의 상징적 존재의 발언으로 보도되었다.[51]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매제인 오수춘 전 육군 중령은 김재규가 간첩사건을 조작하던 전임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며, '동백림 사건' 같은 종류의 '한 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밝혔다.[37]신군부는 김재규를 패륜아로 만드는 언론 보도 관제(검열 및 대응) 프레임을 진행했다.[53] 김재규의 여동생 김단희는 언론에 '(부마항쟁 등에) 민란이 일어나면 대통령 가족들을 그냥 두겠느냐, 박근혜와 (박정희) 아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내쫓기는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김재규가 안타까워했었다고 전했다.[54] 10·26 쿠데타(박정희 암살 사건)의 진상과 동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한국에서는 일시적인 정신착란에 빠진 암살자라는 평가와 18년간 지속된 군사독재 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화 운동의 애국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2004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이 민주화에 기여했는지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전두환의 쿠데타 및 이후 독재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어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18] 민주화운동가이자 신부인 함세웅은 2012년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우리 민족 전체의 은인이다. 33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과 역사가들이 김 부장의 진의를 깨닫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19]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이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그의 묘소에 헌화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의 명예회복을 내세운 어떤 단체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공원에 있는 박정희 동상 옆에 김재규의 흉상을 세우겠다며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20] 2004년 당시 재평가에 반대했던 역사학자 한홍구는 2013년에 김재규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와 함께 "보수우익 의사"로 분류하며 "김재규의 의거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여성 연예인이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일만큼은 확실히 사라졌다"고 평가했고,[21] 2016년에는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최선을 다해 최태민을 막으려 했다"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20]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철(李哲, 1948년) 전 국회의원은 "10·26 의사 38주기 합동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청학련 사건 이후 김재규가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등학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매우 옳은 일을 했다.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을 전하며 김재규를 추모했다.[22]
5. 2. 부정적 평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89년 5월 19일 TV방송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정보부장이라는 높은 자리를 받았음에도 유신에 대해 나쁘게 생각했다면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 배신을 하는 것은 패륜이라고 말했다.[55] 10·26 쿠데타(박정희 암살 사건)의 진상과 동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한국에서는 일시적인 정신착란에 빠진 암살자라는 평가와 18년간 지속된 군사독재 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화 운동의 애국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2004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이 민주화에 기여했는지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전두환의 쿠데타 및 이후 독재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어 최종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18]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이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그의 묘소에 헌화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의 명예회복을 내세운 어떤 단체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공원에 있는 박정희 동상 옆에 김재규의 흉상을 세우겠다며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20]
5. 3. 중립적 평가
10·26 사건(박정희 암살 사건)의 진상과 동기는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김재규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하나는 일시적인 정신착란 상태에서 암살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18년간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을 종식시킨 민주화 운동의 애국자라는 평가이다.2004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이 민주화에 기여했는지 여부를 논의했지만, 전두환의 쿠데타와 이후 독재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어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18]
민주화운동가이자 신부인 함세웅은 2012년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우리 민족 전체의 은인이다. 33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과 역사가들이 김 부장의 진의를 깨닫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19]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이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그의 묘소에 헌화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어떤 단체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공원에 있는 박정희 동상 옆에 김재규의 흉상을 세우겠다며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20] 특히 2004년 당시 재평가에 반대했던 역사학자 한홍구는 2013년에 김재규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와 함께 "보수우익 의사"로 분류하며 "김재규의 의거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여성 연예인이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일만큼은 확실히 사라졌다"고 평가했고,[21] 2016년에는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최선을 다해 최태민을 막으려 했다"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20]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철 전 국회의원은 "10·26 의사 38주기 합동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청학련 사건 이후 김재규가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등학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매우 옳은 일을 했다.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을 전하며 김재규를 추모했다.[22]
6. 재심 논의
2020년 5월 26일, 김재규의 유족은 서울고등법원에 10·26 사건 재심을 청구했는데, 그 이유는 원래의 수사와 재판이 불법이었고 김재규가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김재규의 여동생이 재심 청구를 한 지 4년 만인 2024년 4월 17일에 심리가 예정되어 있다.[56]
7. 기타
- 1979년에 "자유민주주의, 민주정도"라고 휘호했다.[22]
- 친족에 따르면, 김재규의 묘비는 친박정희·박근혜계 인사들에 의해 파괴된 적이 있다.[22]
- 박근혜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 재판관 이정미는 인터뷰에서, 원래 꿈은 수학 교사였지만, 대학 입시를 앞둔 시기에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법학부 진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23]
; 영화
; 텔레비전 드라마
참조
[1]
라디오
Sound of Seoul, Reevaluation of Kim Jae-kyu Who Shot the Heart of Yushin
Sound of Seoul
2011-05-19
[2]
TV
Why Did Kim Jae-kyu Shoot? ''Now We Can Tell the Story''
MBC TV
2004-04-04
[3]
TV
Jang Jun-ha, Part 2, ''Modern History in Biography''
KBS 1 TV
[4]
간행물
South Korean Workers in the Middle East
Middle East Research and Information Project(MERIP) Reports
1977
[5]
TV
Why Did Kim Jae-kyu Shoot? ''Now We Can Tell the Story''
MBC TV
2004-04-04
[6]
TV
Cha Ji-chul: "The President Is the State", ''Modern History in Biography''
KBS 1 TV
[7]
TV
People of Gungjeong-dong, ''Now We Can Tell the Story''
MBC TV
[8]
뉴스
Family of Park Chung-hee's assassin requests retrial
http://english.hani.[...]
The Hankyoreh
2020-05-27
[9]
뉴스
김재규家 10·26과 '기이한 인연'…작년사망 모친기일과 겹쳐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02-10-25
[10]
웹사이트
김재규(金載圭)
https://encykorea.ak[...]
2023-08-13
[11]
웹사이트
스카이데일리, 김재규 압박 ‘반짝 사육신’…묘 앞에 65억 빌딩
https://www.skyedail[...]
2016-05-28
[12]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7-23
[13]
뉴스
유신의 심장 쏘았던 '김재규'를 평가한다
http://www.amn.kr/su[...]
서울의 소리
2011-05-14
[14]
뉴스
<장관열전>6.李鍾贊국방-군의 정치중립 실천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1994-04-10
[15]
웹사이트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https://www.ohmynews[...]
2020-06-27
[16]
웹사이트
「韓国のラスプーチン」朴槿恵大統領を陰で操る謎の女性・崔順実氏とは?
https://www.huffingt[...]
ハフィントンポスト
2016-11-16
[17]
뉴스
「[インタビュー]「崔太敏が朴正煕の死を予告して以来、朴槿恵が一層信じるようになった」」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ニュース
[18]
웹사이트
김재규에게 ‘민주화 훈장’을 달아줄 것인가
https://h21.hani.co.[...]
2004-08-11
[19]
웹사이트
함세웅 신부, “김재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은인”
http://www.mediatoda[...]
2012-08-31
[20]
웹사이트
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
https://m.khan.co.kr[...]
2016-12-17
[21]
웹사이트
김재규는 보수우익계의 마지막 대륙형 인간
https://www.hani.co.[...]
2013-05-17
[22]
웹사이트
10.26의 의인들, 김재규장군 재평가 받아야,. 젊은이들 사이 관심 높아
https://www.newsfree[...]
2018-05-24
[23]
웹사이트
박근혜ㆍ이정미의 연결고리 김재규…‘소름돋는 인연’
http://biz.heraldcor[...]
2017-03-14
[24]
논문
인간 김재규와 10ㆍ26에 대한 재인식
https://korea.inha.a[...]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1-11
[25]
웹인용
김재규 (金載圭)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2-28
[26]
뉴스
김재규 "유신헌법은" 재판관 "그만하십시오"···10·26의 최후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6-01
[27]
뉴스
24일 사형 당한 '박정희 시해' 김재규, 하루전 조카에게 한 말은
https://www.asiae.co[...]
아시아경제
2017-05-25
[28]
웹인용
친동생이 바라본 박정희 살해범 '김재규'
http://sagunin.com/1[...]
사건의내막
2017-05-26
[29]
TV
101호 작전
SBS
2021-04-22
[30]
뉴스
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https://news.naver.c[...]
주간경향
2005-11-04
[31]
웹인용
[10·26 40주년]① 궁정동의 총소리…엇갈리는 평가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9-10-25
[32]
논문
박정희 정부의 NPT 가입 요인 분석
https://s-space.snu.[...]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8
[33]
뉴스
“박정희, 핵무기 공개 뒤 하야하려 했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0-11-08
[34]
뉴스
김형욱 “난 부자 아니다” … 씨티은행 “재산 2000만 달러”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5-06-12
[35]
뉴스
[오래전 '이날']8월28일 박정희 '배신'한 김형욱의 무죄
https://www.khan.co.[...]
경향신문
2016-08-28
[36]
뉴스
김형욱씨 재산 몰수 부당, 가족에 300억대 반환판결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98-01-23
[37]
뉴스
박근혜 탄핵 마주한 김재규 일가의 반응 뉴욕거주 김재규매제 오수춘 박사 단독 인터뷰
https://sundayjourna[...]
선데이저널
2016-12-15
[38]
방송
1114회 최순실 재산, 또다시 대물림되는가
http://playvod.imbc.[...]
MBC
2017-01-24
[39]
웹인용
친동생이 바라본 박정희 살해범 '김재규'
http://sagunin.com/1[...]
사건의내막
2017-05-26
[40]
웹인용
“수십년 ‘정치군인’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은 건 기적”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5-12-06
[41]
웹인용
“軍에 법을 무시하는 오점 남겨”
https://www.sisajour[...]
시사저널
1990-01-21
[42]
서적
www.한국현대사.com
김진국, 민연
2000
[43]
웹사이트
http://www.newdaily.[...]
[44]
뉴스
김재규 지시로 파리근교서 김형욱 권총살해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5-05-26
[45]
뉴스
김재규 지시로 김형욱 살해했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5-05-26
[46]
뉴스
'남산의 부장들' 본 김재규 유족 "폄하도 미화도 원치 않는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2-04
[47]
뉴스
“김형욱은 내가 죽였다”
http://www.sisajourn[...]
시사저널
2005-04-11
[48]
뉴스
[추적] 10·26 직전 金載圭가 朴正熙 생일 선물로 준비한 2만 달러짜리 파텍 필립 시계의 행방
http://monthly.chosu[...]
㈜조선뉴스프레스
2005-03
[49]
뉴스
[단독]‘10·26’ 김재규 사진, 출신 부대 다시 건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9-05-02
[50]
뉴스
5공, 핵개발 포기
https://news.kbs.co.[...]
KBS
1995-10-05
[51]
방송
244회 '극비해제' 10.26과 전두환!
http://tv.jtbc.joins[...]
JTBC
2019-05-28
[52]
영상
2부 잊혀진 영웅들
https://busanmbc.co.[...]
부산MBC
2019-04-29
[53]
방송
244회 '극비해제' 10.26과 전두환!
http://tv.jtbc.joins[...]
JTBC
2019-05-28
[54]
뉴스
"박근혜 아꼈던 우리 오빠를 패륜아로 부르다니..."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5-27
[55]
뉴스
뉴스타파 26회 시선 - "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전문]
https://newstapa.org[...]
뉴스타파
2012-09-14
[56]
뉴스
‘10·26 사건’ 김재규 재심 여부 다음 달 심리…청구 4년만
https://news.kbs.co.[...]
KBS
2024-03-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