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 세이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카노 세이고는 후쿠오카 출신의 정치 평론가이자 정치가로, 범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며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질서 구축을 주장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중의원 의원을 8번 역임했다. 1930년대에는 파시즘에 경도되어 동방회를 결성하고,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을 방문하여 무솔리니, 히틀러와 회담을 갖기도 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과 대립하다가 1943년 할복 자살했다. 그의 사상은 일본의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3년 자살 - 한스 예쇼네크
한스 예쇼네크는 독일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공군 참모총장으로서 주요 작전을 지도했으나 전략적 판단에 대한 비판 속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1943년 자살 - W. S. 밴다이크
W. S. 밴다이크는 "원 테이크 우디"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MGM 스튜디오의 전성기를 이끌고, 《더 씬 맨》, 《샌프란시스코》 등의 작품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미국의 영화 감독이다. - 일본의 파시스트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일본의 파시스트 -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일본 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하고 군사혁명을 통한 국가 개조를 주장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그의 사상은 2·26 사건에 영향을 미쳤으며, 진보적인 면모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 2·26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당했다. - 일본의 자살한 사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의 소설가로, 단편 소설을 주로 썼으며 《라쇼몽》, 《코》, 《지옥변》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 심리와 윤리 문제를 다루며 일본 근대 문학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업적을 기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이 제정되었다. - 일본의 자살한 사람 - 후루오야 마사토
후루오야 마사토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극단에서 연극 배우로 데뷔하여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나, 경제적 어려움과 가정 불화로 자살한 일본의 배우이다.
나카노 세이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인물 정보 | |
이름 | 나카노 세이고 (中野 正剛) |
출생 | 1886년 2월 12일 |
출생지 | 후쿠오카현후쿠오카시 니시미나토마치 |
사망 | 1943년 10월 27일 (향년 57세) |
사망지 | 도쿄도시부야구 요요기혼마치 |
국적 | 일본 |
학력 |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졸업 |
직업 | 언론인, 정치인 |
배우자 | 나카노 타미코 |
묘소 | 다마 영원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구락부 (→) 혁신구락부 (→) 헌정회 (→) 입헌민정당 (→) 국책연구클럽 (→) 국민동맹 (→) 동방회 (→) 무소속 (→) 익찬정치회 (→) 무소속 |
선거구 | 후쿠오카현 제1구 |
당선 횟수 | 7회 |
임기 시작 | 1920년 5월 10일 - 1939년 4월 11일 |
임기 시작 | 1942년 4월 30일 |
임기 종료 | 1943년 10월 27일 |
소속 위원회 | 해당 사항 없음 |
의원회관 | 해당 사항 없음 |
주요 직책 | |
직책 | 동방회 총재 |
임기 시작 | 1936년 5월 25일 |
임기 종료 | 1943년 10월 27일 |
서훈 | |
훈장 | 훈4등서보장 |
2. 생애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에서 태어나 후쿠오카현 슈유칸과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슈켄칸에서 오가타 다케토라와 만났으며, 이후 와세다 대학과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서 함께 일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미야케 세쓰레이의 《일본 및 일본인》(日本及日本人일본어)에 글을 기고하면서 겐요샤의 우익 인사 도야마 미쓰루, 다롄에서 활동하던 가네코 셋사이 등과 교류했다.[3]
1909년 와세다 대학 졸업 후, 동문 가자미 아키라(風見 章일본어) 등과 함께 도쿄 니치니치 신문을 발행하는 닛포샤(日報社일본어)에 입사했다가 아사히 신문으로 옮겼다. 아사히 신문에서는 "융만마"(戎蛮馬|유반바일본어)라는 필명으로 《조야(朝野)의 정치가》, 《메이지 민권사론》 등 정치 평론을 썼다. 1913년 도야마 미쓰루와 고지마 가즈오의 중매로 미야케 세쓰레이의 딸 다미코와 결혼했다. 1916년 아사히 신문에서 퇴사하고 도호지론샤(동양평론) 신문으로 옮겨 사장 겸 주필이 되었다.[9]
19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1920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이후 8번 재선되었다. 헌정회,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등에서 활동하며, 입헌민정당 시절에는 당 유세부장으로서 나가이 류타로와 함께 임시군사비 문제나 장쭤린 폭살 사건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 제기했다.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는 미키 다케키치의 후임으로 대장참여관과 체신차관을 지냈다.[17] 이후 거국일치내각을 주장한 친군파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과 함께 민정당을 탈당하고 국민동맹을 결성했으며, 1936년에는 히가시 노리마사와 도호카이("극동 협회")를 결성해 총재가 되었다.[22]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을 방문하여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와 회견했다.
1939년 의회 정치의 부정과 정당 해체를 주장하며 중의원 의원을 사직했다. 남진론과 독일·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을 지지하며 격영동아민족회의(撃栄東亜民族会議|게키에이 도아민조쿠카이기일본어)를 개최했다. 1940년 대정익찬회 총무가 되었으나,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여 1942년 탈퇴했다. 1943년 정월 아사히 신문에 "전시 재상론"을 발표하여 도조 내각을 비판했다.
1943년 10월 27일 자택 1층에서 할복 자살했다. 자결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2. 1. 초기 생애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에서 나카노 진타로(中野 甚太郎)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무사 가문 출신으로 전당포를 운영하던 아버지 나카노 타이지로와 어머니 나카노 토라 사이의 장남이었다.[3] 형제로는 남동생 둘(타이스케, 히데토)과 여동생 둘(테루, 무라)이 있었다.5세부터 14세까지 초등학교를 다닌 후 후쿠오카현 슈유칸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총명한 학생으로 알려졌다. 슈유칸에서는 유도에 열중했으나, 1학년 때 다리 부상으로 1년 유급하여 군 입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4] 이 무렵 학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사카타'라는 필명을 사용했고, '신무관'이라는 학생 무술 센터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1903년에는 "전당포의 진타로"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세이고(正剛)로 개명했다.[33]
1905년 4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면서,[5] 학비 마련을 위해 잡지 ''일본 및 일본인''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잡지 소유주인 미야케 세츠레이를 알게 되었다. 또한 비밀 초국수주의 단체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비록 겐요샤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1909년 7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2. 2. 언론인 활동
1909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니치니치 신문을 거쳐 아사히 신문에 입사했다. 아사히 신문에서는 "융만마"(戎蛮馬, 유반바)라는 필명으로 정치 평론을 연재하며 정치 저널리스트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6]다이쇼 정국이 시작되자 가쓰라 다로 내각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썼고, 1913년에는 책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러나 신문 경영진과 갈등을 빚었고, 같은 해 한국으로 전출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기도 했다.[7]
신해 혁명 당시에는 혁명가들을 지지하며 쑨원을 만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서구 열강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고,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8]
1916년 아사히 신문을 퇴사하고 도호지론샤(동양평론) 신문으로 옮겨 사장 겸 주필이 되었다.[9] 도호지론샤를 통해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대중국 21개조 요구를 비판하고, 1918년 쌀 소동을 지지하는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펼쳤다.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며, 영미 블록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다.[10] 1919년에는 베르사유 조약 평화 회의를 취재하기도 했다.[11]
2. 3. 정치 입문
19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후보했다가 낙선했지만, 1920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8번 재선되었다. 헌정회,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등에서 활동했다. 입헌민정당 시절에는 당 유세부장으로서 나가이 류타로와 함께 임시군사비 문제나 장쭤린 폭살 사건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 제기했다.[14]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미키 다케키치의 후임으로 대장참여관, 체신차관을 지냈다.[17]1917년, 후쿠오카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20년, 도호지론샤에서의 활동으로 얻은 명성과 흑룡회의 지지, 확대된 선거인단의 도움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무소조쿠 클럽(무소속 클럽), 카쿠신 클럽(개혁 클럽)에 가입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2]
1924년, 아다치 겐조 파벌과 연대하며 켄세이카이에 입당했다.[12] 1927년에는 입헌민정당 창당에 기여했고, 당무 국장, 선거 운동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15][16]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황고둔 사건으로 몰락한 후, 하마구치 오사치 아래 입헌민정당 내각이 구성되었고, 나카노는 통신 차관으로 임명되었다.[17]
2. 4. 파시즘 경도
1930년대 초, 대공황과 만주 사변을 겪으며 나카노는 세계와 기존 체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강력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세이유카이와 민세이토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아다치 겐조와 함께 민정당을 탈당하고 국민동맹을 결성했다.[19] 나카노는 '전환기 일본의 동향'(Tenkan Nihon no Dōkō)이라는 팸플릿에서 일당 독재 국가를 지향하고, 자유방임주의 경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했다. 1933년 '국가 개조 계획 강령'(Kokka Kaizō Keikaku Kōryō)에서는 조합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국민동맹은 "통제 경제" 수립을 요구했다.[19] 만주국 승인을 옹호하기도 했다.[20]
그러나 국민동맹 활동 기간은 짧았다. 아다치가 당의 제복인 검은 셔츠 착용을 거부하고 오카다 내각을 지지하는 등 갈등이 있었다.[21] 1936년 5월, 나카노는 도호카이("극동 협회")를 결성했다.[22]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을 방문하여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와 회견했다. 1939년에는 의회 정치의 부정과 정당 해체를 주장하며 중의원 의원을 사직했다. 남진론과 삼국 동맹을 지지하며, 1940년 대정익찬회 총무가 되었으나,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여 1942년 탈퇴했다.
2. 5. 도조 히데키와의 대립과 자살
도조 히데키 내각이 들어선 후, 일본을 전체주의 사회로 만들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더욱 강해졌다. 1942년 총선에서 나카노 세이고는 의원직을 되찾았지만, 정부는 대정익찬회를 일본의 유일한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전의 대정익찬회는 정치 조직이 아니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개혁된 동방회(Tōhōkai)는 해산되고, 비정치적 문화 단체인 동방지계(Tōhō Jikai)로 다시 만들어졌다.[27] 1942년 선거 결과는 나카노에게도 실망스러웠는데, 그는 총 46명의 후보를 내세워 20명의 당선을 기대했지만, 자신을 포함해 7명만이 성공했다. 그는 대정익찬회가 결성된 후 이에 합류했다.결국 나카노는 도조 히데키와 대정익찬회 모두를 강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그는 이 정당이 관료주의의 도구가 되어 국민 위에 독재를 확립하려 하며, 민의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도조를 폭군이라고 불렀다.[28] 나카노가 도조에게 분노한 이유 중에는 관료주의가 주도하는 가혹한 경제 통제 체제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쇠퇴가 있었다.
진주만 공격 전에 나카노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영토로의 확장을 강하게 지지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경우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거나, 영국의 경우 독일과의 분쟁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쉽게 점령하고 해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은 나카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29]
와세다 대학에서 나카노는 "개인으로 세상을 번영시킨다"(''천하일인을 가지고 일어난다, Tenka Ichinin o Motte Okoru'')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관료주의를 비판하면서, 일본의 최근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그는 또한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잘 알려진 일본 자유주의자들과 광범위한 의미의 일본 자유주의를 칭찬하며, 이를 영미 자유주의와 대비시켰다. 이러한 비판은 그에게 더 큰 정부의 압력을 가져왔다. 나카노는 기사 게재나 공개 연설을 금지당했다. 1943년 6월, 나카노는 한 의원의 제명 문제로 대정익찬회에서 사임했다.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나카노는 도조 내각을 무너뜨리는 데 힘쓰려 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기획원의 간부였던 타나베 타다오, 마츠마에 시게요시, 하토야마 이치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등과 접촉했다. 궁극적으로 나카노는 원로들을 설득하여 도조를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우가키 가즈시게 장군을 임명할 계획을 세웠다. 그 후 도조 추종자들을 육군과 정부에서 숙청하고, 경제를 합리화하여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미국을 평화 회담으로 이끌려고 했다.[30]
도조 내각이 더 강력한 경제 통제 계획을 발표했을 때, 나카노를 의회에서 제거하려는 의도로 10월 21일 나카노와 100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구금된 동안 나카노는 정부에 대한 유해한 소문을 퍼뜨린 것을 자백했다. 그러나 이 자백만으로는 그를 법적으로 구금하고 10월 26일의 의회 출석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카노는 다음 날 의회에 출석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서명하고 25일에 풀려났다.[22] 하지만, 그는 다시 집으로 보내지기 전에 잠시 ''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다.
1943년 10월 27일, 나카노 세이고는 자택 1층 서재에서 할복 자살했다. 옆방에는 망을 보는 헌병 2명이 쉬고 있었다. 자결의 이유는 아직 불명이다. 나카노는 잇따라 아들을 잃었고, 그 때문에 남은 아들을 매우 귀여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살의 원인으로, 일설에는 징병되었던 아들의 "안전"과의 교환 조건이었다고도 한다.[39] 그 외에도, 그전까지 경찰의 취조에도 굴복한 적이 없었음에도 헌병의 협박에는 굴복한 것을 굴욕으로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 자신이 행한 히가시쿠니노미야의 수상 추대 공작에 대해, 도조 측에 조사 공격을 받음으로써, 황족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 또한 전후 라디오 프로그램 『진상은 이렇다』는, 나카노는 도조 암살 계획에 관여하고 있어, 그 발각으로 인해 도조 측으로부터 자결을 강요받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일 뿐이라고 협박받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40] (사건 당시 집에 가족도 있었고, 나카노는 스스로 가족에게 칼을 준비시켰지만 평정했고, 가족에게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진상은 이렇다』에서는, 도조 측이 나카노에게 "너는 무사다", "그러므로 자결의 기회를 주겠다",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적당히 처리할 것이다"라고 협박하여 자결하게 하고, 헌병을 붙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설의 근거로, 당시 도쿄 헌병대장이 "나카노를 죽인 것도 나다"라고 술에 취해 자랑했다는 이야기를 든 사람도 있다.[41].)
자결 직전에 나카노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로부터 받은 액자를 떼어내고, 책상 위에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상과 『다이세이고 덴』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자결 몇 시간 전, 넷째 아들 야스오에게 "천 리의 눈을 다하고자 더욱 높은 누각에 오른다"라고 색지에 써서, 헌병 앞에서 건네주고 있다. 유서에는 "나는 일본을 보면서 성불하겠다. 슬퍼하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묘소는 다마 영원이다.[42]
3. 사상과 신념
나카노 세이고는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출신으로, 슈켄칸과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학창 시절 오가타 다케토라와 교류했으며, 미야케 세쓰레이의 《일본 및 일본인》(日本及日本人일본어)에 글을 기고하며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 등 우익 인사들과도 인연을 맺었다.[19]
대학 졸업 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융만마"(戎蛮馬|유반바일본어)라는 필명으로 정치 평론을 기고했다. 1913년에는 미야케 세쓰레이의 딸과 결혼했다.[19] 1917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1920년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후 8번 재선되었다. 헌정회,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등 여러 정당을 거쳤으며, 민정당 시절에는 다나카 기이치 내각을 비판하고,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대장참여관과 체신차관을 지냈다.
1936년 히가시 노리마사와 도호카이를 결성하여 총재가 되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을 방문하여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와 회견했다. 1939년에는 의회 정치를 부정하며 중의원 의원을 사직하고, 남진론과 삼국 동맹을 지지했다. 1940년 대정익찬회 총무가 되었으나,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여 1942년 탈퇴했다. 1943년 아사히 신문에 "전시 재상론"을 발표하여 도조 내각을 비판한 후, 경시청에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할복 자살했다.
나카노는 대공황과 만주 사변 등을 겪으며 세계와 기존 체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확신하고, 강력한 정부 수립과 조합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만주국 승인을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1915년 영국을 여행하면서 서구 열강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고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3. 1.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대공황과 만주 사변 등의 사건을 겪으며 나카노는 세계와 기존 체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강력한 정부 수립을 위해 세이유카이와 민세이토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아다치 겐조와 함께 국민동맹을 결성하고 민세이토를 탈당했다.[19]나카노는 '전환기 일본의 동향'(Tenkan Nihon no Dōkō)이라는 팸플릿에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 일당 독재 국가로 향하고 있으며, 영국식 의회 정치와 자유방임주의 경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했다. 1933년 '국가 개조 계획 강령'(Kokka Kaizō Keikaku Kōryō)에서는 조합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국민동맹은 "대중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통제 경제" 수립을 강령으로 내세웠다.[19] 나카노는 이시와라 간지와 같은 군인들과도 관계를 맺고 만주국 승인을 강력하게 옹호했다.[20]
그러나 국민동맹에서의 활동은 짧았다. 위기감이 약해지고 아다치가 당의 제복 착용을 거부하고 오카다 내각을 지지하면서 갈등이 생겼다.[21] 1936년 5월, 나카노는 도호카이("극동 협회")를 결성했다.[22] 1930년대 초, 나카노는 아내와 아들들을 잃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그는 국가적 위기감이 옅어지자 만주 사변과 같은 국제적 행동을 통해 일본의 국가 재건을 이룰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23]
3. 2. 범아시아주의
나카노 세이고는 1915년 영국을 여행하면서 서구 열강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고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본 것을 쇠퇴의 징후라고 믿었고, 1917년에는 정의와 자결을 설교하면서 식민지에서 억압을 지속하는 서구의 위선을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8]일본으로 돌아온 후, 도호지론샤(동양평론) 신문의 주필이 되어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대중국 21개조 요구를 비판하고, 일본의 중재를 통해 중국 북부와 남부 정부의 재통일을 지지했다.[10] 또한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인정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영미 블록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0]
1930년대, 대공황과 만주 사변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나카노는 세계와 기성 체제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조합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만주국 승인을 강력하게 옹호했다.[20]
3. 3. 전시 재상론
나카노 세이고는 아사히 신문에 '전시 재상론'을 발표하여 도조 히데키를 비판하고, 이상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했다.[18] 그는 강력한 리더십, 청렴성, 혜안 등을 강조하며 전시 상황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역설했다.[18]4. 평가와 논란
나카노 세이고는 뛰어난 웅변술과 정치적 카리스마, 사회 비판 능력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독선적이고 극단적인 면모도 보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1]
4. 1. 긍정적 평가
나카노 세이고는 뛰어난 웅변술과 정치적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사회 비판 능력 또한 뛰어나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오가타 다케토라는 나카노에 대해 "한 번 생각에 몰두하면 귀신에 씌인 것 같다"고 평가했으며, 기요세 이치로 또한 "항상 오르되브르만 먹고 맛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나가 버린다. 결코 디저트 시간까지 자리에 있지 않는다"는 비슷한 평가를 남겼다.
나카노는 자택에서 여러 학생들을 기거시키며 식사와 학비를 지원했다. 서생 중 한 명인 하세가와 슌(후에 노동상 및 운수상 역임)에게 정원의 참새 떼를 가리키며 "저 참새에게 밥그릇의 밥알을 나눠줘도 별일 아니지만, 참새는 배를 채우고 하늘로 날아간다. 너희들도 여기에서 마음껏 날아올라라"는 따뜻한 말을 전했다는 일화가 있다.
4. 2. 부정적 평가
오가타 다케토라는 나카노 세이고에 대해 "한 번 생각에 몰두하면, 귀신에 씌인 것 같다"고 평가했으며, 기요세 이치로는 "항상 오르되브르만 먹고, 맛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나가 버린다. 결코 디저트 시간까지 자리에 있지 않는다"고 평가했다.[1] 이는 나카노 세이고의 독선적이고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5. 관련 인물
미야케 세쓰레이의 잡지 《일본 및 일본인》에 글을 기고하면서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와 알게 되었다.[3] 1913년에는 도야마 미쓰루와 고지마 가즈오의 중매로 미야케 세쓰레이의 딸 다미코와 결혼했다.[7]
도조 히데키가 독재 색채를 강화하자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1943년 11월 10일에는 와세다 대학 오쿠마 강당에서 "천하의 한 사람으로 흥한다"라는 연제로 도조를 탄핵하는 대연설을 하기도 했다.[36] 결국 나카노는 1943년 10월 27일 자택에서 할복 자결했다.[39]
5. 1. 미야케 세쓰레이
나카노 세이고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미야케 세쓰레이의 잡지 《일본 및 일본인》에 글을 기고했다.[3] 이 일로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와 알게 되었다.[3] 1913년에는 도야마 미쓰루와 고지마 가즈오의 중매로 미야케 세쓰레이의 딸 다미코와 결혼했다.[7]5. 2. 도야마 미쓰루
나카노 세이고는 겐요샤의 유력 인사인 도야마 미쓰루와 알게 되었다.[5] 나카노는 겐요샤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도야마 및 단체와 관계를 유지했다.[5] 1913년에는 도야마 미쓰루와 고지마 가즈오의 중매로 미야케 세쓰레이의 딸 다미코와 결혼했다.5. 3.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독재 색채를 강화하자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1941년 3월, 도조의 권력 강화를 반대하기 위해 대정익찬회를 탈퇴했다.[22] 같은 해 5월 동방회 총재가 되었다. 1942년 4월 익찬선거에서도, 스스로 비추천 후보를 선택해 도조 수상에 항거했다. 동방회 후보자 46명 중 당선자는 나카노 외에 혼료 신지로 (와세다대 교수), 미타무라 타케오 등 7명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찬정치회에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최종적으로 호시노 나오키의 설득으로 겨우 정치회에 들어가는 것을 승낙했다.
1943년 11월 10일, 와세다 대학 오쿠마 강당에서 "천하의 한 사람으로 흥한다"라는 연제로 2시간 반에 걸쳐 도조를 탄핵하는 대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 학생들은 기립하여 교가 "도쿄의 서북"을 합창하며 화답했다. 연설회장에는 도조의 명을 받은 헌병대가 다수 있었고, 나카노의 연설을 도중에 제지하려 했지만, 나카노의 웅변과 청중의 흥분 열기는 너무나 굉장해서 제지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와세다 제일 고등학원의 학생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이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정치가의 길을 지망했다.[36]
나카노의 반(反) 도조 움직임은 더욱 고조되어, 1943년 정월, 아사히 신문 지상에 "전시 재상론"을 발표[37]하고, "난국 일본의 명재상은 절대 강해야 한다.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성실하고 근신하며 청렴하고, 게다가 기우가 광대해야 한다. 다행히, 일본에는 존귀한 황실이 있기 때문에, 다소 무능한 재상이라도 맡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도조 수상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기사의 내용에 도조는 격노하여, 아사히 신문에 대해 기사의 게재 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도조는 나카노의 이 논문이 기사가 되고 나서 읽었기 때문에, 이 게재 중지 명령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38]
같은 해 3월, 제81 제국 의회에서 전시 형사 특별법 심사를 둘러싸고, 6월, 제82 제국 의회에서 기업 정비 법안 심의를 둘러싸고 각각 정부 원안에 반대했다. 의회 내에서는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다케키치 등에게 호소하여, 의회에서 도조 내각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지만, 도조 측의 붕괴 공작에 의해 양 법안 반대 운동은 좌절되었다.
의회에서의 반(反) 도조 운동에 한계를 느낀 나카노는 고노에 후미마로나 오카다 게이스케 등 "중신 그룹"과 연계하여, 마츠마에 시게요시나 미타무라 타케오 등과 함께 도조 내각의 타도를 꾀했다. 나카노를 중심으로, 중신 회의 자리에 도조를 불러내어 전황 불리를 이유로 도조를 퇴진시키고 우가키 가즈시게를 후임 수상으로 세우려는 계획이 진행되어 우가키의 양해도 얻었으나, 일부 중신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중신 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그 후, 나카노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 탄생을 획책하는 전술로 전환했지만, 도조 측의 대응은 나카노의 예상 이상으로 빨랐다. 1943년 9월 6일, 미타무라 타케오가 경시청특고부에 신병이 구속되었다(나카노 세이고 사건). 경시청은 10월 21일에 동방 동지회(동방회가 개칭) 외 3단체 간부 100여 명을 신병 구속하는 가운데 나카노도 구속되었다. 도조는 매우 흡족했지만, 이 나카노의 신병 구속은 너무 강압적인 것으로 여론의 반발을 샀다. 결국, 나카노는 10월 25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 도조의 직접 지시를 받은 헌병대에 의해 자택 감시 상태에 놓였고, 그 후의 의회 결석을 약속받았다는 설이 있다.
같은 해 10월 27일 자택 1층 서재에서 할복 자결했으며, 옆방에는 망을 보는 헌병 2명이 쉬고 있었다. 자결의 이유는 아직 불명이다. 나카노는 잇따라 아들을 잃었고, 그 때문에 남은 아들을 매우 귀여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살의 원인으로, 일설에는 징병되었던 아들의 "안전"과의 교환 조건이었다고도 한다.[39] 그 외에도, 그전까지 경찰의 취조에도 굴복한 적이 없었음에도 헌병의 협박에는 굴복한 것을 굴욕으로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 자신이 행한 히가시쿠니노미야의 수상 추대 공작에 대해, 도조 측에 조사 공격을 받음으로써, 황족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 또한, 전후 라디오 프로그램 『진상은 이렇다』는, 나카노는 도조 암살 계획에 관여하고 있어, 그 발각으로 인해 도조 측으로부터 자결을 강요받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일 뿐이라고 협박받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40]
자결 직전에 나카노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로부터 받은 액자를 떼어내고, 책상 위에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상과 『다이세이고 덴』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자결 몇 시간 전, 넷째 아들 야스오에게 "천 리의 눈을 다하고자 더욱 높은 누각에 오른다"라고 색지에 써서, 헌병 앞에서 건네주었다. 유서에는 "나는 일본을 보면서 성불하겠다. 슬퍼하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6. 유산과 영향
나카노 세이고는 생전에 도조 히데키와 대립했으며 1942년 대정익찬회에서 탈퇴했다.[4] 1943년 정월에는 아사히 신문에 〈전시 재상론〉을 발표하여 도조 내각을 비판했다.[4] 1943년 10월 21일 경시청은 나카노를 비롯한 동방동지회(구 동방회) 회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가, 10월 25일 혐의 불충분으로 나카노를 석방했다.[4] 이틀 후인 10월 27일, 나카노는 자택에서 할복 자살했다.[4]
7. 저서
中野正剛일본어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11년 | 팔면봉 아침저녁의 정치가 | 박문관 | |
1913년 | 메이지 민권사론 | 유린당 | 1994년 위서방에서 재출간 |
1913년 | 칠금팔종 | 동아당 | |
1915년 | 내가 본 만선 | 정교사 | 1999년 고지마 신지 감수로 유마니 서방에서 재출간 |
1917년 | 세계 정책과 극동 정책 | 지성당 서점 | |
1919년 | 세계 개조의 거리에서 | 동방시론사 | |
1919년 | 강화 회의를 목격하고 | 동방시론사 | |
1921년 | 현실을 직시하고 | 선문사 | |
1921년 | 만선의 거울에 비추어 | 동방시론사 | |
1923년 | 러시아 승인론 | 동방시론사 | 1923년 3월 20일 중의원 연설 속기록 포함 |
1926년 | 中野正剛일본어 대 러시아 지론책집 | 아관사 | 오카노 류이치 편 |
1928년 | 다나카 외교의 참패 | 헤이본샤 | |
1929년 | 국민에게 호소 중노 세이 대연설집 | 헤이본샤 | |
1930년 | 국가 통제의 경제적 진출 | 헤이본샤 | |
1931년 | 침체된 일본의 갱생 | 치쿠라 서방 | |
1932년 | 전환 일본의 동향 | 치쿠라 서방 | |
1932년 | 일본의 동향 | 입헌경당회 | |
1932년 | 만주국 즉시 승인을 고조하다 | 도쿄 강연회 | 노구치 야스모토 편, 고마이 장관을 맞이하여 |
1933년 | 대만주국 건설에 대해 | 도쿄 강연회 | 고마이 씨를 맞이하여 |
1933년 | 국가 개조 계획 강령 | 치쿠라 서방 | 동방회 총서 제1집 |
1934년 | 제국의 비상시 절대로 해소되지 않는다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도쿄 니치니치 신문사 | 대매 강좌 1,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편 |
1935년 | 현상 붕괴의 과정과 적극 건전 정책의 제창 | 아관사 | |
1935년 | 일본 국민에게 격문 북지 풍운의 연막을 투과하여 | 아관사 | |
1936년 | 일본 확대 강화론 | 일본 강연 협회 | |
1936년 | 쇼와 유신과 관료 정부의 역할 | 슈코 서방 | |
1936년 | 전력 국영안에 대해 中野正剛일본어 씨 소신을 밝히다 | 전기 연합 통신사 | 전기 연합 통신사 편 |
1936년 | 위기선상의 일지 | 도쿄 니치니치 신문사・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 도쿠토미 소호, 中野正剛일본어, 다치바나 신량 공저 |
1936년 |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 오늘의 문제사 | |
1936년 | 中野正剛일본어 씨 대연설집 | 아사카제사 | 아사카제사 편집국 편 |
1937년 | 적극 확대주의의 위험성과 합리성 | 동대륙사 | |
1937년 | 일본은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육생사 | |
1938년 | 이·독 양 수뇌 등과의 시국 논쟁 | 일본 외교 협회 | |
1938년 | 혼을 토하다 | 금성당 | |
1938년 | 똑바로 가라 | 육생사 | |
1939년 | 전체주의 정책 강령 | 육생사 | 中野正剛일본어·스기모리 고지로 편저 |
1939년 | 대중국 국책의 근간을 논하다 | 동방회 서일본 지부 | |
1939년 | 시국 타개 국민 운동 강연 속기록 | 시국 해상 협의회 사무국 | |
1940년 | 난국 타개의 경륜 기원 2600년·일본 흥망의 갈림길 | 동대륙사 | |
1941년 | 일미 위기와 그 꿰뚫어 보기 | 신경제 정보사 | 정경 간담회 총서 제1집, 스에쓰구 노부마사, 中野正剛일본어 공저 |
1941년 | 동방회의 깃발은 나아간다 | 도쿄 강연회 출판부 | |
1941년 | 폭풍에 서는 일본의 정치 전략 | 도쿄 강연회 | |
1941년 | 난국 돌파의 지표 신체제 실천 강령 | 신동학사 | |
1941년 | 새로운 정치의 방향 | 동방회 선전부 | 개정판 |
1941년 | 루즈벨트, 처칠에게 답하고 일본 국민에게 고함 | 동방회 선전부 | |
1942년 | 세계 유신의 폭풍에 서다 | 동방회 | |
1942년 | 전쟁에 이기는 정치 | 동방회 | |
1942년 | 이 한 판 국민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 학서방 | |
1943년 | 태합 히데요시 | 동방 동지회 출판국 | 일본 외사 강의 |
1943년 | 전쟁에 이기는 정치 | 무사시노 서방 | |
1953년 | 건무 중흥사론 | 정강회 | 中野正剛일본어 선집 1 |
8. 가족 관계
- 아내 다미코(1934년 사망)는 미야케 세쓰레이·미야케 가호 부부의 딸이다. 1913년(大正|다이쇼일본어 2년)에 결혼했다.[43]
- 장남 가쿠메이는 1931년(昭和|쇼와일본어 6년) 17세에 북알프스마에호다카에서 추락사했다.[43]
- 차남 유시는 1935년(昭和|쇼와일본어 10년)에 병사했다.[44]
- 삼남 다쓰히코는 "진선미사" 사장이었다.[45]
- 사남 나카노 야스오는 아시아 대학교 명예 교수였다.[46] 다쓰히코와 야스오 형제는 할아버지 미야케 세쓰레이가 간토 대지진을 계기로 정교사와 갈라져 세이고와 함께 설립한 출판사 "아관사"[47]를 계승하는 형태로, 전후 하나다 기요테루를 편집 주간으로 한 "진선미사"(할아버지의 대표작 "진선미 일본인"에서 명명[48])를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영하여, 전위 예술 전문지 『종합 문화』 등을 간행하고, 하니야 유타카나 아베 코보 등을 데뷔시켰지만, 1948년(昭和|쇼와일본어 23년)에 도산했다.
- 동생 나카노 히데토는 화가, 시인, 평론가였다.
- 사촌 나카노 다이자부로(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한국어 관료)[49]
- 손자 나카노 다미오 (도쿄 공업대학·리버럴 아츠 연구 교육원·교수), 나카노 마사미치(약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함)[50]
참조
[1]
웹사이트
中野正剛
http://www6.plala.or[...]
2023-02-18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 Press
[3]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4]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5]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6]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7]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8]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9]
웹사이트
Nakano, Seigo | Portraits of Modern Japanese Historical Figures
https://www.ndl.go.j[...]
n.d.
[10]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11]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12]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13]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14]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15]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16]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17]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18]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19]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20]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21]
논문
"Nakano Seigo and the Spirit of the Meiji Restoration in Twentieth-Century Japan"
[22]
웹사이트
中野正剛(なかのせいごう)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3-02-18
[23]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24]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25]
논문
"Nakano Seigo and the Spirit of the Meiji Restoration in Twentieth-Century Japan"
[26]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Taylor & Francis
[27]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28]
논문
"Nakano Seigo and the Spirit of the Meiji Restoration in Twentieth-Century Japan"
[29]
서적
Pan-Asianism a Documentary History. Volume 2, 1920-present
Rowman & Littlefield
[30]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31]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32]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33]
뉴스
名選手ものがたり37 大豪徳三宝を投げる -早大時代の中野正剛-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82-11-20
[34]
간행물
『修猷館同窓会名簿 修猷館235年記念』
修猷館同窓会
[35]
뉴스
安達、富田、中野の三人が脱党
昭和ニュース事典編纂委員会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刊
1931-12-13
[36]
웹사이트
大隈重信生誕百五十年記念講演,「建学の精神を継承して,今こそ新しい早稲田百年の第一歩を」(竹下内閣総理大臣),データベース「世界と日本」
https://worldjpn.net[...]
[37]
뉴스
「戦時宰相論」で謹慎と清廉を説く
朝日新聞
1945-01-01
[38]
서적
言論統制下の記者
朝日新聞社
1988-04-20
[39]
웹사이트
軽井沢で東条の倒閣工作 中野正剛、道半ばで自刃
https://mainichi.jp/[...]
毎日新聞社
2023-04-25
[40]
웹사이트
真相はかうだ. 第1輯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2022-12-14
[41]
서적
犯罪の大昭和史 戦前
文藝春秋
2016-12-01
[42]
웹사이트
中野正剛
http://www6.plala.or[...]
2024-12-09
[43]
웹사이트
中野正剛「シッカリシロチチ」
http://books.salterr[...]
緒方竹虎『人間中野正剛』
[44]
웹사이트
雪嶺と中野正剛
https://www.rku.ac.j[...]
流通経済大学三宅雪嶺記念資料館
[45]
블로그
888号目次
https://www.kinyobi.[...]
週刊金曜日
2012-03-23
[46]
웹사이트
中野泰雄
http://www6.plala.or[...]
歴史が眠る多磨霊園
[47]
웹사이트
我観
https://kotobank.jp/[...]
『世界大百科事典』
[48]
간행물
桂英史「日本人はアジア」をどのように内面化してきたか?
http://geidai-ram.jp[...]
東京芸術大学
2015-01-25
[49]
서적
玄洋社・封印された実像
海鳥社
2010
[50]
뉴스
幕末の侍から スフィンクスの縁 子孫は今もカイロに「一族5代 エジプトに足跡」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0-04-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