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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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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이는 조선 세조 시대의 무신으로,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 여진족 토벌 등에서 공을 세워 병조 판서까지 올랐다. 예종 즉위 후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으나, 사후 억울함이 밝혀져 신원되었다. 그는 '백두산 돌' 시로 유명하며, 민간 신앙에서 장군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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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남이
한글남이
한자南怡
히라가나なん い
가타카나ナム・イ
로마자 표기Nam I
인물 정보
원래 이름남이(南怡)
출생일1443년
사망일1468년 10월 27일 (25세)
별명시호: 충무(忠武)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지조선 한성부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친인척남휘(할아버지)
정선공주(할머니)
권남(장인)
부모남빈(부), 남양 홍씨 부인(모)
배우자초취 안동 권씨
계취 고성 이씨
그 이외 측실 2명
자녀1녀
경력
직업무관
복무 기간1457년 ~ 1468년
주요 활동이시애의 난 정벌, 여진족 정벌

2. 생애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현손이자 태종의 외증손으로 왕실과 인연이 있었다. 증조부는 남재(南誾)의 형이며, 할아버지 남휘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와 혼인하였다. 1453년(세조 3년) 17세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횡행하는 도적 토벌로 이름을 떨쳤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귀성군 이준과 함께 이를 진압하고 훈공 일등으로 상을 받아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지는 건주위의 이만주(여진족)와의 전투에서도 선봉장으로 나서 공적을 세우고 공조판서가 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세조가 붕어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는 돌연 냉대를 받았다. 남이가 과거 원정 중에 읊었던 시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구절을 두고, 동료 유자광이 나라(조선)를 뒤엎으려는 모반의 증거라고 고발했다. 남이는 체포되어 한강 변의 처형장인 사남기에서 처형되었다. 강순 등 세조에게 중용되었던 사람들도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남이와 함께 숙청되었고, 귀성군 이준도 영의정을 사임했다(남이의 옥). 이 사건은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 등 신흥 세력신숙주, 한명회구 세력 간의 대립이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1. 초기 생애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부사를 지낸 남재의 현손이자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이며,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은 그의 일족이다. 세조의 공신 권람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 권씨는 요절했고, 권람도 일찍 죽었다. 재취 부인과 첩 2명이 더 있었으며, 재취 부인은 후일 그가 처형될 때 함께 처형되고 두 명의 첩은 남이의 옥사 직후 노비로 끌려갔다.

증조부는 남재(南誾의 형)이다. 할아버지인 의산군 남휘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와 결혼했다(남이는 태종의 증손이며, 왕실과 연이 있다). 아버지는 남이이며, 어머니는 홍여공의 딸이다.

1453년(세조 3년) 17세에 과거 무과에 장원 급제(수석 합격)했다.[6] 1460년(세조 6년) 무과에, 1466년(세조 12년) 발영시에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다.[6] 횡행하는 도적 토벌로 이름을 떨쳤으며, 1467년 경기도 포천, 영평 등지의 길목에서 여행객과 상인들을 약탈하는 도적떼를 토벌했다.

2. 2.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 토벌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 일대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대 대장이 되어 귀성군 준, 강순(康純), 어유소 등과 함께 토벌에 참여, 선봉으로 출정하였다. 그 뒤 출정 중 그의 훈공이 조정에 알려져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행 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행 호군이 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관에 책록되고 의산군에 봉군되었다.[7] 이어서 서북변에 출몰한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정벌할 때에도 평안도선위사 윤필상의 지휘하에 우상대장이 되어 선봉으로 적진에 들어가 만포로부터 훈강(파저강)을 공격하여 여진족의 수괴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고 되돌아왔다. 이러한 공로로 2등 군공에 책봉되었다.

2. 3. 병조판서 등용과 좌천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거성군 이준과 함께 이를 진압하고 훈공 일등으로 상을 받아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후 건주위의 이만주(여진족)와의 전투에서도 선봉장으로 나서 공적을 세우고 공조판서가 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세조가 붕어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는 돌연 냉대를 받았다. 남이가 과거 원정 중에 읊었던 시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동료 유자광이 나라(조선)를 뒤엎으려는 모반의 증거라고 고발했다. 남이는 체포되어 한강 변의 처형장인 사남기에서 처형되었다. 강순 등 세조에게 중용되었던 사람들도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남이와 함께 숙청되었고, 거성군 이준도 영의정을 사임했다(남이의 옥). 이 사건은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 등 신흥 세력신숙주, 한명회구 세력 간의 대립이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4. 유자광과의 갈등 및 죽음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났지만,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했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유자광은 그를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9]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예종은 남이가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며 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9] 1468년 (세조 14년, 예종 원년), 예종 즉위 직후 남이가 숙직을 서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라고 말한 것을 엿들은 유자광은, 남이가 영의정 강순 등과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하옥시켰다. 남이는 장인 권람의 친구들인 대신들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한명회신숙주는 이를 외면했다.

1468년 10월 27일, 남이는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강순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를 변호하던 조숙(趙淑) 등도 처형되었고, 그의 모친 역시 연좌되어 능지처사되었다.

3. 사후



그의 시 중에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남자 20세에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 후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라고 읊은 시가 유명하다. 이 시는 훗날 봉기나 데모대의 홍보물에 주로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김구는 반탁시위에서 남이가 지은 이 시를 친필로 써서 6.23 반탁데모를 격려하였다.[11][12]

아내는 좌의정 권람의 딸이었다. 권람은 계유정난에서 한명회 등과 함께 정난공신으로 지목되었지만, 사건 이전인 1465년에 사망했다.

3. 1. 복권과 신원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이라고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10] 중종 때 조광조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점이 감안되어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숙청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유자광에 의한 2차례의 처절한 사화로 유자광에 대한 사림의 평가가 극도로 절하됨으로써 남이의 역모는 억울한 누명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1818년 (순조 18년)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으며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1818년 (순조 18년),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관작과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충무공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3. 2. 신격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남이의 옥사가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10] 중종 때 조광조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점이 감안되어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숙청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유자광에 의한 2차례의 사화로 유자광에 대한 사림의 평가가 극도로 절하됨으로써 남이의 역모는 억울한 누명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으며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그의 시 중에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남자 20세에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 후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라고 읊은 시가 유명하다. 후에 그의 이 시는 봉기나 데모대의 홍보물에 주로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반탁시위에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11][12]

무용이 뛰어난 장군이면서 억울한 누명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여겨진 남이는 후세에 "남이 장군"으로 신격화되어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비범한 무용과 신통력을 발휘하여 권람의 딸을 귀신으로부터 구하고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 많은 설화가 만들어져 『연려실기술』 등의 설화집에 수록되어 있다.

각지에 "묘지"로 전해지는 곳이 있지만, 실제 매장지는 확실하지 않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는 경기도의 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1]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산면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 또한 유명한 전승지로, 묘가 있는 섬은 남이섬이라고 불리고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 용산구에는 남이 장군 사당이 있으며, 매년 11월에 남이 장군 대제가 열린다.

4. 가족 관계

남재(南在)의 현손이자 남휘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이고,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南袞)은 그의 일족이다.[6] 세조의 공신 권람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 권씨는 요절했고, 권람도 일찍 죽었다. 재취한 부인과 첩 2명이 더 있었으며, 재취 부인은 후일 그가 처형될 때 함께 처형되고 두 명의 첩은 남이의 옥사 직후 노비로 끌려갔다.[13]

관계이름비고
증조부남경문(南景文)1370년 - 1395년/1403년(?)
할아버지남휘(南暉)? ~ 1454년
할머니정선공주(貞善公主)태종 이방원의 넷째 딸
숙부남붕(南人+朋)
아버지남빈(南份)
어머니홍씨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
부인안동 권씨좌의정 권람(權擥)의 딸
탁씨, 탁문아(卓文兒)신운(申雲)의 노비로 갔다.[13]
이덕(李德)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노비로 갔다.[13]
남구을금(南求乙金)한명회(韓明澮)의 노비로 갔다.[13]



그의 장인 권람한명회, 신숙주의 옛 동료이자 후일 계유정난과 세조반정을 함께 거사하던 동지였다. 그러나 부인 권씨가 일찍 죽고, 장인 권람1465년에 일찍 죽었으므로 그를 지원해 줄 인물이 없었다. 권람, 태종과는 이중 인척관계로 남이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의 손자이며, 장인 권람의 숙부 권규(權侊)는 태종의 다섯째 딸인 경안공주와 결혼하여 그 아들 권총은 태종의 외손이자, 그에게는 외종이모부가 된다. 김문기와도 사돈간으로 권총의 손녀 권영금은 김문기의 아들 김현석의 부인이다.

5. 전설

남이 장군에 관한 전설은 여러 문헌과 구전 설화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연려실기술》, 《청야만집(靑野謾集)》, 《대동기문(大東奇聞))》 등에 관련 기록이 있으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연려실기술》 중 《국조기사(國朝記事)》에 인용된 남이의 결혼 과정은 현재 구전되는 설화와 내용이 같아 민간 전승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남이의 죽음은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인한 억울한 죽음으로 묘사되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해 남이가 희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0] 중종 때 조광조 등이 남이의 복권을 추진했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했다. 사림은 유자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기에 남이의 역모는 누명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남이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시는 봉기나 데모대의 홍보물에 자주 이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 해방 후 반탁 시위에서 김구가 친필로 이 시를 인용하여 데모대를 격려하기도 했다.[11][12]

경기도 남양주시가평군 경계에 있는 축령산에는 남이가 어릴 적 무예를 닦았다는 남이바위가 있어 남이와 관련된 지명 유래를 가진다.[14]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는 남이의 묘소가 있으며, 강원도 춘천시남이섬에는 남이 장군이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돌무더기가 있다. 경상북도 영양의 '남이포'와 경기도 용인시 구성 지역의 '남씨 가문에 내려오는 아기장군' 이야기도 남이 장군과 관련되어 있다.[14] 이처럼 한국에는 남이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는데, 이는 젊은 나이에 죽은 남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14]

박시백의 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에는 남이가 청년 시절 처녀를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전설에 따라 귀신, 지네 등 다양한 상대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속에서 남이는 무당이 섬기는 장군신 중 한 명이기도 하다.

6. 관련 작품

1964년 영화 《남이 장군》 (신영균 주연)에서 남이를 다루었다.

드라마로는 다음과 같다.

6. 1. 드라마

6. 2. 영화

참조

[1] 웹사이트 invil - ムルコッ村(南怡将軍の墓) http://www.invil.org[...]
[2] 실록 예종실록 권1, 예종 즉위년(1468년) 10월 27일(계축) 2번째 기사
[3] 서적 해좌집
[4] 실록 순조실록 권21, 순조 18년(1818년) 3월 10일(정미) 1번째 기사
[5] 서적 약천집
[6] 실록 세조실록 권45, 세조 14년(1468년) 3월 27일(정해) 1번째 기사
[7] 문서 할아버지 남휘에 이어 습봉되었다.
[8] 서적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불 1998
[9] 서적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불 1998
[10] 서적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불 1998
[11]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2] 서적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3] 실록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월 13일(무진) 1번째기사
[14] 뉴스 환갑의 ‘잣나무 숲’에 안겨… 산소충전·활력보충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8-12-05
[15] 실록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8일(계사)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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