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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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대포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킨 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부대가 다대포진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진을 함락시킨 후 다대포진을 공격했으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다대포진은 함락되었다. 윤흥신은 동생과 함께 순절하였다. 다대포 전투의 패배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방어 체계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군은 이후 동래성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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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임진왜란 |
날짜 | 1592년 5월 24일 (양력); 1592년 4월 14일 (음력) ~ 1592년 5월 25일 (양력); 1592년 4월 15일 (음력) |
장소 |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
결과 | 일본의 승리, 다대포성 함락 |
전투 | 다대진 전투; 다대포 해전; 多大鎮の戦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File:Toyotomi mon.png|20px]] |
지휘관 | |
조선 | 윤흥신; 박홍 |
일본 |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
병력 규모 | |
조선 | 400~800명 |
일본 | 병력 1만 8700명; 병선 700척; 최소 7,000명 |
사상자 | |
조선 | 윤흥신 장군 및 다대포 군민; 전 병력 전멸 또는 대부분 사망 |
일본 | 미상 |
관련 전투 | |
관련 전투 목록 | 임진왜란 |
2. 배경
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명령하였다.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여 척을 이끌고 동래부 영도에 상륙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력을 둘로 나눠 부산포진을 공격하는 동시에 다대포 방향으로도 진군하였다.
일본군 침략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18,700명의 병력을 태운 4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되어 쓰시마 섬에서 4월 13일(그레고리력: 5월 23일)에 출발하여 아무런 문제 없이 부산 항에 도착했으며, 일본군은 다음 날 아침 4시부터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지휘관은 고니시,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모토쓰구였으며, 마쓰라를 제외한 모두와 그들의 부하들 중 상당수가 기리시탄이었다. 소 요시토시가 부산을 공격하는 동안, 고니시는 낙동강 하구의 부산 남서쪽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대진 요새를 상대로 소규모 병력을 이끌었다.
2. 1. 조선과 일본의 관계
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명령하였다.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여 척을 이끌고 동래부 영도에 상륙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력을 둘로 나눠 부산포진을 공격하는 동시에 다대포 방향으로도 진군하였다.일본군 침략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18,700명의 병력을 태운 4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되어 쓰시마 섬에서 4월 13일(그레고리력: 5월 23일)에 출발하여 아무런 문제 없이 부산 항에 도착했으며, 일본군은 다음 날 아침 4시부터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소 요시토시가 부산을 공격하는 동안, 고니시는 낙동강 하구의 부산 남서쪽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대진 요새를 상대로 소규모 병력을 이끌었다.
2. 2. 다대포진의 전략적 중요성
다대포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낙동강 하구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어 부산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해상 경로였다.[2] 1417년 태종 17년 8월 20일에 수군도절제사 정문의 건의로 만호를 파견하였다.[2]1490년 성종 21년 11월 다대포에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3m 90cm), 둘레가 1,806척(5.4km)이었다.[3] 1593년 선조 26년에는 이곳의 성이 증축되었다.[4]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쓰시마 섬에서 출발하여 부산 항에 도착한 후, 소 요시토시가 부산을 공격하는 동안 다대진 요새를 공격했다.[4]
3. 전투 경과
1592년 4월 14일에 일본군이 수군진이 있던 부산포를 함락시켰으며, 상급 지휘관인 경상좌수사 박홍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같은날 부산진에서 다대포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서평진(西平鎭)이 먼저 일본군에게 손쉽게 점령되었고, 그 직후에 다대진 군사들이 다대진성을 포위한 일본군을 격퇴하는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이튿날인 4월 15일에 다대포에 왜군들이 다시 벌떼같이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전력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결국 다대포는 부산진처럼 함락되고 말았다. 첨사 윤흥신은 다대포진 객사 동쪽에 있던 연못에 동생과 함께 순절하였다.[5]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번째기사에서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경주(慶州)의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西生浦)와 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의 군현(郡縣)과 진보(鎭堡)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흩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첫 번째 공격은 윤흥신에 의해 격퇴되었다. 두 번째 공격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군은 총격의 엄호 아래 해자를 돌과 목재로 채운 뒤 대나무 사다리를 사용하여 성벽을 기어올랐다. 주둔군 전체는 몰살되었다.
3. 1. 일본군의 공격
1592년 4월 14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부산포를 함락시켰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5] 같은 날, 일본군은 다대포진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서평진(西平鎭)을 점령했다.[5] 그 직후 다대진 군사들이 일본군을 격퇴하는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으나,[5] 다음날인 4월 15일(양력 5월 25일)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오자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맞서 싸웠지만, 결국 다대포는 함락되었다.[5]고니시 유키나가의 첫 번째 공격은 윤흥신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두 번째 공격은 야간에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의 엄호 아래 해자를 돌과 목재로 채우고 대나무 사다리를 사용하여 성벽을 기어올랐다. 윤흥신은 전사하고 주둔군 전체가 학살당했다.
일본군은 조총을 지원받으며 해자를 배수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조선 병사들은 부산진 전투와 마찬가지로 조총을 두려워하여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다. 밤중에 유키나가는 기습하여 나무, 돌, 흙덩이를 해자에 던져 넣어, 오전 4시부터 8시 사이에 이를 메웠다. 일본군은 공성탑(운제)이나 사다리를 사용하여 조총의 지원 속에서 성벽에 올랐다.
3. 2. 윤흥신과 조선군의 저항
윤흥신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가 함락되고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주한 상황에서도[5] 다대포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서평진이 함락된 직후, 다대진성을 포위한 일본군을 한 차례 격퇴하였다.[5] 그러나 다음날인 4월 15일,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오자 윤흥신은 전력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다대포는 함락되었다.[5]고니시 유키나가의 첫 번째 공격은 윤흥신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야간에 이루어진 두 번째 공격에서 일본군은 총격의 엄호 아래 해자를 돌과 목재로 채우고 대나무 사다리를 사용하여 성벽을 기어올랐다.
윤흥신은 일본군의 조총 공격과 해자를 메우는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조선 병사들은 조총을 두려워하여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고, 결국 일본군은 성벽을 넘어 다대포진을 점령했다. 윤흥신은 제1 방어선이 뚫린 것을 보고 거짓 후퇴 후 반격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 윤흥신은 다대포진 객사 동쪽에 있던 연못에 동생과 함께 순절하였다.[5]
3. 3. 전투 결과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은 부산포를 함락시켰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같은 날, 다대포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서평진(西平鎭)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다대진 군사들이 일본군을 일시 격퇴했으나, 다음날인 4월 15일, 일본군은 재차 공격을 감행,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 다대포진은 함락되었다.[5] 윤흥신은 동생과 함께 순절하였다.[5]고니시 유키나가는 첫 번째 공격이 격퇴되자, 야간에 총격의 엄호를 받으며 해자를 돌과 목재로 채우고 대나무 사다리를 이용, 성벽을 넘어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주둔군 전체가 학살당했다. 윤흥신은 제1 방어선이 뚫린 것을 보고 거짓 후퇴 후 반격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난전 끝에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을 공격한 소 요시토시와 함께 큰 저항 없이 진격했다. 다대포진에 병력을 남겨 경비하게 한 후, 동래성으로 향했다.
4. 전투의 영향
다대진과 부산진이 함락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 다음 날, 고니시와 소 요시토시는 병력을 재결합하여 서울로 가는 주요 도로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래읍성으로 진격했다. 이러한 초기 전투의 패배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방어 체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며, 이는 조선 지배층의 군사적 대비 부족과 전략 부재를 드러낸다. 다대진과 부산진이 함락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읍성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다대포 지역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전쟁의 참혹함과 민중의 고통을 보여준다.
4. 1. 조선의 초기 대응 실패
다대진과 부산진이 함락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 다음 날, 고니시와 소 요시토시는 병력을 재결합하여 서울로 가는 주요 도로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래읍성으로 진격했다. 이러한 초기 전투의 패배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방어 체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며, 이는 조선 지배층의 군사적 대비 부족과 전략 부재를 드러낸다.4. 2. 민중의 피해
다대진과 부산진이 함락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읍성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다대포 지역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전쟁의 참혹함과 민중의 고통을 보여준다.5. 역사적 평가
5. 1. 윤흥신에 대한 평가
5. 2. 다대포 전투에 대한 재조명
참조
[1]
서적
日本外史
[2]
역사기록
경상도 다대포에 만호를 차견하다
http://sillok.histor[...]
태종실록
1417-08-20
[3]
역사기록
이 달에 경상도의 다대포성을 쌓다
http://sillok.histor[...]
성종실록
1490-11-29
[4]
역사기록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이 왜적이 부산 등지에 성을 쌓고 있다고 치계하다
http://sillok.histor[...]
선조실록
1593-02-18
[5]
서적
충렬사지
[5]
서적
해은일록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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