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요시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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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요시무라는 분가 다테 무네후사의 장남으로, 센다이 번의 다이묘였다. 그는 168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상속받았고, 1703년 다테 쓰나무라의 은퇴로 다이묘가 되었다. 요시무라는 센다이 번의 재정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며, 번찰 발행 중단, 협력금 공출, 매미 시법 강화 등을 통해 재정 안정에 힘썼다. 또한 학문소를 창립하고,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자화상과 가집을 남겼다. 그의 치세 동안 센다이 번은 교호 대기근을 통해 재정적 안정을 찾았으며, 많은 가신들에게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주는 편휘를 내렸다. 1743년 은거 후 1752년에 사망했으며, 1928년에 종3위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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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요시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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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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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테 요시무라 (伊達吉村) |
출생 | 1680년 7월 23일 |
출생지 | 이와테현 다이토 |
사망 | 1752년 2월 8일 |
사망지 | 미야기현 소데가사키 |
다른 이름 | 소데사키 은공 |
칭호 | 속등원전사산원활대거사 |
어린 시절 이름 | 조산부로 (助三郎) |
초명 | 무라후사 (村房) |
가문 정보 | |
씨족 | 다테 씨 (미야기다이라 다테 가 → 다테 종가) |
아버지 | 다테 무네후사 |
어머니 | 가타쿠라 가케나가의 딸 |
양아버지 | 다테 쓰나무라 |
형제자매 | 요시무라, 무라오키 |
배우자 | 조쇼인 (구카 미치나리의 딸) |
측실 | 세이료인, 엔규인, 게이신인 |
자녀 | 무라타다, 기쿠지로, 무라카제, 무네무라, 다무라 무라타카, 무라요시, 도미노스케, 에이히메, 가즈히메, 도미히메, 다치바나히메, 사토히메, 미호히메, 유리히메, 사토히메, 이름 미상 |
관직 정보 | |
관위 | 종4위상, 좌근위권중장·무쓰노카미, 증 종3위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다테 쓰나무라 → 도쿠가와 쓰나요시 → 이에노부 → 이에쓰구 → 요시무네 |
센다이 번주 정보 | |
직책 | 센다이번 번주 |
대수 | 5대 |
임기 시작 | 1703년 |
임기 종료 | 1743년 |
전임자 | 다테 쓰나무라 |
후임자 | 다테 무네무라 |
다이묘 정보 | |
직책 | 20px 센다이 번 5대 다이묘 |
쇼군 | 도쿠가와 쓰나요시 도쿠가와 이에노부 도쿠가와 이에쓰구 도쿠가와 요시무네 |
2. 생애
다테 타다무네의 8남 다테 무네후사(伊達宗房)의 장남으로 이와테현 다이토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스케사부로(助三郎)였다. 1695년 3월, 이치노세키번의 다무라 타쓰아키에게 양자로 입적될 예정이었으나, 막부에 공식 통보 전에 다테 쓰나무라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703년 쓰나무라의 은퇴와 함께 ''다이묘''가 되었다.
1704년 5월 21일 아오바성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센다이 번은 다테 쓰나무라의 야심찬 공공사업과 사찰 건축 프로젝트로 인해 파산 상태였다. 요시무라는 부채와 인플레이션의 원인 중 하나가 번에서 발행한 지폐라고 판단하여 발행을 중단하고 유통에서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1706년 9월, 센다이 번이 에도로의 의무적인 ''산킨코타이''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고 막부에 알리고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1725년 영지 재조사를 실시하여 미신고된 쌀 토지를 발견하고 황무지를 다시 경작하기 위한 광범위한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1729년에는 ''군다이''(郡代: 지방관)의 수를 8명에서 4명으로 줄이는 등 영지 행정을 간소화했다. 1727년 막부가 센다이에서 채굴된 구리를 사용하여 구리 주화를 주조하는 조폐국을 설립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1732년 간사이 지방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지만, 센다이는 풍작을 거두어 피해 지역에 많은 양의 쌀을 출하하여 500,000료 이상의 이익을 올리고 수십 년간의 부채를 청산했다.
1736년 양현당의 전신이 되는 학문소를 창립했다.[1] 1743년 아들 다테 무네무라에게 영주직을 물려주고 은퇴했으며, 1752년 사망했다. 1928년 종3위(從三位)로 추증되었다.
2. 1. 탄생과 가독 상속
다테 요시무라는 분가를 세운 다테 타다무네의 여덟 번째 아들인 다테 무네후사(伊達宗房)의 장남으로, 현재 이와테현 다이토정의 일부인 영지 북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스케사부로(助三郎)였다. 어머니는 카타쿠라 카게나가의 딸이었다. 1680년 6월 28일 (음력) 다테 무네후사(2대 번주 다테 타다무네의 여덟째 아들)의 적장자로, 무쓰국 히가시이와이군 오하라촌(현 이와테현 이치노세키시 다이토정 오하라)에서 태어나, 그 마을의 하치만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카타쿠라 카게나가의 장녀 마츠코였다. 유년 시절의 이름은 '''도쿠사부로'''였다.[1]1686년 1월 13일 (음력) 아버지 무네후사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1] 1690년 12월 (음력)에 겐푸쿠 의식을 거쳐 다테 무라후사|伊達村房|일본어라는 이름을 받았다. 겐로쿠 3년 12월 (음력), 원복을 치르고, 종형이자 번주인 다테 쓰나무라로부터 편휘를 받아 '''무라후사'''(むらふさ)로 이름을 지었다.[1] 1693년, 가신들과 중신들이 다테 쓰나무라에게 은퇴를 청원했을 때, 그의 이름은 문서에 나타나지 않았다. 겐로쿠 6년에 일문(一門)에 의한 번주 쓰나무라에게의 간언서 제출에는 나이가 어려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1]
1695년 3월 (음력), 이치노세키번의 다무라 타쓰아키에게 양자로 입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부에 공식 통보를 하기 전에, 대신 다테 쓰나무라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의 관위는 ''에치젠노카미(越前守)''였으며, 그의 관위는 종5위하(從五位下)였다. 겐로쿠 8년 3월 (음력), 무츠 이치노세키번주 타무라 타테아키의 양자가 되면서, 일가인 고야나가와 가문을 잇고 있던 동생 무네토키(후의 다테 무라오키)를 불러들여 미야토코 다테 가문의 가독을 양보하고, 무라후사는 일문 상석의 가격을 받아 5월 (음력)에는 에도의 이치노세키 번저에 들어갔지만, 정식으로 양자 연(緣)을 막부에 신고하기 전에, 후계자가 없었던 쓰나무라의 양자가 되었다. 또한, 타나베 키켄이 시강이 되었다.[1]
1696년 11월 (음력)에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정식으로 알현을 받았고, 요시무라라는 이름과 함께 정4위하(正四位下)의 관위와 시종이라는 명예 직함을 받았다. 1703년 쓰나무라의 은퇴와 함께 ''다이묘''가 되었으며, 또한 ''사코노에곤쇼쇼'' (좌근위권소장: 左近衛権少将)와 ''무쓰노카미(陸奥守)''라는 관위도 물려받았다. 겐로쿠 9년 11월 (음력)에 번주가의 관례에 따라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로부터 편휘를 받아 '''요시무라'''로 개명한다.[1]
2. 2. 번주로서의 치세
다테 쓰나무라의 양자가 되어 1703년 쓰나무라의 은퇴와 함께 다이묘가 된 다테 요시무라는 파산 상태의 센다이 번 재정을 재건해야 했다. 요시무라는 지폐 발행 중단 및 회수, 산킨코타이 비용 지원 요청, 토지 재조사, 영지 행정 간소화, 구리 주화 주조, 쌀 판매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1726년에는 ''후신 부교''(건설 봉행) 직책을 폐지했고, 1729년에는 ''군다이''(郡代: 지방관)의 수를 8명에서 4명으로 줄이는 등 영지 행정을 간소화하고 비용을 절감했다.[3]
1727년 막부가 센다이에서 채굴된 구리를 사용하여 구리 주화를 주조하는 조폐국을 설립하면서 통화 사용이 증가했고, 영지는 농부로부터 잉여 쌀을 모두 사들여 에도에 판매하여 이익을 얻었다.[3] 1732년 간사이 지방에 교호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센다이 번은 풍작을 거두어 피해 지역에 쌀을 출하, 500000RYO 이상의 이익을 올리고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3]
1743년, 요시무라는 아들 다테 무네무라에게 영주직을 물려주고 은퇴했으며, 1752년 사망했다.[3]
2. 2. 1. 초기 재정 상황
1704년 5월 21일, 다테 요시무라는 센다이성에 처음 들어갔다. 당시 센다이 번은 쓰나무라의 야심찬 공공사업과 사찰 건축 프로젝트로 인해 파산 상태였다.[3] 그는 부채와 인플레이션의 한 원인이 영지가 발행한 지폐라고 판단하여, 지폐 발행을 중단하고 유통에서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3]1706년 9월, 다테 요시무라는 센다이 번이 에도로의 의무적인 산킨코타이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을 막부에 알리고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3] 막부는 영지의 세금을 일시적으로 절반으로 줄이고 쌀 대신 통화로 지불하는 것에 동의했다.[3] 당시 영지의 부채는 123,000 료를 초과했고, 높은 이자율로 인해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났다.[3]
1711년, 다테 요시무라가 쇼군(將軍)의 닛코 도쇼구 참배에 동행하도록 명령받았을 때, 영지는 에도와 교토의 돈놀이에게서 추가로 73,700 료를 빌려야 했다.[3]
요시무라가 번주가 된 1704년 5월 21일 당시, 센다이 번의 재정은 쓰나무라의 낭비와 문란한 정치로 인해 완전히 파탄난 상태였고, 요시무라는 즉시 재정 재건에 착수해야 했다.[4]
우선 대처해야 할 문제는 쓰나무라 억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번찰의 뒷수습이었다.[4] 1705년 1월에 번찰 발행을 중단했지만, 이미 유통되고 있는 번찰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가 될 정금을 마련해야 했다.[4] 이듬해 1706년 9월에는 산킨코타이 면제를 막부에 청원해야 할 상황이라며, 지행고 30석 이상의 번사에게 협력금 공출을 명하고, 연공의 절반을 쌀로 납부하거나 석고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으로 납부하도록 선택하게 했다.[4] 10월에 번찰 통용이 겨우 중단되었지만, 이 해 센다이 번의 적자액은 한 해에만 12만 3000냥에 달했다.[4]
이처럼 요시무라 습봉 당시 센다이 번의 재정 상태는, 쓰나무라가 남긴 막대한 부채에 더해, 그 뒷수습에 필요한 비용이 더욱 적자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4] 또한 재정 재건 중에도 1711년 11월에는 막부로부터 닛코 도쇼구 보수 공사를 명받아, 에도와 교토의 상인으로부터 7만 3700냥의 추가 차입을 해야 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4]
2. 2. 2. 영내 총검지 계획과 실패
교호 10년(1725년) 연초, 다테 요시무라는 간에이 이래 실시되지 않았던 영내 총 검지 '대개'를 실시할 것을 표명했다. 이는 경지 소유자의 이동, 신전의 은전화, 푸신(普請)(토목공사)이나 황폐화로 인한 경지 면적의 변화 등을 정상화하여 토지 제도의 근본적인 재정비와 연공 증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은전이 흉작 시 연공 부담의 부족분을 보충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고, 일문 등 상급 가신뿐만 아니라 중·하급 가신에게도 지방지행제가 시행되고 있던 센다이 번에서는 하급 급인과 배신이 지행지의 일부를 직접 경작함으로써 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국사' 명의의 의견서에 대표되는 일문층을 비롯한 가신 측의 반발이 강했고, 반년 후에 사실상 중지되었다.
이듬해에는 검지의 담당자였던 출입사의 이와부치 야스쓰구·키도 아리노부가 책임을 지는 형태로 처벌되었다. 이후, 센다이 번에서는 영내 총검지가 실시되지 않은 채 막말을 맞이하게 된다.[1]
2. 2. 3. 역직 정리, 화폐 주조, 매미법
다테 요시무라는 영지를 다스리면서 여러 가지 직책을 정리하고, 화폐를 주조했으며, 매미법을 강화했다.1726년(교호 11년)에는 저택 봉행과 병기 봉행을 겸임하게 하고, 토목 봉행을 폐지하여 그 산하의 토목방을 출입사의 직할로 두었다. 1729년(교호 14년)에는 군 봉행을 8명에서 4명으로 감원했으며, 1731년(교호 16년)에는 류가사키 봉행을 폐지하고 직무를 군 봉행의 겸직으로 했다.
이와 병행하여 1727년(교호 12년)에는 센다이 영지산 구리를 사용할 것을 조건으로 막부의 허가를 얻어 동전(간에이 통보)을 이시노마키에서 주조하여 그것을 영내에서 유통시켜 이윤을 얻었다. 또한 매미 시법을 재편 강화하여 농민으로부터 잉여미를 강제적으로 공출시켜 에도로 회송하여 현금화했다. 18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쳐 에도 시중에 유통된 쌀의 대부분이 센다이산이라고 말해질 정도였다. 1732년(교호 17년), 서국에서 교호 대기근이 발생하자, 이 해 오슈는 풍작이었기 때문에, 대량의 쌀을 에도로 보내 판매하여 50만 량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이 때문에 번 재정은 단번에 호전되어 마침내 단년도 흑자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2. 2. 4. 기타
다테 타다무네의 8번째 아들인 다테 무네후사의 장남으로, 이와테현 다이토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스케사부로(助三郎)였다. 1695년 3월, 이치노세키번의 다무라 타쓰아키에게 양자로 입적될 예정이었으나, 막부에 공식 통보 전에 다테 쓰나무라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703년 쓰나무라의 은퇴와 함께 ''다이묘''가 되었다.요시무라는 1704년 5월 21일에 처음 아오바성에 들어갔는데, 당시 영지는 쓰나무라의 야심찬 공공사업과 사찰 건축 프로젝트로 인해 파산 상태였다. 그는 부채와 인플레이션의 한 원인이 영지가 발행한 지폐라고 판단하여 발행을 중단시키고 유통에서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1706년 9월, 다테 영지가 에도로의 의무적인 ''산킨코타이''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음을 막부에 알리고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725년에 재조사를 실시했고, 미신고된 쌀 토지를 발견하고 황무지를 다시 경작하기 위한 광범위한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1729년에는 ''군다이''(郡代: 지방관)의 수를 8명에서 4명으로 줄이는 등 영지 행정을 간소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막부가 1727년에 센다이에서 채굴된 구리를 사용하여 구리 주화를 주조하는 조폐국을 설립했다. 1732년에는 일본의 간사이 지방에 심각한 기근이 닥쳤지만, 센다이는 풍작을 거두어 피해 지역에 많은 양의 쌀을 출하하여 500000RYO 이상의 이익을 올리고 수십 년간의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1743년, 아들 다테 무네무라에게 영주직을 물려주고 은퇴했으며, 1752년에 사망했다. 1928년에 종3위(從三位)로 추증되었다.
1736년에 양현당의 전신이 되는 학문소를 창립했다.[1]
2. 3. 은거 이후
1743년(간포 3년) 7월, 넷째 아들 무네무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여 소데가사키의 별저로 옮겨갔다. 1752년(호레키 원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향년 72세.3. 관위 이력
해당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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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로쿠 8년(1695년) 12월 | 종5위하 관위에 서임되고, 에치젠노카미(越前守)에 임명됨. |
겐로쿠 9년(1696년) 11월 2일 | 종4위하로 관위가 승진되고, 지주를 겸임. |
겐로쿠 16년(1703년) | 무쓰노카미(陸奥守)·사콘노에권쇼쇼(左近衛権少将)로 전임. |
쇼토쿠 원년(1711년) | 종4위상으로 관위가 승진되고, 사콘노에권츄조(左近衛権中将)로 전임. |
쇼와 3년(1928년) | 종3위 추증. |
4. 인물 및 일화
쓰나무라는 요시무라의 성격에 대해, 성격적으로도 사물을 깊이 생각하고 사려 깊으며, 정치에 대한 접근 방식도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뜻을 품고, 인애를 가지고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인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적으로 너무 생각하고, 아무래도 이치에 지나치는 점이 흠이라고 평가했다.[2]
요시무라는 와카・서화 등 예술 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림은 야마토에를 본뜬 섬세한 화풍이 특징이며, 전문 화가도 잘 그리지 않는 자화상까지 그릴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2] 교호 9년(1724년)에는 하세가와 요신에게 명하여, 다테 씨 초대・아사무네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역대 당주 21명의 초상화집 『다테가 역대 화진』을 제작하게 했지만, 그 밑그림은 요시무라가 직접 그렸다.
겐분 2년(1737년) 10월 5일, 요시무라의 딸 화희의 남편인 오카야마번 주・이케다 츠구마사의 사자를 칭하는 하타모토가 에도의 센다이번 상옥저를 방문하여, 화희와 츠구마사의 관계 악화와 그녀의 병을 이유로 이혼과 절교[3]를 통고했다. 대응한 센다이번의 가로는 책임이 모두 화희에게 있는 듯한 사자의 말에 반발하여, 츠구마사에게 그 설명을 요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자는 그 건에 관해서는 츠구마사에게 전하지만, 이혼 신고는 이미 로주에게 제출 완료라고 말했다. 보고를 받은 요시무라는 이미 이혼 신고가 제출되었으니 이혼은 어쩔 수 없지만, 원래는 이혼 신고는 공동으로 막부에 내는 것인데 사전 인사도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혼 신고를 낸 것으로 다테 가문 측에서도 절교를 통고했다. 당시의 관례에서는 이혼을 원인으로 당사자 쌍방의 가문이 절교했다 하더라도 흥분이 가라앉을 즈음에 화순(화해)가 성립되는 것이었지만, 이케다가 측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본 다테 가문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센다이번과 오카야마번의 절교 상태는 47년 후의 텐메이 4년(1784년)까지 이어졌다(「겐분 이혼 사건」).[4]
5. 작품
다테 요시무라는 가집과 회화를 남겼다. 가집으로는 린쇼슈(隣松集), 조쿠린쇼슈(続隣松集)가 있으며, 회화는 센다이시 박물관, 후쿠시마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5. 1. 가집(歌集)
- 린쇼슈(隣松集)
- 조쿠린쇼슈(続隣松集)
5. 2. 회화
제목 | 소장처 | 비고 |
---|---|---|
「자화상」 | 센다이시 박물관 | 견본 채색 |
「육소옥하와가어수감(六所玉河和歌御手鑑)」 | 센다이시 박물관 | 지본 채색 1첩 |
「겐지 팔경 어수감(源氏八景御手鑑)」 | 센다이시 박물관 | 견본 채색 1첩 |
「쿄고쿠 사다이에・고쿄고쿠 요시쓰네상」 | 후쿠시마 미술관 | 쌍폭 |
「타카가리·스나도리도(たかがり・すなどり図)」 | 센다이시 박물관 | 2권 |
「죽매도」 | 센다이시 박물관 | 지본 묵화 |
6. 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다테 무네후사 (1646년 - 1686년) |
어머니 | 테이쥬인 - 마츠코, 가타쿠라 가게나가의 장녀 |
양아버지 | 다테 쓰나무라 (1659년 - 1719년) |
정실 | 초쇼인 (1689년 - 1745년) - 사다코, 후유히메, 쿠가 미치나리의 양녀, 쿠가 미치나의 딸 |
측실 | 오타카노카타 - 세이료인, 오카무라 씨 |
측실 | 오소에노카타 - 엔큐인, 스즈키 씨 |
측실 | 린 - 오타치의카타, 케이신인, 다카하시 하루마사의 딸 |
양자 | 효히메 (미치코) (1713년 - 1769년) - 쿠가 미치나의 딸, 미야토코 다테 무라타네 실 |
'''자녀'''
처 | 이름(출생-사망) | 비고 |
---|---|---|
초쇼인 | 장녀: 에이히메 (1705년 - 1706년) | 요절 |
차녀: 카즈히메 (무라코) (1706년 - 1746년) | 신테이인, 오카야마번주 이케다 쓰구마사 정실. 이케다 무네마사의 생모이며,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고노에 타다테루의 부계 증조부인 이케다 아키마사는 무네마사의 차남 사가라 나가히로의 증손. | |
삼녀: 토미히메 (토쿠코) (1710년 - 1747년) | 우와지마번주 다테 무라토시 정실. 다테 무라토키의 생모. 무라토키의 차남 야마구치 나오키요의 자손에게서 다테 무네나리 등 막부 말기의 번주가 배출되었다. | |
사녀: 타치바나히메 (1712년 - 1715년) | 요절 | |
오녀: 토시히메 (1713년 - 1714년) | 요절 | |
사남: 다테 무네무라 (1718년 - 1756년) | 형들의 요절로 인해 적자가 되어 6대 번주가 됨 | |
오타카노카타 | 장남: 다테 무라마사 (1709년 - 1722년) | |
육녀: 미호히메 (콘시) (1723년 - 1747년) | 요도번주 이나바 마사마스 정실 | |
오소에노카타 | 차남: 다테 키쿠지로 (타케사부로) (1711년 - 1713년) | 요절 |
삼남: 다테 무라카제 (1715년 - 1735년) | 일문, 다테 우쿄가 (3000석)를 세웠지만 일대에서 무자 단절 | |
린 | 칠녀: 백합히메 (후지코) (1733년 - 1747년) | |
팔녀: 고히메 (마사코) (1735년 - 1752년) | 가타쿠라 무라카도 정실 | |
오남: 다무라 무라타카 (1737년 - 1782년) | 다테 무라카츠, 처음에는 도메다테 무라토모의 양자가 되어 도메 다테가 8대 당주, 후에 다무라 무라아키의 양자가 되어 이치노세키번 4대 번주 | |
육남: 불명 (1739년 - 1739년) | 요절 | |
칠남: 다테 토미노스케 (1741년 - 1745년) | 요절 | |
린 | 팔남: 다테 무라요시 (1743년 - 1787년) | 동모형 무라카츠의 양자, 도메 다테가 9대 당주 |
다테 타다무네━┳다테 쓰나무네━━다테 쓰나무라
┃
┃ ┏다테 무라오키━━다테 무라타네
┗다테 무네후사━┫
┗다테 요시무라
┃
┏후유히메
┏쿠가 미치나━┫
쿠가 히로미치━┫ ┗━━━━━━효히메
┗쿠가 미치나리
7. 편휘(偏諱)를 받은 인물
요시무라일본어 시대 (1703년-1743년)에 다테 요시무라에게서 편휘 한 글자를 받은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가문 | 비고 |
---|---|---|
다테 무라타다 | 장남 | |
다테 무라카제 | 삼남 | |
다테 소무라 | 사남, 적자 | |
다테 무라코 | 오남, 후에 형 소무라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다테 무라카쓰, 다무라 무라타카로 개명 | |
다테 무라요시 | 팔남 | |
다테 무라타네 | 미야토코 다테 가문 | 요시무라의 조카 (친동생 무라오키의 아들) |
다테 무라시게 | 처음에는 카타쿠라 무라노부, 요시무라의 조카 (친동생 무라오키의 아들), 후에 친형 무라타네의 요절로 친가인 미야토코 다테 가문을 상속 | |
다테 무라토시 | 이요 우와지마번 | 4대 번주, 요시무라의 사촌이자 사위 |
다테 무라토키 | 이요 우와지마번 | 5대 번주, 무라토시의 아들이자 요시무라의 외손 |
다테 무라토요 | 이요 요시다번 | 3대 번주 |
다테 무라스미 | 무라토요의 장남, 요절 | |
다테 무라노부 | 이요 요시다번 | 4대 번주, 무라스미의 동생 |
다테 무라자네 | 와타리 다테 가문 | |
다테 무라사다 | 와쿠야 다테 가문 | |
다테 무라모리 | 무라사다의 아들, 처음에는 무라시게 | |
다테 무라타네 | 무라사다의 아들, 무라모리의 친동생이자 양자 | |
다테 무라카게 | 무라사다의 친동생, 미즈사와 다테 가문을 상속 | |
다테 무라토모 | 토메 다테 가문 | |
다테 무라모치 | 이와야도 다테 가문 | |
다테 무라치 | 이와데야마 다테 가문 | |
다테 무라미치 | 무라치의 아들 | |
다테 무라토시 | 무라치의 친동생, 처음에는 나카무라 무라타카, 후에 카와사키 다테 가문을 상속 | |
이시카와 무라미츠 | ||
이시카와 무라토시 | 무라마츠의 아들 | |
카타쿠라 무라야스 | ||
카타쿠라 무라노부 | 후의 다테 무라시게, 요시무라의 조카 (친동생 무라오키의 아들), 잠시 카타쿠라 무라야스의 양자가 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친가인 미야토코 다테 가문을 상속 | |
카타쿠라 무라사다 | 처음에는 엔도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지만, 무라노부가 친가로 돌아온 것에 따라 친가인 카타쿠라 가문을 상속 | |
시라카와 무라히로 | 마사카 시라카와 가문 | 5대 당주 |
타무라 무라아키 | 사촌, 이치노세키번주, 다테 무라코 (타무라 무라타카)의 양부 | |
미사와 무라타메 | 미사와 무라나오의 아들로 다테 무라모치의 친형 | |
미사와 무라키요 | 무라타메의 양자 |
참조
[1]
문서
出身の宮床伊達家は元々、伊達崎氏、[[田手氏]]を称していた。伊達氏初代当主[[伊達朝宗]]の六男・実綱を祖とする伊達一門の家柄であるが、江戸時代初期に2代藩主伊達忠宗の子・宗房が名跡を継承していた。その子が吉村である。
[2]
간행물
お殿様の遊芸
板橋区立美術館
2006
[3]
문서
当時の婚姻関係は両家間の関係構築の手段であるため。
[4]
서적
武士の三くだり半
汲古書院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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