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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지카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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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지카무네는 센다이 번의 다이묘로, 1796년 다테 나리무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세도 되지 않아 센다이 번주를 상속받았으며,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과 약혼했다. 천연두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번주 대행 체제로 전환되었고, 1812년 동생을 양자로 삼고 은거한 후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며, 가신 및 편휘를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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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지카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테 지카무네
다테 지카무네의 초상 (센다이 시 박물관 소장)
이름다테 지카무네 (伊達周宗)
로마자 표기Date Chikamune
출생1796년 4월 9일
출생지에도
사망1812년 6월 3일 (공식 기록)
사망 장소센다이
묘소즈이호덴, 센다이
어린 시절 이름마사치요 (政千代)
이명오야카타사마 (大屋形様, 은거 후)
계명청룡원전고육오국주소산융공대거사 (青龍院殿故陸奥国主紹山隆公大居士)
관직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가문다테 씨
무쓰센다이 번 번주
가족 관계
아버지다테 나리무라
어머니다카쓰카사 세이시
형제자매다테 지카무네, 나리무네
배우자도쿠가와 이에나리의 3녀 아야히메 (婚約者)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11녀 아사히메 (婚約者)
양자나리무네
센다이 번주
직책센다이번 번주
대수9대
임기 시작1796년
임기 종료1812년
이전 번주다테 나리무라
다음 번주다테 나리무네
기타
특징특례에 따라 오메미에 없이 17세에 은거가 허용된 번주. 재직 중 2번 말기 양자의 금지에 저촉됨. 일설에는 사망 시기가 공식 기록보다 3년 빠르다고 함.

2. 생애

1796년 3월 2일(1796년4월 9일) 8대 번주 다테 나리무라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딸 세이시(노부코)였다.[2]

생모 세이시는 출산 후 회복이 좋지 않아 같은 해 4월 16일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같은 해 4월 21일 조부 다테 시게무라가 사망하고, 7월 27일 아버지마저 사망하여 생후 1년도 되지 않아 마사치요(지카무네)가 센다이 번주를 상속받게 되었다.[2]

원래는 정2품 쇼군알현을 받은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속받을 수 없었지만, 나리무라의 사망을 에도 막부와 가신들에게 숨긴 채 친족인 와카도시요리 호리타 마사아츠,[2] 도이 도시카타, 칸신인과의 협의 결과, 8월 15일 막부에 말기 양자로 상속을 요청하여 10월 29일 승인받았다. 동시에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셋째 딸 아야히메와 약혼했다.[2]

칸신인이 양육과 보좌를 맡았고, 호리타 마사아쓰, 다무라 무라토시 등의 후견을 받았다. 칸신인은 번정을 나카무라 가게사다, 오우치 요시카도에게 보좌하게 하고, 번내 경호는 다테 무라지, 다테 무라쓰네, 다테 무라유키에게 맡겼으며, 중신들에게는 중요 안건을 다테 무라스에 등에게 상담하도록 명하여 보좌 체제를 굳혔다.[2]

1797년 센다이 번에서 사상 최대의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이는 행정 개혁과 낭비 삭감 등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이 봉기에 자극받아 상급 번사 61명을 포함한 2033명의 번사에 의한 '사무라이 잇키'도 계획되었다. 같은 해 아야히메가 사망했다.[2]

1805년 칸신인이 사망하고, 친할머니 쇼소인(기타야마 씨)이 보좌와 양육을 맡았다. 1806년 6월 11일 아야히메의 이복 여동생 아사히메와 다시 약혼했다. 1807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후견인이 되었다.[2]

분카 노략질로 인해 1808년 막부는 센다이 번에 경비병 파병을 명령, 이투루프 섬, 쿠나시르 섬, 하코다테에 총 1700명이 파병되었다.[2]

1809년 1월 4일 천연두에 걸려 위독해졌으나 살아남았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고, 이복 동생 도쿠사부로(후의 다테 나리무네)가 번주 대행을 맡았다.[2]

1810년 이름을 지카무네로 정했지만, 1812년 동생 도쿠사부로를 양자로 삼고 같은 해 2월 7일 은거를 막부에 제출했다. 17세에 알현도 하지 않은 채 은거하는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이에나리의 사위였기 때문에 특별히 허가되었다.[1] 은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지카무네의 약혼자 아사히메는 후쿠이 번 주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와 결혼했다.[2]

일설에는 1809년 1월 4일 천연두에 걸려 그대로 14세에 요절했다는 설도 있다. 센다이 번은 나카무라 가게사다의 기지로 지카무네의 죽음을 3년간 은폐하여 개역의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막부는 지카무네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도호쿠 최대의 번이었기 때문에 굳이 방치했다는 설, 이에나리 아래에서 방만한 정치가 행해졌기 때문에 뇌물을 보내 위기를 넘겼다는 설, 홋타 마사아츠가 와카도시오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2. 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다테 나리무라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마사치요(政千代)였다. 어머니는 간파쿠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딸 노부코(信子)로, 고카쿠 천황의 재종사촌이 된다.[2] 그러나 어머니는 지카무네가 태어난 직후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고,[2] 같은 해에 할아버지 다테 시게무라와 아버지 나리무라도 사망하여, 생후 1년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센다이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원래 쇼군의 알현을 받지 않은 후계자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으나, 나리무라의 죽음을 에도 막부와 가신들에게 숨기고 친족인 호리타 마사아쓰와 도이 도시카타, 그리고 할머니 칸신인과의 협의를 통해 1796년 10월 29일에 상속을 받았다. 동시에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셋째 딸인 아야히메와 약혼했다.[1]

칸신인이 양육과 보좌를 맡았고, 칸신인과 친척 다이묘인 도이 도시카타나 다무라 무라토시 등과의 상담 결과, 호리타의 후견을 받게 되었다. 칸신인은 번의 정치는 나카무라 가게사다와 오오우치 요시카도에게 보좌를 받도록 하고, 번내 경호는 다테 무라지, 다테 무라쓰네, 다테 무라유키에게 맡겼으며, 중신에게는 중요 안건을 다테 무라스에 등에게 상담하도록 하여 지카무네의 보좌 체제를 굳혔다.

1797년에는 센다이 번에서 사상 최대의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이는 전대에 실패한 간세이 신법의 결과로 행해진 반동 행정으로, 행정 개혁이나 낭비 삭감, 관리의 기강 숙청의 불철저가 원인이었다. 이 봉기에 자극받아 상급 번사 61명을 포함한 2033명의 번사에 의한 '사무라이 잇키'도 계획되었다. 같은 해 아야히메가 사망한다.

1805년에는 칸신인이 사망하고, 대신 친할머니인 쇼소인(키타야마 씨)이 보좌와 양육에 관여한다.

1806년 6월 11일 아야히메의 이복 여동생인 아사히메와 다시 약혼한다. 1807년에는 호리타 마사아츠가 에조치 순검을 막부로부터 임명받은 4개월 동안,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후견인이 된다.

분카 노략질에 의해 1808년에 막부는 센다이 번에 경비병 파병을 명령하고, 이투루프 섬이나 쿠나시르 섬, 하코다테에 총 1700명이 파병된다.

1809년 1월 4일, 천연두에 걸려 위독해진다. 이후 후유증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고, 이 해부터 이복 동생인 도쿠사부로(후의 다테 나리무네)가 번주 대행으로서 의식과 접객에 임한다.

1810년에 이름을 '''지카무네'''(周宗)라고 칭했지만, 두창의 후유증이 회복되지 않아, 1812년에 동생 도쿠사부로를 양자로 삼아, 같은 해 2월 7일에 은거하고 싶다는 뜻을 막부에 제출한다. 17세에, 알현도 하지 않은 채 은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원래 인가받기 어려웠지만, 이에나리의 사위였기 때문에 특례로 은거가 인가되었다.[1]

2. 2. 번정 운영과 시련

다테 나리무라의 장남으로 1796년 4월 9일 에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딸 노부코(신쇼인)였다. 지카무네는 고카쿠 천황의 재종사촌이기도 했다.[2]

어머니 노부코는 출산 후유증으로 1796년 4월 16일 2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같은 해 4월 21일에는 할아버지 다테 시게무라가, 7월 27일에는 아버지 나리무라가 사망하여 생후 1년도 안 돼 센다이 번주를 상속받게 되었다.[2]

원래 쇼군의 알현을 받지 않은 후계자는 상속받을 수 없었지만, 나리무라의 죽음을 에도 막부와 가신들에게 숨긴 채 와카도시요리 호리타 마사아쓰와 도이 도시카타, 할머니 칸신인의 협의 결과, 1796년 8월 15일 막부에 말기 양자로 상속을 요청하여 10월 29일 승인을 받았다. 동시에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셋째 딸 아야히메와 약혼했다.[2]

칸신인이 양육과 보좌를 맡았고, 호리타 마사아쓰, 다무라 무라토시 등의 후견을 받았다. 칸신인은 번정을 나카무라 가게사다, 오우치 요시카도에게 보좌하게 하고, 번내 경호는 다테 무라지, 다테 무라쓰네, 다테 무라유키에게 맡겼으며, 중신들에게는 중요 안건을 다테 무라스 등에게 상담하도록 명하여 보좌 체제를 굳혔다.[2]

1797년, 센다이 번에서 사상 최대의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이는 행정 개혁과 낭비 삭감 등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이 봉기에 자극받아 상급 번사 61명을 포함한 2033명의 번사에 의한 '사무라이 잇키'도 계획되었다. 같은 해 아야히메가 사망했다.[2]

1805년 칸신인이 사망하고, 친할머니 쇼소인(기타야마 씨)이 보좌와 양육을 맡았다. 1806년 6월 11일 아야히메의 이복 여동생 아사히메와 다시 약혼했다. 1807년에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후견인이 되었다.[2]

분카 노략질로 인해 1808년 막부는 센다이 번에 경비병 파병을 명령, 이투루프 섬, 쿠나시르 섬, 하코다테에 총 1700명이 파병되었다.[2]

1809년 1월 4일 천연두에 걸려 위독해졌다. 이후 후유증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고, 이복 동생 도쿠사부로(후의 다테 나리무네)가 번주 대행을 맡았다.[2]

1810년 이름을 지카무네로 정했지만, 1812년 동생 도쿠사부로를 양자로 삼고 같은 해 2월 7일 은거를 막부에 제출했다. 17세에 알현도 하지 않은 채 은거하는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이에나리의 사위였기 때문에 특별히 허가되었다.[1] 은거 후 곧 사망했다. 지카무네의 약혼자 아사히메는 후쿠이 번 주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와 결혼했다.[2]

2. 3. 천연두와 은거

분카 6년 (1809년) 1월 4일, 다테 지카무네는 천연두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1] 병에서 살아남았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외모가 손상되어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다.[1] 이 때문에 이 해부터 지카무네가 은거할 때까지, 이복 동생인 도쿠사부로(후의 다테 나리무네)가 번주 대행으로서 의식과 접객에 임했다.

분카 9년 (1812년), 지카무네는 두창의 후유증이 회복되지 않아 동생 도쿠사부로를 양자로 삼고, 같은 해 2월 7일에 은거하겠다는 뜻을 막부에 제출했다. 17세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알현도 하지 않은 채 은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사위였기 때문에 특별히 은거가 허가되었다.[1] 은거 후에는 오야카타 님이라고 불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묘는 센다이의 즈이호덴에 있다.

3. 죽음에 대한 의혹

지카무네는 1806년 1월 4일 천연두에 걸린 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다테 나리무네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지 두 달 만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많은 역사가들은 지카무네가 실제로 1806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이 당국에 비밀로 유지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센다이 번은 다테 나리무라의 사망 이후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는 대체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지카무네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면 이 약속은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3]

일설에는 1809년 1월 4일에 천연두에 걸려 그대로 14세에 요절했다고 한다. 후사가 없었고 17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규정상 막부로부터 말기 양자에 의한 상속 인가가 내려지지 않아 센다이 번은 무자 단절의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봉행인 나카무라 카게사다(나카무라 가 당주)의 기지로, 주소의 죽음을 3년간 은폐하여 다테 가는 주소의 가독 상속에 이은 개역의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3]

막부는 주소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다테 가는 도호쿠에서도 최대의 대번이므로 굳이 방치했다고도 한다. 또한, 이때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 아래에서 방만한 정치가 행해졌기 때문에, 다테 가는 막부에 뇌물을 보내 위기를 넘겼다고도 한다. 후견인인 홋타 마사아츠가 와카도시요리를 맡고 있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라는 설도 있다.[3]

다만, 이상의 일은 공식 기록에는 없기 때문인지, 『센다이 시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3]

4.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다테 나리무라
어머니다카츠카사 노부코(1775–1796)
부인
양자다테 나리무네 (1796년 - 1819년) - 친동생


5. 지카무네 시대의 가신

;《일문》

이시카와 슈마, 다테 토고로, 다테 쇼겐, 다테 아키, 다테 시키부, 다테 우콘, 다테 하야토, 다테 쿠라, 다테 주덴, 시라카와 야시치자에몬, 미사와 시나노

;《봉행》 등

나카무라 휴가, 카타쿠라 코쥬로, 마츠마에 이즈미, 엔도 칸게유, 다만키 시마, 이시다 부젠, 고토 손베

;【도시요리】 (센다이 번의 직제에서는 와카도시요리 또는 와카도시요리 격)

오조 감물, 오우치 지쿠고, 후루우치 지쿠젠, 나가누마 토사, 스즈키 감물, 다만키 슈젠

;【요닌】

아베 세이지, 이즈미다 이사노신, 타다노 이가 (타다노 마구스의 재혼 상대), 히노 에이마 (노부키요, 에토로후 섬 비토를 맡다), 히라타 고로자에몬, 미야자와 분자에몬, 사이토 사고로, 오노 분키치, 키무라 코시치, 히라가 아와지, 이리에 곤타유, 유자 지로자에몬, 다만키 요스케, 타나베 키자에몬, 아라오 신자에몬

;【에도 루스이】 (센다이 번의 직제에서는 공의사)

오코치 로쿠로자에몬, 마츠키 겐노조

6. 편휘를 받은 인물


  • 다테 '''무네'''스미 (실제 동생·양자(다음 대의 번주), 이후 사이무네로 개명)
  • 다테 '''무네'''미쓰 (시키부, 도메 다테 가문, 12대 번주 다테 나리카니의 생부)
  • 다테 '''무네'''요시 (도고로, 와타리 다테 가문)
  • 다테 '''무네'''타카 (우콘, 이와야도 다테 가문)
  • 다테 '''무네'''노리 (하야토, 미야토코 다테 가문)
  • 다테 '''무네'''치카 (나이조, 이와데야마 다테 가문)
  • 다테 '''무네'''카즈 (가와사키 다테 가문, 다테 주덴 무라카타의 아들)

참조

[1] 문서 仙台藩 역대 번주의 관례가 되어 있는 쇼군으로부터의 이름 한 글자(偏諱) 수여는 받지 않았다.
[2] 문서 6대 번주・伊達宗村 (仙台藩主)의 8남.
[3] 문서 당시, 원칙적으로 말기 양자를 세울 수 있는 것은 17세 이후이며, 이 설대로 周宗이 14세에 사망했다면,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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