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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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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 도쿄도와 사이타마현에서 발생한 연쇄 유괴 살인 사건이다.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는 4명의 어린이를 유괴,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등 엽기적인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체포 후에도 범행 동기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며, 1997년 사형이 선고되어 2008년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 미디어의 과열된 보도 경쟁, 창작물에 대한 규제 강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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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
사건 개요
명칭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
정식 명칭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7호 사건
발생 장소일본: 도쿄도, 사이타마현
발생 날짜1988년 - 1989년
피해 대상유아, 여아
사망자 수4명
범인미야자키 쓰토무
용의해당 없음
대처체포, 기소
사죄없음
형사 소송
판결사형 (집행 완료)
관할

2. 사건

이 사건은 4세에서 7세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범인이 범행 성명을 신문사에 보내거나 초벌판된 피해자 유골을 유족에게 보내는 등 매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구미(유럽과 미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아동 대상 성폭행 목적의 유괴·살인 사건과 비교되기도 했으며, 일본 범죄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도입이 검토되었다.[9]

사건의 특이성으로 인해 발생 초기부터 언론의 치열한 보도 경쟁이 벌어졌고, 이후 범인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미디어 스크럼을 비롯한 보도 방식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1989년 7월 23일,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는 도쿄도 하치오지시 미야마초에서 다른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던 중 피해 여아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하치오지 경찰서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8월 9일, 미야자키는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에 일부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진술을 시작했고, 8월 10일 그의 진술대로 시신이 발견되면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실명 보도되었다. 8월 11일 유괴 및 살인 혐의로 다시 체포된 미야자키는 9월까지 4건의 사건에 대한 관여를 차례로 진술했다. 미야자키는 체포 전부터 과거 성범죄자 명단에 올라 수사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미야자키의 집에서 5,763편의 실사 드라마 등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압수하여 분석했다. 74명의 수사 인력과 50대의 비디오덱을 동원한 2주간의 수사 결과, 피해자 유아 살해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1989년 9월 2일, 미야자키는 기소되었고, 이후 그의 진술에 따라 사체가 발견되면서 일련의 사건 범인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미야자키는 공판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는 등 석연치 않은 발언을 반복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미야자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례적으로 판결 이유 낭독 없이 주문이 먼저 선고되었다.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공소를 기각하고 1심의 사형 판결을 지지했다. 변호측은 미야자키가 도쿄구치소에서 환청을 호소하며 투약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재감정을 요구하며 상고했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사형 확정에 대해 "바보 같은 재판관은 나중에 울게 될 것"이라고 말하거나, "판결은 무엇인가의 실수"라고 주장했다.

사형 확정 후, 미야자키는 편지를 통해 교수형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약물 주사를 통한 사형을 원했다. 그는 교수대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수렁의 공포"라고 표현하며 인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크게 보도된 것에 대해 "역시 나는 인기인"이라고 말하고,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는 "특별히 없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야자키는 끝까지 유족에 대한 사죄나 사건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
사건 일지:

발생일사건 내용
1988년 8월 22일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세 여아 A가 유괴·살해되었다.[1] 미야자키는 살해 직후 사후 경직으로 굳어진 A의 시신에 음란 행위를 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1988년 10월 3일사이타마현 한노시에서 7세 여아 B가 유괴·살해되었다.[12] 미야자키는 살해 직후 음란 행위를 했다.
1988년 12월 9일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에서 4세 여아 C가 유괴·살해되었다.[13]
1988년 12월 15일C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1988년 12월 20일C의 집에 엽서가 도착했다.[20]
1989년 2월 6일A의 집에 뼛조각 등이 담긴 상자가 놓였다.[5]
1989년 2월 10일 ~ 11일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와 A의 집에 이마다 유코 명의의 범행 성명이 발송되었다.[8]
1989년 3월 11일이마다 유코 명의의 고백문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와 B의 집에 도착했다.
1989년 6월 6일5세 여아 D가 유괴·살해되었다.
1989년 6월 11일D의 토막 살인 시체가 발견되었다.
1989년 7월 23일미야자키,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별건의 성추행 사건으로 현행범 체포.
1989년 8월 9일미야자키, D의 살해 자백.
1989년 8월 10일D의 머리 부분 발견. 언론 보도 시작.
1989년 8월 11일미야자키, D의 유괴, 살인, 사체 유기 혐의로 재체포.
1989년 8월 13일미야자키, A, C 유괴 살해 자백.
1989년 9월 1일경찰청 광역중요지정 117호로 지정.
1989년 9월 2일검찰, 미야자키 기소.
1989년 9월 5일미야자키, B의 살해 자백.
1989년 9월 6일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쓰카이치정(현 아키루노시)에서 B의 유골 발견.
1989년 9월 13일A의 유골 발견.



미야자키는 어린 딸을 살해할 때마다 짚인형을 놓고, 방을 어둡게 한 뒤 머리띠를 하고 촛불을 켠 채 검은 옷을 입고 의식을 치렀다고 재판에서 주장했다.

2. 1. 사건 개요

1988년 8월부터 1989년 6월까지 도쿄도사이타마현에서 4~7세의 여아 4명이 연쇄적으로 유괴, 살해된 사건이다.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는 피해자들의 시신을 훼손하고, 일부를 유족에게 보내거나 범행 성명문을 언론사에 보내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범인이 범행 성명을 신문사에 보내거나, 초벌판된 피해자의 유골을 유족에게 보내는 등 매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구미(유럽과 미국)를 중심으로 자주 발생하는 아동에 대한 성폭행을 목적으로 한 유괴 및 살인 사건 등과 비교되기도 했으며, 전후 일본 범죄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도입이 검토되었다.[9]

특이성이 강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 초기부터 치열한 보도 경쟁이 벌어졌다. 나중에 범인의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미디어 스크럼을 비롯한 보도 방식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1989년 7월 23일, 미야자키 츠토무는 도쿄도 하치오지시 미야마초에서 별건의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던 중 피해 여아의 부친에게 붙잡혀(사인 체포) 하치오지 경찰서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8월 9일에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의 일부에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진술을 시작했다. 8월 10일 진술대로 시신이 발견되었고, 그날 석간과 TV를 통해 대대적인 실명 보도가 시작되었다. 8월 11일에 유괴와 살인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이후 9월에 걸쳐 4건의 사건에 대한 관여를 차례로 진술했다. 미야자키는 체포되기 전부터 과거 성범죄자 명단에 따라 수사선상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미야자키의 집을 수색하여 그가 소유하고 있던 5,763편의 실사 드라마 등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압수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74명의 수사 인력과 50대의 비디오덱을 동원했다. 2주간의 수사를 통해 피해자 유아 살해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이 발견됐다. 1989년 9월 2일 미야자키는 기소되었고, 이후 그의 진술에 따라 사체가 발견되면서 일련의 사건 범인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미야자키는 공판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 "내 차와 비디오를 돌려달라"는 등 석연치 않은 발언을 반복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미야자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통상적으로 사형을 선고할 때는 피고인의 정신 상태를 고려해 판결 이유를 낭독한 다음 주문을 뒤로 미루지만, 이 재판에서는 예외적으로 첫머리에서 주문을 선고받았다. 그 후 공소했으나, 2001년 6월 28일에 도쿄 고등재판소에서도 공소가 기각되어 1심 판결의 사형을 지지했다(카와베 요시마사 재판장). 변호측은 미야자키가 도쿄구치소에서 환청을 호소하며 계속적으로 투약을 받고 있는 것 등을 들어 고등 법원에 재감정을 요구하며 상고했지만, 2006년 1월 17일에 최고재판소 제3 소법정은 변호측의 상고를 기각, 사형이 확정되었다(후지타 토오야스 재판장). 미야자키는 자신의 사형 확정에 대해 저서에서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 재판관은 나중에 울게 된다"라고 말했고, 면회 온 사람에게도 "그 판결은 무엇인가의 실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형 확정 후 편지에서 교수형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미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약물 주사를 통한 사형을 원했다. 그는 교수대에서 낙하하는 순간을 「수렁의 공포에 빠뜨려 그것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크게 보도된 것을 두고 "역시 나는 인기인이다"라고 말했으며, 피해자나 유족에 대한 생각을 추궁받자 "특별히 없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야자키는 끝내 유족에 대한 사죄와 사건에 대한 반성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사건 일지:

날짜사건 내용
1988년 8월 22일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세 여아 A 씨 유괴·살해.[1] 미야자키는 살해 직후 사후 경직으로 굳어진 A의 시신에 음란 행위를 하는 모습을 비디오 촬영했다.
1988년 10월 3일사이타마현 한노시에서 7세 여아 B 씨 유괴·살해.[12] 미야자키는 유괴 직후 살해하고 음란 행위를 했다.
1988년 12월 9일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에서 4세 여아 C 씨 유괴·살해.[13] 미야자키는 유괴 직후 살해했다.
1988년 12월 15일C의 시신이 전라 상태로 발견됨.
1988년 12월 20일C의 집에 엽서가 도착함.[20]
1989년 2월 6일A의 집에 종이 조각과 뼛조각 등이 들어 있는 골판지 상자가 놓여짐.[5][7]
1989년 2월 10일이마다 유코 명의로 A 사건에 관한 첫 번째 범행 성명문이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로 우송됨.[8]
1989년 2월 11일같은 내용의 범행 성명문이 A의 집에 전달됨.[8]
1989년 3월 11일이마다 유코 명의의 두 번째 서한 고백문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와 B의 집에 도착함.
1989년 6월 6일5세 여아 D가 유괴·살해됨.
1989년 6월 11일D의 토막 살인 시체가 발견됨.
1989년 7월 23일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어린 자매를 노린 성추행 사건을 일으킨 미야자키 츠토무가 피해 여아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현행범으로 체포됨.
1989년 8월 9일D의 살해를 자백함.
1989년 8월 10일D의 머리 부분이 발견됨. 범인에 대한 매스컴 보도가 시작됨.
1989년 8월 11일D의 유괴, 살인, 시체 유기 혐의로 다시 체포됨.
1989년 8월 13일A, C 유괴 살해 자백함.
1989년 9월 1일경찰청 광역중요지정 117호로 지정됨.
1989년 9월 2일검찰이 기소를 단행함.
1989년 9월 5일B의 살해를 자백함.
1989년 9월 6일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쓰카이치정(현재의 아키루노시)에서 B의 유골 발견됨.
1989년 9월 13일A의 유골이 발견됨.



미야자키는 어린 딸을 살해할 때마다 집에 짚인형을 놓고 방을 어둡게 했으며, 머리에 머리띠를 하고 촛불 몇 개를 쓴 검은 옷을 입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할아버지 부활 의식을 치렀다고 재판에서 주장했다.

2. 2. 사건 일지

발생일사건 내용
1988년 8월 22일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첫 번째 피해자(당시 4세)가 유괴, 살해되었다.[1]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는 살해 직후, 사후 경직으로 굳어진 시신에 음란 행위를 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1988년 10월 3일사이타마현 한노시에서 두 번째 피해자(당시 7세)가 유괴, 살해되었다.[12] 미야자키는 살해 직후 바로 음란 행위를 했다.
1988년 12월 9일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에서 세 번째 피해자(당시 4세)가 유괴, 살해되었다.[13]
1988년 12월 15일사이타마현 이루마군 나구리촌에서 세 번째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7]
1988년 12월 20일세 번째 피해자 집에 미야자키가 보낸 엽서가 도착했다.[20]
1989년 2월 6일첫 번째 피해자 집에 뼛조각 등이 담긴 상자가 놓였다.[5]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에 이마다 유코 명의의 첫 번째 범행 성명이 발송되었다.[8]
1989년 2월 10일 ~ 11일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와 첫 번째 피해자의 집에 이마다 유코 명의의 첫 번째 범행 성명이 발송되었다.[8]
1989년 3월 11일이마다 유코 명의의 두 번째 서한 고백문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와 두 번째 피해자 집에 도착했다.[8]
1989년 6월 6일도쿄도에서 네 번째 피해자(당시 5세)가 유괴, 살해되었다.
1989년 6월 11일네 번째 피해자의 토막 살인 시체가 발견되었다.
1989년 7월 23일미야자키 츠토무,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별건의 성추행 사건으로 현행범 체포.
1989년 8월 9일미야자키, 네 번째 피해자 살해 자백.
1989년 8월 10일네 번째 피해자의 머리 부분 발견. 언론에서 범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도가 시작되었다.
1989년 8월 11일미야자키, 네 번째 피해자 유괴, 살인, 사체 유기 혐의로 재체포.
1989년 8월 13일미야자키, 첫 번째, 세 번째 피해자 유괴 살해 자백.
1989년 9월 1일경찰청, 이 사건을 광역 중요 지정 117호로 지정.
1989년 9월 2일검찰, 미야자키 기소.
1989년 9월 5일미야자키, 두 번째 피해자 살해 자백.
1989년 9월 6일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쓰카이치정(현 아키루노시)에서 두 번째 피해자의 유골 발견.
1989년 9월 13일첫 번째 피해자의 유골 발견.


3. 범인

이 사건은 4세에서 7세의 저연령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범인이 범행 성명을 신문사에 보내거나 초벌판된 피해자의 유골을 유족에게 보내는 등 매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러한 특징은 구미에서 자주 발생하는 아동 대상 성폭행 목적의 유괴 및 살인 사건과 비교되기도 했으며, 전후 일본 범죄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도입이 검토되기도 했다.

사건의 특이성으로 인해 발생 초기부터 치열한 보도 경쟁이 벌어졌으며, 이후 범인의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미디어 스크럼을 비롯한 언론 보도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9년 7월 23일, 범인 미야자키 쓰토무도쿄도 하치오지시 미야마초에서 다른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던 중 피해 여아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사인 체포) 하치오지 경찰서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8월 9일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에 일부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진술을 시작했고, 8월 10일 진술대로 시신이 발견되면서 당일 석간과 TV를 통해 실명 보도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8월 11일 유괴 및 살인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후 9월까지 4건의 사건에 대한 관여를 차례로 진술했다. 미야자키는 체포 전부터 과거 성범죄자 명단에 올라 수사 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미야자키의 집에서 5,763편의 실사 드라마 등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압수하여 분석했다. 74명의 수사 인력과 50대의 비디오덱을 동원하여 2주간 수사한 결과, 피해 여아를 살해한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1989년 9월 2일 기소 후, 미야자키의 진술에 따라 사체가 발견되면서 일련의 사건 범인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미야자키는 공판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 "내 차와 비디오를 돌려달라"는 등 석연치 않은 발언을 반복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이례적으로 판결 이유를 낭독하기 전에 주문을 먼저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했으나,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도 항소 기각되어 1심의 사형 판결이 유지되었다. 변호인 측은 미야자키가 도쿄 구치소에서 환청을 호소하며 지속적인 투약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재감정을 요구하며 상고했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사형 확정에 대해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그 재판관은 나중에 울게 된다"라고 말했으며, 면회 온 사람에게도 "그 판결은 무언가의 실수"라고 말했다. 사형 확정 후 편지에서 교수형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미국에서나 가능한 약살형을 원했다. 그는 교수대에서 낙하하는 순간을 "수렁의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라며 인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크게 보도된 것을 "역시 나는 인기인이다"라고 말했으며,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는 "특별히 없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야자키는 죽는 순간까지 유족에 대한 사죄나 사건에 대한 반성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미야자키는 여자아이를 살해할 때마다 짚인형을 놓고 방을 어둡게 한 뒤, 머리띠를 하고 촛불 몇 개를 켜 검은 옷을 입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할아버지 부활 의식을 치렀다고 재판에서 주장했다.

다음은 범행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이다.

범행 관련 사건 일지
날짜사건 내용
1988년 8월 22일4세 여아 A 씨 유괴 및 살해. 사후 경직된 시신을 성추행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13] 동기에 대해 "갑자기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라고 증언.[13]
1988년 10월 3일7세 여아 B 씨 유괴 및 살해. 살해 직후 성추행. 다리가 실룩거렸다는 범인의 증언.[13] 동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스릴이 있었다"라고 진술.[13]
1988년 12월 9일4세 여아 C가 가와고에시에서 실종.[13]
1988년 12월 15일C의 시신이 전라 상태로 발견됨.[13]
1988년 12월 20일C의 집에 신문 기사를 오려 붙인 엽서 도착.[20]
1989년 2월 6일A의 집에 종이 조각과 뼛조각 등이 든 상자 배달.[13]
1989년 2월 10일이마다 유코 명의의 범행 성명이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로 발송.[13]
1989년 2월 11일A의 집에 범행 성명 전달.[13]
1989년 3월 11일이마다 유코 명의의 두 번째 서한 고백문이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와 B의 집에 도착.[13]
1989년 6월 6일5세 여아 D 양 유괴 및 살해. D의 양손을 구워 먹었다고 주장했으나, 판결에서는 허위로 판단.[13]
1989년 6월 11일D의 토막 살인 시체 발견.[13]
1989년 7월 23일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어린 자매를 노린 성추행 사건을 일으켜 현행범 체포.[13]
1989년 8월 9일D의 살해 자백.[13]
1989년 8월 10일D의 머리 부분 발견. 범인에 대한 매스컴 보도 시작.[13]
1989년 8월 11일D의 유괴, 살인, 시체 유기 혐의로 재체포.[13]
1989년 8월 13일A, C 유괴 살인 자백.[13]
1989년 9월 1일경찰청 광역중요지정 117호로 지정.[13]
1989년 9월 2일검찰 기소.[13]
1989년 9월 5일B의 살해 자백.[13]
1989년 9월 6일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쓰카이치정(현재의 아키루노시)에서 B의 유골 발견.[13]
1989년 9월 13일A의 유골 발견.[13]


3. 1. 미야자키 쓰토무

1962년 도쿄도에서 태어났다. 체포 당시 26세였으며, 인쇄업에 종사하고 있었다.[1] 선천적으로 손에 기형이 있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은둔형 외톨이 성향을 보였다. 오타쿠 문화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특히 로리콘 및 호러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80]

미야자키는 재판 과정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 "내 차와 비디오를 돌려달라"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을 반복했다.[32]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일반적인 사형 선고와 달리, 이례적으로 판결 이유 낭독 전에 주문이 먼저 선고되었다.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도 항소가 기각되어 1심의 사형 판결이 유지되었다. 변호인 측은 미야자키가 도쿄 구치소에서 환청을 호소하며 지속적인 투약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재감정을 요구하며 상고했으나,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32]

사형 확정 후, 미야자키는 편지에서 교수형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약살형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교수대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수렁의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라며 인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크게 보도된 것을 두고 "역시 나는 인기인이다"라고 말했으며,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는 "특별히 없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답했다.[32]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야자키는 죽는 순간까지 유족에 대한 사죄나 사건에 대한 반성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32]

3. 2. 범행 동기

미야자키 츠토무는 수사 과정 및 재판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는 등 횡설수설하여 범행 동기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32] 어린 딸을 살해할 때마다 짚인형을 놓고 방을 어둡게 한 뒤, 머리띠를 하고 촛불 몇 개를 켜 검은 옷을 입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할아버지 부활 의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건의 기이함 때문에 온갖 추측이 난무했고, 미야자키 자신이 요령부득의 진술을 반복했기 때문에 재판에서도 동기를 완전히 특정하지는 못했다.

감정을 맡은 의사들은 미야자키가 원래 소아성애증(페도필리아)은 아니지만,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욕구 충족이 어려워 어린 여자아이를 대체 대상으로 삼았다고 증언했다. 제1차 정신 감정 감정 의사 호자키 히데오는 법정 증언에서 "성인을 포기하고 유녀를 대체물로 한 것 같고, 소아성애나 시체성애 등의 경향은 볼 수 없다"고 했다. 간이 정신 감정에서도 "유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성도착은 인정되지 않고…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은 대체이다"라고 밝혔다.

1989년 8월 24일, 미야자키는 도쿄지방검찰청 총무부 진단실에서 간이정신감정을 받았다. 그 결과, 조현병(정신분열증의 당시 호칭)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서는 인격장애의 범위에 그친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검찰은 기소를 단행했다.

공판 개시 후인 1992년 12월 18일부터, 변호측의 의뢰로 3명의 감정의에 의한 3번째(공판 개시 후는 2번째)의 재감정이 시작되었다. 1994년 12월에 제출된 감정서에서는 1명은 조현병, 2명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 다른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일각에서는 로리콘, 시체성애, 시체 가학성애, 페티시즘 등 복합적인 성도착증이 범행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4. 재판

이 사건은 4세에서 7세의 어린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했고, 범인이 범행 성명을 신문사에 보내거나 초벌판된 피해자의 유골을 유족에게 보내는 등 매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점에서, 구미에서 자주 발생하는 아동 성폭행 목적의 유괴 및 살인 사건과 비교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후 일본 범죄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도입이 검토되었다.

특이성이 강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 초기부터 치열한 보도 경쟁이 벌어졌고, 이후 범인의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언론 보도 방식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1989년 7월 23일, 범인 미야자키 쓰토무는 다른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던 중 피해 여자아이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8월 9일, 미야자키는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 중 일부에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진술을 시작했다. 8월 10일, 그의 진술대로 시신이 발견되면서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실명 보도가 시작되었다. 8월 11일, 미야자키는 유괴 및 살인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이후 9월까지 4건의 사건에 대한 관여를 차례로 진술했다. 미야자키는 체포되기 전부터 과거 성범죄자 명단에 올라 수사 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미야자키의 방에서 5,763편의 비디오테이프를 압수하여 분석했고, 2주간의 수사를 통해 피해자를 살해한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을 발견했다. 1989년 9월 2일, 미야자키는 기소되었고, 이후 그의 진술에 따라 시신이 발견되면서 일련의 사건 범인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미야자키는 공판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 "내 차와 비디오를 돌려달라"는 등 석연치 않은 발언을 반복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미야자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통상 사형을 선고할 때는 피고인의 정신 상태를 고려하여 판결 이유를 낭독하고 주문을 뒤로 미루지만, 이 재판에서는 예외적으로 첫머리에서 주문을 선고했다. 이후 미야자키는 항소했지만,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판결의 사형을 지지했다. 변호인 측은 미야자키가 도쿄 구치소에서 환청을 호소하며 계속적으로 투약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재감정을 요구하며 상고했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는 변호인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사형 확정에 대해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그 재판관은 나중에 울게 된다"라고 말했고, 면회 온 사람에게도 "그 판결은 무엇인가의 실수"라고 이야기했다.

사형 확정 후, 미야자키는 편지에서 교수형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미국에서나 있을 법한 약물 주사를 통한 사형을 원했다. 그는 교수대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수렁의 공포에 빠뜨리는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크게 보도된 것을 두고 "역시 나는 인기인이다"라고 말했으며,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는 "특별히 없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답했다.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 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야자키는 끝내 유족에 대한 사죄나 사건에 대한 반성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사건 발생부터 사형 집행까지의 주요 날짜는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내용
1989년 8월 9일D 살해 자백
1989년 8월 10일D의 머리 부분 발견, 언론 보도 시작
1989년 8월 11일D의 유괴, 살인, 사체 유기 혐의로 재체포
1989년 8월 13일A, C의 유괴 살인 자백
1989년 9월 1일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7호로 지정
1989년 9월 2일검사 기소
1989년 9월 5일B의 살해 자백
1989년 9월 6일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츠카이치마치 (현 아키루노시)에서 B의 유골 발견
1989년 9월 13일A의 유골 발견


4. 1. 1심 (도쿄 지방재판소)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9년 7월 23일, 도쿄도 하치오지시 미야마치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상대로 음란 행위를 하던 중 피해 아동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사인의 체포) 하치오지 경찰서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1989년 8월 9일, 미야자키는 여자아이 D의 살해를 자백했다.[33] 8월 10일, 그의 자백대로 오쿠타마정 우메자와 지구의 산속에서 여자아이 D의 두개골이 발견[35]되었고, 8월 11일 미야자키는 미성년자 유괴, 살인, 사체 유기 혐의로 재체포되었다.[36]

미야자키의 자택에서 발견된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를 분석하기 위해 경찰은 74명의 수사원과 50대의 비디오 데크를 동원했다. 2주간의 수사를 통해 피해자 어린 여자아이를 살해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발견되었다.

미야자키는 처음에는 사이타마현에서 일어난 3건의 유괴 사건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9월에 걸쳐 4건의 사건에 대한 관여를 모두 자백했다. 1989년 9월 2일, 도쿄 지검은 미야자키를 D 사건에 관한 유괴, 살인, 사체 손괴 및 유기죄로 기소했다.[39]

미야자키는 재판 과정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는 등 석연치 않은 발언을 반복했다.

1990년 3월 30일, 도쿄 지방 재판소 형사 제2부(나카야마 요시후사 재판장)에서 열린 제1심 첫 공판에서, 미야자키는 범행의 외형적 사실은 인정했지만, 유괴 및 살해의 계획성과 살의는 부인했다.[45]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미야자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미야자키에게 완전한 책임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 당시 미야자키는 가끔 주위를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평소처럼 탁상에 펼쳐놓은 노트에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법정을 나올 때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재판부는 체포 당시 미야자키에게 조현병 등을 의심하게 하는 비정상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고, 체포에 의한 구금 반응으로 보았을 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2회 감정이 채용되지 않아 책임 능력이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미야자키는 당일에 항소했다.

4. 2. 항소심 (도쿄 고등재판소)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1심 판결을 유지하며 항소를 기각했다[62][65]

미야자키 츠토무의 변호인은 1999년 11월 12일까지, 미야자키가 사건 당시 심신상실 혹은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하며 무죄 또는 형의 감경을 요구하는 항소 이유서를 제출했다[60]。 1999년 12월 21일, 도쿄고등법원(가와베 요시마사 재판장)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변호인은 미야자키가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주장을 유지했다. 더불어 수사 단계 진술 조서에 수사관의 유도가 의심되는 진술이 있어 신용성에 의문이 있으며, 밀실에서 집행되는 사형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며 사형 판결 파기를 요구했다[62]

검사 측은 미야자키의 수사 단계 자백이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백을 바탕으로 판단된 정신 감정 결과와 "완전 책임 능력이 인정된다"는 감정 결과를 채택한 원심 판결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며 항소 기각을 요구했다[62]

2000년 11월 21일 항소심 공판에서 도쿄고등법원은 1심에서 이루어진 정신 감정 기록과 항소심에서 10차례 진행된 피고인 신문을 바탕으로 추가 정신 감정이 불필요하다고 판단, 변호인의 정신 감정 청구를 기각하고 사실 조사를 마무리했다[63]。 이후 1심에서 채택된 3가지 정신 감정을 토대로 미야자키의 책임 능력 유무를 다시 검토했다[65]

2001년 2월 6일, 제12회 항소심 공판이 결심되었다[64]。 최종 변론에서 변호인은 미야자키가 정신분열병으로 인해 사건 당시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하며 원심 판결 파기를 요구했다[64]。 반면 검사는 미야자키가 주장하는 '또 다른 자신' 등은 범행 당시의 정신 이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언동 자체가 완전 책임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항소 기각을 요구했다[64]

4. 3. 상고심 (최고재판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 제3소법정은 변호인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 (후지타 토모야스 재판장)[67] 변호인 측은 판결 정정을 요구했지만, 2006년 2월 1일에 기각되었다.[4] 이로써 미야자키 츠토무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사형 확정에 대해 저서에서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그 재판관은 나중에 울게 된다"라고 말했고, 면회 온 사람에게도 "그 판결은 무엇인가의 실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2005년 11월 23일, 최고재판소 제3소법정 (후지타 토모야스 재판장)에서 상고심 공판이 열려 변론이 진행된 후 종결되었다.[67] 변호인은 미야자키가 구치소에서 오랫동안 정신과 약물을 처방받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조현병을 상정한 치료가 지속되고 있음을 주장하며, 또한 미야자키는 범행 당시부터 명백히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으므로 수사 단계에서의 진술만 신용성을 인정한 제1심 판결은 사실 오인이라고 주장하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심리를 파기환송할 것을 요구했다.[67] 반면 검사는 수사 단계에서의 진술은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극단적인 성격 편향(인격 장애)은 있었지만, 범행 당시에는 병적인 정신 상태였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상고 기각을 요구했다.[67]

최고재판소 재판관후지타 미츠야스(재판장)・하마다 쿠니오・우에다 토요조・호리고메 유키오
판결 내용피고인(미야자키 츠토무)·변호인 측 상고 기각(사형 판결 확정)


4. 4. 사형 집행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 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45] 미야자키는 냉정하게 집행을 받아들였고, 미야자키의 모친은 사체와 대면한 후에 처치는 구치소에 맡겼다고 한다. 미야자키의 입을 통해 유족에 대한 사죄와 사건에 대한 반성의 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5.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4세에서 7세의 저연령 여아를 대상으로 했고, 범인이 범행 성명을 신문사에 보내거나 초벌판된 피해자 유골을 유족에게 보내는 등 극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점에서, 구미를 중심으로 다발하는 아동 대상 성폭행 목적의 유괴·살해 사건과 비교되며 전후 일본 범죄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도입이 검토되었다.

특이성이 강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 초기부터 치열한 보도 경쟁이 벌어졌고, 이후 범인 미야자키 쓰토무의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미디어 스크럼을 비롯한 언론 보도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1989년 7월 23일, 미야자키 쓰토무는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별건의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던 중 피해 여아의 부친에게 붙잡혀(사인 체포) 하치오지 경찰서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8월 9일, 미야자키는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에 일부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진술을 시작했다. 8월 10일, 진술대로 시신이 발견되자 언론은 대대적인 실명 보도를 시작했다. 8월 11일, 미야자키는 유괴 및 살인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이후 9월까지 4건의 사건에 대한 관여를 차례로 진술했다. 미야자키는 체포되기 전부터 과거 성범죄자 명단에 올라 수사 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미야자키의 방에서 실사 드라마 등을 촬영한 5,763편의 비디오테이프를 압수하여 분석하기 위해 74명의 수사 인력과 50대의 비디오덱을 동원했다. 2주간의 수사 결과, 피해자를 살해한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1989년 9월 2일, 미야자키는 기소되었고, 이후 그의 진술에 따라 사체가 발견되면서 일련의 사건 범인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미야자키는 공판에서 "범행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했다", "쥐 인간이 나타났다", "내 차와 비디오를 돌려달라"는 등 석연치 않은 발언을 반복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미야자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통상 사형 선고 시에는 피고인의 정신 상태를 고려하여 판결 이유를 낭독한 다음 주문을 뒤로 미루지만, 이 재판에서는 예외적으로 첫머리에서 주문이 선고되었다. 이후 공소가 이어졌지만,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공소를 기각하고 1심의 사형 판결을 지지했다(가와베 요시마사 재판장). 변호 측은 미야자키가 도쿄구치소에서 환청을 호소하며 계속적으로 투약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고등법원에 재감정을 요구하며 상고했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 제3소법정은 변호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후지타 토오야스 재판장). 미야자키는 자신의 사형 확정에 대해 저서에서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 재판관은 나중에 울게 된다"라고 말했고, 면회 온 사람에게도 "그 판결은 무엇인가의 실수"라고 말했다.

사형 확정 후, 미야자키는 편지에서 교수형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미국에서나 있을 법한 약물 주사를 통한 사형을 원했다. 그는 옥중에서 쓴 편지를 정리한 저서에서 교수대에서 낙하하는 순간을 "수렁의 공포에 빠뜨려 그것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크게 보도된 것을 "역시 나는 인기인이다"라고 말하고,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각을 추궁받자 "특별히 없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답했다.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대신 하에서 도쿄구치소에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야자키는 끝내 유족에 대한 사죄나 사건에 대한 반성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미야자키의 변호인은 정신 감정을 신청하여 약 1년 5개월 동안 공판이 중단되었다[46]. 이후 5명의 정신과 의사와 1명의 임상심리학자에 의해 정신 감정이 실시되었다[47]. 호자키 히데오 (게이오기주쿠 대학 명예 교수) 등 6명에 의한 이 감정(''호자키 감정'')에서, 호자키 등은 미야자키가 손의 장애에 대한 열등감으로 피해 의식이 강해지기 쉽고, 거기에 성적 흥미와 수집벽이 더해져 범행에 이르렀으며, 사건 당시에는 인격 장애였지만 정신 분열증 등의 상태는 아니었고, 완전한 책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46].

1992년 "호자키 감정"의 감정서가 제출되었고[47], 공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변호 측은 "이상하고 냉혹한 범행에 비해 전혀 죄악감이 결여되어 있다. 정신 세계의 해명과 범행 당시의 정신 상태 고찰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진술했다[46].

1997년 판결 공판에서, 도쿄지방법원은 구형대로 미야자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57][58]. 도쿄지방법원은 3건의 정신 감정 결과를 검토하여, 미야자키가 사건 당시 "다중 인격"이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며 "우치누마 감정"을 채택하지 않았다[57]. 또한 "나카야스 감정"도 불채택했다. 반면, 미야자키에게 완전 책임 능력이 있었다고 한 "호자키 감정"을 채택하여, 미야자키는 사건 당시 완전 책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했다[57].

양형 이유에서는, 범행 동기에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점, 범행이 냉혹하고 비정하며 극에 달하는 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는 태도가 현저한 점, 피해자 유족의 비탄과 처벌 감정, 미야자키가 범행 당시부터 피해자 유족이나 사회를 조롱하는 태도를 보인 점 등을 지적했다[46].

미야자키의 변호 측은 판결에 대한 사실 오인과 양형 부당을 주장하며 도쿄고등재판소에 항소했다[59]. 쓰치야 요시히코 사이타마현 지사는 "일찍이 없었던 불행하고 슬픈 사건이었다. 공정한 재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57].

지역 신문 『아키루 신문・니시노카제(秋流新聞・西の風)』는 미야자키가 살던 이츠카이치정 코와다 주변에 체포 후 연일 취재진이 몰려들어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른 아침 4시부터 헬리콥터가 뜨고, 아키가와(秋川)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구경꾼으로 몰려왔다. 또한 "코와다 다리" 부근에서 신문사 차량이 5세 아이를 치어 의식 불명 상태가 되는 교통 사고가 발생했지만, 이 사고는 『신문 아카하타(しんぶん赤旗)』가 몇 줄 보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신문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신문은 전국지가 남의 일은 화려하게 보도하는 한편, 자신들의 사건 사고는 공동으로 억누른다고 주장하며 언론을 비판했다[74].

사이타마 신문(埼玉新聞)』은 일련의 사건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을 불신하게 만드는 풍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76]. 피해자 B가 통학하던 한다노 시립 하라시바 초등학교는 사건을 계기로 저학년에게만 실시했던 집단 하교를 고학년에게도 적용하게 되었다[77]. 또한 A와 C가 각각 살던 이루마시와 가와고에시의 단지에서도 자치회가 순찰을 실시하게 되었고, 가와고에 시립 후루야히가시 중학교도 직원이 단지 주변을 순찰하게 되었다[77]. A 사건과 C 사건의 유괴 현장 부근에는 각각 사건 발생 3년 후에 파출소가 설치되었고, 유괴 현장 부근의 초등학교에는 "두 명 이상으로 귀가합니다", "4시까지 귀가합니다", "유아를 유괴로부터 지킵시다"와 같은 표지판이 설치되었다[78][79]

5. 1.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

미야자키가 오타쿠, 로리콘, 호러 마니아로 보도되면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강한 편견이 생겨났다.[46] 미야자키가 살해 후 어린 여자아이들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여 방대한 컬렉션 비디오 테이프 안에 숨겨둔 것으로부터, 오타쿠는 현실과 공상·망상과 범죄 행위의 경계가 모호하고, 명확한 규범 의식이 결여되어 범죄에 이르렀다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46]

이 사건으로 인해 "유해 코믹 소동"이 활발해져 애니메이션·만화·게임 등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풍조가 높아져, 언론이나 PTA 등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어린 소녀 연쇄 유괴 사건"이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었다.[46]

미야자키가 첫 번째 사건을 진술한 이후, NHK나 민영 방송의 텔레비전 보도·와이드 쇼 프로그램은 연일 연쇄 유아 유괴 살인 사건 관련 보도를 대대적으로 전했다. 그 직전, 가이후 도시키가 제76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고, 제1차 가이후 내각이 발족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미야자키가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을 진술했기 때문에, 사건의 경위를 검증하는 형태로 유괴 살인 사건 보도를 우선시했다. 민영 방송 각국의 와이드 쇼는 8월 하순까지 연일 30분~1시간 (경우에 따라 2시간) 정도 유괴 살인 사건 관련 화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었다.[46]

당시 보도에서는 이후 옴진리교 사건 이후 현저해진 보도의 와이드 쇼화, 매스 히스테리가 격화되었다. 이는 1980년대 서브컬처 문화인들에게 "연합 적군 사건"과 같았으며, 이 이후 오쓰카 에이지 등의 서브컬처 문화인들이 "사회파"로 전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80]

8월 26일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현 아키시노노미야)이 가와시마 키코와 약혼을 발표한 이후부터 사건 보도의 취급이 점차 축소되었다.[46]

《사이타마 신문》은 미야자키 체포 후 현내 고등학교에서 사교성이 부족한 반면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 소년이 급우들로부터 "장래 미야자키가 되는 거 아니야?"라고 놀림받거나, 다른 고등학교에서 "미야자키 같아"라는 말을 계속 들은 소년이 등교 거부가 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76] 또한 미야자키 체포 후, 과거 그가 소속되었던 비디오 클럽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은 언론사 각사로부터 잇따라 취재를 받았는데, 그 영향으로 "가족으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았다" 등의 투고가 클럽 회지(같은 해 9월 발간)에 게재되었다.[81] 같은 해 12월 코믹 마켓에는 십수만 명이 참가한 한편, 참가자 대부분은 언론 취재에 대해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취재에 응하는 사람도 그 전보다 훨씬 적었지만, 준비회 대표인 요네자와 요시히로는 그 배경에 대해 언론 보도로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호러라는 "약한 부분"에 책임이 전가된 결과, 코미케 참가자들이 "출판 문화를 지탱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말단에 위치해, 언론 쪽에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들이 언론에 공격받고 있다"라는 언론에 대한 猜疑心(시의심)을 품고 있다고 해설했다.[81] 이 행사에는 사건을 다룬 동인지가 5, 6종 출품되었는데, 그중 한 종에는 "천황 보도도, 키코 붐 때도, 언론은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밝고 운동을 잘하는' 스타일의 체육계 인간만이 인정받고, 사회의 틀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 감성이 다른 자를 부정하고, 버리는 풍조야말로 재검토해야 한다"라는 발언이 게재되었다.[81]

이후에도 어린이가 피해자가 되는 사건이나 소년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단속적으로 애니메이션·만화·게임 등의 악영향이 논의되었고, 오타쿠들 사이에서 강한 반 언론 감정,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피해자 의식이 조성되었다. 2004년에 발생한 나라 초등학교 1학년 여아 살해 사건을 계기로, 오타니 아키히로의 피겨 모에족 발언처럼 용의자 체포 이전부터 사건의 범인을 오타쿠로 단정하는 해설자의 발언도 종종 이루어졌다. 또한 2005년에는 경찰에 의해 오타쿠를 타겟으로 한 직무 질문이 이루어진 사례도 확인되었다.

5. 2. 미디어 스크럼 및 보도 과열

이 사건은 특이성이 강해 사건 초기부터 치열한 보도 경쟁이 벌어졌으며, 이후 범인 미야자키 쓰토무의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미디어 스크럼을 비롯한 언론 보도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74]

지역 신문인 『아키루 신문・니시노카제(秋流新聞・西の風)』(현: 『Weekly News 니시노카제(Weekly News 西の風)』)는 미야자키가 살던 이츠카이치정 코와다 주변에 체포 후 연일 취재진이 몰려들어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른 아침 4시부터 헬리콥터가 뜨고, 아키가와(秋川)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구경꾼으로 몰려왔다. 또한 "코와다 다리" 부근에서 신문사 차량이 5세 아이를 치어 의식 불명 상태가 되는 교통 사고가 발생했지만, 이 사고는 『신문 아카하타(しんぶん赤旗)』가 몇 줄 보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신문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경찰서나 피해 아동의 부모에게 취재를 신청해도 "사망 사고가 아니다", "끝난 일"이라며 취재를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신문은 전국지가 남의 일은 화려하게 보도하는 한편, 자신들의 사건 사고는 공동으로 억누른다고 주장하며 언론을 비판했다.[74]

같은 해 10월 들어 이츠카이치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미야자키 체포 후 한 주민이 이즈(伊豆)의 여관에 투숙하려다 이츠카이치 주민이라는 이유로 숙박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시의회에서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일반 질문도 나오는 등, 마을에 소문 피해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도했다.[75]

범인 미야자키의 본가는 지역 신문 『아키가와 신문(秋川新聞)』을 발행하는 출판사 "신 이츠카이치사"였다. 이 회사의 경영자인 미야자키의 아버지는 지역의 명사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건 후 가족은 흩어졌고, 아버지는 아들의 체포 5년 후인 1994년에 자살했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키무라 토오루는 한 민영방송 카메라 크루가 미야자키의 방에 있던 잡지 더미에서 성인용 만화 『젊은 안주인의 생 속옷』을 빼내 가장 위에 올려놓고 촬영했기 때문에, 미야자키가 수집했던 잡지류와 비디오는 모두 성인용이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퍼졌다고 증언했다. 보도진이 방을 촬영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주간지 기자 코바야시 토시유키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83]월간 뉴타입』 1989년 11월호에서도 토리·미키가 TV 방송 관계자에 의한 잡지 위치 변경 등의 '연출'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5. 3.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 루머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던 중, 2000년대에 코믹 마켓 행사장에서 한 리포터가 "여기에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가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는 소문이 인터넷 등에서 퍼졌다[82]. 그러나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당시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비슷한 표현은 있었지만,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라는 문구는 사용되지 않았다[82]. 이 발언을 텔레비전에서 봤다는 증언은 많았지만, 방송국, 리포터, 상황 등이 모두 달라 소문과 일치하는 영상은 확인되지 않았다[82].

이 소문으로 인해 리포터 토카이린 노리코가 발언자로 지목되기도 했다(토카이린 노리코#「10만 명의 미야자키 츠토무」데마 피해 참조). 2004년 9월, 한 잡지에 게재된 만화에서 이 발언을 소재로 한 장면이 등장한 이후 인터넷에서 소문이 더욱 확산되었다고 한다[82].

5. 4. 창작물에 대한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1989년경부터 일본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성적 묘사 규제가 강화되었다. 소년 만화 등에서 여성의 나체를 표현할 때 젖꼭지가 보이지 않도록 수정되었고, 청년지에서는 ANGEL 등의 인기 작품이 연재 중단되기도 했다.[76]

미야자키의 방에서 압수된 비디오테이프 중에 기니피그 2: 피와 살의 꽃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 작품이 범행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퍼져 기니피그 시리즈 전체가 절판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니피그 4: 피터의 악마 여의사가 발견되었고, 미야자키는 기니피그 2를 보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여파로 한동안 공포 영화의 TV 방영이 자제되었다.[76]

미야자키가 소유했던 5,787개의 비디오테이프 대부분은 남아, 바보 고시엔이나 도카벤 등 애니메이션 녹화 테이프였고, 음란물이나 어린 소녀 관련 비디오는 44개에 불과했다.

6. 한국의 유사 사건

대한민국에서는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과 직접적으로 유사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아동 대상 성범죄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아동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특히, 2008년 조두순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아동 성범죄 방지 및 처벌 강화를 위한 법률 제·개정의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조두순 사건을 비롯한 아동 성범죄 사건에 대해 강력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정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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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狭山の女児 行方不明から1週間 事件に巻き込まれた? 埼玉新聞 1988-08-29
[3] 뉴스 入間で幼女失跡 男性が連れ去る? 少年が目撃 事件に巻き込まれた可能性も 地元民ら徹夜で捜索 埼玉新聞 1988-08-24
[4] 뉴스 Aちゃん失跡事件 「異様」「人間じゃない」 住民ら怒りあらわ 県警 不審者洗い出しに全力 埼玉新聞 1989-02-07
[5] 뉴스 行方不明のAちゃん自宅前に骨片入り段ボール 入間 中に幼児のあごも 犯行におわすメモ残す 埼玉新聞 1989-02-07
[6] 뉴스 女児失跡、誘拐殺人事件 遺骨はAちゃんではない 歯の鑑定から断定 Bちゃんとも異なる 第4の犯行?なぞ深まる 埼玉新聞 1989-02-08
[7] 뉴스 女児失跡・誘拐殺人事件 歯の別人鑑定、白紙に Aちゃんの可能性も 県警、捜査の基本線変わらず 埼玉新聞 1989-02-10
[8] 뉴스 Aちゃん、殺害と断定 自宅などに犯行声明文 鑑定もAちゃん 誘拐殺人で本格捜査 埼玉新聞 1988-02-12
[9] 서적 現場検証 平成の事件簿 株式会社 柏艪舎 2019-03-08
[10] 뉴스 Aちゃん誘拐殺人 無事祈る両親の思い無残 最悪の悲報に絶句 母親の○○さん 添付写真で確認 埼玉新聞 1989-02-12
[11] 뉴스 飯能 小1の女児行方不明 埼玉新聞 1988-10-05
[12] 뉴스 埼玉・入間川沿い 幼女また失跡 飯能の小1が帰宅後 12キロ下流の入間市では8月末に4歳園児 いずれも月曜、関連追及 読売新聞 1988-10-05
[13] 뉴스 誘拐か、4歳女児不明 入間川沿い 4か月間で3人目 同一犯人の可能性も 読売新聞 1988-12-10
[14] 뉴스 川越 Cちゃん依然不明 2件の幼女失跡と関連? 埼玉新聞 1988-12-11
[15] 뉴스 県西部の連続女児不明事件 警戒していたのに… 不安募らせる親や学校 主婦ら150人 無事祈り懸命の捜索 埼玉新聞 1988-12-11
[16] 뉴스 幼女誘拐・殺人事件で県警 「総力集め解決を」 対策本部を全署に拡大 埼玉新聞 1989-02-28
[17] 뉴스 Cちゃん死体で発見 「名栗少年自然の家」付近の杉林 絞殺?スカートなど衣類散乱 飯能、川越両署 合同捜査本部を設置 3件の幼女失跡連続誘拐の可能性 埼玉新聞 1988-12-16
[18] 뉴스 【所沢】Cちゃん遺体で発見 埼玉の連続幼女不明事件 自宅から35キロの杉林 中日新聞 1988-12-16
[19] 뉴스 Cちゃん 誘拐直後に殺害 残る2女児も同一犯か 埼玉新聞 198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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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뉴스 Dちゃん事件、埼玉の捜索打ち切り――聞き込みに重点置く 日本経済新聞 198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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