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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치야 요시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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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치야 요시히코는 1926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사이타마현 의원, 참의원 의원을 거쳐 사이타마현 지사를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참의원 의장으로 재임하다가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3번의 지사 임기 동안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을 추진하고, 지방 분권을 주장하며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과도한 공공사업과 재정 운영으로 채무를 증가시켰으며, 정치 자금 문제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는 자민당 최고 고문 등을 역임하다가 200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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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치야 요시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쓰치야 요시히코
방위 정무 차관 착임 당시의 쓰치야 요시히코 (1970년 1월 20일)
원어 이름쓰치야 요시히코 (土屋 義彦)
출생일1926년 5월 31일
출생지일본 이바라키현 이타코시
사망일2008년 10월 5일
사망지일본 사이타마현 가스카베시
학력주오 대학 상학부
전직우에하라 쇼키치 참의원 의원 비서
소속 정당자유민주당무소속
칭호/훈장종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참의원 영년 재직 의원
사이타마현 가스카베시 명예 시민
상학사
가족 (정치가)쓰치야 진사쿠(조부, 다카다정 회의원, 이나즈사 마을 회의원)
우에하라 쇼키치(의리 숙부 (숙모의 남편), 참의원 의원)
스즈키 사부로 (숙부 (아버지의 남동생), 시즈오카현의회 의원)
자녀이치카와 모모코 (장녀)
쓰치야 시나코(차녀, 중의원 의원)
배우자쓰치야 시오리 (우에하라 긴이치의 딸)
경력
참의원의장제17-18대
취임일1988년 9월 30일
퇴임일1991년 10월 4일
환경청 장관제11대
내각제2차 오히라 내각
취임일1979년 11월 9일
퇴임일1980년 7월 17일
사이타마현지사제54대 - 제56대 (공선제 제13대 - 제15대)
당선 횟수3회
취임일1992년 7월 13일
퇴임일2003년 7월 18일
참의원 의원선거구: 사이타마현 선거구
당선 횟수: 5회
취임일1965년 7월 5일
퇴임일1992년 6월 1일
사이타마현의회의원선거구: 동 제8구
당선 횟수: 2회
취임일1959년 4월 23일
퇴임일1965년 6월 10일
기타 직력
취임일1991년
퇴임일1992년
취임일1985년
퇴임일1988년

2. 생애



== 생애 ==

=== 어린 시절과 교육 ===

쓰치야 가는 목수 일을 했고, 아버지 스미오는 가업에서 기술을 습득하여 내무성 기사가 되어 이타코마치에 부임했다. 6세 때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하츠에는 요시히코 등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기 때문에, 요시히코와 동생 유조는 도쿄부기타토시마군다카다정(현 도쿄도토시마구다카다)에서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 쪽 조부모 쓰치야 진사쿠·타츠 부부에게 맡겨졌다. 형제인 소지는 스미오의 여동생 코에다와 그녀의 남편 우에하라 쇼키치(당시 다이쇼 제약 이사)의 양자가 되었다.

조부 진사쿠는 다카다정 의원을 역임한 후, 시즈오카현가모군이나아자촌(현 시모다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요시히코도 도요 중학교 졸업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진사쿠는 시즈오카 이주 후 술집을 시작했고, 이나아자촌 의원도 역임했지만, 요시히코가 중학교 재학 중에 사망했다. 요시히코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조모 타츠와 함께 술집을 운영하며 동생을 키우는 고난의 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졸업 후 대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이미 조부가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5년 소집되어 나고야시의 제6연대에 입대했다. 그 후 하마마쓰시에 파견되어 참호를 팠다. 종전으로 제대하여, 숙부 우에하라 쇼키치·코에다 부부에게 의지하여 귀경하여, 대학 입학을 했다. 우에하라 가에 하숙하며, 대학에 다니면서 다이쇼 제약에서 일했다.

=== 정계 입문 ===

쓰치야 요시히코는 1926년 5월 이바라키현 나메가타군 이타코정(현 이타코시)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내무성 기술직 관료였으나 쓰치야가 6살 때 사망했고, 이후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면서 쓰치야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3] 할아버지는 시즈오카현 가모군 이나즈사촌(현 시모다시)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며 촌의회 의원을 지냈고, 쓰치야는 시즈오카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3]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45년 징병되어 나고야시의 제6연대에 입대했다가 종전 후 제대했다.[3]

이후 고모부 우에하라 쇼키치의 집에서 하숙하며 다이쇼 제약에서 일하면서 주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1950년 고모부가 참의원 의원이 되자 비서로 일하며 정계에 입문했다.[3] 1959년 사이타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3년 재선에 성공했다.[3] 1965년 제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5선 의원을 지냈다.[3] 소속 파벌은 청화회였다.[3]

=== 참의원 의원 시절 ===

1970년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방위정무차관을 역임했으며, 1973년에는 세이람회에 참여했다.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이 발족하자 환경청 장관에 취임하여 처음 입각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자민당 참의원 의원회장을 역임했고, 1986년 7월 중참의원 동시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였다. 1988년에는 참의원 의장에 취임했는데, 1991년 10월 임기 도중에 사임했다.

1992년에는 참의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사이타마현지사 시절 ===

쓰치야는 1992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제휴해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을 추진했다. 강력한 지방분권을 추진해 산하 시정촌에 50개가 넘는 권한을 이양하고 공원 정비 사업을 벌였다.[3] 각료와 의원 경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는 등 힘 있는 지사로 평가받았지만, 과도한 공공사업과 버블 경제 붕괴의 여파로 현 재정 적자가 11년 사이에 4배로 폭증했다.[3]

1991년 10월, 참의원 의장을 사임하고 다음 해의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3] 현직 하타 와타루도 6선 출마를 선언하며 거물 간의 대결이 예상되었으나, 가네마루 신다나베 마코토가 양측의 출마 포기를 종용했다. 나가타초에서는 쓰치야의 갑작스러운 출마 표명을 예상 밖의 사건으로 받아들였으며, 삼권의 장인 참의원 의장이 임기 중 사임하고 지방 선거에 출마하는 행위는 국회의 권위상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992년, 하타 지사의 친동생을 포함한 건설업자들의 담합 및 헌금 사건으로 하타는 출마를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쓰치야는 세이와회와 숙모 우에하라 사요의 지원을 받아 자민당 추천으로 입후보했다.

쓰치야의 현 지사 취임 후, 자민당 내에서도 쓰치야 지지파와 사쿠마 지지파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1993년 5월, 현 의회 의장 선거를 둘러싼 부정 사건으로 사쿠마가 수뢰 혐의로 체포되면서 자민당 현 의원들은 모두 쓰치야 지지로 돌아섰다.

1995년 4월, 통일 지방 선거에서 사쿠마가 항소 중임에도 출마했고, 쓰치야는 대항마로 시미즈 도시로를 옹립했으나 두 사람 모두 당선되었다. 1996년 7월, 사쿠마의 상고가 기각되어 실형이 확정되면서 현 의원을 사임하고 복역했다.

1999년 4월, 출소한 사쿠마는 통일 지방 선거에 자민당 비공인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시미즈는 낙선했다. 이후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 복귀를 시도했으나, 쓰치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01년 12월, 가스카베 시장 선거에서는 쓰치야 부녀가 지지하는 현직 시장이 당선되었다. 2003년 4월, 통일 지방 선거에서는 사쿠마와 시미즈 모두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7월 쓰치야의 정치 자금 문제로 장녀가 체포되고 쓰치야는 지사를 사임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쓰치야 사임 후 지사 선거에서 사쿠마는 민주당 출신 우에다 세이지를 지원했고, 우에다 당선 후 자민당 현 의원단을 여당 회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2007년 4월,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에 복귀했고, 시미즈는 낙선했다. 2008년 11월, 시미즈는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자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쓰치야는 삼권 분립 경험자로서 현 안팎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현민 서비스에 힘썼다. 수도권 연합을 구상하고, 지방 분권을 제창했으며, 사이타마현의 애칭으로 『채의 나라』를 제안하고,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정비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사이타마현의 채무를 4배로 증가시켰고, 현정에 사적인 감정을 섞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 정치자금 문제와 은퇴 ===

2003년 7월, 쓰치야의 정치자금관리단체인 '지방행정연구회'가 1억 엔이 넘는 헌금 기록을 누락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혐의로 정치 자금을 관리하던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가 체포되었다. 당초 쓰치야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지만 결국 지사를 사임하고 정계도 은퇴했다. 쓰치야 본인은 도쿄지검 특수부의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 말년 ===

만년엔 사이타마현 가스카베시에서 생활했으며 자민당 최고고문, 사단법인 일본·아르헨티나 협회 회장, 일본·니카라과 우호 협회 명예 회장 등을 역임했다. 차녀 쓰치야 시나코가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을 때 자민당의 선거 유세에 초대되는 등 전직 지사로서의 대우는 받았다. 이후에도 통일지방선거참원선 등의 유세에 참여했다.

2003년 7월, 쓰치야의 정치자금관리단체인 지방행정연구회가 1억 엔이 넘는 헌금 기록을 누락한 사실이 발각되어 장녀가 체포되고, 쓰치야는 지사를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재단법인 일본-아르헨티나 협회장이 되었으며, 2005년엔 일본농구협회장으로 내정되었다가 반대 의견이 강하자 스스로 고사했다.

모모코 체포의 영향도 있어, 지사 사직 직후에는 공직·명예직을 사퇴했다. 은둔 생활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2004년에 출장 연극 극단에 들어가, 노인 복지 시설 등을 위문했다. 하모니카 연주 등을 선보였다.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각광받는 일도 적어졌지만, 동요 등을 연주하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2008년 10월 5일 0시 30분에 사이타마현의 자택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에 추서됐다.

쓰치야의 사망에 즈음하여, 오랜 세월 정적으로 대립하며, 가스카베시의 보수 세력을 양분하여 다투었던, 자유민주당 현 의원 사쿠마 미노루는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국정과도 두터운 파이프를 가진 전 지사가 돌아가신 것은 유감"이라고 말하며,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2009년 2월 24일, "전 사이타마현 지사 고 쓰치야 요시히코 씨를 추모하는 모임"이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렸다. 현민과 정재계 관계자 등 약 4000명이 참례했다. 참례자 중에는 타이、팔라우 등의 주일 특명전권대사의 모습도 있었다. 후임 지사 우에다 기요시가 실행 위원장을 맡았고, 전 내각관방 부장관이시하라 노부오 등이 조사를 낭독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쓰치야 가는 목수 일을 했고, 아버지 스미오는 가업에서 기술을 습득하여 내무성 기사가 되어 이타코마치에 부임했다. 6세 때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하츠에는 요시히코 등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기 때문에, 요시히코와 동생 유조는 도쿄부기타토시마군다카다정(현 도쿄도토시마구다카다)에서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 쪽 조부모 쓰치야 진사쿠·타츠 부부에게 맡겨졌다. 형제인 소지는 스미오의 여동생 코에다와 그녀의 남편 우에하라 쇼키치(당시 다이쇼 제약 이사)의 양자가 되었다.

조부 진사쿠는 다카다정 의원을 역임한 후, 시즈오카현가모군이나아자촌(현 시모다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요시히코도 도요 중학교 졸업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진사쿠는 시즈오카 이주 후 술집을 시작했고, 이나아자촌 의원도 역임했지만, 요시히코가 중학교 재학 중에 사망했다. 요시히코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조모 타츠와 함께 술집을 운영하며 동생을 키우는 고난의 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졸업 후 대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이미 조부가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5년 소집되어 나고야시의 제6연대에 입대했다. 그 후 하마마츠시에 파견되어 참호를 팠다. 종전으로 제대하여, 숙부 우에하라 쇼키치·코에다 부부에게 의지하여 귀경하여, 대학 입학을 했다. 우에하라 가에 하숙하며, 대학에 다니면서 다이쇼 제약에서 일했다.

2. 2. 정계 입문

쓰치야 요시히코는 1926년 5월 이바라키현 나메가타군 이타코정(현 이타코시)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내무성 기술직 관료였으나 쓰치야가 6살 때 사망했고, 이후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면서 쓰치야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3] 할아버지는 시즈오카현 가모군 이나즈사촌(현 시모다시)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며 촌의회 의원을 지냈고, 쓰치야는 시즈오카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3]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45년 징병되어 나고야시의 제6연대에 입대했다가 종전 후 제대했다.[3]

이후 고모부 우에하라 쇼키치의 집에서 하숙하며 다이쇼 제약에서 일하면서 주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1950년 고모부가 참의원 의원이 되자 비서로 일하며 정계에 입문했다.[3] 1959년 사이타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3년 재선에 성공했다.[3] 1965년 제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5선 의원을 지냈다.[3] 소속 파벌은 청화회였다.[3]

2. 3. 참의원 의원 시절

쓰치야 요시히코는 1959년 사이타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3년 재선에 성공했다. 1965년 제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5선 의원을 지냈다. 소속 파벌은 청화회였다.

1970년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방위정무차관을 역임했으며, 1973년에는 청람회에 참여했다.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이 발족하자 환경청 장관에 취임하여 처음 입각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자민당 참의원 의원회장을 역임했고, 1986년 7월 중참의원 동시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였다. 1988년에는 참의원 의장에 취임했는데, 1991년 10월 임기 도중에 사임했다.

1992년에는 참의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 4. 사이타마현지사 시절

쓰치야 요시히코는 1992년 참의원 의원을 사임하고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제휴하여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을 추진했으며, 강력한 지방분권을 통해 산하 시정촌에 50개가 넘는 권한을 이양하고 공원 정비 사업을 벌였다.[3] 각료와 의원 경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는 등 힘 있는 지사로 평가받았지만, 과도한 공공사업과 버블 경제 붕괴의 여파로 현 재정 적자가 11년 사이에 4배로 폭증했다.[3]

1991년 10월, 참의원 의장을 사임하고 다음 해의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3] 현직 하타 와타루도 6선 출마를 선언하며 거물 간의 대결이 예상되었으나, 가네마루 신다나베 마코토가 양측의 출마 포기를 종용했다. 나가타초에서는 쓰치야의 갑작스러운 출마 표명을 예상 밖의 사건으로 받아들였으며, 삼권의 장인 참의원 의장이 임기 중 사임하고 지방 선거에 출마하는 행위는 국회의 권위상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992년, 하타 지사의 친동생을 포함한 건설업자들의 담합 및 헌금 사건으로 하타는 출마를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쓰치야는 세이와회와 숙모 우에하라 사요의 지원을 받아 자민당 추천으로 입후보했다.

쓰치야의 현 지사 취임 후, 자민당 내에서도 쓰치야 지지파와 사쿠마 지지파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1993년 5월, 현 의회 의장 선거를 둘러싼 부정 사건으로 사쿠마가 수뢰 혐의로 체포되면서 자민당 현 의원들은 모두 쓰치야 지지로 돌아섰다.

1995년 4월, 통일 지방 선거에서 사쿠마가 항소 중임에도 출마했고, 쓰치야는 대항마로 시미즈 도시로를 옹립했으나 두 사람 모두 당선되었다. 1996년 7월, 사쿠마의 상고가 기각되어 실형이 확정되면서 현 의원을 사임하고 복역했다.

1999년 4월, 출소한 사쿠마는 통일 지방 선거에 자민당 비공인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시미즈는 낙선했다. 이후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 복귀를 시도했으나, 쓰치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01년 12월, 가스카베 시장 선거에서는 쓰치야 부녀가 지지하는 현직 시장이 당선되었다. 2003년 4월, 통일 지방 선거에서는 사쿠마와 시미즈 모두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7월 쓰치야의 정치 자금 문제로 장녀가 체포되고 쓰치야는 지사를 사임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쓰치야 사임 후 지사 선거에서 사쿠마는 민주당 출신 우에다 세이지를 지원했고, 우에다 당선 후 자민당 현 의원단을 여당 회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2007년 4월,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에 복귀했고, 시미즈는 낙선했다. 2008년 11월, 시미즈는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자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쓰치야는 삼권 분립 경험자로서 현 안팎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현민 서비스에 힘썼다. 수도권 연합을 구상하고, 지방 분권을 제창했으며, 사이타마현의 애칭으로 『채의 나라』를 제안하고,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정비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사이타마현의 채무를 4배로 증가시켰고, 현정에 사적인 감정을 섞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2. 5. 정치자금 문제와 은퇴

쓰치야 요시히코는 1992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청람회 결성 과정에서 친밀해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제휴해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을 추진했으며 강력한 지방분권을 추진해 산하 시정촌에 50개가 넘는 권한을 이양하고 공원 정비 사업을 벌였다. 각료와 의원을 역임한 경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강력한 압력을 넣는 등 힘 있는 지사임을 내세웠지만 지나친 공공사업으로 예산이 팽창한 데다 버블 경제 붕괴의 여파가 겹쳐 현의 재정 적자는 11년 사이에 4배로 폭증했다.

2003년 7월, 쓰치야의 정치자금관리단체인 '지방행정연구회'가 1억 엔이 넘는 헌금 기록을 누락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혐의로 정치 자금을 관리하던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가 체포되었다. 당초 쓰치야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지만 결국 지사를 사임하고 정계도 은퇴했다. 쓰치야 본인은 도쿄지검 특수부의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 6. 말년

만년엔 사이타마현 가스카베시에서 생활했으며 자민당 최고고문, 사단법인 일본·아르헨티나 협회 회장, 일본·니카라과 우호 협회 명예 회장 등을 역임했다. 차녀 쓰치야 시나코가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을 때 자민당의 선거 유세에 초대되는 등 전직 지사로서의 대우는 받았다. 이후에도 통일지방선거참원선 등의 유세에 참여했다.

2003년 7월, 쓰치야의 정치자금관리단체인 지방행정연구회가 1억 엔이 넘는 헌금 기록을 누락한 사실이 발각되어 장녀가 체포되고, 쓰치야는 지사를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재단법인 일본-아르헨티나 협회장이 되었으며, 2005년엔 일본농구협회장으로 내정되었다가 반대 의견이 강하자 스스로 고사했다.

모모코 체포의 영향도 있어, 지사 사직 직후에는 공직·명예직을 사퇴했다. 은둔 생활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2004년에 출장 연극 극단에 들어가, 노인 복지 시설 등을 위문했다. 하모니카 연주 등을 선보였다.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각광받는 일도 적어졌지만, 동요 등을 연주하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2008년 10월 5일 0시 30분에 사이타마현의 자택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에 추서됐다.

쓰치야의 사망에 즈음하여, 오랜 세월 정적으로 대립하며, 가스카베시의 보수 세력을 양분하여 다투었던, 자유민주당 현 의원 사쿠마 미노루는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국정과도 두터운 파이프를 가진 전 지사가 돌아가신 것은 유감"이라고 말하며,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2009년 2월 24일, "전 사이타마현 지사 고 쓰치야 요시히코 씨를 추모하는 모임"이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렸다. 현민과 정재계 관계자 등 약 4000명이 참례했다. 참례자 중에는 타이、팔라우 등의 주일 특명전권대사의 모습도 있었다. 후임 지사 우에다 기요시가 실행 위원장을 맡았고, 전 내각관방 부장관이시하라 노부오 등이 조사를 낭독했다.

3. 정책 및 업적

쓰치야 요시히코는 삼권의 장 경험자로서 현 안팎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전임 하타 와의 장기 현정(5기 20년)으로 인해 이완된 현청의 분위기를 바꾸고 현민 서비스에 힘썼다. 그러나 권력 의식이 강하고 직원들에게 고압적이며 명령조였다고 한다. 보수 현정으로 전환하여 현 의회 다수파인 자민당과 양호한 관계를 구축했다. 사이타마 신도심 구상은 모두 계승하여 계속해서 정비에 임했다.

수도권 연합」을 구상하여 세이란회 결성 이후 친밀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와 연계했다. 일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으며, 가나가와현 지사 오카자키 히로시도 참여하여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을 추진했다. 이 구상은 후임 우에다 세이지에게 계승된다.

일본국 정부와 자민당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성청 담당 관료가 아닌, 내각총리대신, 국무대신, 자민당 당 삼역 등에 직접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 분권을 제창하고, 현내 각 시정촌에 50개가 넘는 권한을 위임하고 "국가 건설 보조금"을 지급하여 재정 지원을 했다.

사이타마 도민의 편의성 향상을 위해 신주쿠역 서구에 "사이타마현 정보 센터 신주쿠"(애칭: "사이타마현 영사관")를 설치했다. 일본국 여권 발급 신청, 주민표 교부 등 사이타마현민을 위한 창구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국 최초로 설치되어 주목받았다. 자치성의 제지를 받았지만,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에게 직접 호소하여 개설을 실현했다. (2005년 3월 폐지)

취임 직후, 타모리의 발언으로 유행했던 "다사이타마"의 부정적 이미지 탈피에 힘썼다. 사이타마현을 "다사이타마"라고 불리는 것에 진심으로 화를 냈으며,[4] 향토애가 얇다고 여겨졌던 사이타마현민의 애향심 향상을 위해, 사이타마현의 애칭 『채의 나라』를 제안하고 심볼 마크를 제정하여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채의 나라"는 하타 와 시대에 결정되었지만, 사이타마 리소나 은행, 무사시노 은행, 세이부 철도, 도부 철도 등이 채택했다. 현내 예술·문화 진흥을 중시하여, 1994년 요노시에 채의 나라 사이타마 예술 극장을 개설했다. 가와구치시 출신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가 맡은 연극 공연 초연을 다수 상연했으며, 외국 왕족, 정치가, 주일 대사 등을 초청하여 극장의 평가를 높였다.

사이타마현이 매년 최하위에 위치했던 경제기획청의 "국민 생활 지표"(풍요 지표)에 맹렬히 항의하여 1999년을 마지막으로 해당 랭킹은 소멸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환경 문제, 국토 녹화, 산림 보전, 공원 정비 등을 전문으로 했다. 도다시 아라카와 강변 부지에 설치된 저수지를 "채호"로 명명하고 주변을 녹지 공원으로 정비했다. 전국 도도부현 최초로 멸종 위기종에 대한 "레드 데이터 북"을 간행하고, ISO14001 인정도 취득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일 대회를 위해 사이타마시에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를 정비, 경기 개최지 유치에 성공했다. 결승전 장소를 두고 요코하마시 (요코하마 국제 종합 경기장)와 경쟁하여 조별 리그 H 일본전 첫 경기 (일본벨기에)와 준결승 (브라질 대 터키) 개최를 실현했다.

공공 사업을 많이 포함한 팽창형 예산으로 인한 방만한 재정 운영이 버블 붕괴의 영향을 받아, 11년 재임 기간 동안 사이타마현의 채무는 8,000억 엔에서 2조 8,000억 엔으로 4배 증가했다.

현정에 사적인 감정을 섞는 모습도 보였다. 사이타마 고속철도선 우라와미소노역 이북 연장 계획에 대해 운수정책심의회 답신 제18호에서 하마다가 거론되었으나, 하마다시에서 열린 "연장 감사회"에 200명밖에 모이지 않자 격노하여 사이타마 신문 등에 게재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2005년 9월, "사이타마 고속철도 연장 검토 위원회"는 도부 노다선과의 직통 운전에 대해서도 검토를 진행하게 되었고, 하마다 연장 구상은 검토되지 않고 있다.

아내 시오리나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 부부가 빈번하게 지사실에 출입하며 현 직원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등 공사 혼동이 눈에 띄었다. 모모코는 현 발주 공공 사업을 둘러싸고 건설업자 알선·주선을 하는 등 현정에 개입했으며, "쓰치야 왕국"이라고 조롱받았다. 이치카와 모모코는 2005년에 자기 파산했다.

1996년, 이루마군오고세마치에 "벚꽃의 고장·아야카엔" 건설 계획을 발표했지만, 자연 환경 파괴 및 오고세는 매화의 마을이라는 반대 의견으로 중단되었다. 차녀 시나코가 "일본 벚꽃의 모임" 이사를 맡고 있어, 지사의 사적인 동기에 의한 계획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1년, 지치부군요시다마치·동군 오가노마치에 합각 댐이 완공되었다. 2003년, 댐 호수명을 공모했는데, "모모코호" 등 "모모코"가 가장 많았다. 심사 위원회는 "니시지치부 모모코"라는 명칭으로 결정했지만, 이치카와 모모코의 이름과 같아 건설업자 등이 조직표를 투표한 것이 아니냐고 보도되었다.

같은 해 지치부군아라카와촌에 우라야마 댐이 완공, 댐 호수는 "지치부 벚꽃 호수"로 명명되었다. 시나코가 "일본 벚꽃의 모임" 이사를 맡고 있어, 딸과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2006년에 현창비가 세워진 시즈오카현시모다시에서도, "지역 진흥 협력자"라는 평가와 "사이타마 현정을 사유화했다"는 비판이라는 찬반 양론이 있다.

2006년 농구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 라운드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유치에 성공, 일본 농구 협회 회장직에 결정되었지만, 협회 안팎의 반대로 사퇴했다.

3. 1. 지방분권 추진

3. 2.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

쓰치야 요시히코는 수도권 연합 구상을 추진하였다. 세이란회 결성 이후 친밀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와 연계하여 일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가나가와현 지사인 오카자키 히로시도 참여하여 수도권 광역 행정 구상을 추진했으며, 이 구상은 후임 우에다 세이지와 마쓰자와 나리후미에게 계승되었다.

3. 3. 환경 정책

3. 4. 문화 정책

쓰치야 요시히코는 삼권의 장 경험자로서 현 안팎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전임 하타 와의 장기 현정(5기 20년)으로 이완된 현청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현민 서비스 향상에 힘썼다. 그러나 권력 의식이 강하고 직원들에게 고압적이며 명령조였다는 평가도 있다. 보수 현정으로 전환하여 자민당과 양호한 관계를 구축했으며, 사이타마 신도심 구상을 계승하여 정비에 힘썼다.

수도권 연합 구상을 추진하여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 오카자키 히로시 가나가와현 지사와 협력했다. 이 구상은 후임 지사들에게 계승되었다. 중앙 정부와 자민당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지방 분권과 도도부현 독립 국가론을 주장하며 현내 시정촌에 권한을 위임하고 재정 지원을 했다.

신주쿠역 서구에 "사이타마현 정보 센터 신주쿠"를 설치하여 일본국 여권 발급 신청 등 현민 대상 창구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는 전국 최초의 사례였으나, 2005년 폐지되었다.

다사이타마라는 부정적 이미지 탈피를 위해 노력하고, 사이타마현의 애칭으로 『채의 나라』를 제안하며 심볼 마크를 제정했다.[4] 채의 나라 대학 컨소시엄 등 현내 각 방면에서 이 애칭이 사용되고 있다. 사이타마 리소나 은행, 무사시노 은행 등 현내 기업들도 채택했다. 채의 나라 사이타마 예술 극장을 개설하고 니나가와 유키오의 연극 공연을 초연하는 등 예술·문화 진흥에도 힘썼다.

경제기획청의 "국민 생활 지표"에 대해 맹렬히 항의하여 해당 랭킹이 소멸되게 만들었다. 환경 문제와 국토 녹화, 산림 보전, 공원 정비 등에도 힘썼으며, 아라카와 강변 부지에 저수지 "채호"를 조성하고 주변을 녹지 공원으로 정비했다. 멸종 위기종에 대한 "레드 데이터 북"을 간행하고, ISO14001 인증도 획득했다.

2002 FIFA 월드컵 경기 개최를 위해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를 정비하고, 조별 리그 일본전 첫 경기와 준결승 개최를 유치했다.

하지만 팽창형 예산으로 인해 사이타마현의 채무가 4배로 증가하는 등 재정 악화를 초래했다. 사이타마 고속철도선 연장 계획과 관련하여 하마다시와의 갈등이 사이타마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내와 딸 등 가족이 현정에 개입하는 등 공사 혼동 문제도 있었다. "벚꽃의 고장·아야카엔" 건설 계획은 자연 환경 파괴 논란과 딸과의 관련성 의혹으로 중단되었다. 합각 댐 호수 명칭 공모 과정에서 "모모코"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투표되었는데, 이는 건설업자 등이 지사 측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조직표 투표 의혹으로 이어졌다. 우라야마 댐 호수 명칭인 "지치부 벚꽃 호수" 역시 딸과의 관련성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6년 농구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 라운드를 유치했으나, 일본 농구 협회 회장직은 사퇴했다.

4. 논란 및 비판

2003년 7월, 쓰치야 요시히코의 정치자금 관리 단체인 '지방행정연구회'에서 1억 엔이 넘는 헌금 기재 누락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혐의로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가 체포되었다. 쓰치야 요시히코는 처음에는 사임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조사 결과, 쓰치야 요시히코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쓰치야 요시히코는 자민당과의 양호한 관계를 바탕으로 보수 현정을 펼쳤으나, 버블 붕괴의 영향으로 재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4] 공공 사업을 많이 포함한 팽창형 예산으로 인해 사이타마현의 채무는 11년 재임 기간 동안 8,000억 엔에서 2조 8,000억 엔으로 4배 증가했다.[4] 이는 하타 지사나 우에다 세이지 지사 시대에는 생각할 수 없는 예산액으로, 사이타마현의 적자 재정을 최악으로 몰아넣었다.[4]

1991년 10월, 쓰치야는 참의원 의장을 사임하고 다음 해의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현직 하타 와타루도 같은 해 12월 현 의회 정례회에서 6선 출마를 명시했다. 거물 간의 1대 1 대결 양상이 되었지만, 가네마루 신다나베 마코토가 쌍방의 출마를 포기하도록 획책했다. 이 배경에는 역대 총리와 친분이 두텁고 게이세이회에도 가까웠던 사쿠마 미노루・자민당 현 의원단장(전 현 의회 의장・전 자민당 사이타마현 연맹 간사장)이 '포스트 하타'에 의욕을 보이고 있어, 이미 자민당 게이세이회와 사회당 간에는 하타를 은퇴시키고 사쿠마를 후계자로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자리'인 참의원 의장을 맡았던 쓰치야의 갑작스러운 출마 표명은 나가타초에서는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 쓰치야는 출마에 즈음하여 '향토애'나 '고향에 은혜를 갚고 싶다' 등 그 의욕을 강조했지만, 숙부와 마찬가지로 참의원 의원 5회 연속 당선을 달성하고, 각료・의장과 국정의 장에서 그야말로 지위가 극에 달했던 쓰치야가 한 도도부현의 지사 직에 고집을 보이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쪽도 많았고, 삼권의 장인 참의원 의장이 임기 중에 사임하고 지방 선거에 출마하는 행위는 국회의 권위상 적절하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러한 가운데, 가네마루 등의 뜻을 받은 중의원 의원 야마구치 도시오가 양측을 설득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야마구치도 지사 자리를 노렸다고 한다), 가네마루 본인이 쌍방에 출마를 포기하도록 요청했다.

해가 바뀐 1992년, 하타 지사의 친동생을 포함한 건설업자에 의한 '사이타마 토요회' 담합・헌금 사건이 일어나 의혹이 확산되는 가운데 하타는 출마를 포기.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 한편 야마구치・사쿠마 등은 여전히 쓰치야의 출마 포기를 획책했다. 그러나 쓰치야는 세이와회의 지지와 당시 다이쇼제약 명예회장이었던 숙모 우에하라 사요의 지원을 받아 단호하게 출마 태도를 굽히지 않아, 결국 자민당 추천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쓰치야의 현 지사 취임 후 여당 회파가 된 자민당 내에서도, 쓰치야를 지지하는 현 의원과 사쿠마를 지지하는 현 의원이 나타나, 쓰치야와 사쿠마와의 대립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쿠마는 쓰치야의 지역 가스카베시 선출 현 의원이었으며, 심각한 대립으로 발전하는 양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93년 5월, 1989년과 1992년의 현 의회 의장 선거를 둘러싼 부정 사건이 발각되어, 의장이 된 우쓰기 세이조・다마다 도모요시 양 현 의원(두 사람 모두 자민당)에게 현금을 요구한 사쿠마가 수뢰 혐의로, 우쓰기・다마다가 증뢰 혐의로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을 탈단하고, 자민당 현 의원은 모두 쓰치야 지지로 돌아섰다.

실각할 것처럼 보였던 사쿠마였지만, 1995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 항소 중이면서 출마했다. 한편 쓰치야는 전 다이쇼제약 판매 부장이자 현직 가스카베시 의회 의장이었던 시미즈 도시로(보수 계열 무소속)를 옹립하여, 사쿠마를 현 의회에서 배제하려 했다. 중상 모략이나 괴문서 등도 난무하는 격렬한 선거전의 결과, 두 사람 모두 당선되었다. 1996년 7월, 사쿠마의 상고가 기각되어, 수탁 수뢰죄로 징역 1년 2개월・추징금 300만 엔의 실형이 확정. 사쿠마는 현 의원을 사임하고, 복역(자민당 탈당은 하지 않고 당적은 유지). 현 의회를 무대로 한 은밀한 정쟁은 종국으로 향했다.

출소한 사쿠마는 1999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 자민당원이면서 비공인 비추천으로 다시 출마하여,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한편 시미즈(자민당 공인)는 차점으로 낙선. 사쿠마는 의석을 회복하고 복권을 달성했다. 이를 받아 사쿠마와 가까운 노모토 요이치 전 현 의회 의장(사쿠마와 동기 당선) 등이 즉시 "자민당원이 당선된 이상 자민당 현 의원단에 맞이해야 한다"며 사쿠마의 당 현 의원단 복단을 제안했다. 그러나 쓰치야 직계인 시미즈가 의석을 지키지 못해 쓰치야가 심기가 불편해했고, 또 사쿠마가 지사 여당 회파인 자민당 현 의원단에 복단하면 불필요한 불씨가 될 우려가 컸기 때문에 당내에서도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아, 이때는 복단할 수 없었다. 이후 사쿠마는 자민당원이면서 무소속으로 활동(자민당원이기 때문에 개별 의결은 자민당 현 의원단과 행동을 함께하여, 사실상 지사 여당 의원이었다)했으며, 당 활동은 제한되었지만, 사쿠마와 친한 현 의원도 당 안팎에 여러 명 있어, 현 의회에서는 은연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 의회에서 쓰치야와 사쿠마가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쓰치야 사임까지 우호적인 관계가 되지는 않았다. 2001년 12월의 가스카베 시장 선거에서는 쓰치야 요시히코・시나코 부녀가 지지하는 현직에 대해, 대립 후보를 사쿠마가 지원했다. 쓰치야 대 사쿠마의 대리전이라고 평가되었다. 결과는 쓰치야가 지원한 현직 사에구사 야시게 시장이 6선을 달성했다.

2003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사쿠마(자민당적・비공인 비추천)・시미즈(자민당 공인) 모두 당선. 다시 대립이 표면화되는 양상이 되었지만, 같은 해 7월, 다스킨 부정 지출 사건을 계기로, 쓰치야의 정치 자금 관리 단체를 둘러싼 문제로 쓰치야의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가 체포되어, 쓰치야가 현 지사를 사임하고 정계 은퇴. 수사 기관으로부터 지사 공관을 압수 수색당했고, 쓰치야 본인은 기소 유예, 장녀 모모코에게는 유죄가 확정되었다. 현정에서의 양자의 정쟁은 완전히 끝났지만, 사쿠마는 자민당원이면서 자신이 소속된 지부의 지부장인 시나코를 지원하지 않는 등, 그 후에도 대립이 꼬리를 물었다.

쓰치야 사임 후의 지사 선거에서 사쿠마는 민주당 출신이면서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우에다 세이지를 지원했고, 그의 당선을 환영. 야당 회파가 된 자민당 현 의원단을 우에다 지사에게 소개하고 여당 회파화하는 등, 다시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2007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서 9선을 달성한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에 복귀했다. 한편 시미즈는 낙선했지만, 쓰치야의 사망 직후인 2008년 11월에 치러진 보궐 선거에 출마. 시나코 등의 지원을 받아 3선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 출마 당시 시미즈는 자민당을 탈당, 자민당의 추천도 받지 않고, 정치 단체 '가스카베 겐키주쿠'를 신고. 현 의회에서는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4. 1. 사이타마현지사 선거 출마 논란

1991년 10월 참의원 의장에서 물러난 쓰치야는 이듬해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현직 지사인 하타 야와라도 6선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거물 정치인 간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쓰치야는 자유민주당 소속이었고 하타는 일본사회당 출신이었으나 탈당한 뒤 혁신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네마루 신다나베 마코토는 5선을 한 하타를 퇴진시키고 자민당 현의회 의원단장 사쿠마 미노루를 후임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참의원 의장까지 지낸 쓰치야의 현지사 선거 출마는 나가타초에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쓰치야는 지역 주민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임기 중 의장을 사임하고 지방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국회의 권위를 손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네마루는 야마구치 도시오에게 쓰치야와 하타를 설득하도록 했지만 실패했고, 가네마루가 직접 두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1992년, 하타의 동생을 포함한 지역 건설업자들의 담합 및 불법 헌금 의혹이 불거지자 하타는 출마를 포기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가네마루가 이끄는 청화회는 쓰치야를 설득했지만, 경세회다이쇼 제약 명예회장인 고모의 지원을 바탕으로 쓰치야는 자민당의 공식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쓰치야가 당선되면서 자민당은 사이타마현의회에서 여당이 되었지만, 당내에는 쓰치야 지지 세력과 사쿠마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1993년 5월, 사쿠마가 현의회 의장 선거 과정에서 현금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쿠마는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낮아졌고 사이타마현의회 자민당 의원들은 쓰치야 지지로 돌아섰다. 1996년 7월 사쿠마는 징역 1년 2월과 추징금 300만 엔의 실형이 확정되면서 둘의 정쟁은 끝이 났다.

4. 2. 사쿠마 미노루와의 갈등

1991년 10월, 쓰치야는 참의원 의장을 사임하고 다음 해의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현직 하타 와타루도 같은 해 12월 현 의회 정례회에서 6선 출마를 명시했다. 거물 간의 1대 1 대결 양상이 되었지만, 가네마루 신다나베 마코토가 쌍방의 출마를 포기하도록 획책했다. 이 배경에는 역대 총리와 친분이 두텁고 게이세이회에도 가까웠던 사쿠마 미노루・자민당 현 의원단장(전 현 의회 의장・전 자민당 사이타마현 연맹 간사장)이 '포스트 하타'에 의욕을 보이고 있어, 이미 자민당 게이세이회와 사회당 간에는 하타를 은퇴시키고 사쿠마를 후계자로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자리'인 참의원 의장을 맡았던 쓰치야의 갑작스러운 출마 표명은 나가타초에서는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 쓰치야는 출마에 즈음하여 '향토애'나 '고향에 은혜를 갚고 싶다' 등 그 의욕을 강조했지만, 숙부와 마찬가지로 참의원 의원 5회 연속 당선을 달성하고, 각료・의장과 국정의 장에서 그야말로 지위가 극에 달했던 쓰치야가 한 도도부현의 지사 직에 고집을 보이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쪽도 많았고, 삼권의 장인 참의원 의장이 임기 중에 사임하고 지방 선거에 출마하는 행위는 국회의 권위상 적절하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러한 가운데, 가네마루 등의 뜻을 받은 중의원 의원 야마구치 도시오가 양측을 설득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야마구치도 지사 자리를 노렸다고 한다), 가네마루 본인이 쌍방에 출마를 포기하도록 요청했다.

해가 바뀐 1992년, 하타 지사의 친동생을 포함한 건설업자에 의한 '사이타마 토요회' 담합・헌금 사건이 일어나 의혹이 확산되는 가운데 하타는 출마를 포기.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 한편 야마구치・사쿠마 등은 여전히 쓰치야의 출마 포기를 획책했다. 그러나 쓰치야는 세이와회의 지지와 당시 다이쇼제약 명예회장이었던 숙모 우에하라 사요의 지원을 받아 단호하게 출마 태도를 굽히지 않아, 결국 자민당 추천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쓰치야의 현 지사 취임 후 여당 회파가 된 자민당 내에서도, 쓰치야를 지지하는 현 의원과 사쿠마를 지지하는 현 의원이 나타나, 쓰치야와 사쿠마와의 대립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쿠마는 쓰치야의 지역 가스카베시 선출 현 의원이었으며, 심각한 대립으로 발전하는 양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93년 5월, 1989년과 1992년의 현 의회 의장 선거를 둘러싼 부정 사건이 발각되어, 의장이 된 우쓰기 세이조・다마다 도모요시 양 현 의원(두 사람 모두 자민당)에게 현금을 요구한 사쿠마가 수뢰 혐의로, 우쓰기・다마다가 증뢰 혐의로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을 탈단하고, 자민당 현 의원은 모두 쓰치야 지지로 돌아섰다.

실각할 것처럼 보였던 사쿠마였지만, 1995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 항소 중이면서 출마했다. 한편 쓰치야는 전 다이쇼제약 판매 부장이자 현직 가스카베시 의회 의장이었던 시미즈 도시로(보수 계열 무소속)를 옹립하여, 사쿠마를 현 의회에서 배제하려 했다. 중상 모략이나 괴문서 등도 난무하는 격렬한 선거전의 결과, 두 사람 모두 당선되었다. 1996년 7월, 사쿠마의 상고가 기각되어, 수탁 수뢰죄로 징역 1년 2개월・추징금 300만 엔의 실형이 확정. 사쿠마는 현 의원을 사임하고, 복역(자민당 탈당은 하지 않고 당적은 유지). 현 의회를 무대로 한 은밀한 정쟁은 종국으로 향했다.

출소한 사쿠마는 1999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 자민당원이면서 비공인 비추천으로 다시 출마하여,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한편 시미즈(자민당 공인)는 차점으로 낙선. 사쿠마는 의석을 회복하고 복권을 달성했다. 이를 받아 사쿠마와 가까운 노모토 요이치 전 현 의회 의장(사쿠마와 동기 당선) 등이 즉시 "자민당원이 당선된 이상 자민당 현 의원단에 맞이해야 한다"며 사쿠마의 당 현 의원단 복단을 제안했다. 그러나 쓰치야 직계인 시미즈가 의석을 지키지 못해 쓰치야가 심기가 불편해했고, 또 사쿠마가 지사 여당 회파인 자민당 현 의원단에 복단하면 불필요한 불씨가 될 우려가 컸기 때문에 당내에서도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아, 이때는 복단할 수 없었다. 이후 사쿠마는 자민당원이면서 무소속으로 활동(자민당원이기 때문에 개별 의결은 자민당 현 의원단과 행동을 함께하여, 사실상 지사 여당 의원이었다)했으며, 당 활동은 제한되었지만, 사쿠마와 친한 현 의원도 당 안팎에 여러 명 있어, 현 의회에서는 은연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 의회에서 쓰치야와 사쿠마가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쓰치야 사임까지 우호적인 관계가 되지는 않았다. 2001년 12월의 가스카베 시장 선거에서는 쓰치야 요시히코・시나코 부녀가 지지하는 현직에 대해, 대립 후보를 사쿠마가 지원했다. 쓰치야 대 사쿠마의 대리전이라고 평가되었다. 결과는 쓰치야가 지원한 현직 사에구사 야시게 시장이 6선을 달성했다.

2003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사쿠마(자민당적・비공인 비추천)・시미즈(자민당 공인) 모두 당선. 다시 대립이 표면화되는 양상이 되었지만, 같은 해 7월, 다스킨 부정 지출 사건을 계기로, 쓰치야의 정치 자금 관리 단체를 둘러싼 문제로 쓰치야의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가 체포되어, 쓰치야가 현 지사를 사임하고 정계 은퇴. 수사 기관으로부터 지사 공관을 압수 수색당했고, 쓰치야 본인은 기소 유예, 장녀 모모코에게는 유죄가 확정되었다. 현정에서의 양자의 정쟁은 완전히 끝났지만, 사쿠마는 자민당원이면서 자신이 소속된 지부의 지부장인 시나코를 지원하지 않는 등, 그 후에도 대립이 꼬리를 물었다.

쓰치야 사임 후의 지사 선거에서 사쿠마는 민주당 출신이면서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우에다 세이지를 지원했고, 그의 당선을 환영. 야당 회파가 된 자민당 현 의원단을 우에다 지사에게 소개하고 여당 회파화하는 등, 다시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2007년 4월의 통일 지방 선거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서 9선을 달성한 사쿠마는 자민당 현 의원단에 복귀했다. 한편 시미즈는 낙선했지만, 쓰치야의 사망 직후인 2008년 11월에 치러진 보궐 선거에 출마. 시나코 등의 지원을 받아 3선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 출마 당시 시미즈는 자민당을 탈당, 자민당의 추천도 받지 않고, 정치 단체 '가스카베 겐키주쿠'를 신고. 현 의회에서는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4. 3. 재정 악화

쓰치야 요시히코는 자민당과의 양호한 관계를 바탕으로 보수 현정을 펼쳤으나, 버블 붕괴의 영향으로 재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4] 공공 사업을 많이 포함한 팽창형 예산으로 인해 사이타마현의 채무는 11년 재임 기간 동안 8,000억 엔에서 2조 8,000억 엔으로 4배 증가했다.[4] 이는 하타 지사나 우에다 세이지 지사 시대에는 생각할 수 없는 예산액으로, 사이타마현의 적자 재정을 최악으로 몰아넣었다.[4]

4. 4. 정치자금 문제

2003년 7월, 쓰치야 요시히코의 정치자금 관리 단체인 '지방행정연구회'에서 1억 엔이 넘는 헌금 기재 누락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혐의로 장녀 이치카와 모모코가 체포되었다. 쓰치야 요시히코는 처음에는 사임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조사 결과, 쓰치야 요시히코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5. 역대 선거 기록

/후보자 수비례구비례 순위
/후보자 수
1965년 참의원 선거1965년 7월 4일사이타마현 지방구자유민주당298,59229.02/5--당1971년 참의원 선거1971년 6월 27일사이타마현 지방구자유민주당553,30844.31/3--당1977년 참의원 선거1977년 7월 10일사이타마현 지방구자유민주당659,16932.61/6--당1983년 참의원 선거1983년 6월 26일사이타마현 지방구자유민주당605,51633.21/6--당1989년 참의원 선거1989년 7월 23일사이타마현 지방구무소속627,27525.12/12--당1992년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1992년 6월 21일사이타마현무소속906,85158.51/5--당1996년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1996년 6월 23일사이타마현무소속1,122,04167.71/5--당2000년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2000년 6월 25일사이타마현무소속2,185,31568.81/3--당선 횟수 8회 (참의원 의원 5회, 사이타마현지사 3회)


6. 수상

1999년 4월 29일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5] 2001년 3월 25일에는 와세다 대학에서 명예 박사(법학) 학위를 받았다.[5] 2008년 10월 5일 종2위에 추서되었고,[5] 2021년 12월 20일에는 카스카베시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5]

7. 저서

참조

[1] 웹사이트 歴代議長・副議長一覧 https://www.sangiin.[...] 参議院ホームページ 2022-08-03
[2] 웹사이트 名誉市民(土屋 義彦氏) https://www.city.kas[...] 春日部市 秘書課 秘書担当 2021-12-20
[3] 뉴스 土屋義彦氏が死去/参院議長から埼玉知事 https://www.shikoku-[...] 四国新聞社 2008-10-06
[4] 뉴스 「ダサイタマ」は死語? 呼び名と県民反応の歴史 県議会で論争、逆手にPR… https://style.nikkei[...] 日本経済新聞社 2016-12-20
[5] 웹사이트 名誉市民(土屋 義彦氏) https://www.city.kas[...] 春日部市 秘書課 秘書担当 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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