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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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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군은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전개한 단체들을 통칭한다. 1910년대에는 간도,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었고,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등이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0년대에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만주 사변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항일 유격대가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연합군과 함께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독립군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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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조선)
기본 정보
이름대한독립군단
한자 표기大韓獨立軍團
로마자 표기Daehandeokripgundan
영문 명칭Korean Independence Corps
창립1920년 12월
해체1924년 9월
지휘관서일
소속대한민국 임시정부
본부중국 헤이룽장성 미산
자유시
이념한국 독립운동
병력 규모3,500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깃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깃발
역사
주요 전투자유시 참변
관련 사건독립군 통합 노력의 일환으로 창설되었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됨.
동맹 및 적대 관계
동맹소비에트 연방 (1921년까지)
적대 세력일본 제국

2. 독립군의 성립 배경



중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만주 남북부, 특히 북간도에 주둔한 독립군 부대들은 중소 국경 근처 밀산 방향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항일 전쟁 기지를 건설했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의 지도 아래, 대한독립군, 신한청년회, 구춘선이 이끄는 국민회, 혼춘의 국민회, 군정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의 대표들은 장기적인 항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이 단체를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조직했다.[1][2][3]

2. 1. 을미의병 (1895)


2. 2. 을사의병 (1905)


2. 3. 정미의병 (1907)

고종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에 저항하여 일어난 의병 항쟁이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3. 독립군의 초기 활동 (1910년대)

한일신협약 체결 이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고,이 해산 군대가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의병 전쟁의 양상을 띠어 가게 되었고, 차차 이 의병이 체계적인 지도 체제를 갖추고 고도로 훈련된 전투 군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1] 이 시기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한반도 내에서 무장 독립 운동에 대한 일본 제국의 탄압이 강한 시기였으므로 간도, 만주, 연해주 등지로 독립군의 중심지가 이동하게 된다.[1] 이들 지역에서는 민족 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기지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1] 특히 국내의 민족 운동 단체이자 비밀 결사로 운영되었던 신민회의 경우, 남만주 삼원보 지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들을 본격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20년대 서로군정서군의 기반이 된다.[1] 북만주 지역에서는 대종교 단체인 중광단김좌진과 함께 의병들과 대종교도들을 규합하여 북로군정서군을 조직한다.[1] 연해주에서는 1911년 권업회가 이동휘, 이상설 등에 의해 조직되어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비밀결사인 양도호와 해도호를 운영하고,[1] 1914년에는 동 단체에서 이상설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임시 정부로서 설립하게 되어 통합적 독립 전쟁에 대한 시도도 이뤄지게 된다.[1]

3. 1.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한일신협약 체결 이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고, 해산 군대가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어 의병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의병은 체계적인 지도 체제를 갖추고 훈련된 전투 군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간도, 만주, 연해주 등지로 독립군의 중심지가 이동하게 된다.

이들 지역에서는 민족 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기지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신민회는 남만주 삼원보 지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20년대 서로군정서의 기반이 된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대종교 단체인 중광단김좌진과 함께 의병들과 대종교도들을 규합하여 북로군정서를 조직한다. 연해주에서는 1911년 권업회이동휘, 이상설 등에 의해 조직되어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인 양도호와 해도호를 운영하고, 1914년에는 이상설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임시 정부로서 설립하여 통합적 독립 전쟁을 시도하였다.

3. 2. 국내 진공 작전

한·일 신협약 체결 이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고, 해산 군대가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어 의병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후 의병은 체계적인 지도 체제를 갖추고 훈련된 전투 군대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일본 제국의 탄압이 강화되자, 독립군의 중심지는 간도, 만주,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민족 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기지 설립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4. 1920년대 독립군의 활동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는 총기와 탄약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 시기의 독립군은 이로 무장하여 두만강 근교를 넘나들며 일제 보급소나 파출소 등을 습격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4]

니콜라옙스크 일본영사관의 불탄 자리 1920년 6월


만주의 간도 지역은 깊은 숲이 많아 이씨 조선 시대부터 종종 조선족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이주하던 곳으로, 1920년경에는 50만 명 정도가 집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간도 협약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않아 게릴라 활동의 근거지로 적합했고, 1905년부터 1910년에 걸쳐 대한제국 말기에 고조된 항일 운동의 잔당이 활동을 지속하는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게다가 1919년 3월에 발발한 조선 국내의 독립 운동에 자극받은 농민과 노동자 일부가 새롭게 결기한 것으로 결성되었지만, 시베리아 출병의 영향으로 무장화는 단기간에 진행되었다.

주요한 것으로는 북간도 (두만강 유역)의 군정부 (후에 서로군정서로 개칭), 대한국민회군,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의용군, 광복군총서 등이 있었다. 이들 항일 무장 조직은 종종 국경을 넘어 조선 북부의 온성, 무산, 혜산 등의 마을을 습격했다. 다만 이들 지역에서의 활동은 민간인과 비무장 시설에 대한 약탈·습격이었으며, 일본 제국 군 및 조선총독부와 직접 무력 충돌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1920년 10월에 중국인 마적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훈춘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일본은 간도 일대에 수만 명의 대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대규모 간도의 항일 무장 조직 진압 작전을 벌였다. 이는 청산리 전투로 불리며, 한국에서는 과장된 전과로 과대 평가되고 있다.[4]

일본군의 공세로 각 무장 집단은 큰 타격을 입고 중·러 국경의 밀산부에 도주하여 잔당은 자칭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지만,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6월, 러시아 국내의 적군과 백군의 내전에 휘말려 적군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 (자유시 참변). 이로 인해 간도 지역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은 저조해졌다.

그러나 1932년에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이 대두했고, 중국인에 의한 반만주국 운동과 결합하여 다시 항일 투쟁이 고조되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비적은 약 36만 명 정도가 봉기했다고 추정되지만, 실제로는 모두 수백 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으로, 잠시 후 생활고에 시달려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싸움 등 내부 항쟁으로 치닫거나, 투쟁을 멈추고 농사일에 복귀하려는 자들이 속출했다. 1930년대에 "독립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5]

1930년대가 되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을 떠나거나 지하 운동화하는 등, 한반도 내부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전개한 것은 공산주의자가 주였다.[6] 그들이 주도하여 재조직한 것은 항일 유격대라고 하며, 당시 코민테른일당제 방침에 따라,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중국인 지휘하에 있었지만, 북한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린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인한 독립 후,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참전하여, 한국을 침략했다. 그 때문에, 한국 좌파에서는 1930년대 이후에도 활동 보고를 한 것으로 한국 침략의 죄가 있어도 찬미되고 있지만, 한국 우파에서는 한국을 멸망시키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비판받고 있다.[7][8]

4. 1. 봉오동 전투 (1920.6)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는 총기와 탄약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 시기의 독립군은 이를 통해 무장하여 두만강 근교를 넘나들며 일제 보급소나 파출소 등을 습격하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4. 2. 청산리 대첩 (1920.10)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는 총기와 탄약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 시기의 독립군은 이를 바탕으로 무장하여 두만강 근교를 넘나들며 일제 보급소나 파출소 등을 습격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김좌진은 밀산에서 이만을 거쳐 만주 북부로 후퇴하였고, 이범석, 김홍일 등 다른 부대들도 밀산에서 철수하였다.

4. 3. 대한독립군단 결성 (1920.12)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는 총기와 탄약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 시기의 독립군은 이로 무장하여 두만강 근교를 넘나들며 일제 보급소나 파출소 등을 습격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중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만주 남북부, 특히 북간도에 주둔한 독립군 부대들은 중소 국경 근처 밀산 방향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항일 전쟁 기지를 건설했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의 지도 아래, 대한국민의회, 북간도 국민회, 훈춘 대한국민회, 군무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의 독립군 부대 대표들은 장기적인 항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으로 구성되었으며, 부대 상위 부대로 연대가 있었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약 3,500명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기, 의복, 식량 등 지원에 더욱 절실해졌다.

4. 4. 자유시 참변 (1921.6)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는 총기와 탄약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 시기의 독립군은 이를 이용해 무장하여 두만강 근교를 넘나들며 일제 보급소나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1]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1921년 2월에는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러시아 군사학교 졸업생 오하묵의 주선으로 치타의 완충 정부와 항일 독립군 사이에 군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군사 협정에 따라 독립군은 그들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았고, 독립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으며, 백계군 토벌에 참여했다.[1]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강력한 외교 공세를 펼쳐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혁명 후 국내 내전이 우려되었던 러시아는 일본과의 불화를 경계하여 한국 독립군을 무장 해제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1921년 6월 22일, 러시아 당국은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 명령을 내리고,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하여 제압함으로써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이때 독립군 부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큰 고난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독립군은 와해되었다.[1] 박두희(북로군정서), 이동휘 연합 부대, 지청천 부대,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는 미산을 거쳐 이만을 지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1]

5. 1930년대 이후 독립군의 활동

1932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이 대두했고, 중국인에 의한 반만주국 운동과 결합하여 다시 항일 투쟁이 고조되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비적은 약 36만 명 정도가 봉기했다고 추정되지만, 실제로는 모두 수백 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으로, 잠시 후 생활고에 시달려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싸움 등 내부 항쟁으로 치닫거나, 투쟁을 멈추고 농사일에 복귀하려는 자들이 속출했다. 1930년대에 "독립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5]

1930년대가 되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을 떠나거나 지하 운동화하는 등, 한반도 내부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전개한 것은 공산주의자가 주였다.[6] 그들이 주도하여 재조직한 것은 항일 유격대라고 하며, 당시 코민테른일당제 방침에 따라,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중국인 지휘하에 있었지만, 북한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린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인한 독립 후,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참전하여, 한국을 침략했다. 그 때문에, 한국 좌파에서는 1930년대 이후에도 활동 보고를 한 것으로 한국 침략의 죄가 있어도 찬미되고 있지만, 한국 우파에서는 한국을 멸망시키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비판받고 있다.[7][8]

5. 1.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자유시로 이동하는 동안 무장 해제에 응하지 않은 부대는 연해주 이만(현재 러시아 연해주 달네레첸스크)에서 만주로 복귀했다. 자유시로 이동한 부대는 통합 과정에서 흑하사변(이청사변)을 겪었다. 흑하사변 이후 자유시에 남은 병력은 고려혁명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1][1]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대한독립군은 여러 부대로 재편성되었다.[1]

  • 고려혁명군(오하묵): 1921.8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 주 → 제5 적군에 배속.
  • 대한의용군(유사용): 1921.10 연해주 이만시(달네친스크) → 적군 특별 보병 대대로 개편
  • 대한독립군(이범윤, 김좌진): 1922.8 흑룡강성 동녕현 - 잔류 병력 재편성
  • 적기단(최봉설): 1923.1 연해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고려혁명군(김규식): 1923.5 길림성 연길현
  • 대한독립군정서(현천묵): 1924.3 흑룡강성 동빈현(同賓縣)


1922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군부, 혈성단, 국민회, 대한광복회, 대한정의단, 대한의민단, 대한신민단, 대한독립군 등의 대표자에 의해 대한독립군이 재편성되었다. 이범윤이 총재로, 김좌진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항일 독립군 부대 통합을 통한 독립군 창설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1924년 9월 군사통일회의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범윤(李範允)이 위원장, 김좌진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김규식, 최진동, 현천묵, 강국모, 남성기, 최호, 박두희, 유현, 이장녕 등이 만주의 동녕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수분하에서 하얼빈을 잇는 동지선을 따라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1][1][1] 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여러 독립군 부대가 공식적으로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되었으나, 열악한 재정과 흩어진 군사력으로 인해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1]

이후, 미쓰야 협정을 포함한 일본의 독립군 탄압 속에서, 독립군은 조직을 재편하고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결성하며 통일 운동을 이어갔다. 대한독립군단은 한국인 사회의 통합을 추구하고 동시에 독립 전쟁을 통해 조국을 해방하고자 일본 식민 통치에 맞서 필사적인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무장 단체였다. 이러한 독립 운동의 계승선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1][1]

5. 2.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

5. 3. 동북항일연군

6. 1940년대 독립군의 활동

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여러 독립군 부대가 공식적으로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되었으나, 열악한 재정과 흩어진 군사력으로 인해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1] 이후, 미쓰야 협정을 포함한 일본의 독립군 탄압 속에서, 독립군은 조직을 재편하고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결성하며 통일 운동을 이어갔다.[1] 대한독립군단은 한국인 사회의 통합을 추구하고 동시에 독립 전쟁을 통해 조국을 해방하고자 일본 식민 통치에 맞서 필사적인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무장 단체였다.[1] 이러한 독립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 창설(1940년)로 이어졌으며,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1]

6.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여러 독립군 부대가 공식적으로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되었으나, 열악한 재정과 흩어진 군사력으로 인해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1] 이후, 미쓰야 협정을 포함한 일본의 독립군 탄압 속에서, 독립군은 조직을 재편하고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결성하며 통일 운동을 이어갔다.[1] 대한독립군단은 한국인 사회의 통합을 추구하고 동시에 독립 전쟁을 통해 조국을 해방하고자 일본 식민 통치에 맞서 필사적인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무장 단체였다.[1] 이러한 독립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 창설(1940년)로 이어졌으며,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1]

7. 독립군 관련 논란 및 비판

7. 1. 자유시 참변 책임 논란

7. 2. 1930년대 이후 독립군 활동에 대한 평가

8. 독립군의 의의와 영향

독립군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존재였다.[4] 1920년대 만주 간도 지역은 이씨 조선 시대부터 조선족 농민들이 이주하던 곳으로, 간도 협약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않아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가 되었다.[4] 주요 독립군 부대로는 북간도의 서로군정서, 대한국민회군,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이 있었다.[4] 이들은 훈춘 사건 이후 일본군의 대규모 진압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고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세력이 약화되었다.[4]

1932년 만주 사변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이 등장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5] 1930년대 이후 한반도 내 무장 독립 운동은 항일 유격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들은 코민테른일당제 방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았다.[6] 태평양 전쟁 패전 후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참전하여 한국을 침략했기에, 한국 우파에서는 이들을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7][8]

독립군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통일 이후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역사적 교훈을 제시한다.

참조

[1] 뉴스 Korean Independence Corps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2-04
[2] 웹사이트 Doopedia(대한독립군단) : 大韓獨立軍團 (Korean Independence Corps) https://www.doopedia[...]
[3] 웹사이트 Korean Independence Corps https://m.blog.naver[...] Naver Blog 2023-09-16
[4] 웹사이트 韓国で反日映画続々公開も当事者自ら「神話に近い」と認める https://www.zakzak.c[...] 2020-07-14
[5] 웹사이트 【社説】ペク・ソンヨプ将軍を弔問するのは大韓民国大統領の義務だ http://www.chosunonl[...] 2020-07-14
[6] 웹사이트 【社説】ペク・ソンヨプ将軍を弔問するのは大韓民国大統領の義務だ http://www.chosunonl[...] 2020-07-14
[7] 웹사이트 【コラム】「英雄」ペク・ソンヨプたたきの精神構造 http://www.chosunonl[...] 2020-07-14
[8] 웹사이트 【萬物相】護国の英雄、ペク・ソンヨプ将軍を罵倒する韓国左派 http://www.chosunonl[...]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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