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카쿠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롯카쿠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가(武家) 가문으로, 오미국(近江国)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다. 사사키씨(佐々木氏)의 분가로 시작하여,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거치며 오미 슈고(守護)를 역임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롯카쿠 우지요리, 롯카쿠 사다요리, 롯카쿠 요시카타 등이 주요 인물로 꼽힌다. 센고쿠 시대에는 미요시 씨(三好氏)와의 다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침공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멸망했다. 롯카쿠씨 식목(六角氏式目)이라는 분국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에도 시대 이후에는 가가 번(加賀藩)의 가신으로 남아 가문을 이어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센고쿠 무장의 명수 - 다케다 이십사장
다케다 이십사장은 센고쿠 시대 다케다 신겐을 섬긴 24명의 가신을 묘사한 그림으로, 다케다 가문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에도 시대에 대중 예술의 소재로 활용되었고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다루어지지만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센고쿠 무장의 명수 - 오다 사천왕
- 롯카쿠씨 - 롯카쿠 요시카타
롯카쿠 요시카타는 센고쿠 시대 오미 남부의 롯카쿠 가문 당주로서,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전투, 아자이 가문의 침략 격퇴,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헤키류 궁술 계승 및 사사키류 기마술 창시 등 무예에도 뛰어났으나, 아자이 나가마사의 반란과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 패배로 가문이 멸망했다. - 롯카쿠씨 - 무소 소세키
무소 소세키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서 남북조 시대에 걸쳐 활약한 선승이자 정원 디자이너로, 고다이고 천황과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신임을 받아 겐무 신정과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에 기여했으며, 유서 깊은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며 선종을 알리고 독창적인 정원 디자인으로 일본 조경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긴키 지방의 씨족 - 하타케야마씨
하타케야마씨는 헤이안 시대 무사시국에서 기원하여 겐페이 전쟁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세력을 키운 무가로, 아시카가 씨와 관계 깊은 겐지 하타케야마씨가 막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가문 내 분열과 센고쿠 시대 혼란으로 쇠퇴, 에도 시대에는 고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시족으로 이어졌다. - 긴키 지방의 씨족 - 아사쿠라씨
아사쿠라 씨는 구사카베 친왕의 후손을 자처하며 에치젠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씨족으로, 아사쿠라 타카카게가 분국법을 제정하여 전국 다이묘로 성장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한 후에도 혈통을 이어 에도 시대까지 존속했다.
롯카쿠씨 | |
---|---|
개요 | |
가문 이름 | 롯카쿠 씨 (사사키 롯카쿠 씨) |
가문 문양 | 스미타테요츠메 (隅立て四つ目), 츠루노마루 (鶴の丸) |
본성 | 우다 겐지 사사키 씨 적류 |
시조 | 사사키 야스츠나 |
종별 | 무가, 사족 |
근거지 | 오우미국 남부 |
주요 인물 | 롯카쿠 타카요리 롯카쿠 사다요리 롯카쿠 요시카타 롯카쿠 요시하루 |
지류 | 사사키가? |
2. 역사
오미 겐지인 사사키씨의 4개 분가 중 하나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슈고로서 미나미 오우미 일대를 지배했다. 롯카쿠씨라고 자칭한 것은 교토 롯카쿠히가시노토우인에 롯카쿠씨의 시조가 되는 사사키 야스츠나가 저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당시, 당주 롯카쿠 토키노부는 로쿠하라 탄다이를 끝까지 지원하다 패배하여 항복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롯카쿠씨는 오미 슈고직을 두고 교고쿠씨와 대립했다. 교고쿠 다카우지(사사키 도요)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친분을 바탕으로 오미 슈고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롯카쿠 우지요리가 오미 슈고가 되면서 롯카쿠씨가 오미 슈고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고쿠씨는 슈고사불입 특권을 인정받고,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에는 사직이 되어 롯카쿠씨와 대립하였다.
오닌의 난이 일어나자, 타카요리는 서군에 속했다. 롯카쿠씨의 군사 지휘는 중신인 야마우치 마사츠나와 이바 사다타카가 맡았다. 분메이 9년(1477년)에 오닌의 난이 수습되자, 이듬해 분메이 10년(1478년)에 타카요리는 막부에 귀참하고,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 의해 오미 슈고 자리를 받았다.
센고쿠 시대 중기에는 롯카쿠 사다요리가 등장했다. 사다요리는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여러 번 비호했고, 덴분 호케의 난 진압에도 관여했다. 가모군간논지성을 본거지로 오미 일대에 세력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이가 국과 이세 국의 일부(호쿠세 48가가 지배하는 북이세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쳐 롯카쿠 씨의 최성기를 만들었고, 아와 국에서 긴키 지방으로 진출한 미요시 씨와 여러 차례 다퉜다.
하지만 사다요리 사후, 뒤를 이은 롯카쿠 요시카타 시대에도 미요시 나가요시와 여러 번 다퉜지만, 1560년에 노라다 전투에서 아사이 나가마사에게 패배하는 등 롯카쿠 씨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저항했지만, 1570년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패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거병했지만 야스카와라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군에게 패배했다. 아사쿠라군이 오미로 침공하자 다시 거병했지만 재차 패배하여, 같은 해 11월에는 간논지성 등 주요부를 되찾지 못한 채 노부나가와 화해했다 (시가 전투).
이후 롯카쿠 요시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쓰구에 의해 소환되었으며, 오사카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으로도 나타난다. 요시하루는 오미하치만성 주성도 맡았던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측근으로 섬겼고, 히데쓰구 가문이 멸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다.
롯카쿠 요시하루의 데릴사위 사다하루는 장인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이 되어 오사카 전투를 맞이했다. 오사카성 퇴각 후, 옛 중신이었던 가모 씨의 객장을 거쳐 가가 국의 마에다 씨 가신으로 섬겼고, 에도 시대에는 가가 번사 사사키 롯카쿠(롯카쿠) 가문으로서 1,000석을 받았으며, 자손이 가증되어 2100석의 가가 번사로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렀다.
2. 1. 가마쿠라 시대
사사키씨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친척이자 막부 창업 공신으로, 서일본의 슈고를 맡아 크게 번영했다.[2] 사사키 노부쓰나 사후, 영지의 상당수는 3남 야스쓰나가 승계했으나, 간겐 원년(1243년), 노부쓰나의 장남 시게쓰나가 막부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야스쓰나가 적류인 것은 변함없었으나, 오우미 소령 일부를 잃었다. 오우미 소령은 형제들에게 4분할되어, 시게쓰나와 차남 다카노부, 막내 우지노부는 각각 오오하라씨, 타카시마씨, 쿄고쿠씨의 선조가 되었고, 적류인 야스쓰나 가계는 롯카쿠씨가 되었다.이 가문들은 가마쿠라 막부를 직접 섬겼기 때문에, 총령인 롯카쿠씨가 다른 세 집안을 가신으로 만들지 못해 오우미 통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당시, 당주 롯카쿠 토키노부는 로쿠하라 탄다이를 끝까지 지원하다 패배하여 항복했다.
2. 2.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 롯카쿠씨는 오미 슈고직을 두고 교고쿠씨와 대립했다. 교고쿠 다카우지(사사키 도요)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친분을 바탕으로 오미 슈고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롯카쿠 우지요리가 오미 슈고가 되면서 롯카쿠씨가 오미 슈고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고쿠씨는 슈고사불입 특권을 인정받고,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에는 사직이 되어 롯카쿠씨와 대립하였다.다카시마씨, 구쓰키씨, 오하라씨 등은 봉공중으로서 막부의 직신이 되어 롯카쿠씨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또한 영내에 히에이산이 있어 롯카쿠씨의 지배는 불안정했다. 롯카쿠 미쓰쓰나, 롯카쿠 모치쓰나 부자는 가신 반란으로 자살했고, 롯카쿠 히사요리는 교고쿠 모치키요와 대립하다 1456년에 자살했다.
2. 2. 1. 무로마치 막부 성립과 교고쿠 가문의 대두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자, 서류인 교고쿠씨의 교고쿠 다카우지(사사키 도요)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즈모 슈고, 히다 슈고 등에 더해 오미 슈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에 롯카쿠 우지요리가 오미 슈고에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막부와 대립한 시기를 제외하고, 오미 겐지 사사키씨의 적류로서 오미 일국의 슈고 지위를 차지하였다.하지만 교고쿠씨는 이즈모나 히다의 슈고를 대대로 맡아 번영하였고, 오미 국내에서도 슈고사불입(슈고인 롯카쿠씨의 지배를 받지 않는 특권)을 인정받았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때에는 4직이 되어 막부의 요직을 차지해 롯카쿠씨와 대립했다. 또한, 국내 동족 중에는 다카시마씨, 구쓰키씨, 오하라씨 등 봉공중으로 막부의 직신화되는 자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막부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 슈고 롯카쿠씨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영내에는 히에이산도 있어 무로마치 시대를 통해 롯카쿠씨의 지배는 안정되지 않았다. 롯카쿠 미쓰쓰나, 롯카쿠 모치쓰나 부자는 가신의 반란으로 자살했고, 모치쓰나의 동생으로 뒤를 이은 롯카쿠 히사요리는 교고쿠 모치키요와의 대립 끝에 정신적 피로로 고쇼 2년(1456년)에 자살하였다.
2. 2. 2. 오닌의 난과 가키쓰의 난
오닌의 난이 일어나자, 타카요리는 서군에 속했다. 롯카쿠씨의 군사 지휘는 중신인 야마우치 마사츠나와 이바 사다타카가 맡았다. 난 중에는 동군 측의 오미 수호가 된 교고쿠 모치키요나 롯카쿠 마사타카와 싸우고, 또한 미노국 수호인 토키 나리요리나 수호대 사이토 묘춘과 협력하여 적대 세력에 해당하기도 했다. 분메이 2년(1470년) 교고쿠 모치키요의 병사로 인해 교고쿠씨가 분열되자(교고쿠 소란), 서군에 교고쿠 타카키요가 가세하는 등 교고쿠씨는 혼란에 빠졌고,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던 타카요리는 오미에 세력을 뻗었다. 분메이 3년(1471년)에는 타카요리는 시미즈성을 함락시키고 롯카쿠 마사타카를 자결에 몰아넣었다.분메이 9년(1477년)에 오닌의 난이 수습되자, 이듬해 분메이 10년(1478년)에 타카요리는 막부에 귀참하고,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 의해 오미 수호의 자리를 받았다.
2. 2. 3. 메이오 정변과 센고쿠 시대 초기
엔토쿠 2년(1490년), 도키 씨의 비호를 받던 아시카가 요시타네 (후의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으로 취임하고, 롯카쿠 다카요리는 사면되었다. 그러나 롯카쿠 씨의 내부 무리가 사찰 본소령의 반환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듬해 엔토쿠 3년(1491년) 4월에 다시 막부군의 원정이 시작되었다(엔토쿠의 난). 다카요리는 다시 코우가로 도망쳤지만 패배를 거듭하고, 이세에서도 기타바타케 씨의 군세에 맞서 싸우다 도망쳤다.[3]아시카가 요시타네는 오미 슈고 자리를 롯카쿠 마사타카의 유아인 '''롯카쿠 도라치요'''에게 주고, 메이오 원년(1492년) 12월에 교토로 개선했지만, 직후 메이오 2년(1493년) 4월, 가와치 원정 중에 간레이인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아시카가 요시타카 (후의 요시즈미)를 옹립하여 권력을 잃었다(메이오 정변).
11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타카는 롯카쿠 도라치요를 폐하고, 야마우치 나리쓰나 (사사키 고사부로)를 오미 슈고로 임명했다. 다카요리는 이 기회를 틈타 봉기하여, 사이토 묘준 등의 지원을 받아 야마우치 나리쓰나를 교토로 몰아내고, 메이오 4년(1495년), 아시카가 요시타카로부터 회유를 받아 오미 슈고로 임명되었다. 다카요리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함께 미노에서 일어난 후나다 전투에 개입했고, 이듬해 메이오 5년(1496년)에 미노 사이토 씨, 교고쿠 씨, 아사쿠라 씨의 침공을 받았지만, 다카요리는 이세의 군세와 가모 씨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하고, 사이토 묘준을 쳐 죽였다.[4]
2. 3.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 중기에는 '''롯카쿠 사다요리'''가 등장했다. 사다요리는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여러 번 비호했고, 덴분 호케의 난 진압에도 관여했다. 가모군간논지성을 본거지로 오미 일대에 세력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이가 국과 이세 국의 일부( 호쿠세 48가가 지배하는 북이세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쳐 롯카쿠 씨의 최성기를 만들었고, 아와 국에서 긴키 지방으로 진출한 미요시 씨와 여러 차례 다퉜다.하지만 사다요리 사후, 뒤를 이은 '''롯카쿠 요시카타''' 시대에도 미요시 나가요시와 여러 번 다퉜지만, 1560년에 노라다 전투에서 아사이 나가마사에게 패배하는 등 롯카쿠 씨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2. 3. 1. 간논지 소동과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
롯카쿠 요시하루는 가독을 이은 후, 1563년에 중신인 고토 가타토요 부자를 살해했는데, 이를 계기로 가신단 내에서 내분(관음사 소동)이 일어나 롯카쿠씨 식목에 서명을 해야만 했고, 롯카쿠씨 당주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이처럼 롯카쿠씨는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의 시대에 크게 쇠퇴하여,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끄는 상락군과 싸워 패배하여, 거성인 관음사성을 떠나게 되었다(관음사성의 전투).2. 3. 2. 오다, 도요토미 시대
그 후, 요시카타와 요시하루는 코카군 북부의 이시베성으로 거점을 옮겨 노부나가에게 게릴라식으로 저항했다. 이는 과거 무로마치 막부의 롯카쿠씨 정벌 때 롯카쿠 다카요리의 전술과 유사하다. 1570년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패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거병했지만 야스카와라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군에게 패배했다. 아사쿠라군이 오미로 침공하자 다시 거병했지만 재차 패배하여, 같은 해 11월에는 간논지성 등 주요부를 되찾지 못한 채 노부나가와 화해했다 (시가 전투). 이 화해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간논지성을 빼앗긴 채 화해한 것은 사실상의 항복이며, 다이묘로서의 롯카쿠씨의 멸망으로 평가받고 있다.[6]그 후에도 요시카타와 요시하루는 몇 차례 거병을 시도했으며, 1574년 4월에 이시베성이 함락되자 코카군 남부의 시가라키로 도망쳐 계속 저항했지만,[6] 차츰 역사 무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후에 롯카쿠 요시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쓰구에 의해 소환되었으며, 오사카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으로도 나타난다. 요시하루는 오미하치만성 주성도 맡았던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측근으로 섬겼고, 히데쓰구 가문이 멸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다.
2. 4. 에도 시대 이후
롯카쿠 요시하루의 데릴사위 사다하루는 장인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이 되어 오사카 전투를 맞이했다. 오사카성 퇴각 후, 옛 중신이었던 가모 씨의 객장을 거쳐 가가 국의 마에다 씨 가신으로 섬겼고, 에도 시대에는 가가 번사 사사키 롯카쿠(롯카쿠) 가문으로서 1,000석이 되었으며, 자손이 가증되어 2100석의 가가 번사로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렀다. 메이지 시대에는 사족에 편입되었고, 가문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센다이 번사에도 롯카쿠 가문이 있었는데, 초대 당주는 나오히사라고 하며, 다테 요시무라에게 불려졌다고 한다. 현재도 후쿠시마현고리야마시 등에 롯카쿠 성씨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요시하루의 동생 '''롯카쿠 요시사다'''의 자손도 에도 막부의 하타모토가 되었다. 이쪽도 본성인 사사키 씨를 칭했다. 그러나 요시사다의 증손자 구마 사다카타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절가되었다.[7]
요시하루의 동생 다카이치는 오다 노부오의 가신이 되었고, 그의 아들 마사카츠는 이코마 씨를 칭하며 야마토 국우다마쓰야마 번 오다 가문의 중신이 되었다. 자손은 단바 국가시와라 번 오다 가문에 섬겼다.
롯카쿠 씨 연구를 하고 있는 중세 사학자 무라이 유키는, 롯카쿠 요시카타의 묘소와 위패가 있는 슈온안이 가가 번사 사사키 롯카쿠 가문과 연락을 취하여 법요를 거행해 온 사실을 지적하며, 가가 번사 사사키 롯카쿠 가문이 오미 수호 롯카쿠 씨의 적류 자손이었다고 결론짓고, 하타모토 사사키 가문도 그 분가였다고 한다.
3. 분국법
롯카쿠 씨가 제정한 분국법은 롯카쿠 씨 식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롯카쿠 가문 일족
이름 |
---|
롯카쿠 야스츠나 |
롯카쿠 요리츠나 |
롯카쿠 토키노부 |
롯카쿠 우지요리 |
롯카쿠 요시노부 |
롯카쿠 미츠타카 |
롯카쿠 미츠츠나 |
롯카쿠 모치츠나 |
롯카쿠 토키츠나 |
롯카쿠 히사요리 |
롯카쿠 타카요리 |
롯카쿠 우지츠나 |
롯카쿠 사다요리 |
롯카쿠 요시카타 |
롯카쿠 요시하루 |
롯카쿠 요시사다 (요시하루의 동생) |
롯카쿠 마사카츠 (야마우치 마사츠나와 함께 롯카쿠 타카요리를 후견. 롯카쿠 성이 아니라고도 하며, 타카요리의 아버지이자 히사요리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
5. 롯카쿠 가문 주요 가신
5. 1. 무로마치 시대
- 야마우치 씨 (사사키 씨 계열)
- * 야마우치 노부아키라
- * 야마우치 마사쓰나
- * 야마우치 나리쓰나
- 이바 씨
- * 이바 미쓰타카
- * 이바 사다타카
- * 이바 사다노리
5. 2. 센고쿠 시대
가신 | |
---|---|
그 외 가신·통제하의 영주 |
6. 위서 『강원무감』의 영향
에도 시대에 사와다 겐나이가 쓴 위서인 『코우겐부칸(江源武鑑)』이나 계도류에서는 사다요리의 계통은 롯카쿠씨 서가인 미츠쿠리씨로 진다이에 불과하고, 우지츠나(사다요리의 형)의 아들 요시사네의 계통이 적류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지츠나의 아들 요시히데를 섬겨 편휘를 받았고, 우지츠나의 아들 요시사토가 도요토미 성과 시종의 관직을 받아 1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연좌되어 개역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위서였지만, 『간세이 중수 제사보(寛政重修諸家譜)』의 야마오카씨 계도나 민간 사서에 인용되었다. 사사키 토오루 등 일부 재야 역사가는 우지츠나(사다요리의 형)의 후손이 실재했다는 입장이지만, 연구자들에게는 위서로 지목되고 있다.[1]
무라이 유우키는 우지츠나의 7주기나 13주기의 시주가 모두 사다요리이므로, 우지츠나의 자손은 없었다고 한다.[1]
참조
[1]
서적
国史大辞典
2018-10-01
[2]
서적
近江蒲生郡誌 巻2
滋賀県蒲生郡役所
[3]
간행물
蔭涼軒日録
1492-10-01
[4]
간행물
大乗院寺社雑事記
1496-10-19
[5]
간행물
後法興院記
1499-11-22
[6]
서적
信長公記
[7]
서적
断家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