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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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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큐 침공은 1609년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략한 사건이다. 사쓰마 번은 류큐 침공을 통해 류큐 왕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에 두었으며, 류큐는 사쓰마 번의 감시 아래 외국 무역, 외교 등이 제한되었다. 류큐 왕국은 아마미 제도를 상실하고, 사쓰마 번에 조공을 바치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이 사건은 류큐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류큐 처분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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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류큐 왕국 지도
류큐 왕국 지도
시기1609년 3월 ~ 1609년 5월
장소류큐 제도
원인류큐국의 친명 외교
결과사쓰마 번의 승리, 류큐는 속국이 됨
교전 세력
교전 1류큐 왕국
교전 2사쓰마 번
지휘관 및 지도자
류큐 왕국쇼네이 왕
자나 우에카타
나고 료호
우라소에 초시
도미구스쿠 세이조쿠
쇼 코쿠시
구스쿠마 사페친
고에쿠 우에카타
야마자키 니큐
사쓰마 번시마즈 다다쓰네
가바야마 히사타카
히라타 마스무네
병력 규모
류큐 왕국3,000명 이상; 선박 수 미상
사쓰마 번3,000명, 100척의 선박
피해 규모
류큐 왕국최소 1,500명
사쓰마 번500명 이하
관련 전투

2. 용어

류큐 국의 정사인 《중산세감》에서는 '기유의 난'(己酉ノ乱) 또는 '기유왜란'(己酉倭亂)이라고 했다.[63]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는 '류큐 정벌'(琉球征伐) 또는 '류큐입성'(琉球入り)이라고 불렸다.[64]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사료에서는 '세이나와 역'(征縄役)이라는 용어로 불렸다.[65] 당시의 연호 "게이초"에서 '''게이초의 역'''이라고도 불린다[42][43]( 도요토미 정권의 게이초의 역과는 별개).

한편, 류큐 사료 『추잔세감』은 이를 '''기유의 난'''이라고 칭한다[44]。 현재의 학교 교과서나 역사 사전 등에서는 승자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정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일은 없으며, 사쓰마 시마즈 씨가 류큐 왕국을 무력으로 정복한 사실에 근거하여, "침공", "출병", "정복", "점령" 등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덧붙여, 당시 사쓰마 번 시마즈 씨의 군사적 의도는 류큐 왕국으로부터의 아마미 제도 탈취에도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번 내에서는 "'''오시마 입'''"이라고 불렀다[46]

3. 배경

15세기 중반 류큐 왕국 성립 이후, 아마미 오시마 군도의 교역 이권을 둘러싸고 왕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15세기에는 오키노에라부 섬과 요론 섬이, 1466년까지 오시마, 키카이 섬 등 아마미 군도 전역이 왕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시마즈 요시히사 시대 이전 (1570년대)까지 시마즈 씨와 류큐는 표면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49]

17세기 초, 주인선 무역이 시작되자 시마즈 씨는 류큐와의 무역 이권 독점을 노리고 류큐 왕국에 시마즈 씨의 도항 주인장을 갖지 않은 선박의 단속을 요구했다. 왕국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50] 시마즈는 류큐가 상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보았고, 류큐 왕권은 안정과 강화를 추구하면서 양측의 마찰이 심화되었다.[51]

임진왜란・경장역 및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치면서, 전국에 이름을 떨쳤던 시마즈 씨도 연패를 거듭, 사쓰마 번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남진, 즉 류큐 침공이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1588년, 당시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알현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천하를 통일했지만 류큐만은 신종의 예를 다하지 않아 이대로는 병사를 일으켜 류큐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상의"를 발했다고 한다. 그 취지는 1588년의 시마즈 요시히사에서 쇼에이 왕의 서간에 적혀 있다.

히데요시는 원래 끊어진 조일 무역의 재개 교섭이 난항을 겪고 꼬인 것에 분노하여 명나라 정복을 결의했다고 하며, 그를 위해 먼저 조선을 칠 것을 명분으로 임진왜란(조선역)을 기획했다. 1591년에는 조선 출병에 즈음하여 사쓰마와 함께 군역 부담을 류큐에 명령했고, 응하지 않으면 먼저 류큐부터 공격하겠다는 등 히데요시의 서간으로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위협했다. 이는 결국 군역 부담은 시마즈 씨가 대신했고, 더 나아가 대체로 요구된 병량미 공출은 왕부의 어려운 재정 사정으로 인해 요구의 절반에 그쳐 시마즈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왕부가 명나라 푸젠 성의 관료에게 궁상을 호소했지만, 특히 좋은 대답은 없고 그저 히데요시를 설득하라는 답변뿐이었다[47]

1602년, 센다이번 영내에 류큐 선박이 좌초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1603년에 류큐에 송환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사쓰마를 통해 사은사 파견을 반복해서 요구했지만, 류큐는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608년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수군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들은 시마즈 다다쓰네가 다시 대자사(大慈寺)의 승려 용운 등을 보내어 쇼네이 왕과 삼사관에게 반드시 조정의 초빙에 응하도록 설득했지만 테이 도는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모욕을 하며 사자로 온 승려를 욕보였다.[66]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면서, 쇼 네이는 사쓰마로부터 도쿠가와 막부에 정식으로 복종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 요청은 무시되었다. 1603년, 류큐 선원 몇 명이 센다이 영지 해안에 표류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을 류큐로 돌려보냈다.[10] 시마즈는 류큐에게 이에야스에게 다시 감사를 표할 것을 요청했지만, 류큐는 이 요청을 무시했다.[11][12]

결국, 시마즈 씨는 막대한 군역 부담으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재정 재건을 위해 류큐 왕국으로부터 아마미를 할양받고 류큐 무역의 독점적 이권을 얻으려 했다. 시마즈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허락을 얻어 류큐 침공을 감행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에 책봉을 받고 있었으며, 사쓰마의 침공에 대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침공에 관해 일절 구원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묵살했다. 당시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일본과의 전투에 막대한 지출과 부담을 강요당해 국력이 피폐해져, 도저히 류큐 지원을 위해 도해 원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쇠퇴한 명나라는 그 후 1644년에 반란으로 멸망한다.

청나라 말기에 발생한 류큐 어민 살해 사건에서도, 일본의 소에지마 다네오미 외무경이 1872년 (메이지 5년)에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가서 항의했지만, 청나라 측에서는 "대만은 화외의 땅이며 장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표명하는 등, 명나라 및 청나라 모두 책봉 하의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

3. 1. 류큐-일본 관계

15세기 중반 류큐 왕국 성립 이후, 아마미 오시마 군도의 교역 이권을 둘러싸고 왕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15세기에는 오키노에라부 섬과 요론 섬이, 1466년까지 오시마, 키카이 섬 등 아마미 군도 전역이 왕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시마즈 요시히사 시대 이전 (1570년대)까지 시마즈 씨와 류큐는 표면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49]

17세기 초, 주인선 무역이 시작되자 시마즈 씨는 류큐와의 무역 이권 독점을 노리고 류큐 왕국에 시마즈 씨의 도항 주인장을 갖지 않은 선박의 단속을 요구했다. 왕국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50] 시마즈는 류큐가 상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보았고, 류큐 왕권은 안정과 강화를 추구하면서 양측의 마찰이 심화되었다.[51]

임진왜란・경장역 및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치면서, 전국에 이름을 떨쳤던 시마즈 씨도 연패를 거듭, 사쓰마 번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남진, 즉 류큐 침공이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3. 1.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류큐 압박

1588년, 당시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알현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천하를 통일했지만 류큐만은 신종의 예를 다하지 않아 이대로는 병사를 일으켜 류큐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상의"를 발했다고 한다. 그 취지는 1588년의 시마즈 요시히사에서 쇼에이 왕의 서간에 적혀 있다.

히데요시는 원래 끊어진 조일 무역의 재개 교섭이 난항을 겪고 꼬인 것에 분노하여 명나라 정복을 결의했다고 하며, 그를 위해 먼저 조선을 칠 것을 명분으로 임진왜란(조선역)을 기획했다. 1591년에는 조선 출병에 즈음하여 사쓰마와 함께 군역 부담을 류큐에 명령했고, 응하지 않으면 먼저 류큐부터 공격하겠다는 등 히데요시의 서간으로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위협했다. 이는 결국 군역 부담은 시마즈 씨가 대신했고, 더 나아가 대체로 요구된 병량미 공출은 왕부의 어려운 재정 사정으로 인해 요구의 절반에 그쳐 시마즈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왕부가 명나라 푸젠 성의 관료에게 궁상을 호소했지만, 특히 좋은 대답은 없고 그저 히데요시를 설득하라는 답변뿐이었다[47]

3. 1. 2.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과 류큐

1602년, 센다이번 영내에 류큐 선박이 좌초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1603년에 류큐에 송환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사쓰마를 통해 사은사 파견을 반복해서 요구했지만, 류큐는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608년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수군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들은 시마즈 다다쓰네가 다시 대자사(大慈寺)의 승려 용운 등을 보내어 쇼네이 왕과 삼사관에게 반드시 조정의 초빙에 응하도록 설득했지만 테이 도는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모욕을 하며 사자로 온 승려를 욕보였다.[66]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면서, 쇼 네이는 사쓰마로부터 도쿠가와 막부에 정식으로 복종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 요청은 무시되었다. 1603년, 류큐 선원 몇 명이 센다이 영지 해안에 표류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을 류큐로 돌려보냈다.[10] 시마즈는 류큐에게 이에야스에게 다시 감사를 표할 것을 요청했지만, 류큐는 이 요청을 무시했다.[11][12]

결국, 시마즈 씨는 막대한 군역 부담으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재정 재건을 위해 류큐 왕국으로부터 아마미를 할양받고 류큐 무역의 독점적 이권을 얻으려 했다. 시마즈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허락을 얻어 류큐 침공을 감행했다.

3. 2. 류큐-명 관계

류큐 왕국은 명나라에 책봉을 받고 있었으며, 사쓰마의 침공에 대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침공에 관해 일절 구원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묵살했다. 당시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일본과의 전투에 막대한 지출과 부담을 강요당해 국력이 피폐해져, 도저히 류큐 지원을 위해 도해 원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쇠퇴한 명나라는 그 후 1644년에 반란으로 멸망한다.

청나라 말기에 발생한 류큐 어민 살해 사건에서도, 일본의 소에지마 다네오미 외무경이 1872년 (메이지 5년)에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가서 항의했지만, 청나라 측에서는 "대만은 화외의 땅이며 장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표명하는 등, 명나라 및 청나라 모두 책봉 하의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

4. 침공

1609년 3월 4일, 사쓰마 군은 총 3,000명, 선박 80여 척으로 야마카와 항을 출항했다.[68] 대장은 가바야마 히사타카, 부장은 히라타 마쓰무네였다.

4. 1. 아마미오시마

1609년 3월 4일 인시(새벽 4시)에 야마카와 항을 출발한 사쓰마 군은 3월 7일 신시(16시)에 아마미오섬에 도착했다.[68] 가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를 대장군, 히라타 마쓰무네(平田増宗)를 부장군으로 하는 사쓰마 군은 총 3000명, 선박 80여 척 규모였다.[53] 오시마에서는 전투가 전혀 없었고,[68] 오시마 현지 수뇌부는 류큐를 버리고 전면적으로 사쓰마에 협력했다.[69][70] 가사리의 촌장인 타메텐(笠利首里大屋子為転)은 가바야마의 신하로서, 아마미 사람들에게 항복을 촉구했으며,[13] 야키우치의 촌장인 시게테다루(焼内首里大屋子茂手樽)는 사쓰마 군에 물자를 제공했다.[14]

사쓰마 군은 오 섬 후카에가우라에 도착하여 8일에는 주변을 순찰했다.[56] 가사리의 구라모토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산림으로 도망쳐 숨어있었다.[56] 사쓰마 군은 노인들을 불러내어 안도할 것을 설명하고 돌아갔다.[53] 12일에 야마토하마를 경유하여 16일에는 니시코미에 도착, 20일 묘시에 토쿠노 섬으로 출항했다.

3월 10일, 류큐 왕국은 사쓰마 군의 오시마 상륙 소식을 듣고 항복을 청하기 위해 텐류 사이분 장로를 파견했지만, 접촉은 없었다.[37] 이분은 어딘가에 숨어 사쓰마 군과 만나지 못했고, 나중에 문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53]

4. 2. 도쿠노시마

13척의 배가 1609년 4월 17일 도쿠노 섬에 도착하여 흩어졌다. 2척의 배가 가나구마에 도착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척의 배가 와냐에 도착했다.[17] 배는 밤새 1,000명의 사람들에게 포위되었다. 4월 18일, 사쓰마군은 상륙하여 군중에게 발포하여 50명을 살해했다. 3척의 배가 아키토쿠에 도착하여[18] 아키토쿠 사람들에게 해안가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군대는 재빨리 반격하여 20~30명을 살해했다.[19]

3월 16일, 13척이 도쿠노시마로 선행했다.[56] 이에 대해 도쿠노시마에서는 일부 섬 주민들이 저항했지만, 신속하게 제압되었다.[53] 아키토쿠에서는 사쓰마 배 3척이 도착한 곳을 공격했지만, 20명에서 30명을 살해하고 제압했다. 지도자인 오키테 형제(형·사부라카네, 동생·시고라카네[59])는 곤봉, 부하인 백성들은 죽창이나 끓는 죽으로 과감하게 근접전을 벌였고, 사쓰마군도 일시적으로 해중에 몰아넣을 기세였지만, 쇼나이중의 단고노카미가 훌륭한 정밀 저격으로 사부라카네를 사살한 것에서 형세가 역전되었다고 한다.[57] 그러나 사쓰마 측도 쇼나이중이 6, 7명 사살되었고 (생사 불명), 시치토중에서는 6명의 사망자가 나왔다.[57]

도쿠노시마에는 요나바루 친운상이라는 류큐 왕부 관리도 파견되었지만, 섬 주민을 버리고 산속에 숨어있는 곳을 발견되어 22일에 생포되었다.[56]

사쓰마 함대는 4월 20일 오후 4시에 아키토쿠에도 도착했다. 4월 21일, 가바야마는 10척의 배를 이끌고 오키노에라부 섬으로 선발대로 출발했다. 다른 배들은 4월 24일 오전 10시에 도쿠노 섬을 떠나 해질녘 오키노에라부에 도착했다. 그들은 가바야마와 그의 배들을 만나 재빨리 오키나와 섬으로 출발했다.

4. 3. 오키나와 본섬

3월 25일 사쓰마 군은 오키나와 본섬 북부 나키진의 운텐항에 도착했다.[56] 나키진 성은 비어 있었고, 사쓰마 군은 방화했다.[20] 류큐 왕은 사이라이인키쿠인을 사자로 보내 화친을 시도했다.[37] 키쿠인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시마즈 가문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선발되었다.[36][37] 키쿠인은 나하에서 평화 회담을 제안했고, 나고 친방이 인질로 잡혔다.[37]

4월 1일, 사쓰마 군은 슈리성으로 진격했고, 우라소에 성과 류후쿠지를 불태웠다.[37] 타이헤이 다리에서 류큐 군과 전투가 벌어졌지만, 류큐 군은 조총 공격에 패배했다.[61] 4월 1일 나하항에서 평화 회담이 열렸고,[28] 쇼네이 왕의 동생 쇼 코와 세 명의 대신이 인질로 넘겨지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56] 5월 4일, 쇼네이 왕은 슈리성을 떠났고, 다음날 사쓰마 군은 성에 들어가 보물 목록을 작성했다.[28]

5. 전후 처리

1609년 류큐 침공 이후, 쇼네이 왕은 1610년 시마즈 다다쓰네와 함께 에도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했다.[3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슨푸성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에도성에서 쇼네이왕을 알현하였다.[31] 1611년, 쇼네이 왕과 삼사관은 "류큐는 예로부터 시마즈 씨의 부용국이다"라고 적힌 기청문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32][33] 이를 거부한 테이 도는 참수되었다.[34]

류큐 왕국은 '계 15조'를 인정하여 사쓰마 번의 감독을 받는 무역을 하게 되었다.[34] 이 조항은 외국 무역, 외교 및 여행에 대한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었으며, 류큐의 대외 관계는 사쓰마 번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마미 제도는 사쓰마 번 직할령이 되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왕국의 일부로 간주되었다.[34] 류큐는 일본과 중국에 모두 조공하는 이중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사쓰마 번은 에도에도 류큐의 사절을 데려갔지만, 그 당시의 복장은 왕국에 청 제국 사절이 왔을 때 사용하는 중화풍의 의상을 입혔다.

1879년 10월 류큐 처분과 관련하여 ''노스 차이나 헤럴드''에 게재된 쇼 네이와 삼사관, 15개 조항의 서약 번역본

6. 결과

1609년 5월 17일, 쇼 네이는 약 100명의 관료와 함께 운텐 항구를 출발하여 사쓰마로 향했다. 1610년 8월, 슨푸성에서 은퇴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고, 이후 에도로 가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정식으로 알현했다. 12월 24일,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시마즈 씨족에게 여러 서약을 해야 했다. 1611년, 침략 2년 후 국왕은 슈리의 성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부재한 동안, 가바야마 히사타카와 그의 대리인 혼다 지카마사는 영주 시마즈 타다쓰네를 대신하여 섬들을 통치했다. 사쓰마 출신 사무라이 관리 14명과 직원 163명이 왕국의 정치 구조와 경제 생산성을 조사하고 모든 섬의 토지 측량을 실시했다. 국왕이 슈리로 돌아와 왕실 설립 하에 통치를 재개한 후, 일부 류큐 관료들은 인질로 가고시마로 갔다.

1611년 가고시마에서 서명된 항복 문서에는 일련의 서약이 동반되었다. 국왕과 그의 의원들은 "류큐의 섬들은 고대부터 사쓰마의 봉건적 종속국이었다"고 맹세해야 했다. 왕실 의원이자 침략에 대한 왕국의 방어 사령관인 테이 도는 서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 후 참수되었다.

류큐는 명목상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일본인들에게는 "이국" (異国, ''이코쿠'')이었다. 그러나 아마미 오시마와 사쓰난 제도로 알려진 여러 북부 섬들은 사쓰마 번으로 합병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가고시마현에 남아 있다. 국왕은 상당한 권한을 유지했지만, 사쓰마가 정한 엄격한 지침의 틀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사쓰마에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쳐야 했다. 또한 중국과의 무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류큐에 대한 사쓰마의 지배를 중국 조정에서 은폐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침의 틀은 15개 조항(掟十五ヶ条, ''오키테 주고카조'')이라는 문서에 의해 주로 설정되었으며, 사쓰마가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 외에는 외국 무역, 외교 및 여행에 대한 금지가 이러한 조항의 주요 요소였다. 류큐의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와의 광범위한 무역 관계는 사쓰마의 이익에 유리하게 이용되었으며, 일본인과 류큐인 사이의 상호 작용과 두 섬 국가 간의 여행을 금지하는 다양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류큐 처분으로 이어진다. 류큐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독특한 외교적 위치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침공은 류큐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 오키나와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Chūzan Seikan
[2] 서적 琉球王国の構造 吉川公文館 1987
[3] 웹사이트 国土交通省 奄美群島の概要 http://www.mlit.go.j[...]
[4] 문서 雑録後編2
[5] 문서
[6] 문서 大日本古文書巻16・島津家文書之3
[7] 문서 入唐
[8] 문서
[9] 문서 雑録後編2
[10] 문서 島津家文書之二
[11] 문서 雑録後編3
[12] 문서 雑録後編4
[13] 문서 奄美大島諸家系譜集
[14] 문서 奄美大島諸家系譜集
[15] 문서 Shō Taikyū
[16] 문서 渡海日々記
[17] 문서 a harbor of Amagi town
[18] 문서 present Kametoku harbor in Tokunoshima town
[19] 문서 肝付兼篤書状
[20] 문서 渡海日々記
[21] 문서 Enkaku-ji, Naha
[22] 문서 Shimazu Yosihisa, Yoshihiro, Iehisa
[23] 문서 喜安日記
[24] 문서 久良波
[25] 문서 喜安日記
[26] 문서 大湾 or 大湾渡具知 (Ōwan Toguchi)
[27] 문서 雑録後編4
[28] 문서 Kian diary
[29] 문서 Kian diary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서적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35] 서적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後編4 1984
[36] 서적 『琉球国由来記』「西来禅院記」
[37] 문서 「[{{NDLDC|1144763}} 喜安日記]」
[38] 문서 「球陽附巻」12号
[39] 문서 「琉球渡海日々記」には'''琉球入'''番衆主取なる役名が見られる。
[40] 문서 「[[肝付兼篤]]書状」に「琉球国御征伐」とある。
[41] 웹사이트 国土交通省 奄美群島の概要 https://www.mlit.go.[...]
[42] 웹사이트 議会の概要 https://www.pref.oki[...] 沖縄県議会事務局 2022-05-14
[43] 웹사이트 島津侵入事件 https://kotobank.jp/[...] 2022-05-14
[44] 웹사이트 『琉球国中山世鑑』巻之二 https://web.archive.[...]
[45] 서적 『琉球王国の構造』 吉川公文館 1987
[46] 문서 친리(2007)
[47] 문서 『しまゆぬ1』
[48] 논문 琉球王国と中世日本 高志書院 2012
[49] 문서 『しまゆぬ1』
[50] 문서 琉球貿易 小学館 2001
[51] 논문 琉球王国と中世日本 高志書院 2012
[52] 문서 小山(1993)、新名(2014)
[53] 문서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拾遺家わけ2』「肝付兼篤書状」
[54] 문서 『奄美大島諸家系譜集』「笠利氏家譜」
[55] 문서 『奄美大島諸家系譜集』「前里家家譜」
[56] 문서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後編4』「琉球渡海日々記」
[57] 문서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後編4』「琉球入ノ記」
[58] 서적 琉日戦争一六〇九―島津氏の琉球侵攻 ボーダーインク 2009
[59] 웹사이트 「秋徳湊の古戦場跡」徳之島町公式サイト https://www.tokunosh[...]
[60] 문서 「樺山権左衛門久高譜中」
[61] 문서 「球陽附巻」史料番号5
[62] 문서 明治12年4月8日太政大臣三条実美通達
[63] 문서 『琉球国中山世鑑』 제2권, “琉球徃古ニハ金銀満ッテ或ハカンサシヲ作リ或ハ祭噐ヲ作リ又ハ大明暹羅日本ナトヘ往来致シ商賈ヲシケルモ察度王金宮ヨリ堀出給ケル金トソ聞ヱシ其ノ祭噐モカンサシモ数百年ノ後尚寧王ノ時マテ傳リケルカ己酉ノ乱ニ失セタリキ”
[64] 서적 『琉球王国の構造』 吉川公文館 1987
[65] 웹사이트 国土交通省 奄美群島の概要 http://www.mlit.go.j[...]
[66] 문서 「南聘紀考」
[67] 문서 琉球貿易 小学館 2001
[68] 문서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拾遺家わけ2』「肝付兼篤書状」
[69] 문서 『奄美大島諸家系譜集』「笠利氏家譜」
[70] 문서 『奄美大島諸家系譜集』「前里家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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