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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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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에파야는 라트비아 서부에 위치한 발트해 항구 도시로,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한다. 1263년 튜튼 기사단에 의해 '리바우'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으며,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시대에 주요 항구로 번영했다. 러시아 제국 시기에는 발트해의 주요 항구이자 이민의 출발지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라트비아 독립 후에는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으나, 소련 점령과 2차 세계 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소련 붕괴 이후 군사 도시에서 상업 항구 도시로 탈바꿈했으며, 현재는 리에파야 경제 특별 구역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기도 한 리에파야는 음악, 시각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매 도시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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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파야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리에파야 문장
문장
리에파야 깃발
깃발
리에파야 워드마크
브랜드마크
공식 명칭Liepāja (리에파야)
도시 유형자치 도시
표어'(바람이 태어나는 도시)'
별칭''
건립1625년 (도시 권한 부여)
위치라트비아, 유럽
지리
좌표''
면적60.37km²
육지 면적54.775km²
수면 면적5.595km²
해발 고도14m
기후온대 해양성 기후(Cfb)
행정
국가라트비아
시장구나르스 안신슈
소속 정당리에파야 파르티야
시의회 의원 수15명
인구
총 인구67,964명 (2021년)
도시 인구100,296명
인구 밀도자동 계산
인구 통계' (라트비아어)'
경제
GDP (국가 도시)' (|df=y}})'
1인당 GDP' (|df=y}})'
상징
국가 (바람이 태어나는 도시)
기타 정보
우편 번호LV-34(01-13); LV-3414; LV-34(16–17)
지역 번호+371 634
시간대동유럽 표준시(EET)
UTC 오프셋+2
일광 절약 시간제동유럽 하계시(EEST)
UTC 오프셋 (DST)+3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주요 시설
리에파야 전경
리에파야 전경
카로스타 성 니콜라스 해군 대성당
성 니콜라스 해군 대성당
리에파야 시청
시청
그레이트 앰버 콘서트 홀
그레이트 앰버 콘서트 홀
카로스타 급수탑
카로스타 급수탑

2. 역사

리에파야 지역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최소 750년 이상 되었으며,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53년 4월 4일 쿠르란트 주교와 리보니아 기사단 수장 간의 조약에서 '리바 마을'(Villa Liva|빌라 리바la)로 언급된 것이다. 1263년 튜턴 기사단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독일어로 '리바우'(Libau)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1920년까지 사용되었다. 라트비아어 이름 '리에파야'(Liepāja)는 1649년에 처음 문헌에 등장했다.

중세 시대 리에파야는 암스테르담모스크바를 잇는 무역로의 일부였으나, 16세기 초 강 수심이 얕아지면서 쇠퇴기를 겪었다.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시대에 야콥 케틀러 공작의 통치 아래 주요 항구 도시로 다시 번영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에 힘입어 조선업 등이 발달하고 서유럽 국가들과의 교역도 활발했다. 17세기 말에는 운하가 건설되고 항구가 현대화되었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후, 리에파야는 19세기에 철도 연결과 항만 시설 확충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발트해의 주요 항구이자 미국, 캐나다 등지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중요 출발 거점이 되었으며, 알렉산드르 3세의 명령으로 요새화되어 카로스타 지역에 대규모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발트 함대가 이곳에서 출항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제국 군대에 점령되었고, 라트비아 독립 전쟁 시기에는 임시 정부가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 전간기에는 라트비아 제2의 도시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소련나치 독일에 차례로 점령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특히 나치 점령기에는 리에파야 학살을 포함한 심각한 인명 피해와 함께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전후 소련 치하에서 리에파야는 해군 기지가 주둔하는 폐쇄 도시가 되었고, 도시의 상당 부분이 군사 시설로 사용되었다. 핵무기 저장 시설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상업 항구 기능은 폐쇄되었다. 이 시기 인구 증가에 따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1991년 라트비아가 독립을 되찾은 후, 1994년 러시아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리에파야는 군사 도시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항구 도시로의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상업 항구가 다시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라트비아 해군 기지와 주요 보급 기지가 위치해 있다. 과거 군사 기지였던 카로스타 지역은 역사 유적을 활용한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2. 1. 초기 역사

"리에파야"라는 이름은 "모래"를 의미하는 리보니아어 단어 "Liiv"에서 유래했다. '리바 마을'(Villa Liva|빌라 리바la)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53년 4월 4일 쿠르란트 주교와 리보니아 기사단의 수장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63년, 튜턴 기사단은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고 독일어로 "Libau"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은 1920년까지 사용되었다. 현대 리에파야가 위치한 곳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피에마레에서 온 쿠르인 어부들이며, 이들은 이곳을 '리바'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리보니아의 헨리(Henricus de Lettis)의 유명한 연대기에는 이 정착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1418년에는 리투아니아인들이 이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라트비아어 이름 "Liepāja"는 1649년 파울 아이른호른이 그의 저서 Historia Lettica에서 처음 언급했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는 러시아어로 Либава|리바바ru (Libava) 또는 Либау|리바우ru (Libau)로 불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라트비아어 'Liepāja'를 음역한 Лиепая|리예파야ru (Liepaya)가 사용되었다.

이 도시의 다른 이름으로는 리투아니아어 'Liepoja', 폴란드어 'Lipawa', 영어 'Libow' 등이 있다.

2. 2. 리보니아 연맹

15세기 리에파야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무역로의 일부였으며, 당시에는 "리바 항구"로 가는 백색 도로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1520년 무렵 리바강이 얕아져 항해가 어려워지면서 도시의 발전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2. 3.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1701년 리에파야 파노라마, 발트해에서 바라본 모습


1560년,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초대 공작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당시 리바우(Liebau)라 불리던 리에파야를 포함한 그로비냐 지역 전체를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에게 50,000 라인 길더를 받고 빌려주었다. 이 지역은 1609년 프로이센 공주 소피 호엔촐레른이 빌헬름 케틀러와 결혼하면서 공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리보니아 전쟁 중 리바우는 스웨덴 군대의 공격을 받아 불타기도 했다. 이 시기 쿠를란트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 아래 있었다.

1625년, 쿠를란트 공작 프리드리히 케틀러는 리바우에 도시로서의 권리를 부여했으며,[7] 이는 162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에 의해 확정되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가 어떤 법적 근거로 이를 확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야콥 케틀러 공작(재위 1642–1681) 시대에 리바우는 쿠를란트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성장하며 번영의 시기를 맞았다. 1637년부터 리바우와 벤츠필스(당시 빈다우) 항구를 통해 쿠를란트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 야콥 케틀러는 중상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금속 가공업과 조선업을 발전시켰고, 인근 국가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포르투갈 왕국과도 활발하게 교역했다.

1697년부터 1703년 사이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운하가 건설되었고, 더 현대적인 항구가 만들어졌다.[65] 1701년 대북방 전쟁 중에는 스웨덴의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명목상으로는 폴란드에 반환되었다.[66] 1710년에는 흑사병이 크게 유행하여 도시 인구의 약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1780년에는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로지 대리인이었던 이반 옐라긴에 의해 리바우 최초의 프리메이슨 로지인 "리바논(Libanon)"이 설립되었고, 이는 영국 대 로지에 524번으로 등록되었다.[67] 1794년에는 코시치우슈코 봉기 당시 폴란드 반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7]

2. 4. 러시아 제국



쿠르란트 공국은 제3차 폴란드 분할 중인 1795년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어 쿠를란트 현으로 편입되었다. 리바우(Libau, 현재의 리예파야)는 19세기에 급속한 성장을 경험했다. 크림 전쟁 중 영국 왕립 해군이 러시아의 발트해 항구를 봉쇄했을 때, 아직 요새화되지 않았던 리바우 항구는 1854년 5월 17일 HMS ''Conflict''와 HMS ''Amphion''에서 파견된 110명의 상륙 부대에 의해 교전 없이 잠시 점령되기도 했다.[68]

1857년, 황제의 칙령에 따라 리바우로 향하는 새로운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다.[9] 같은 해 엔지니어 얀 하이다텔은 항구 재건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1861년부터 1868년까지 이 프로젝트가 실행되어 등대와 방파제가 건설되었다. 1877년부터 1882년까지는 리바우 최초의 라트비아어 신문인 정치 및 문학 주간지 ''Liepājas Pastnieks''가 발행되었다.[69] 1870년대 러시아 철도망의 급속한 발전, 특히 1871년 리바우-카우나스 철도와 1876년 리예파야-롬니 철도 개통으로 중앙 러시아 무역의 상당 부분이 리바우를 통과하게 되었다.[70] 1900년까지 러시아 전체 수출의 7%가 리바우를 거쳐갔다. 이 도시는 발트해의 주요 항구이자 인기 있는 휴양지로 부상했다. 이 시기 도시 건축가 파울 막스 베르치는 도시의 공공 및 민간 건물을 설계하여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리예파야의 전기 노면 전차, 1900년경


알렉산드르 3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리바우는 독일의 잠재적 공격에 대비하여 요새화되었다. 리바바 요새가 도시 주변에 건설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도시 북쪽 가장자리에 주요 군사 기지가 세워졌다. 이곳에는 강력한 해안 요새와 군 병력을 위한 광범위한 숙소가 포함되었다. 군사 개발의 일환으로 군 전용 항구가 별도로 건설되었는데, 이 지역은 카로스타(Kara Osta, 전쟁 항구)로 알려졌으며 20세기 내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부동항인 카로스타 군항은 발트 함대의 주요 기지 중 하나였으며, 러일 전쟁 당시에는 발트 함대가 이 항구에서 극동을 향해 출항했다. 현재 카로스타 군항은 개방되어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초, 리바우 항구는 미국캐나다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주요 출발 지점이 되었다. 1906년에는 미국행 직항 노선을 통해 연간 4만 명의 이민자가 리바우를 떠났다. 동시에 러시아 최초의 잠수함 훈련 학교 중 하나가 이곳에 설립되었고, 1912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수상 비행장 중 하나가 문을 열었다.[71] 1913년에는 1,738척의 선박이 리바우에 입항했으며, 1548119ton의 화물이 항구를 통과했다. 도시 인구는 약 60년 만에 1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시내의 성 트리니티 교회에는 건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2. 5. 제1차 세계 대전과 독립 전쟁

독일 순양함 SMS 아우크스부르크에 의한 리예파야 항구 폭격, 1914년 8월 2일


리바우 5 루블(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순양함 SMS ''마그데부르크''가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리예파야를 포격했고, 다른 독일 선박들은 항구 접근로에 기뢰를 설치했다.[11] 리예파야는 1915년 5월 7일 독일 제국 육군에 점령되었으며, 독일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6년 쿠르마야스 대로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1919년 신생 라트비아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다. 점령 기간 동안 리예파야 지방 정부는 자체 화폐인 ''리바우 루블''을 발행하기도 했다. 1915년 8월에는 리예파야 인근 바이뇨데에 5개의 격납고를 갖춘 독일 제플린 비행선 기지가 건설되었다.[12] 1915년 10월 23일, 독일 순양함 SMS ''프린츠 아달베르트''는 리예파야에서 서쪽으로 37km 떨어진 해상에서 영국 잠수함 HMS E8에 의해 격침되었다.

1915년 리예파야의 독일 제국 육군


러시아의 붕괴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점령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독일 제국이 서부 전선에서 패배하고 협상국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무효화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칼리스 울마니스가 이끄는 라트비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곧 볼셰비키 러시아 군대가 라트비아 영토로 진격해오자, 임시 정부와 잔존 독일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리가를 내주고 리예파야까지 후퇴해야 했다. 볼셰비키 군대의 공세는 벤타 강에서 멈추었으며, 이들은 점령지에 라트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1919년 라트비아는 잔존 독일군의 발트해 작전 주요 전장이 되었고, 독일군과 협력하는 란데스베어가 결성되었다.

리예파야에서는 1919년 4월 16일 독일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울마니스 정부를 축출하고 안드리에브스 니에드라를 내세운 친독 정부를 수립했다.[13] 울마니스 정부는 리예파야 항구에 정박 중이던 증기선 ''사라토프'' 호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1919년 5월, 라트비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영국 해군 순양함 분대가 리예파야에 도착하여 독일군에게 철수를 요구했다.[14]

전쟁 중 핀란드의 엽병 운동가 헤이키 누르미오는 리예파야에서 핀란드 엽병들의 행진곡인 "예거 행진곡"의 가사를 썼다.

독일 자유군단은 볼셰비키로부터 리가를 탈환한 후 1919년 말 라트비아를 떠났고, 볼셰비키 군대는 1920년 초 라트비아 내륙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920년에는 러시아로부터 핀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옛 핀란드 폴란드 군단 소속 폴란드 군인 2,500명 이상이 핀란드에서 리예파야를 거쳐 폴란드로 대피했다 (''라트비아-폴란드 관계'' 참조).[15]

2. 6. 1920–1940

1920년 리에파야의 라트비아 국군 병사들


전간기 동안 리에파야는 라트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리바우(리에파야의 옛 독일어 명칭)를 '지도에 올리려는' 시도로, 1922년 1월 31일 리바우 은행이 상당한 신규 자본으로 설립되었다. 이는 리바우 거래 협회에 속해 있던 옛 리바우 거래 은행을 개편한 것으로, 결국 라트비아의 주식회사 형태 은행 중 네 번째로 큰 규모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은행의 리가 지점이 개설되면서 사업의 중심지가 리에파야에서 리가로 옮겨갔고, 1923년에는 리가 '지점'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리에파야 주재 독일 영사는 "국가의 경제적 심장인 리가가 모든 사업을 끌어들인다"라고 보고했다. 라트비아 정부는 이러한 상황 변화를 막으려는 리바우 거래 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6]

1935년에는 KOD(Kara ostas darbnīcaslav, 군항 작업소)가 리에파야에서 경비행기 LKOD KOD-1 및 LKOD KOD-2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해, 소련과의 무역이 사실상 중단되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17]

2. 7. 제2차 세계 대전

리에파야에 폐쇄된 군항 건설에 관한 소련의 극비 문서. 스탈린 서명 (참고: "리에파야" 철자 오류 – ) (1951)


리에파야와 벤츠필스의 항구 및 인적 자원은 소련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의 주요 목표였다. 그는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다. 1940년 소련이 라트비아를 점령하고 병합하면서 개인 재산을 국유화했으며, 수천 명의 이전 소유주들을 체포하여 6월 추방을 통해 시베리아의 굴락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켰다.

1941년, 나치 독일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자 리에파야는 북부 집단군 소속 제291 보병 사단에 의해 가장 먼저 점령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 점령군과 라트비아인 협력자들은 전쟁 전 약 7,000명에 달했던 지역 유대인 공동체를 사실상 절멸시켰다.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현지 유대인을 처형하는 장면이 리에파야에서 영상으로 기록되기도 했다.[72][73] 이러한 대량 학살은 주로 도시 북쪽 슈케데(Šķēde)의 사구에서 자행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리에파야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은 3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초기 단계의 유대인 대량 학살을 기록한 몇 안 되는 영상 자료 중 하나는 1941년 7월, 리에파야 등대 근처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목격한 독일 군인이 촬영한 짧은 필름이다.[73]

전쟁 기간 동안 리에파야는 독일 해군 U보트 승무원들의 어뢰 훈련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944년부터 소련군발트해 지역으로 공세를 펼치자 리에파야는 독일군 최후 방어선인 "쿠를란트 포켓"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도시는 1945년 5월 9일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독일로 피난을 떠났으며, 도시는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과 산업 시설이 파괴되어 황폐해졌다.

2. 8. 라트비아 SSR

1949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소련 당국은 프리보이 작전의 일환으로 리예파야에서 시베리아로 주민들을 대규모로 추방하는 두 번째 작전을 실행했다. 1950년에는 기차역 광장(Stacijas laukumslv)에 스탈린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스탈린의 학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당 대회 이후인 1958년에 철거되었다.

1963년 리예파야 도시 공원에서 열린 소련 집회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건축가 A. 크루글로프와 M. 자가레의 지휘 아래 도시 중심부가 재건되었다.[65] 또한 1952년부터 1955년까지는 A. 아이바르의 지휘 아래 리예파야 교육 아카데미 건물이 건설되었다. 1960년에는 쇼핑센터 "쿠르제메"가 문을 열었다. 소련 통치 기간 동안 리예파야는 폐쇄 도시로 지정되어, 지역 농민이나 마을 주민들조차 도시에 들어가려면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소련 군대는 리예파야에 발트해 해군 기지와 핵무기 저장 시설을 설치했다. 베베를린슈 모래 채취장은 지하 저장고 건설에 필요한 모래를 공급하기 위해 파헤쳐졌다. 1967년, 소련은 상업적 목적의 항구 이용을 전면 금지했다. 도시 면적의 3분의 1 가량이 소련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주둔 군인 수는 26,000명에 달했다. 이곳에는 소련 발트 함대 소속 제14 잠수함 전대(14 эскадрилья ЛиВМБ ДКБФru, 호출 부호 "Комплекс")가 16척의 잠수함(613형, 629a형, 651형)과 함께 주둔했으며, 발트 함대의 제6 후방 보급 부대, 제81 설계국, 예비 사령부 센터 등도 위치했다.

리예파야의 소련 시대 아파트 단지


1977년 리예파야는 1941년 나치 독일에 맞서 영웅적인 방어전을 펼친 공로를 인정받아 10월 혁명 훈장을 수여받았다. 아나톨리예스 필라트킨스, 아르투르스 프리드리흐손스, 볼데마르스 라즈두프스, 발렌틴스 슈바제브스, 오틸리야 자가타 등 5명의 주민은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주택 부족 문제가 심화되자, 소련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엔비드리투미, 에제르크라스트, 지에멜루 프리엑슈필세타, 잘라 비르제, 토스마레 등 리예파야의 현대적인 주거 지역 대부분을 개발했다. 이 지역의 건물들은 대부분 국영 라트기프로고르스트로이 연구소(Латгипрогорстройru)에서 설계한 표준 규격의 철근 콘크리트 패널로 지어졌다. 1986년에는 잘라 비르제 지역에 새로운 중앙 시립 병원이 개원했다.[74]

2. 9. 1990년 이후

라트비아가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독립을 되찾으면서, 리에파야는 군사 도시에서 현대적인 항구 도시로 변화를 모색했다. 소련 시대의 기밀 유지 정책 이후 다시 유럽 지도에 등장한 것이다. 1991년 상업 항구가 다시 문을 열었고, 1994년에는 마지막 러시아 군대가 리에파야에서 철수했다.

이후 리에파야는 국제 협력을 강화하며 10개의 자매 도시 및 파트너 도시와 관계를 맺고, 여러 협력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 시설도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현재 리에파야는 라트비아 최대의 해군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발트해 국가 중 가장 큰 탄약 및 무기 창고와 라트비아군의 주요 보급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폐쇄된 군사 도시였던 북쪽의 카로스타 지역은 리에파야 시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군사 시대의 유적을 활용한 관광지로 변모했다.[18]

21세기 초에는 NATO 군사 기지[19]발트 3국 최대 규모로 계획된 놀이공원인 발트해 공원 등 야심 찬 건설 프로젝트가 계획되었으나, 대부분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리에파야의 난방 네트워크는 프랑스 기업 달키아와 러시아 기업 가스프롬의 협력을 통해 개조되었다. 2006년에는 야코프 케틀러의 직계 후손인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가 리에파야를 방문했다. 2010년에는 정부 지원으로 400 MW급 석탄 열병합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3. 지리

리에파야는 라트비아 남서부의 발트해 해안에 위치한 라트비아 최서단 도시이다. 이 도시는 해안 사구 제방과 해안 저지대의 구릉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무역 운하(Tirdzniecības kanālslav)가 도시를 남부의 베츨리에파야(VecLiepāja, 구시가지)와 북부의 야운리에파야(Jaunliepāja, 신시가지)로 나누며, 북쪽으로는 카로스타 지역까지 확장된다.[21] 리에파야의 해안선은 끊임없는 모래 해변과 사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시 면적의 약 3분의 1은 자연 지역이 차지한다.[20][21]

리에파야는 다음과 같은 주요 구역으로 나뉜다.

구역명라트비아어 명칭
베츨리에파야VecLiepāja
에제르크라스츠Ezerkrasts
디엔비드리ету무 라욘스Dienvidrietumu rajons
지에멜루 프리에크슈필세타Ziemeļu priekšpilsēta
야운리에파야Jaunliepāja
벨른치엠스Veļķiems
카로스타Karosta
토스마레Tosmare
잘라 비르제Zaļā birze
야우나 파사울레Jaunā pasaule


3. 1. 위치

리에파야의 해변


리에파야는 라트비아 남서부의 발트해 해안에 위치해 있다. 라트비아의 최서단 지점은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어 리에파야는 라트비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이다. 이 도시는 폭 1.5km에서 6.5km 사이의 해안 사구 제방과 해안 저지대의 바르타우 평원에 있는 구릉지 평원을 차지하고 있다. 리에파야는 디엔비드쿠르제메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는 메드제 교구, 동쪽으로는 그로비냐 교구, 남쪽으로는 니차 교구와 접하고, 서쪽 경계는 발트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무역 운하(Tirdzniecības kanāls|티르드즈니에치바스 카날스lav)는 도시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호수와 바다를 연결하며, 이 지역은 종종 각각 베츨리에파야(VecLiepāja, 구시가지)와 야운리에파야(Jaunliepāja, 신시가지)로 불린다. 해안을 따라 도시는 북쪽으로 카로스타 운하(Karostas kanāls|카로스타스 카날스lav)까지 확장된다. 카로스타 운하 북쪽에는 현재 리에파야에 완전히 통합되어 도시의 최북단 지역인 카로스타라는 지역이 있다. 리에파야의 해안선은 끊임없는 모래 해변과 사구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 지역은 도시 영토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이러한 지역은 주로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시 중심부의 작은 녹지 공간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20][21]

리에파야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약 10km 떨어진 리가 방향의 그로비냐이다. 이 지역의 다른 주요 도시로는 클라이페다 (남쪽으로 약 110km), 벤츠필스 (북쪽으로 약 115km) 및 살두스 (동쪽으로 약 100km)가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까지의 거리는 동쪽으로 약 200km이다. 발트해를 건너 리에파야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북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스웨덴의 고틀란드 섬이다. 스톡홀름까지의 거리는 216 해리이다. 리에파야에서 가장 가까운 주요 공항은 팔랑가 국제공항 (60km) 및 리가 국제공항 (210km)이다.

3. 2. 숲

리에파야의 도시 숲은 총 1368.9ha를 차지한다. 이 중 83%는 나무가 자라는 임목 지대이며, 나머지는 늪(4.7%), 초원 및 모래 언덕(9.5%), 범람원 및 기반 시설 부지(총 3% 미만)로 덮여 있다. 전체 숲 면적 중 109.6ha는 사유지이며, 나머지 92%에 해당하는 1259.3ha는 시 소유이다.

도시 숲은 크게 5개의 덩어리로 나뉜다. 가장 큰 숲은 도시 북부에 있는 카로스타 숲이다. 그 외에도 레이뉴 숲, 지역 병원 근처 숲, 남서부 숲, 잘라 비르제 숲이 있다. 리에파야의 숲은 지역의 지질학적 및 수문학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성장 유형을 보인다. 건조한 환경의 숲이 전체 숲 면적의 39%를 차지하며, 습한 광물질 토양의 숲이 13%, 늪지대 숲이 22%, 배수가 이루어진 숲이 26%를 차지한다.[21]

리에파야 호수

3. 3. 수역

수역은 1009ha(시 전체 면적의 17%)를 차지한다.[21] 리에파야시의 수문 시스템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 동쪽에 접해 있는 리에파야 호수와 토스마레 호수는 Natura 2000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수의 일부만 리에파야 시에 속하고 나머지는 오탄키와 니차 자치구에 위치한다.[21] 이 외에도 베르니에쿠 강, 칼레유피테 강, 알란데 강, Tirdzniecības kanāls|티르드즈니에치바스 카날스lv, Karostas kanāls|카로스타스 카날스lv, 치에토크슈냐 운하, 페르코네 운하(구 강), 그리고 인공 저수지인 베베를리니가 있다.[21] 리에파야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하며, 라트비아의 유역 지구 분류에 따르면 벤타 강 유역 지구에 속한다.[21]

3. 4. 토양

해안 저지대의 특징으로 인해 이 지역의 토양은 비옥도가 낮은 사질 양토이며 자연 배수가 어렵다. 이러한 조건이 주요 토양 유형과 지형을 결정한다. 토양은 주로 모래 성분이 많은 사질 토양이다. 고지대에는 전형적인 포드졸 토양이 나타나고, 저지대에는 습한 포드졸 글라이 토양, 잔디 글라이 토양, 잔디 포드졸 글라이 토양 등이 분포한다. 습도가 높아 과수 재배에 적합한 특성을 보인다.[21]

3. 5. 기후

리에파야의 온도 및 강수량 분포


리에파야의 기후는 바다와 인접한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따뜻한 여름의 온대 습윤 기후대에 속한다. 이는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Dfb''로 표시된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이 위도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여름 기온은 상대적으로 낮고 겨울 기온은 높다. 리에파야는 라트비아에서 연평균 기온이 7.9°C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이다. 연평균 일조 시간은 2029.1시간으로, 라트비아에서 일조량이 많은 지역에 속한다.[22]

겨울은 비교적 온화하며 자주 해빙기가 찾아온다. 해안 저지대의 눈 덮개는 일반적으로 불규칙하며, 깊이가 5cm에서 10cm를 넘는 경우는 드물다.[21] 겨울 동안 리에파야 주변 바다는 거의 얼지 않는다. 가끔 육빙이 생기기도 하지만 해안에서 100m 이상 확장되는 경우는 드물고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바닷물 온도는 보통 8월 초에 최고조에 달하며, 리가만과 같은 폐쇄된 만보다는 개방된 바다의 영향으로 덜 따뜻하다. 겨울 날씨는 라트비아 내륙 지역보다 온화하며, 스웨덴 본토의 동쪽 해안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리에파야는 라트비아 내륙 지역에 비해 바람이 부는 날이 많다. 우세한 바람은 서풍과 남풍이며, 평균 풍속은 6.1 m/s이다. 최대 풍속(20 m/s 이상)은 주로 가을과 겨울에 관측되며, 대부분 서풍 계열이다. 1967년 10월 17일과 18일에는 라트비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풍이 발생했으며, 10월 18일 리에파야에서는 라트비아 최고 풍속인 48 m/s가 기록되었다. 리에파야는 연평균 폭풍일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평균 풍속 10.8 m/s 이상인 날이 연평균 7.9일에 달한다. 1971년에는 이 수치가 36일에 달했으나, 장기적으로는 폭풍일수가 크게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23]

리에파야의 기후 데이터 (1991년~2020년 평균, 극값: 1895년~현재)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역대 최고 기온 (°C)9.015.518.627.030.233.033.735.630.723.015.410.635.6
월평균 최고 기온 (°C)1.11.24.210.315.418.621.621.617.111.36.13.011.0
일평균 기온 (°C)-0.9-1.11.36.211.214.817.917.713.68.54.11.17.9
월평균 최저 기온 (°C)-3.4-3.8-1.82.36.610.713.813.69.95.41.9-1.24.5
역대 최저 기온 (°C)-32.9-31.6-23.8-10.1-4.30.54.64.6-1.7-7.3-17.5-26.0-32.9
강수량 (mm)57.841.937.428.637.550.764.376.374.184.272.767.5693.0
평균 강수일수 (≥ 1.0 mm)13996678910121313115
평균 상대 습도 (%)87.586.282.576.275.178.478.378.280.783.186.987.281.7
월평균 일조 시간41.671.1148.5223.7300.1302.4309.4264.7187.9113.140.925.72029.1
출처: 라트비아 환경, 지질 및 기상 센터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895년~현재)[91][92], 미국 해양대기청 (강수일수/상대습도)[93]



리에파야의 해안 기온 데이터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평균 해수 온도 °C4.02.93.55.810.115.419.720.016.512.910.36.510.6
출처: Seatemperature.net[28]


4. 행정

현 시장 구나르 안신쉬와 전 시장 울디스 세스크


14명의 시의원과 시장으로 구성된 리에파야 시의회가 있다. 리에파야 시민들은 4년마다 6월에 새로운 정부를 선출한다. 시의회는 의원 중에서 시의회 의장(시장)과 2명의 부의장(부시장)을 선출하며, 이들은 전임직이다.

시의회는 또한 회의에서 논의할 문제를 준비하는 4개의 상임 위원회 위원을 임명한다. 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 재정 위원회
  • 도시 경제 및 개발 위원회
  • 사회 문제, 의료, 교육 및 공공 질서 위원회
  • 문화 및 스포츠 위원회


리에파야 시의 2022년 운영 예산은 1.04억유로였다.[36] 전통적으로 리에파야의 정치적 성향은 우익으로 분류된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리에파야 당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 인구

리에파야의 역사적 인구 변화
연도인구 수
16381,000
18004,500
184011,000
188129,600
189764,500
1907[86]81,000
191494,000
192151,600
194052,900
195064,200
1959[87]71,000
197092,900
1975[88]100,000
1989114,500
1995100,300
200089,100
200785,300
2011[89]83,400
2019[90]68,945



리에파야의 인구 구조는 역사적으로 다문화적이었으며, 이는 도시의 사회 생활, 경제, 행정에 영향을 미쳤다. 1817년 농노제가 폐지된 이후 인구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1800년 4,500명이었던 인구는 1840년 11,000명으로 증가했고, 1881년에는 29,600명에 달했다.[38]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50년 동안 인구가 거의 10배 증가하며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반면, 소련 점령기 50년 동안에는 폐쇄된 군사 항구의 영향으로 인구 증가가 둔화되어 2배 증가에 그쳤다.

역사적으로 민족 구성 비율도 변화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는 발트 독일인의 비율이 높았고,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유대인의 비율이 높았다. 소련 점령 기간에는 러시아인의 수가 증가했다.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1863년 16%에서 1943년 85%까지 증가했으나, 전쟁 이후 다시 감소했다.[29]

2019년 기준 리에파야의 인구는 68,945명으로, 라트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1994년 마지막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1991년부터 2000년 사이에는 많은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2004년 라트비아가 EU에 가입한 이후에는 서유럽 국가로의 경제적 이주와 낮은 출산율이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자연 인구 증가율은 마이너스 상태로, 인구 통계학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29]

그러나 최근 리에파야를 떠나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2018년에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이주 인구가 유입 인구보다 많은 긍정적인 이주 균형을 기록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이주 추세는 부정적인 자연 증가율을 상쇄하며, 2017년과 2018년에는 전체 인구 감소 추세가 크게 완화되었다.[39]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인구는 연평균 750명 감소했다.[40] 부양비(인구 1,000명당 어린이, 청소년, 연금 수급자 수)는 690명으로, 라트비아 주요 도시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39]

5. 1. 종교

성 안나 교회


리에파야에는 여러 교회가 있다. 라트비아 중부 및 서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로 루터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교회가 우세하다. 리에파야 성 삼위일체 대성당(1758년 건립)에는 루터교 리에파야 주교의 자리가 있다. 다른 주요 루터교 교구로는 성 안나 교회(1587년 건립), 십자가 교회, 루터 교회가 있다.

이 도시에는 4개의 침례교 교회가 있으며, 대표적으로 성 바울 교회(1895년 건립)와 시온 교회가 있다.

러시아 제국 말기에 리에파야가 지역적으로 중요해지면서, 20세기 초에는 여러 러시아 정교회 교회가 도시에 세워졌다. 대표적인 예로 성 삼위일체 정교회(1867년 건립)와 카로스타 성 니콜라스 해군 대성당(1901–1903년 건립)이 있다. 이들 교구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톨릭 신앙은 리에파야 성 요셉 대성당(1762년 건립)을 중심으로 대표된다. 이곳은 리에파야 로마 가톨릭 교구의 소재지이며, 가톨릭 초등학교와 가톨릭 센터도 운영되고 있다. 가톨릭 센터 건물은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엑스포 2000 당시 교황청 전시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행사가 끝난 후 리에파야로 옮겨온 것이다.

이 외에도 리에파야에는 고대 전례파, 재림교, 오순절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 다른 기독교 종파의 교회가 각각 하나씩 있다.

6. 경제



소련의 중앙 계획 경제 붕괴 이후, 리에파야는 낡은 기반 시설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의 비즈니스 육성 및 개발을 위해 1997년 3월 1일 리에파야 경제 특별 구역(Liepāja SEZ)이 설립되었으며, 2035년 12월 31일까지 운영될 예정이다. 리에파야 SEZ는 라트비아를 통한 비즈니스 환경, 제조업, 해운 및 항공 교통, 국제 무역 개발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제조 및 기반 시설 확장을 위한 투자 유치, 새로운 일자리 창출, 지역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초기에는 숙련된 노동력 부족으로 투자 유치가 더뎠지만, 새로운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38]

2004년 유럽 연합 가입 이후, 리에파야의 많은 기업들은 더욱 엄격해진 유럽 규제와 치열한 경쟁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2007년에는 설탕 공장인 ''Liepājas cukurfabrika''와 성냥 공장인 ''Liepājas sērkociņi''가 문을 닫았고, 맥주 회사 ''Līvu alus'', 제빵 회사 ''Liepājas maiznieks'', 란제리 회사 ''Lauma'' 등은 유럽 투자자에게 매각되었다. 2013년에는 주요 철강 생산 기업인 Liepājas Metalurgs가 파산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현대 라트비아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재앙 중 하나로 평가되며, 라트비아 정부에 약 3.27억유로의 손실을 입혔다.[42][43]

현재 리에파야 경제는 주로 리에파야 경제 특별 구역, 무역 항구 및 관련 기업들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2021년 기준 리에파야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기업은 TOLMETS, AE Partner, Jensen Metal 등이다.[44]

7. 교통

리에파야 대중교통


리에파야의 교통 시스템은 버스 노선 31개(이 중 5개는 그로비냐와 연결)와 7km 길이의 리에파야 트램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램 노선은 1899년 리에파야 최초의 발전소가 문을 연 후 만들어졌으며, 이는 발트 3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기 트램 노선이다.[45] 현재는 시립 회사인 리에파야 트램바이스가 운영하고 있다. 2013년에는 트램 노선이 디엔비드리에투무 주거 지역(클라이페다 거리)에서 에제르크라스트스 주거 지역까지 1.7km 연장되었고, 종점은 미르자스 켐페스 거리에 있다. 리에파야는 리가, 리가 국제공항, 벤츠필스, 옐가바, 클라이페다 등 다른 도시로 가는 직행 버스 노선을 갖추고 있다.

리에파야에는 옐가바리가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 있어 라트비아의 다른 철도망과 연결된다. 신시가지에 여객역이 하나 있으며, 철도는 항구까지 이어진다. 벤츠필스로 가는 북쪽 철도 노선도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최근 수십 년간 운행이 중단되었다. 철도는 주로 항구로 화물을 운송하는 데 사용된다. 두 개의 주요 고속도로인 A9 및 A11은 리에파야와 항구를 라트비아 다른 지역과 연결한다. A9 고속도로는 북서쪽으로 리가와 라트비아 중부로 이어지고, A11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리투아니아 국경과 항구 도시 클라이페다, 팔랑가 국제공항으로 이어진다.[46] 또한 리에파야에는 라트비아의 세 국제공항 중 하나인 리에파야 국제공항이 있다. 공항은 도시 외곽, 리에파야 호수 북쪽의 침데니에키 근처에 위치한다. 하지만 2020년 기준으로 이 공항은 민간 항공, 군용 항공 또는 비행 훈련에만 사용되며, 국영 항공사인 에어발틱은 더 이상 이 공항에서 운항할 수 있는 저용량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47]

리에파야 항구는 넓은 수역을 가진 항구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겨울 항구는 무역 채널에 위치하며, 소규모 지역 어선과 중형 화물선이 이용한다. 무역 채널 바로 북쪽에는 항구의 주요 구역이 있으며, 바다와 방파제로 분리되어 있다. 이 구역은 대형 선박과 페리를 수용할 수 있다. 더 북쪽에는 카로스타 항구가 있는데, 카로스타 채널이라고도 불린다. 과거에는 군사 항구였으나 현재는 선박 수리 및 기타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된다. 리에파야 항구는 요트와 같은 레저 선박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들은 무역 채널을 통해 도시 중심부 가까이에 정박할 수 있다.

8. 교육

리에파야 대학교


리에파야 제1 국립 김나지움


리에파야 해양 대학


리에파야의 교육 역사는 1560년 교회 조사 중 학교 설립 아이디어가 제기되면서 시작되었으며, 1625년 이전부터 학교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도시 권한 부여는 학교 유지 책임을 명확히 하고 교육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독일인과 쿠로니아인 아이들 모두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장려되었으며, 특히 "비독일인"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 등록하면 모든 노역에서 해방되고 농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추가 교육 지원까지 약속받았다. 처음에는 단일 학급으로 시작했으나, 1638년에는 2개 학급, 1650년에는 3개 학급, 1750년에는 4개 학급으로 점차 규모가 커졌다. 1788년 새로운 학교 건물이 건설되었고, 1806년에는 250년 역사의 도시 학교가 군의 최고 학교로 전환되었다. 이 군 학교에서는 크리시야니스 발데마르스와 크론발두 아티스와 같은 인물들이 수학했다. 1866년에는 군 학교가 니콜라이 김나지움으로 개편되었다.[48]

해양 교육 또한 일찍부터 시작되어, 1861년 군 학교에 해양학 수업이 개설되었고, 1876년에는 리에파야 해양 학교가 추가되었다. 여성 교육도 이루어져 1871년 최초의 여자 고등학교가 개교했고, 1874년에는 2개의 여자 고등학교가 운영되었으며 그중 하나는 1886년 김나지움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889년 법을 시작으로 학교의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모든 학교가 러시아 학교로 전환되었다. 다만, 라트비아 아이들이 다수인 학교에서는 라트비아어를 과목으로 가르치거나 라트비아어로 종교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라트비아어를 주요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는 라트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야 등장했다.[48]

제1차 라트비아 공화국 시기(제1 자유 국가 시대)에는 3개의 중등학교, 25개의 초등학교, 2개의 기술 학교, 상업 학교, 응용 예술 중등학교, 기술 야간 공예 학교, 유대인 공예 학교, 어업 및 양어 학교 등 다양한 교육 기관이 운영되었다. 또한 민속 음악원과 여러 야간 강좌도 개설되었다. 1919년 12월에는 도서관 내에 라트비아 최초로 별도의 어린이 섹션이 마련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리에파야의 교육 시스템은 더욱 확장되었다. 1954년 리에파야 교육학 연구소(1945년 교육 학교로 시작하여 1950년 리에파야 교사 연구소를 거쳐 설립)가 세워졌고, 리가 공과대학교 일반 기술 학부, 해양 학교, 의과 학교, 폴리텍, 리에파야 응용 미술 학교(1926년 설립), 음악 학교 등이 들어섰다. 이 외에도 10개의 종합 학교, 2개의 직업 기술 고등학교, 2개의 기술 학교가 운영되었다.[29]

현대에 이르러 리에파야는 광범위한 교육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2019년 3월에는 시 의회 결정에 따라 제2중등학교와 제12중등학교를 통합하여 현대화된 학습 환경을 갖춘 새로운 중등학교를 설립했다.[49] 2022년 기준으로 시내에는 21개의 유치원, 12개의 일반 교육 기관, 2개의 사립 학교, 2개의 음악 학교, 2개의 기숙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50]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은 8개의 시립 기관(어린이 및 청소년 센터, 청소년 센터, 젊은 기술자 센터, 예술 및 창작 센터 "바두군스", 종합 스포츠 학교, 체조 학교, 테니스 스포츠 학교, 스포츠 학교 "다우가바"(축구, 육상), 농구 스포츠 학교)에서 제공된다. 리에파야 중앙 도서관은 6개의 분관과 오디오 기록 도서관을 운영하며, 약 46만 권의 문헌 자료를 보유하고 온라인 카탈로그를 제공한다. 연평균 방문객 수는 약 25,000명이다.[81]

리에파야의 고등 교육 기관[51]
기관명비고
리에파야 대학교
리가 공과 대학교 리에파야 분교
리가 스트라딘스 대학교 리에파야 분교
발트 국제 아카데미 리에파야 분교
투리바 대학교 리에파야 분교
리가 기술 전문 대학 리에파야 분교
법률 대학 리에파야 분교
리에파야 해양 대학[52]
리에파야 의과 대학
리에파야 응용 미술 학교
리에파야 목공 학교
리에파야 관광 및 섬유 디자인 학교


9. 문화

리에파야는 깊은 문화적, 역사적 전통이 풍부한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라트비아와 해당 지역의 문화적 지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립 및 시립 문화 기관뿐만 아니라 리에파야 대학교와 사립 예술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도시는 역사적인 건축물, 기념물, 시각 예술 컬렉션, 박물관, 도서관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공연 예술무형문화유산(공예, 민속 예술, 전통 문화 등) 분야에서도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라트비아인뿐만 아니라 소수 민족에게도 해당된다. 문화 관광 및 창조 산업이 발전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문화 교육 기반도 갖추어져 있다. 다만 순수 예술, 문학, 영화 등의 분야는 상대적으로 덜 발달했다는 평가도 있다.

리에파야의 건축은 여러 시대의 양식을 보여준다. 17세기 고전주의 양식의 목조 건물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벽돌 건축,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절충주의와 아르 누보, 그리고 전쟁 사이 시기의 건물, 소련 시대의 기능주의와 현대 건축까지 다양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무역 운하와 장미 광장 사이의 시가지 대부분(100개 이상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리에파야의 개발은 항구 설립과 19세기 말 산업 확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9]

리에파야는 2014년 유럽 문화 수도(ECOC) 지위 경쟁에 참여했으나 리가가 선정되었고,[53] 이후 다시 도전하여 2027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다.[3]

"Spoku koks"(유령 나무), Līvi 라트비아 록 그룹에 헌정된 조형물


도시 곳곳에는 바다에서 사망한 선원과 어부 기념비, 미르자 켐페 기념비 등 다양한 기념물과 리에파야 박물관, 카로스타 감옥 박물관 등의 시설이 있다.[75][76] 또한 리에파야 성 삼위일체 대성당, 성 안나 루터교회, 카로스타 성 니콜라스 해군 대성당과 같은 역사적인 종교 건축물과 그레이트 앰버 콘서트 홀(Koncertzāle "Lielais dzintars"|콘체르트잘레 "리엘라이스 진타르스"lav), 리에파야 극장 등 다양한 문화 명소가 자리 잡고 있다.[29] 리에파야는 상징, 음악, 시각 예술, 극장 등 여러 문화 분야에서 풍부한 유산을 지니고 있다.

9. 1. 상징

리에파야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세 가지 상징, 즉 문장, 깃발, 국가를 가지고 있다. 문장은 1625년 3월 18일, 리에파야가 도시 권리를 얻은 지 4일 후에 채택되었으며[64], 현재 사용되는 형태는 1925년에 도입되었다.[54] 리에파야의 문장은 "은색 바탕에, 꼬리가 갈라진 쿠를란트의 사자가 앞발로 피나무(Liepalav)에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깃발은 1938년 '리에파야 시 깃발에 관한 법률'을 통해 처음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중앙에 문장이 위치하고 깃발의 윗부분은 빨간색, 아랫부분은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64]

공식 국가는 '바람이 태어나는 도시'(Pilsētā, kurā piedzimst vējšlav)로, 1999년에 승인되어 2000년 1월 1일 0시에 처음 연주되었다. 이 곡의 원곡은 이만츠 칼닌슈가 1973년에 리에파야와 시민들을 위해 작곡하고 마리스 차클라이스가 작사한 노래 '바람이 태어나는 도시에서'이다. 이 노래는 오스트라 펌푸레가 처음 불렀으며, 발표된 이후 리에파야 주민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인 국가로 여겨져 왔다.

리에파야는 또한 '리에파야 멘치니'(Liepājas menciņilav)라는 특별한 지역 요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훈제 또는 말린 대구를 감자, 양파, , 크림과 함께 도자기 그릇에 넣고 구운 요리로, 남부 쿠를란트 지역의 오래된 조리법에 기반한다.[55] 말리거나 훈제한 대구는 13세기 독일인들이 정착하기 이전부터 쿠를란트 해안에 거주하던 리보니아인과 쿠로니아인의 주요 식재료였다.

리에파야의 상징 사용은 1999년 2월 25일 시의회에서 채택한 구속력 있는 규정에 따라 관리된다.

9. 2. 음악

리에파야는 라트비아의 음악 수도로 알려져 있다. 발트 3국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인 리에파야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리에파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는 수도 리가를 제외하면 라트비아 유일의 전문 오케스트라이다.[78]

또한 리에파야는 리비( Līvilav ), 크레도( Credolav ), 2xBBM, 툼사( Tumsalav )와 같은 유명 밴드들의 고향이며, 작곡가 지그마르스 리에핀슈( Zigmars Liepiņšlav ), 야니스 루센스( Jānis Lūsēnslav ), 울디스 마르힐레비츠( Uldis Marhilēvičslav ) 등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도시에서는 썸머 사운드(Summer Sound), 국제 스타 페스티벌(International Stars Festival), 비아 발티카 페스티벌(VIA Baltica Festival), 국제 오르간 음악 페스티벌 등 다양한 음악 축제가 열린다.[40] 과거 1964년부터 2006년까지는 라트비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 있는 대중음악 축제인 '리에파야 진타르'( Liepājas dzintarslav )가 ''푸트, 베이니니!''( Pūt, vējiņi!lav ) 콘서트 정원에서 개최되기도 했다.[56]

9. 3. 시각 예술

로마 정원


리에파야의 미술계는 길고 풍부한 역사를 지닌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예술 작품 중 하나는 1697년에 만들어진 성 안나 교회의 제단이다. 18세기에는 성 삼위일체 대성당의 오르간이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꼽힌다. 구 가톨릭 교회의 내부 장식 역시 주목할 만한데, 1762년에 만들어진 석고 장식물과 제단 후면, 기둥, 벽, 천장의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이 있다.

응용 미술 분야에서는 리에파야 박물관에 소장된 18세기 문 인방과 주석 주조 장인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19세기 조각품으로는 파비아니가 구 묘지 예배당을 위해 제작한 작품이 뛰어나지만, 도시의 조각품은 주로 기념비적인 성격을 띤다.

도시 곳곳에는 여러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 북부 묘지: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오스카르 칼팍스 대령의 첫 매장지를 알리는 기념 표석이 있다.
  • 리바 묘지 유대인 묘역: 리에파야 근교에서 라트비아 독립 전쟁 중 전사한 유대인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 유르말라 공원: 바다에서 사망한 선원과 어부 기념비와 1905년 1월 16일 집회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근처에는 시인 미르자 켐페의 기념비도 있다.


소련 점령 시기에 세워진 기념비들도 있었으나, 독립 회복 이후 일부는 철거되었다. 리에파야의 1941년 수호자 기념비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지만[29], 2022년에 해체될 예정이었다.[57]

현대에 들어서는 1996년 Ģirts Burvis가 이끄는 워크숍에서 제작한 리바 강바닥을 기리는 기념 조각품이 설치되었다. 또한, 리에파야의 찬가인 "바람이 태어나는 도시에서"를 주제로 한 청동 조각들이 Kūrmāja Prospect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다.[58] 리에파야는 회화 분야에서도 풍부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29]

9. 4. 극장

1907년 리에파야 라트비아 극단이 창립되었다. 다른 단체들과 함께 1907년 3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트비아 전문 극장인 리에파야 극장 Liepāja Theatre|리에파야 시어터eng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1918년, 극장은 현재의 건물, 당시 하게도르나(현재 테아트라) 거리의 시립 극장으로 이전했다.[59]

9. 5. 스포츠

리예파야 올림픽 센터


1998년, 라트비아 독립 이후 처음으로 건설된 아이스하키 링크가 리예파야에 개장되었다. 이후 이곳에서는 두 차례의 청소년 아이스하키 세계 선수권 대회 경기를 포함하여 정기적인 아이스하키 경기가 개최되었다. HK 리예파야스 메탈루르그스는 이 올림픽 아이스 아레나를 홈구장으로 사용했으며, 라트비아 하키 상위 리그에서 8번의 우승을 차지했고 2002년에는 동유럽 하키 리그 토너먼트에서도 우승했다. 하지만 모기업인 야금 회사의 문제로 인해 2013년 여름 팀 운영이 중단되었다. 2014년에는 HK 리예파야가 창단되었고, 2015-16 시즌 라트비아 하키 상위 리그 챔피언이 되었다.

축구에서는 2014년 1월 FK 리예파야스 메탈루르그스가 운영을 중단하자, 이를 대체하여 FK 리예파야가 설립되었다. FK 리예파야는 2015년 라트비아 챔피언이 되었으며, 홈 경기장은 다우가바 스타디움이다. 또한 리예파야는 라트비아 농구 리그 클럽인 Betsafe/Liepāja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2008년 8월 2일에는 새로운 다목적 스포츠 경기장인 리예파야 올림픽 센터가 공식적으로 개장되었다. 이 경기장은 라트비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다목적 스포츠 및 문화 단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리예파야는 FIBA 농구 월드컵이나 유로바스켓과 같은 다양한 국제 스포츠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특히 2009년 여자 유로바스켓 선수권 대회의 A조와 B조 경기가 리예파야 올림픽 센터에서 열렸다. 이 외에도 유럽 랠리 선수권 대회의 한 스테이지인 "랠리 리예파야"와 국제 윈드서핑 대회 등이 개최된다.[60]

9. 6. 미디어

리에파야에는 지역 신문인 Kurzemes vārdslv(쿠르제메스 바르스)와 지역 TV 채널인 ''TV Kurzeme''(TV 쿠르제메)가 있다. 또한 여러 지역 인터넷 웹 포털이 운영되고 있으며, 아마추어 무선 커뮤니티[77]와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무선 영상 감시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2010년을 기준으로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이 완전히 운영되고 있으며, 이동 텔레비전 및 광대역 무선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다. 라트비아의 4개 주요 이동 통신 사업자 모두 리에파야에서 안정적인 통신 서비스 구역(GSM 900/1800, UMTS, 2100 CDMA450)을 운영하고 있으며, 각 사의 고객 서비스 센터도 마련되어 있다.

10. 건축

리에파야의 건축은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양식을 보여준다. 17세기 고전주의 양식의 목조 건물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벽돌 건축,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절충주의와 아르 누보, 그리고 전쟁 사이 시기의 건물들, 소련 시대의 기능주의와 현대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발전은 초기 항구 설립과 이후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 확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9]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무역 운하와 장미 광장 사이의 거의 모든 시가지(100개 이상의 건물)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29]

카로스타의 모습


리에파야 건축의 첫 번영기는 17세기와 18세기로, 이 시기 부유층의 저택에는 매너리즘, 바로크, 고전주의 등 다양한 양식이 반영되었다.[30] 쿵구 거리에서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유형의 목조 통나무집을 찾아볼 수 있으며[31], 18세기에는 리에파야 성 삼위일체 대성당이 가장 화려한 건물로 꼽혔다.[29] (자세한 내용은 #초기 건축 참조)

19세기 후반에는 도시의 초대 건축가 파울 막스 베르취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그의 붉은 벽돌 건물들은 리에파야 건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29] (자세한 내용은 #베르치 참조) 또한 리에파야는 유럽 규모의 아르 누보 건축물 예시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그라우두 거리가 대표적이다.[33] (자세한 내용은 #아르 누보 참조)

도시 북부의 카로스타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건설된 독특한 군사 건축 단지로, 도시의 다른 지역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29] (자세한 내용은 #카로스타 참조) 전간기에는 라트비아 사회관과 같은 새로운 공공 건물들이 들어섰다.[30][29] (자세한 내용은 #전간기 참조)

소련 시대에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도심을 국제 모더니즘 원칙에 따라 재건했으며, 획일적인 도시 계획과 대규모 공공 건물이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역사적인 건물이 철거되기도 했다.[30] 197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공장과 주거 지역(에제르크라스츠 지구 등)이 건설되었다.[29] (자세한 내용은 #소련 시대 참조)

라트비아 독립 회복 이후에는 인공 아이스 링크, 가톨릭 수도원, 새로운 시장 건물 등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세워졌으며, 21세기에는 그레이트 앰버 콘서트홀이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현대 건축은 새로운 재료와 기술,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특징으로 한다.[29] (자세한 내용은 #현대 건축 참조)

10. 1. 초기 건축

리에파야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건축과 건축적 번영의 첫 시기를 맞이했다.[30] 이 시기 부유한 거주자들의 집에는 매너리즘, 바로크, 고전주의 등 다양한 건축 및 예술 스타일이 반영되었다. 반면 일반 사람들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집을 지었다.[30]

리에파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유형은 낮은 돌 기단 위에 세워지고 가파른 기와 지붕을 얹은 나무 통나무집이다. 이러한 건물은 17세기 도시의 주요 거리였던 쿵구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31] 특히 쿵구 거리 24번지 건물은 1697년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가 방문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웃한 26번지 건물에는 1700년 스웨덴 왕 칼 12세가 머물렀다.[32]

26 쿵구 거리의 건물


이전 세기 동안 여러 차례 항구 건설 시도가 실패한 후, 1703년 무역 운하가 성공적으로 굴착되면서 도시 성장에 기여했다.[32] 이 시기 항구 창고는 주로 나무로 지어졌으며, 반 지하로 만들어진 높은 기단이 특징이었다. 오래된 창고 대부분은 유라스 거리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그중 하나는 1930년대에 야외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다른 창고는 남아 있지 않다. 당시 항구 지역의 주거 건물은 매우 작고 밀집되어 있었다.[32]

1848년 기준으로 도시에는 총 664개의 건물이 있었고, 그중 석조 건물은 46개에 불과했다.[29] 목조 건물도 계속 지어졌으며, 특히 호화로운 건물들은 지붕 확장, 화려한 문, 패널 장식, 아름답게 칠해진 냄비 스토브 등을 갖추고 있었다. 18세기 리에파야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은 리에파야 성 삼위일체 대성당이었다.[29]

이 외에도 주목할 만한 초기 건물로는 리엘라 거리 6번지, 쿵구 거리 3번지, 스텐데라 거리 13번지의 건물과 야냐 거리 1, 2번지 및 지브유 거리 4/6, 10/12번지의 창고 등이 있다.[29]

10. 2. 베르치

리에파야의 발전은 항구 건설과 19세기 말 산업 확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9] 1841년 그로비냐 고속도로 건설과 1870년대 리에파야-로미 철도 건설은 도시의 성격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871년 파울 막스 베르취가 도시의 초대 건축가로 임명되면서 리에파야의 건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베르치가 설계하고 건축한 건물들은 리에파야 역사적 건물의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을 형성한다. 그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며, 도시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파울 막스 베르치의 주요 건축물
구분상세 내용 / 위치
산업 시설오일 추출 공장, 리놀륨 공장
저택크리시야니 발데마라 거리 14번지 및 16번지, 펠두 거리 15번지
임대 주택펠두 거리 44번지, 팔무 거리 6번지, 아보투 거리 9번지, 레푸블리카스 거리 28번지, 쿠르슈 거리 21번지
공공 시설유르말라 공원의 펠두 기관(목욕탕), 다르타 거리의 병원 단지, 크리시야니 발데마라 거리 4번지의 체육관 건물, 크리시야니 발데마라 거리 2번지의 카페
종교/숙박 시설성 안나 교회, 로마 호텔



베르치의 건축은 붉은 벽돌을 사용한 점이 특징적이며, 문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고품질의 목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고급 주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임대 주택(팔무 거리 6번지, 아보투 거리 9번지, 레푸블리카스 거리 28번지, 쿠르슈 거리 21번지 등)에서도 아름답게 칠해진 계단이 발견되는 등 세심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10. 3. 아르 누보

리에파야는 유럽 규모의 아르 누보 양식 건축물 예시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도시에 수십 채의 아르 누보 건물이 있으며, 이는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해 많은 수이다.[33] 특히 그라우두 거리는 거의 전체 길이가 아르 누보 양식으로 정의될 정도이다.[33] 대부분의 건물은 절제되고 간결한 북부 민족 낭만주의 스타일로 지어졌다.[34]

5 Lielā 거리의 건물. 건축가: 루드비히 멜빌


파울 막스 베르치(Paul Max Bertchy)가 여러 아르 누보 건물을 설계했으며, 그 외에도 테오도르 막스 베르치(Theodor Max Bertchy), 루드비히 멜빌(Ludwig Melville), 찰스 카(Charles Carr), 라스 손케(Lars Sonke), 파울스 캄페(Pauls Kampe), 아돌프 쿠츠너(Adolf Kucner), 구스타프 야니첵(Gustav Janicek), 윌리엄 로소우(William Losow), 막스 쿤(Max Kuhn), 알렉산더 제렌센(Alexander Zehrensen), 바실리 코샤코프(Vasily Kosyakov) 등의 작품이 중요하다.[35] 리에파야의 아르 누보는 주로 라트비아-독일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부분적으로 러시아 및 다른 문화와의 상호작용도 반영한다.[35]

아래는 리에파야의 뛰어난 아르 누보 건축물 예시이다.[33]

거리번지
쿠르마야스 거리2/6
아우세클리스 거리9
그라우두 거리28, 34, 36/38, 44, 46, 27/29, 45
진타루 거리3, 9, 16, 23
크리시야니스 바론스 거리8
리에푸 거리23
펠두 거리33/35
파스타 거리1, 11
리엘라 거리4, 5
테아트라 거리2
바즈니카스 거리18
바리누 거리21A
티르고뉴 거리22
쿠르슈 거리1, 5, 17, 21
로주 거리8/10, 16
알레이아스 거리6 (안뜰)
토마 거리43
디카 거리11
아보투 거리4, 11
레푸블리카스 거리19, 28
울리하 거리5, 13, 15/17, 19, 25, 66
라이나 거리1
크로뉴 거리10/12


10. 4. 카로스타

리에파야 북부에 위치한 카로스타(Karosta영어)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러시아 군대를 위해 건설된 지역이다. 당시 최고의 러시아 군사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이 건설을 지휘했으며, 기능이나 건물의 특징, 전통 면에서 도시의 다른 부분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현재까지도 그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다.[29] 카로스타는 라트비아 건축 역사상 군사화된 복합 단지의 뛰어난 예시로 평가받는다.[29]

카로스타의 중심에는 정교회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장교 회관과 주거 단지 등이 주요 건물이다. 또한 도시 전체를 에워싸고 여러 부분을 지하 통로로 연결하는 독특한 요새 시스템이 있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부 파괴되었다.[29]

제정 러시아 시대에 이곳에는 부동항인 카로스타 군항이 설치되어 발트 함대의 주요 기지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특히 러일 전쟁 당시에는 이 항구에서 함대가 동해를 향해 출항하기도 했다. 현재 카로스타 군항 지역은 일반에 개방되어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10. 5. 전간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시기 동안, 건축가 야니스 블라우(lv)는 리에파야의 라트비아 사회관(Latvian Society House) 프로젝트를 설계했으며, 이 건물은 1934년 로즈 광장(Rose Square)에 세워졌다. 육군 경제 창고 건물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건축가 알렉산드르스 라체니스(lv)의 설계로 건설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었다. 테아트라 거리 3번지(3 Teātra Street)의 전당포 및 저축 은행 건물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건설되었다.[30] 이 시기에는 우호 직업 초등학교(현재 제5 중학교, 건축가 K. Bikše)와 야운리에파야 루터교회(lv, 건축가 K. E. Strandmann)도 지어졌다.[29]

10. 6. 소련 시대

그레이트 앰버 콘서트 홀 (Great Amber Concert Hall) in 리에파야, 건축가: Volker Giencke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황폐해진 리에파야 시 중심부는 새로운 개발 계획이 필요했다. 소련의 일부였던 라트비아의 건축과 도시 계획은 소련의 통일적인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의 새로운 중심지는 표준화된 형식적 원칙인 국제 모더니즘에 따라 계획되었으며, 거리는 넓고 광장은 규칙적이고 대칭적이며 중앙에는 레닌 기념비가 세워졌다. 공공 건물은 소련 건축 원칙에 따라 크고 넓으며 인상적으로 설계되었다.[30]

1957년에는 현재 리에파야 대학교가 사용하는 건물이 건축가 Andrejs Aivars|안드레이스 아이바르스lav에 의해 묵직한 절충주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거의 동일한 건물이 다우가프필스에도 있다. '쿠르제메'(Kurzeme) 백화점은 외벽에 큰 창문과 1층에 상점 창문을 갖춘 형태로 건설되었다. 소련 시대에는 쿠르제메에서 펠두 거리(Peldu Street)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을 건설하면서 리에파야 구시가지의 역사적인 건물들이 광범위하게 철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리엘라 거리(Lielā Street)에도 영향을 미쳤다.[30]

군사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리에파야는 폐쇄된 도시로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1970년대까지 도시 건설은 다소 더디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라우마'(Lauma), 농기계 공장, '히드롤라츠'(Hidrolats) 등 새로운 공장과 주거 지역이 건설되었으며, 이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에제르크라스츠 지구이다.[29]

10. 7. 현대 건축

독립 회복 이후, 리에파야에는 새로운 현대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인공 아이스 링크(건축가 U. Pīlēns), 야운리에파야(Jaunliepāja)의 가톨릭 수도원(A. Kokins), 재건축된 "Māja" 상점(A. Padēlis-Līns), 그리고 시내 중심가의 새로운 시장 건물(U. Pīlēns) 등이 있다.[29]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대 건축물은 단연 그레이트 앰버 콘서트홀(Great Amber Concert Hall)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건축은 새로운 재료와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29]

11. 자매 도시

리에파야는 다음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62]

국가도시명원어 표기체결 연도
스웨덴뉘네스함Nynäshamn1990
폴란드엘블롱크Elbląg1991
미국벨뷰Bellevue1992
독일다름슈타트Darmstadt1993
리투아니아클라이페다Klaipėda1997
폴란드그디니아Gdynia1999
노르웨이오르스타드Årstad (Bergen)2001
리투아니아팔랑가Palanga2001
스웨덴헬싱보리Helsingborg2005
덴마크굴보르순Guldborgsund미상
벨라루스호멜미상


12. 저명한 출신 인물


  • 볼데마르 케르니그 (1840—1917) — 러시아 및 독일 신경학자
  • 레우벤 도브 데슬러 (1863–1935) – 랍비
  • 미켈리스 발테르스 (1874—1968) — 정치인, 초대 라트비아 내무부 장관
  • 리나 슈테른 (1878—1968) — 생화학자
  • 얀카 마우르 (1883—1971) — 벨라루스 작가
  • 엘리야후 엘리에제르 데슬러 (1892–1953) – 랍비
  • 아우구스츠 아누스 (1893—1984) — 화가
  • 에두아르드 티세 (1897—1961) — 촬영 기사
  • 레온 조셉슨 (1898–1966) – 미국 변호사이자 소련 스파이
  • 야콥 클라인 (1899–1978) – 러시아계 미국인 유대인 철학자
  • 헤르베르츠 쿠쿠르스 (1900—1965) — 비행사이자 나치 협력자
  • 발데마르스 바우마니스 (1905—1992) — 농구 코치
  • 발리스 드바리오나스 (1905—1972) — 리투아니아 작곡가
  • 스타니스와프 야슈키에비치 (1907—1980) — 폴란드 배우
  • 미르자 켐페 (1907—1974) — 시인
  • 아르비드 얀손스 (1914—1984) —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의 아버지
  • 탈리발디스 케니닝스 (1919—2008) — 작곡가[61]
  • 모리스 할레 (1923—2018) — 라트비아계 미국인 유대인 언어학자
  • 즈비 해리 허위츠 (1924—2008) — 남아프리카 언론인, 이스라엘 외교관이자 두 총리의 고문
  • 에르네스토 폴다츠 (1925—2003) — 생물학자
  • 조지 D. 슈왑 (1931) — 미국 정치학자, 편집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학자
  • 키로브스 립만스 (1940) — 사업가
  • 테오필스 비키스 (1950—2000) — 피아니스트
  • 즈이그마르스 리에피에스 (1952) — 작곡가
  • 야니스 바나그스 (1958) — 라트비아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리가 대주교
  • 라일라 파칼니나 (1962) — 영화 감독
  • 이고 (1962) — 가수이자 작곡가
  • 마르틴스 프레이마니스 (1977—2011) — 음악가이자 배우
  •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브스 (1978—2018) — 라트비아-러시아 파워리프터
  • 마리스 베르파코우스키스 (1979) — 축구 선수
  • 로만스 밀로슬라브스키스 (1983) — 수영 선수이자 정치인
  • 아나스타시야 세바스토바 (1990) — 테니스 선수
  • 마레크스 메예리스 (1991) – 이스라엘 농구 프리미어리그의 하포엘 예루살렘 농구 선수
  •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 (1995) — 농구 선수
  • 루돌프스 발세르스 (1997) — 아이스 하키 선수
  • 오스카르스 크라바 - 축구 선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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