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폰 슈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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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1861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독일 해군 제독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 제국 해군에서 복무하며 동아시아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14년 11월, 코로넬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포클랜드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 맞서 싸우다 기함 샤른호르스트를 포함한 함대와 함께 전사했다. 그는 독일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군함이 건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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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폰 슈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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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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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Reichsgraf(제국 백작) |
이름 | 막시밀리안 폰 슈페 |
출생일 | 1861년 6월 22일 |
출생지 | 덴마크 코펜하겐 |
사망일 | 1914년 12월 8일 |
사망 장소 | 대서양 포클랜드 제도 연안, (샤른호르스트) 함상 |
소속 | 독일 제국 |
군 종류 | (독일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878년 – 1914년 |
최종 계급 | Vizeadmiral(해군 중장) |
지휘 | |
지휘 함선 | (헬라) (펠리칸) (비텔스바흐) |
지휘 부대 | 동아시아 전대 |
주요 참전 | |
전투 |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파페에테 전투 코로넬 해전 포클랜드 해전 |
기념 | |
기념 함선 | (독일 순양함,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 |
묘소 | 칠레 푼타아레나스에 위령비 있음 |
2.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생애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1861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가문은 라인란트의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1878년 독일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카메룬 등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동아시아에 파견되어 전함 브란덴부르크의 부함장을 맡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슈페는 무기 개발과 관련된 여러 고위직을 거쳤으며, 1908년에는 북해 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다. 1910년 1월 27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자오저우 만 조차지 내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 동양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지휘하게 된 함대의 장갑순양함들은 당시 독일 해군의 최신예 함선들이었으나, 영국의 전투순양함 등장으로 인해 점차 그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2. 1. 초기 경력

슈페는 1861년 6월 22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영지가 있는 독일 라인란트에서 성장했다. 1878년 독일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초기에는 주요 해군 기지인 킬에서 복무했다.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서아프리카로 파견된 포함 뫼베에 배속되었다. 이 시기 독일은 현지 통치자들과 조약을 맺어 토고와 카메룬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1887년에는 카메룬으로 전출되어 두알라 항구를 지휘했다. 이곳에서 류머티즘 열을 앓게 되어 독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평생 간헐적인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다.
1889년 독일로 돌아와 마르가레타 폰 데어 오스텐-자켄 남작 부인과 결혼했다. 부부는 아들 오토(1890년생), 하인리히(1893년생)와 딸 후베르타(1894년생)를 두었다. 1895년까지 해군 대위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5월 1일부터 9월 12일까지 철갑포함 나터를 지휘했다. 1897년 12월, 독일이 칭다오 항이 위치한 자오저우만 조차지를 점령한 후 독일 동아시아 전대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해군 중장 오토 폰 디데리히스의 참모로 근무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자 칭다오와 양쯔강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독일로 귀국한 후 해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전함 브란덴부르크의 선임 장교(부함장)로 근무했다. 1900년부터 1908년까지 아비소 헬라, 기뢰부설함 펠리칸, 전함 비텔스바흐 등 여러 함선을 지휘했다. 이 기간 중 1904년 1월 27일 해군 중령으로, 정확히 1년 뒤에는 해군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대령 진급 후 비텔스바흐 함의 지휘를 맡았다. 1908년 북해 함대 기지 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1910년 1월 27일에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양함대 정찰부대 부사령관직을 역임했다. 1912년에는 귄터 폰 크로지크 제독의 후임으로 독일 동아시아 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 2. 동아시아 함대 사령관
1912년 말, 슈페는 12월 4일 귄터 폰 크로지크 제독의 후임으로 동아시아 함대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장갑순양함 SMS 샤른호르스트에 기함을 두고, 자매함 SMS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남서 태평양 순방에 나섰다. 이 기간 동안 싱가포르와 바타비아를 포함한 여러 항구를 방문했다. 슈페는 이듬해인 1913년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약 1년 반 동안 슈페는 여러 동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등 외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3년 4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샤른호르스트''는 슈페를 태우고 일본을 방문하여 다이쇼 천황을 만났다. 같은 해 말에는 태국을 방문하여 쭐랄롱꼰 국왕을 만났다. 1914년 5월, 슈페는 ''샤른호르스트''와 어뢰정 S90를 이끌고 뤼순과 톈진을 방문했으며, 이어 베이징으로 가서 초대 중화민국 대총통인 위안스카이를 만났다. 그는 5월 11일 ''샤른호르스트''에 다시 탑승하여 칭다오로 돌아왔다.
그 후 슈페는 독일령 뉴기니로의 항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샤른호르스트''는 6월 20일에 출발했다. 두 장갑순양함은 일본 나가사키에 들러 순방 준비를 위해 석탄을 보급했다. 캐롤라인 제도의 트루크로 향하던 중, 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7월 17일, 동아시아 함대는 캐롤라인 제도의 폰페이에 도착했다. 유럽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동안 함선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폰페이에서 슈페는 독일 라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으며, 곧이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에 대항하여 동원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7월 31일, 독일이 러시아에게 군대 동원 중단을 요구한 최후통첩 기한이 만료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슈페는 함대 승무원들에게 전쟁 준비를 명령했다. 8월 2일,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독일의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범하자,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은 독일 동아시아 함대 사령관으로, 함대의 주력인 장갑순양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이끌고 태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그의 함대는 연합국의 상선 및 수송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나, 슈페 제독은 연합국 해군력, 특히 일본 제국 해군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전력을 경계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전투순양함 HMAS 오스트레일리아 한 척만으로도 자신의 함대 전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평가했다.
전쟁 발발 후, 슈페 제독은 함대의 근거지인 칭다오가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태평양을 횡단하고 혼곶을 돌아 대서양을 거쳐 독일 본국으로 귀환하는 항해를 계획했다. 독일 해군 본부는 그에게 작전의 자유를 주면서도, 함대가 격파되기 전에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주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슈페 함대를 "꽃병 속의 꽃"에 비유하며 고립된 상황을 지적했다.
슈페 제독은 함대를 마리아나 제도의 파간 섬에 집결시킨 후, 마셜 제도의 에네웨토크 환초를 거쳐 태평양 횡단을 시작했다. 항해 중 정보 수집 및 연합군 견제를 위해 독일령 사모아의 아피아와 프랑스령 타히티의 파페에테 등을 방문했다. 파페에테 해전에서는 프랑스 포격정을 격침시켰으나, 항구의 기뢰에 대한 우려로 석탄 확보에는 실패했다.
이스터 섬에서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등과 합류한 슈페 함대는 1914년 11월 1일, 칠레 코로넬 앞바다에서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이 이끄는 영국 제4 순양함 전대와 교전했다(코로넬 해전). 이 전투에서 슈페 함대는 영국의 장갑순양함 HMS 굿 호프와 HMS 몬머스를 격침시키며 승리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해군이 겪은 첫 함대 패배였다.
해전 후 칠레 발파라이소에 잠시 기항하여 보급을 받은 슈페 함대는 혼곶을 돌아 대서양으로 향했다. 슈페는 포클랜드 제도의 스탠리에 있는 영국군 석탄 저장소와 무선 기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코로넬 해전의 패배에 대응하여 도베톤 스터디 부제독이 지휘하는 최신 전투순양함 인빈시블과 HMS 인플렉시블을 포함한 강력한 함대를 파견한 상태였다. 또한 영국군은 독일 해군 암호를 해독하여 슈페 함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고, 일설에 따르면 포클랜드 공격을 유도하는 거짓 정보를 보냈다고도 한다.
1914년 12월 8일, 스탠리 공격을 시도하던 슈페 함대는 스터디 함대와 조우하여 포클랜드 해전이 벌어졌다. 슈페 함대는 영국의 전투순양함에 비해 속도와 화력에서 열세였다. 기함 샤른호르스트는 슈페 제독과 함께 침몰했으며, 그나이제나우,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역시 격침되었다. 이 전투로 슈페 제독 본인과 두 아들(뉘른베르크에 승선했던 해군 중위 오토 폰 슈페, 그나이제나우에 승선했던 하인리히 폰 슈페)을 포함한 약 2,200명의 독일 해군 장병이 전사했다. 유일하게 탈출한 경순양함 드레스덴도 이후 후안페르난데스 제도에서 영국 함대에 발견되어 자침함으로써 독일 동아시아 함대는 완전히 소멸했다.
3. 1. 개전 당시 상황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1914년 8월 3일), 독일 동양 함대(이하 "슈페 함대") 사령관이었던 슈페는 함대의 주력인 샤른호르스트급 장갑순양함 2척(샤른호르스트(기함), 그나이제나우)을 이끌고 캐롤라인 제도의 독일령 폰페이 섬에 정박 중이었다. 당시 함대는 독일령 사모아 제도 순항을 예정하고 평시 활동을 하고 있었다.개전 시점에서 슈페 함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으나, 함선들은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고 임전 태세도 갖추지 못했으며 군수 물자도 부족한 상태였다.
함종 | 함명 | 위치 (1914년 8월 3일 기준) |
---|---|---|
장갑순양함 | 샤른호르스트 (기함) | 폰페이 섬 정박 |
장갑순양함 | 그나이제나우 | 폰페이 섬 정박 |
경순양함 | 엠덴 | 칭다오 정박 |
경순양함 | 뉘른베르크 |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폰페이 섬으로 항해 중 |
경순양함 | 라이프치히 | 멕시코 태평양 연안 |
슈페는 연합국 해군, 특히 영국 해군(중국 방면 함대),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뉴질랜드 해군의 연합 전력이 슈페 함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순양전함 HMAS 오스트레일리아 1척만으로도 자신의 함대 전체 전력보다 우위에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연합국의 해군력을 경계했다. 또한 프랑스 해군과 잠재적 적국인 일본 제국 해군의 전력도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슈페는 함대의 모항인 칭다오로 돌아가 임전 태세를 갖추는 것은 연합국 함대에 포착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연합국의 눈을 피해 함대의 전력을 한 곳에 모으고 전투 준비를 할 장소로, 당시 독일령이었던 마리아나 제도의 파간 섬을 선택했다.
3. 2. 남아메리카 대륙 연안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슈페 제독 휘하의 독일 동아시아 함대는 칭다오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독일 본국으로 귀환하는 긴 항해를 시작했다. 함대는 먼저 마리아나 제도의 파간 섬에서 집결한 뒤, 마셜 제도의 에네웨토크 환초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경순양함 엠덴은 통상 파괴 임무를 위해 함대에서 분리되었다.정보 수집을 위해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파견되었던 경순양함 뉘른베르크는 연합군이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슈페 제독은 장갑순양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이끌고 9월 14일 사모아의 아피아에 도착했으나, 이미 연합군 함정은 떠난 뒤였다. 슈페 제독은 상륙 작전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9월 22일, 함대는 프랑스 식민지인 타히티의 파페에테를 공격했다. 이 파페에테 해전에서 독일 함대는 프랑스 포격정 젤레(Zélée)를 격침시켰으나, 항구의 기뢰에 대한 우려로 석탄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떠났다. 이후 함대는 마르케사스 제도를 거쳐 보급품을 확보하며 항해를 계속했다.
10월 12일, 함대는 이스터 섬에 도착하여 미주 방면에서 활동하던 경순양함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그리고 4척의 석탄 수송선과 합류하여 전력을 보강했다. 슈페 함대는 칠레 해안으로 이동했고, 11월 1일 코로넬 근해에서 영국 해군의 제4 순양함 전대와 마주쳤다.
영국의 제4 순양함 전대는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이 지휘하는 장갑순양함 굿 호프(Good Hope)와 맘모스(Monmouth), 경순양함 글래스고(Glasgow), 그리고 보조순양함 오트란토(Otranto)로 구성되어 있었다. 슈페 제독은 함선의 속도 우위를 이용하여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전을 시작했다. 해 질 녘의 역광과 칠레 해안을 배경으로 한 독일 함선의 위장 효과는 영국 함대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독일 함대는 18시 7분경 포격을 개시하여 영국 장갑순양함들을 집중 공격했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정확하고 강력한 포격으로 맘모스는 빠르게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굿 호프 역시 큰 피해를 입고 19시 23분경 침몰했다. 이후 독일 경순양함들이 맘모스를 마무리했다. 이 코로넬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굿 호프와 맘모스 두 척의 장갑순양함을 잃고 크래독 제독을 포함한 1,600명 이상의 장병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반면 독일 함대는 경미한 피해만 입었지만, 탄약의 약 40%를 소모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해군이 겪은 첫 번째 함대 단위의 패배였다.

해전 후 슈페 함대는 칠레의 발파라이소로 이동했다. 중립국 규정에 따라 11월 3일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뉘른베르크 세 척만 먼저 입항하여 석탄을 보급받고 독일 제국 해군 참모부와 연락을 취했다. 발파라이소의 독일 교민 사회는 승리를 축하하는 환영회를 열었으나, 슈페 제독은 행사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유지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승리를 축하하며 받은 꽃다발에 대해 "내 무덤에 더 어울릴 것"이라고 답하며 앞으로의 어려운 상황을 예감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 저는 집이 없는 신세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독일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전한 항구가 없습니다. 저는 탄약이 소진될 때까지, 또는 훨씬 강력한 적이 저를 따라잡을 때까지 세계의 바다에서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입히며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저를 쓰러뜨리기 전에 그 불쌍한 자들에게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입니다.
발파라이소에 머무는 동안 슈페 제독은 해군 참모부로부터 독일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함대는 24시간의 정박 제한 시간을 지켜 항구를 떠나, 11월 6일 마스 아 푸에라 섬에서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및 석탄선들과 다시 합류했다. 이곳에서 나포한 영국 및 프랑스 상선으로부터 추가로 석탄을 공급받은 후, 슈페 함대는 혼곶을 돌아 대서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남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한편, 코로넬 해전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영국 해군은 복수를 위해 도베톤 스터디 부제독이 지휘하는 최신 전투순양함 인빈시블(Invincible)과 인플렉시블(Inflexible)을 포함한 강력한 함대를 남대서양으로 급파했다.
3. 3. 코로넬 해전
남아메리카로 향한 슈페 제독의 함대는 1914년 11월 1일 칠레 중부 해안의 코로넬 앞바다에서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이 지휘하는 영국의 제4 순양함 전대와 마주쳤다. 이 전대는 장갑순양함 굿 호프(기함)와 몬머스, 경순양함 글래스고, 그리고 보조순양함 오트란토로 구성되어 있었다.슈페는 영국 함대를 발견하고 교전을 결정했으나, 함선의 속도 우위를 이용하여 해질녘까지 교전을 늦추었다. 이는 석양을 등지게 되는 영국 함선을 실루엣으로 만들어 관측하기 쉽게 만들었지만, 칠레 해안선을 배경으로 한 독일 함선은 식별하기 어렵게 하여 영국 포수들의 조준을 방해했다. 18시 07분, 슈페는 포격 개시를 명령했다. 독일 장갑순양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영국 장갑순양함 굿 호프와 몬머스와 교전했고, 독일 경순양함 라이프치히와 뉘른베르크, 드레스덴은 글래스고와 오트란토와 교전했다. 크래독 제독은 전투 대열에 합류하기 어려운 오트란토를 즉시 분리시켰다. 18시 50분까지 그나이제나우는 몬머스를 무력화시키고 굿 호프에 대한 포격에 가담했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합동 화력으로 19시 23분까지 굿 호프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슈페는 장갑순양함들을 물리고 경순양함들을 보내 몬머스와 굿 호프를 최종적으로 격침시켰다.
이 해전으로 영국은 굿 호프와 몬머스 두 척의 장갑순양함을 잃었으며, 크래독 제독을 포함한 1,600명 이상의 장병이 전사했다. 반면, 독일 함대는 탄약의 약 40%를 소모했을 뿐 함선 손실은 없었다. 이 전투는 약 한 세기 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해군이 처음으로 겪은 함대 단위의 패배였다.
해전 후 슈페 제독은 함대를 북쪽 발파라이소로 이동시켰다. 칠레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국제법에 따라 한 번에 3척의 함선만 항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슈페는 11월 3일 아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뉘른베르크를 먼저 입항시켰고,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인근 마스 아 푸에라 섬(현 로빈슨크루소 섬)에서 석탄선과 함께 대기하도록 했다. 발파라이소에서 슈페 함대는 석탄을 보급받고, 독일 제국 해군 참모부와 연락하여 이 지역에 남아있는 영국 해군 전력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했다. 그는 또한 영국 언론이 자국의 손실을 축소하고 독일 측 피해를 과장하는 보도에 대응하려 했다. 발파라이소의 독일인 사회는 환영회를 열었지만, 슈페는 행사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유지하도록 주장했다. 그는 해전 승리를 축하하며 받은 꽃다발에 대해 "이 꽃은 내 무덤에나 어울릴 것이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저는 집이 없는 신세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독일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전한 항구가 없습니다. 저는 탄약이 소진될 때까지, 또는 훨씬 강력한 적이 저를 따라잡을 때까지 세계의 바다에서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입히며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저를 쓰러뜨리기 전에 그 불쌍한 자들에게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항구에 있는 동안 슈페는 해군 참모부로부터 독일로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슈페 함대는 중립 규정에 따라 24시간만 항구에 머무른 뒤, 11월 6일 마스 아 푸에라로 이동하여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가 발파라이소에 잠시 기항하게 한 후, 나포한 영국과 프랑스 증기선에서 더 많은 석탄을 공급받았다. 이후 재편성된 전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혼곶을 돌아 남대서양으로 향했다. 한편, 영국 해군은 코로넬 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도베톤 스터디 부제독의 지휘 아래 강력한 전함 두 척, 인빈시블과 인플렉시블을 파견하여 슈페 전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3. 4. 포클랜드 해전
1914년 11월 1일 칠레 중부 해안에서 벌어진 코로넬 해전에서 크리스토퍼 크래독 경이 지휘하는 영국 장갑순양함 2척(HMS 굿 호프, HMS 몬머스)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둔 후, 슈페 제독은 포클랜드 제도로 향했다.12월 6일 아침, 슈페는 ''샤른호르스트'' 함상에서 함장 회의를 열어 다음 행동 방침을 논의했다. 이 지역에 영국 증원군이 있다는 단편적이고 상반된 보고들이 있었으나, 슈페와 두 함장은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 무선 기지 파괴를 위한 공격을 주장했고, 결국 이 의견이 채택되어 함대는 12월 6일 정오에 포클랜드로 출항했다.
1914년 12월 8일, 슈페 제독은 포클랜드 제도의 스탠리에 있는 석탄 저장소를 급습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이 코로넬 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도브턴 스터디 제독의 지휘 아래 2척의 최신예 전투순양함 HMS 인빈시블과 HMS 인플렉시블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스탠리 항구에는 장갑순양함 HMS 카나본, HMS 콘월, HMS 켄트와 경순양함 HMS 브리스톨, HMS 글래스고가 정박해 있었다.
독일 함대가 접근하자 ''그나이제나우''의 관측병은 포트 스탠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지만, 독일군이 석탄을 압수하지 못하도록 영국군이 석탄을 태우는 것으로 추정했다. 항구에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해안 방어용으로 배치된 구식 전함 HMS 캐노퍼스에서 발사된 30.5cm 포탄이 독일 함선 주변에 떨어지자 슈페는 즉시 공격을 중단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슈페가 물러나자 스터디 제독은 신속히 함대를 출항시켜 독일군 추격에 나섰다.

오후 1시 20분경, 영국의 빠른 전투순양함들이 독일 함대를 따라잡았다. 슈페는 자신의 장갑순양함으로는 이들을 따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3척의 경순양함(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드레스덴)에게 이탈을 명령하고 자신은 기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로 영국 전투순양함들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스터디는 자신의 순양함들에게 도주하는 독일 경순양함 추격을 지시하고, 자신은 ''인빈시블''과 ''인플렉서블''로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교전에 들어갔다.
슈페는 함대를 능숙하게 기동하여 바람을 등지는 위치를 확보했다. 이 위치는 독일 함선의 연기가 포수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해주었지만, 반대로 영국 함대는 바람을 안는 위치에 놓여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샤른호르스트''는 세 번째 일제 사격으로 ''인빈시블''에 두 발의 명중탄을 기록하며 초반 교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듯했다. 스터디는 독일 함선의 15 cm 부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쪽으로 기동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슈페는 이에 남쪽으로 급선회하며 대응했고, 스터디도 사정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남쪽으로 따라 돌았다. 이 기동으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포 사정거리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정확한 포격으로 영국 함대를 다시 한번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군의 포격은 점점 더 정확해졌고, 오후 4시경 ''샤른호르스트''는 심하게 기울고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다. 슈페는 ''그나이제나우''에게 이탈을 명령하고, 자신은 ''샤른호르스트''를 몰아 영국 함대를 향해 돌진하며 어뢰를 발사하려 했다. 하지만 오후 4시 17분, ''샤른호르스트''는 전복되어 침몰했고, 슈페 제독을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함선과 운명을 함께했다. 영국 함대는 생존자 구조 노력 없이 계속해서 ''그나이제나우''를 추격했다.
결국 ''그나이제나우'',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도 영국 함대의 추격 끝에 격침되었다. 오직 경순양함 ''드레스덴''과 보조선 "자이들리츠(Seydlitz)"만이 탈출에 성공했으나, "자이들리츠"는 아르헨티나에 억류되었고, ''드레스덴''은 이후 후안페르난데스 제도에서 영국 함대에 발견되어 마스 아 티에라 해전 중 자침했다. 이 해전으로 슈페 제독과 그의 두 아들(뉘른베르크에 승선했던 해군 중위 오토 폰 슈페, 그나이제나우에 승선했던 하인리히 폰 슈페)을 포함한 약 2,200명의 독일 해군 장병이 전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해군 장교이자 스파이였던 프란츠 폰 린텔렌은 영국 해군 정보국장 윌리엄 레지날드 홀 제독과의 인터뷰에서, 영국 암호 해독가들이 독일 해군 암호를 해독하고 슈페 함대에 포클랜드의 무선 시설 파괴를 명령하는 "거짓 전문"을 보내 영국 함대 쪽으로 유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4. 평가 및 현창
슈페 제독은 사후 독일에서 영웅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군함들이 건조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현창되었다.[2]
4. 1. 평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우세하고 빠른 속도를 가진 스터디 함대에 포착되어 도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슈페는, 휘하의 3척의 경순양함을 탈출시키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경순양함 3척에게 '''"본관은 끝까지 분전하겠으니, 남아메리카 연안으로 향하라"'''[4]라고 신호를 보내고, 기함인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돌려 스터디 함대에 돌격했다[4]。 그 후, 격전 끝에 샤른호르스트가 먼저 침몰할 때, 슈페는 '''"극력 이탈을 노력하라"'''[4]라고 그나이제나우에게 신호를 보냈다[4]。일본의 군사사가 노무라 미노루는 슈페의 이러한 행동을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건 그렇고, 세 척의 경순양함을 구하려다 자신과 두 척의 장갑순양함을 희생시키기로 결의하고, 또 기함이 침몰할 때 '그나이제나우'에 더 탈출을 명령하는 등, 해군 군인으로서 그 지휘는, 고금동서의 해전 사상, 최고의 명예를 받을 만하다."[4]
4. 2. 현창
독일에서 슈페는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동아시아 전대의 장병들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언론은 그들의 용맹함과 항복 거부를 강조했다. 1917년 9월, 두 번째 마켄젠급 순양전함은 '그라프 슈페'(''Graf Spee'')로 명명되었으며, 슈페의 미망인 마르가레테(Margarete)가 명명식을 거행했다. 이 배는 1918년 11월 11일 휴전까지 건조가 완료되지 못했고, 1921년까지 고철로 해체되었다. 1934년 독일은 새로운 중순양함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를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으며, 슈페의 딸이 명명식을 거행했다. 1939년 12월,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는 우루과이 연안의 라플라타 강 전투 이후 승무원에 의해 자침되었다. 1959년에서 1964년 사이, 서독 연방 해군(Bundesmarine)은 훈련함 프리깃함 ''그라프 슈페''(전 영국 해군 HMS 플라밍고)를 운용했다.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이 처음으로 건조한 전함 2척의 이름은 슈페 함대의 장갑순양함 이름을 딴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였다.[4]
슈페의 기함 샤른호르스트의 잔해는 침몰 105주년이 되는 2019년 12월 5일에 포클랜드 제도 근해에서 발견되었다. 슈페 가문의 수장 빌헬름 그라프 폰 슈페(Wilhelm Graf von Spee)는 잔해 위치에 대해 "씁쓸함"(bittersweet)이라고 언급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발견되어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과 엄청난 인명 손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은 하루에 아버지와 두 아들을 잃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상상할 수 없는 손실을 겪은 수천 가구처럼,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2]

슈페는 독일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공적과 분전을 칭송받았다.[4]
슈페의 이름은 다음 3척의 독일 군함에 붙여졌다.
함선명 | 함종 | 소속 | 비고 |
---|---|---|---|
SMS 그라프 슈페 | 마켄젠급 순양전함 | 독일 제국 해군 | 1917년 진수, 미완성 |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 (장갑함) |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 국방군 해군 | 1936년 취역, 1939년 자침[4] |
그라프 슈페 (F 215) | 연습함 (프리깃함) | 연방 해군 | 1959년 취역, 1964년 퇴역 |
5. 가족 관계
1889년 독일로 돌아온 후, 그는 마르가레타 폰 데어 오스텐-자켄 남작 부인(1867–1929)과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
오토 폰 슈페 | 1890년 7월 10일, 킬 | 1914년 11월 8일, 남대서양 포클랜드섬 앞바다 (뉘른베르크호) |
하인리히 폰 슈페 | 1893년 4월 24일, 킬 | 1914년 11월 8일, 남대서양 포클랜드섬 앞바다 (그나이제나우호) |
후베르타 폰 슈페 | 1894년 7월 11일, 킬 | 1954년 9월 18일, 본 |
참조
[1]
문서
[2]
뉴스
German WWI wreck Scharnhorst discovered off Falklands
https://www.bbc.co.u[...]
BBC News
2019-12-05
[3]
웹사이트
Spee, Maximilian Johannes Maria Hubert Reichsgraf von
https://www.deutsche[...]
Allgemeine Deutsche Biographie
2022-02-03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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