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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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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맥스웰 테일러는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졸업 후 공병으로 시작하여 야전포병으로 전과했으며,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하여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제82공수사단 참모장과 제101공수사단장을 지휘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마켓 가든 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미 제8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육군참모총장으로 '뉴룩' 정책을 비판하고 '유연 대응' 전략을 주장했다. 케네디 행정부에서 대통령 군사 대표와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냈으며, 베트남 전쟁 초기 개입 확대에 관여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 개입 확대, 합동참모본부와의 관계, 그리고 '뉴룩' 정책 비판 등으로 인해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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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 테일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1956년경
이름맥스웰 데번포트 테일러
출생일1901년 8월 26일
출생지미주리주 키츠빌
사망일1987년 4월 19일
사망지워싱턴 D.C.
묘지알링턴 국립묘지
직책
대통령 정보 자문위원회 의장린든 B. 존슨 대통령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임기 시작1968년 2월 29일
임기 종료1970년 5월 1일
전임자클라크 클리포드
후임자조지 휠런 앤더슨 주니어
주 남베트남 미국 대사린든 B. 존슨 대통령
대사 임기 시작1964년 7월 14일
대사 임기 종료1965년 7월 30일
대사 전임자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대사 후임자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합동참모본부 의장존 F. 케네디 대통령
린든 B. 존슨 대통령
의장 임기 시작1962년 10월 1일
의장 임기 종료1964년 7월 1일
의장 전임자라이먼 레므니처
의장 후임자얼 휠러
미국 육군참모총장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참모총장 대리윌리스턴 B. 파머
라이먼 레므니처
참모총장 임기 시작1955년 6월 30일
참모총장 임기 종료1959년 6월 30일
참모총장 전임자매튜 리지웨이
참모총장 후임자라이먼 레므니처
유엔군사령부 사령관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사령관 대리윌리스턴 B. 파머
라이먼 레므니처
사령관 임기 시작1955년 4월 1일
사령관 임기 종료1955년 6월 5일
사령관 전임자존 E. 헐
사령관 후임자라이먼 레므니처
점령 일본 연합군 최고사령관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최고사령관 임기 시작1955년 4월 1일
최고사령관 임기 종료1955년 6월 5일
최고사령관 전임자존 E. 헐
최고사령관 후임자라이먼 레므니처
교장 임기 시작1945년 9월 4일
교장 임기 종료1949년 1월 28일
교장 전임자프랜시스 보디치 윌비
교장 후임자브라이언트 무어
군사 경력
소속미국 육군
복무 기간1922년–1959년
1961년–1964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병과공병
야전 포병
지휘합동참모본부 의장
미국 육군참모총장
미국 육군사관학교
제101공수사단
제82공수사단 포병대
제12야전포병대대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전역
허스키 작전
이탈리아 침공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전투
카랑탕 전투
마켓 가든 작전
벌지 전투
바스토뉴 포위전
일본 점령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주요 훈장수훈 십자장
육군 공로훈장 (4회)
은성 훈장 (2회)
공로훈장
동성 훈장
퍼플 하트 훈장
학력
학력미국 육군사관학교 (이학 학사)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칼리지, 미주리주

2. 초기 생애와 경력

맥스웰 테일러는 1901년 미주리주 키테스빌에서 태어나 캔자스시티에서 성장했다. 노스이스트 고등학교와 캔자스시티 폴리테크닉 연구소(현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컬리지)를 거쳐 1918년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1922년 졸업반 4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 육군 공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초기에는 하와이에서 공병으로 복무하다가 야전포병으로 병과를 옮겼다. 그는 외국어에 재능을 보여 프랑스어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웨스트포인트에서 언어 강사로 활동했다. 이후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1935년)와 미국 육군 전쟁대학교(1940년) 등 주요 군사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주일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1937년에는 중국에서 무관으로 활동하는 등 외교 및 정보 분야에서도 경험을 쌓았다. 1940년 7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2. 1. 웨스트포인트와 초기 군 경력

1922년 웨스트포인트에서


테일러는 미주리주 키테스빌에서 태어나 캔자스시티에서 성장했다. 노스이스트 고등학교 졸업 후 캔자스시티 폴리테크닉 연구소(현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컬리지)를 다녔다. 1918년 웨스트포인트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1922년 졸업반 4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 육군 공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하와이에서 제3공병대 소속으로 복무했다.

이후 야전포병으로 병과를 옮겨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제10야전포병대에서 근무하며 중위로 진급했다. 외국어에 능숙했던 그는 파리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뒤 웨스트포인트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야전포병학교를 졸업했으며, 1935년에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1935년 8월 대위로 진급한 테일러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도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1937년에는 중국에서 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40년 미국 육군 전쟁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7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40년에는 전쟁계획국(War Plans Division) 참모로 일하며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방위 협력 임무에 참여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제12야전포병연대 제1대대장을 역임했고, 1942년까지 육군참모총장실(Office of the Secretary of the General Staff)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1941년 12월 중령, 1942년 2월 대령, 그리고 1942년 12월 준장으로 임시 승진했다.[2]

2. 2. 외국어 능력과 외교적 역할

테일러는 외국어에 능숙함을 보여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으며, 이후 웨스트포인트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어를 포함하여 총 7개 국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외국어 능력은 그의 초기 경력에서 외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주일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주일 미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신분으로 중국 베이징에 출장 중이었다. 그는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우연히 일본군 병사들의 대화를 듣고 그들의 방언 차이를 통해 일본 본토(내지)에서 3개 사단이 추가로 파병되었다는 중요한 군사 정보를 파악했다.[32] 이는 그의 뛰어난 언어 능력과 관찰력이 정보 수집 및 분석에 기여한 사례로 볼 수 있다.

3. 제2차 세계 대전

테일러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매슈 리지웨이 장군 휘하의 제82공수사단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43년, 그는 뛰어난 외교 및 언어 능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비밀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임무는 새로운 이탈리아 총리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만나 제82공수사단과 이탈리아군의 합동 작전을 조율하는 것이었으나, 독일군의 선점으로 인해 실행 직전 취소되었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테일러가 감수한 위험을 높이 평가했다.[33]

지중해 전역 이후, 테일러는 영국에서 훈련 중이던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초대 사단장 윌리엄 C. 리 소장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의 조치였다. 테일러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일, 부하들과 함께 노르망디에 강하하여 D-데이에 프랑스 땅을 밟은 최초의 연합군 장성이 되었다.

그는 종전까지 제101공수사단을 지휘했지만, 사단이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벌지 전투의 바스토뉴 방어전에는 참모 회의 참석차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의 부재 중에는 앤서니 매컬리프 장군이 사단을 지휘했다. 이 일로 일부 부대원들은 테일러에게 불만을 품기도 했다. 테일러는 바스토뉴 방어전을 제101공수사단의 "가장 훌륭한 순간"으로 평가하며, 당시 현장에 없었던 것을 전쟁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술회했다.[34]

3. 1.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전역

1942년 7월, 테일러는 82보병사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10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이 시기 사단은 제82공수사단으로 개편되었다. 11월에는 82공수사단 포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준장으로 임시 승진했다.[2] 이 직책을 맡아 그는 시칠리아 상륙 작전과 이탈리아 전역에 참전했다.

1943년 여름 후반, 이탈리아 침공 계획 수립 과정에서 테일러의 외교 및 언어 능력이 주목받아 로마로 비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임무는 이탈리아군과 제82공수사단의 공수 작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당시 지중해 작전 지역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훗날 "그가 감수한 위험은 전쟁 중 내가 다른 어떤 특사에게도 요구한 것보다 더 컸다"고 평가했다.[3][33]

테일러는 전선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적진에서 활동해야 했으므로, 포로로 잡혔을 경우 스파이로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전 규칙에 따라 미군 군복을 착용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총리였던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와 이탈리아 군사 정보 기관인 Servizio Informazioni Militare|세르비시오 인포르마치오니 밀리타레ita의 책임자였던 자코모 카르보니 장군을 만났다. 테일러는 독일군이 이미 예정된 공수 투하 지점을 장악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에 따라 로마 점령을 위한 공수 작전은 실행 직전에 취소되었다. 수송기는 이미 이륙하여 비행 중이었으나 테일러의 보고로 강하 작전은 중단되었다. 적진에서의 이러한 활약은 연합군 최고 지휘부의 주목을 받게 만들었다.

3. 2. 제101공수사단장

지중해 전역 이후, 테일러는 "The Screaming Eagleseng"라는 별명을 가진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준비하며 영국에서 훈련 중이었고, 초대 사단장인 윌리엄 리 소장이 심장마비를 겪은 후였다. 테일러는 1944년 5월 임시로 소장으로 진급했다.[2]

1944년 6월 12일 프랑스 카랑탕(Carentan)에서의 전투 공로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으로부터 수훈 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받는 테일러(사진 왼쪽)


테일러는 1944년 6월 6일(일반적으로 D-데이로 알려짐) 노르망디 공수 작전에 참여하여 D-데이에 프랑스에 상륙한 최초의 연합군 장성이 되었다. 그는 이후 노르망디 전투에서 제101공수사단을 지휘하며 6월 13일 카랑탕 전투에서의 카랑탕 점령 작전을 포함한 전투를 수행했고, 사단은 일반 보병으로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제101공수사단은 거의 한 달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전투를 치른 후 6월 말 전선에서 철수했고, 4,6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후 7월 초 영국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재정비를 하며 병력을 보충했다.

전력을 회복한 테일러는 1944년 9월 네덜란드에서 마켓 가든 작전에서 제101공수사단을 이끌었다. 그는 미국에서 참모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지 전투의 바스토뉴 포위전에서 사단의 작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제101공수사단 포병대 사령관인 앤서니 맥컬리프 준장이 그의 부재 중 지휘를 맡았다. 테일러는 바스토뉴 방어를 제101공수사단의 전쟁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언급했으며, 그의 부재는 전쟁 중 그의 가장 큰 실망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4] 바스토뉴 이후, 테일러의 제101공수사단은 전쟁에서 더 이상 큰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1945년 말 미국으로 보내져 11월에 해체되었다.

3. 3.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마켓 가든 작전

지중해 전역 이후, 테일러는 "스크리밍 이글스(The Screaming Eagles)"라는 별명을 가진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준비하며 영국에서 훈련 중이었고, 초대 사단장인 윌리엄 리(William Lee) 소장이 심장마비를 겪은 후였다. 테일러는 1944년 5월 임시로 소장으로 진급했다.[2]

테일러는 1944년 6월 6일(일반적으로 D-데이로 알려짐) 노르망디 공수 작전에 직접 참여하여 D-데이에 프랑스 땅을 밟은 최초의 연합군 장성이 되었다. 그는 이후 노르망디 전투에서 제101공수사단을 지휘하며, 6월 13일 카랑탕 전투에서의 카랑탕 점령 작전을 포함한 여러 전투를 수행했다. 이후 사단은 일반 보병 부대로서 전투를 지속했다. 제101공수사단은 거의 한 달 동안 끊임없이 전투를 치른 후 6월 말 전선에서 철수했고, 4,6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뒤 7월 초 영국으로 돌아와 휴식과 재정비를 거치며 병력을 보충했다.

전력을 회복한 테일러는 1944년 9월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마켓 가든 작전에서 제101공수사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참모 회의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이후 벌지 전투 중 벌어진 바스토뉴 포위전에서는 사단을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그의 부재 중에는 제101공수사단 포병대 사령관인 앤서니 맥컬리프 준장이 지휘를 맡았다. 테일러는 바스토뉴 방어전을 제101공수사단의 전쟁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평가했으며, 당시 현장에 있지 못했던 것을 전쟁 중 가장 큰 아쉬움으로 여겼다고 말했다.[4][34] 바스토뉴 전투 이후, 테일러의 제101공수사단은 전쟁에서 더 이상 큰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1945년 말 미국으로 복귀하여 11월에 해체되었다.

3. 4. 벌지 전투 부재와 논란

테일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101공수사단을 지휘했지만, 사단이 참여했던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벌지 전투바스토뉴 방어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미국 본토에서 열린 참모 회의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 중에는 안토니 매코리프 장군이 사단을 대신 지휘했다. 이 일로 인해 일부 낙하산 부대원들은 테일러에게 분개하기도 했다. 테일러 장군은 훗날 바스토뉴에서의 제101공수사단의 방어전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훌륭한 순간"이었다고 평가하며, 당시 자신이 현장에 없었던 것을 전쟁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밝혔다.[34]

4. 전후 활동 및 한국 전쟁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테일러는 1945년부터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장[5][6][7], 1949년부터 베를린 주둔 연합군 사령관[10]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1951년 7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펜타곤에서 미국 육군 작전 및 행정 부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6월, 그는 한국 전쟁의 마지막 전투 작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으로 파병되었다. 정전 이후에는 잠시 일본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근무하며 미국의 일본 점령 마무리와 주한 미군 철수 과정을 감독하기도 했다.

4. 1. 웨스트포인트 교장 및 베를린 주둔

1945년 9월 4일, 테일러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교장(Superintendent)으로 임명되었다.[5][6][7]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재직하는 동안인 1947년에 최초의 공식적인 사관생도 명예 규정(Honor Code) 간행물을 작성하여, 문서화된 "사관생도 명예 규정(Cadet Honor Code)"의 시작을 알렸다.[8][35] 테일러는 1949년 1월 28일까지 교장직을 수행했으며, 후임으로는 브라이언트 무어가 임명되었다.[9]

이후 테일러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베를린 주둔 연합군 사령관을 역임했다.[35] 그는 베를린을 떠날 때, 훗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de"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기 10여 년 전에 이미 자신을 "베를리너"라고 느꼈다고 술회했다.[10] 1951년 7월, 그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펜타곤에서 미국 육군 작전 및 행정 부참모총장(U.S. Army Deputy Chief of Staff for Operations and Administration)으로 임명되었다.

4. 2. 한국 전쟁 참전과 제8미군 사령관

1953년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 전쟁의 마지막 전투들을 지휘했다.

5. 육군참모총장과 "뉴룩" 정책 비판

1953년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테일러는 1955년 매슈 B. 리지웨이 육군 대장의 뒤를 이어 미국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1959년까지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핵무기 시대에 맞춰 보병 사단을 재편성하여 육군 전력을 조정하고자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데이비드 핵워스 대령과 같은 일부 군 관계자들로부터 소령급 장교들의 역할을 축소하고 이후 베트남에서의 전투 적응력을 저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57년, 테일러는 리틀록 고등학교 사건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로 제101 공수사단 병력 1,000명을 아칸소주 리틀록에 파견하여,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미국 연방법원의 명령 집행을 지휘했다.

미국 육군참모총장 재임 중 테일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 국방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정책이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재래식 전력을 소홀히 한다고 보았으며, 통합참모본부 시스템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의 비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테일러는 1959년 7월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듬해인 1960년 1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저서 『불확실한 나팔(The Uncertain Trumpeteng)』을 출간하여 논쟁을 이어갔다.

5. 1. "뉴룩" 정책과의 갈등

미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던 시기(1955년~1959년), 테일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 정책인 "뉴룩"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뉴룩" 정책이 핵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재래식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통합참모본부 시스템의 문제점도 함께 제기했다.

테일러의 이러한 비판과 문제 제기는 당시 행정부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1959년 7월 현역에서 은퇴했다. 군복을 벗은 후에도 테일러는 공개적으로 "뉴룩" 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1960년 1월에는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담은 저서 『불확실한 나팔(The Uncertain Trumpeteng)』을 출판하여 정책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5. 2. "유연 대응" 전략 주장

미국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테일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 정책인 "뉴룩"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뉴룩" 정책이 핵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재래식 전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통합참모본부 시스템의 결함도 지적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핵무기뿐만 아니라 재래식 전력 등 다양한 군사적 수단을 활용하여 여러 위협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비판과 지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테일러는 1959년 7월 현역에서 은퇴했다. 예편 후 그는 공개적으로 "뉴룩"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시작했고, 1960년 1월에는 매우 비판적인 내용의 저서인 『불확실한 나팔(The Uncertain Trumpet)』을 출판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욱 구체화했다.

5. 3. 은퇴와 "불확실한 나팔" 출간

미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테일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 정책인 "뉴룩"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뉴룩" 정책이 핵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재래식 전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 시스템의 결함도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비판과 지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테일러는 1959년 7월 현역에서 은퇴했다. 예편 후 그는 공개적으로 "뉴룩"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시작했고, 1960년 1월에는 매우 비판적인 내용의 저서인 ''불확실한 나팔''(The Uncertain Trumpeteng)을 출판했다.

6. 케네디 행정부와 현역 복귀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F. 케네디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 정책을 비판하며, 테일러가 그의 저서 『The Uncertain Trumpet|불확실한 나팔eng』에서 주장한 강력한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eng) 정책을 지지했다. 케네디는 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196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케네디 대통령은 테일러를 피그스만 침공 특별 조사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며 그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케네디 가문과의 깊은 신뢰 관계 및 기존 합동참모본부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을 바탕으로, 케네디는 테일러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대통령의 군사 고문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겼다. 이로써 테일러는 사실상 대통령의 최고 군사 자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역할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1962년 10월 1일, 케네디 대통령은 테일러를 제5대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공식 임명했으며, 테일러는 1964년까지 이 직책을 역임했다.

6. 1. 케네디 대통령과의 인연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F. 케네디는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 정책을 비판하며, 테일러가 그의 저서 『불확실한 나팔』(The Uncertain Trumpeteng)에서 주장한 강력한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eng) 정책을 지지했다. 케네디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196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케네디 대통령은 군사적 자문이 부족했다고 판단하고 테일러를 피그스만 침공 특별 조사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1961년 4월부터 5월까지 6주 동안 활동하며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테일러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와 함께 일하며 깊은 우정을 쌓았다. 테일러는 로버트 케네디의 진실 추구 자세와 정확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로버트 케네디 역시 테일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매슈 맥스웰 테일러 케네디(Matthew Maxwell Taylor Kennedyeng)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조사가 끝난 후, 케네디 가문은 테일러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반면 케네디 대통령은 기존 합동참모본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케네디 대통령은 테일러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대통령의 군사 문제 특별 보좌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겼다. 테일러는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넘어서는 사실상의 최고 군사 고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역할로 인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1일 테일러를 제5대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공식 임명했다. 테일러는 1964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6. 2. 군사 고문 및 합동참모본부 의장 임명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F. 케네디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 정책을 비판하며 테일러가 그의 저서 The Uncertain Trumpet|불확실한 나팔eng에서 주장한 '유연한 대응'(flexible response|유연한 대응eng) 정책을 지지했다. 케네디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196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1년 4월, 미국이 지원한 쿠바 망명자들의 피그스 만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케네디 대통령은 기존 군사 자문 체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시 예비역이었던 테일러를 임명했다.

테일러는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모두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 피그스만 침공 특별 조사 위원회는 1961년 4월부터 5월까지 약 6주간 활동하며 사건의 진상을 규명했다. 이 과정에서 테일러는 로버트 케네디와 긴밀히 협력하며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테일러는 로버트 케네디의 진실을 추구하는 단호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으며, 로버트 케네디 역시 테일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매슈 맥스웰 테일러 케네디(Matthew Maxwell Taylor Kennedy)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조사가 끝난 후, 케네디 가문의 두터운 신임과 기존 합동참모본부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이 맞물려, 케네디는 테일러를 현역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했다. 테일러는 대통령의 군사 고문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아, 공식적인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넘어서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역할로 인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1일 테일러를 정식으로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임명했다. 테일러는 1964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며 케네디 행정부의 군사 정책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7. 베트남 전쟁 개입과 역할

베트남 전쟁 초기, 테일러는 미국의 대(對)베트남 정책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 문제에 대해 "남베트남의 독립은 그 나라 국민과 정부의 책임이다"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으나, 테일러는 미군 전투 병력 8,000명의 파병을 건의하며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파병 결정에 대해 대통령이 사실상 유일한 반대자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36]

또한 테일러는 1963년 남베트남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실각한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후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자, 1964년 주남베트남 미국 대사로 부임하여 현지 상황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다. 대사 시절 그는 당시 군부 실력자였던 응우옌카인 장군과 자주 충돌하며 갈등을 겪었다.

7. 1. 초기 개입 확대 주장

베트남 전쟁 초기,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테일러에게 "남베트남의 독립은 그 나라 국민과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강조하며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테일러는 이러한 입장과 달리, 곧바로 미군 전투 병력 8,000명의 파병을 건의하며 적극적인 군사 개입 확대를 주장했다. 그는 내각과 합참에 보고서를 제출하며 남베트남에 대한 미군 파병 결정을 압박했다.

테일러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반대자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한 명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이것이 옳은 행위였다는 것을 납득하고 싶어하지 않았다…육군 지상군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정말 대통령의 개인적인 신념이었다.[36]


이처럼 테일러는 케네디 행정부 내에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강력히 주장하는 매파적 입장을 대변했다.

이후 테일러는 1963년 남베트남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실각한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응오딘지엠 정권 붕괴 이후 남베트남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단명하는 임시 정부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테일러는 1964년 남베트남 대사로 부임했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응우옌카인 장군과 자주 충돌하며 남베트남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7. 2. 응오딘지엠 정권 지지와 쿠데타 반대

베트남 전쟁 초기, 케네디 대통령은 테일러에게 남베트남의 독립 문제는 해당 국가 국민과 정부의 책임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하지만 테일러는 곧 8,000명의 미군 실전 부대 파병을 건의하며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테일러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파병에 반대한 인물로 케네디 대통령을 지목했고, 대통령이 지상군 투입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언급했다.[36]

테일러는 1963년 남베트남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실각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 붕괴 이후 남베트남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여러 단명한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테일러는 1964년 남베트남 대사로 부임한 이후, 당시 군부 실력자였던 응웬카인 장군과 자주 의견 충돌을 빚었다.

7. 3. 주남베트남 대사 임명과 역할

베트남 전쟁 초기, 케네디 대통령은 테일러에게 "남베트남의 독립은 그 나라 국민과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말하며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 확대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테일러는 곧 8,000명의 미군 실전 부대 파병을 건의하며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다. 그는 내각과 합참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관여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었다. 테일러는 당시를 회고하며 지상군 투입에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 대통령 본인이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가 케네디 대통령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36]

테일러는 1963년 남베트남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실각하고 살해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쿠데타 이후 남베트남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여러 단명한 임시 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64년, 테일러는 주남베트남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남베트남의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고 미국의 군사 작전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남베트남 군부의 실권자였던 응우옌카인 장군과 정책 방향 및 군사 작전 등을 놓고 자주 충돌하며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은 남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8. 베트남전 이후 활동과 사망

1964년 7월 1일, 합동참모의장직을 얼 휠러(Earle Wheeler) 장군에게 넘겨주고 다시 군에서 은퇴했다. 이후 1964년부터 1965년까지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Henry Cabot Lodge Jr.)의 후임으로 베트남 공화국 대사를 지내며 베트남 전쟁의 확전에 관여했다. 1965년에는 잠시 국방부에서 "대테러작전 특별고문(SACSA)"으로 활동했으며,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통령 특별고문과 대통령 외교정보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국방분석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루게릭병)을 앓았으며, 마지막 세 달 동안 워싱턴 D.C.의 월터 리드 육군 의료 센터에서 지내다가 1987년 4월 19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30]

9. 비판과 논란

맥스웰 테일러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특히 베트남 전쟁 개입 확대 과정에서의 역할과 결정은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결정은 합동참모본부와의 관계 악화 및 군사적 의사결정 과정의 왜곡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9. 1. 베트남 전쟁 개입 확대에 대한 비판

테일러는 이후 미 육군 중장이자 국가안보보좌관이 되는 H. R. 맥마스터의 1997년 저서 『의무 태만(Dereliction of Duty)』에서 강하게 비판받았다. 특히, 테일러가 합참의장들의 견해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의도적으로 잘못 전달하고, 합참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9]

당시 합참의장들은 군사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와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반면 테일러는 합참의장이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을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의 개입 방식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국방부의 민간 관료들은 미국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북베트남에 대한 압력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점진적 압력' 전략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나 합참의장들은 이에 반대하며,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다면 명확한 승리를 목표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마스터는 테일러가 합참의장들의 의견이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정치적 수단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맥나마라가 베트남 관련 의사결정 과정을 주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테일러는 톰 릭스의 2012년 저서 『장군들(The Generals)』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릭스는 "맥스웰 테일러는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장군일 것이다. 1950년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그는 미군이 '소규모 전쟁'에 개입하도록 이끌었다. 1960년대 초 백악관 군사 고문으로서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심화하도록 부추겼다. 합참의장으로서 그는 군과 민간 지도부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는 또한 베트남 전쟁 지휘관으로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선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9. 2. 합동참모본부와의 관계 및 의사 결정 과정 논란

허버트 맥마스터 소령(이후 중장,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은 그의 1997년 저서 Dereliction of Dutyeng(직무유기)에서 테일러를 강하게 비판했다. 맥매스터는 테일러가 합동참모본부 의장들의 견해를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의도적으로 부정확하게 전달했으며, 합참을 베트남 전쟁 관련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했다고 주장했다.[29][37]

이러한 논란의 배경에는 합참의 역할에 대한 테일러와 합참 의장들 간의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있었다. 합참 의장들은 군사 문제에 대해 객관적이고 편향되지 않은 평가와 권고를 제공하는 것이 자신들의 핵심 의무라고 생각했다. 반면, 테일러는 합참의장이 단순히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 그 결정의 진정한 신봉자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의 개입 수준과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에 명확히 드러났다.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미국 국방부의 민간 관료들은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군사적 압력을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점진적 압력' 전략을 선호했다. 그러나 합참 의장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들은 미국이 베트남에 더 깊이 개입하기로 결정한다면, 명확한 승리를 목표로 설정하고 초기부터 압도적인 군사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매스터는 테일러가 합참의 이러한 의견이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치적 수단을 동원했으며, 때로는 노골적인 속임수까지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테일러의 이러한 행동은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베트남 관련 의사결정 과정을 체계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맥매스터는 평가했다.[29][37]

10. 수상 내역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을 포함한 군 복무 기간 동안 세운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및 여러 외국 정부로부터 다수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10. 1. 미국 훈장 및 표창


  • 기본 낙하산 훈장 2개의 청동색 점프 스타
  • 수훈십자장
  • 육군 수훈 복무 훈장 3개의 참나무잎
  • 은성훈장 1개의 참나무잎
  • 공로훈장
  • 동성훈장
  • 퍼플 하트
  • 대통령 부대 표창 1개의 참나무잎
  • 제1차 세계 대전 승리 훈장
  • 미국 방위 복무 훈장 "해외 근무" 클래스프
  • 미국 전역 훈장
  • 유럽-아프리카-중동 전역 훈장 화살촉 및 6개의 종군 성장
  •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훈장
  • 점령군 훈장
  • 국방 근무 훈장 청동 종군 성장
  • 한국 근무 훈장 2개의 종군 성장

10. 2. 외국 훈장 및 표창

훈장명원문명수여 국가/기관
필리핀 공훈훈장 최고 사령관 등급Philippine Legion of Honor, Chief Commander영어필리핀
운남운기훈장 대수장Order of the Cloud and Banner, Grand Cordon영어중화민국
에티오피아 성삼위일체 훈장 대수장Order of the Holy Trinity, Grand Cordon영어에티오피아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관Order of Leopold, Grand Officer영어벨기에
크라운 훈장 대십자관 및 종려장Order of the Crown, Grand Officer with palm영어벨기에
보야카 훈장 대십자관Order of Boyaca, Grand Officer영어콜롬비아
목욕 훈장 컴패니언Order of the Bath, Companion영어영국
대영제국 훈장 기사 사령관Order of the British Empire, Knight Commander영어영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Legion of Honor, Commander영어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Legion of Honor, Knight영어프랑스
조지 1세 훈장 컴맨더Order of George I, Commander영어그리스
특출근무훈장 컴패니언Distinguished Service Order, Companion영어영국
끄루아 드 게르 및 종려장Croix de Guerre avec palme프랑스어프랑스
국가안보공훈훈장 2등급 (국선장) 및 별 2개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 2nd class with two stars영어대한민국
이탈리아 공화국 공훈훈장 콤멘다토레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 Commendatoreit이탈리아
브라질 군공훈장 코멘다도르Ordem do Mérito Militar, Comendadorpt브라질
유엔 한국 훈장United Nations Korea Medal영어UN



(테일러 장군은 이 외에도 여러 외국 훈장을 받았다.)

11. 계급

wikitext

계급장 없음사관생도 (미국 육군사관학교): 1918년 11월 6일
미국 육군 소위 계급장
소위, 정규군: 1922년 6월 13일
미국 육군 중위 계급장
중위, 정규군: 1927년 2월 13일
미국 육군 대위 계급장
대위, 정규군: 1935년 8월 1일
미국 육군 소령 계급장
소령, 정규군: 1940년 7월 1일
미국 육군 중령 계급장
중령, 미국 육군: 1941년 12월 24일
미국 육군 대령 계급장
대령, 미국 육군: 1942년 2월 1일
미국 육군 준장 계급장
준장, 미국 육군: 1942년 12월 4일
미국 육군 소장 계급장
소장, 미국 육군: 1944년 5월 31일
--중령, 정규군: 1945년 6월 13일
--준장, 정규군: 1948년 1월 24일
(이후 1944년 6월 27일로 변경됨)
--소장, 정규군: 1951년 7월 29일
미국 육군 중장 계급장
중장, 미국 육군: 1951년 8월 3일
--대장, 미국 육군: 1953년 6월 23일
--대장, 정규군, 예편 명단: 1959년 7월 1일
--대장, 현역 예편: 1962년 10월 1일
--대장, 정규군, 예편 명단: 1964년 7월 1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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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Biographical register of the officers and graduates of the U.S. Military Academy at West Point, New York since its establishment in 1802: Supplement, 1940–1950 https://digital-libr[...] The Association of Graduates, U.S. Military Academy 2024-11-02
[3] 뉴스 Maxwell D. Taylor, Soldier and Envoy, Dies https://www.nytimes.[...] 2022-12-16
[4] 간행물 An American Soldier: the Wars of General Maxwell Taylor – Book Review http://findarticles.[...] Infantry Magazine 2003-09-01
[5] 뉴스 West Point Salutes Taylor as New Chief https://www.nytimes.[...] 1945-09-04
[6] 보도자료 West Point Changes Commanders 1945-09-05
[7] 뉴스 Gen. Maxwell Taylor Will Head West Point https://www.nytimes.[...] 194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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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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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뉴스 Coup collapses in Saigon; Khanh forces in power; U.S. pledges full support 1964-09-14
[27] 잡지 South Viet Nam: Continued Progress 1964-09-18
[28] 서적
[29] 서적 Dereliction of duty: Lyndon Johnson, Robert McNamara,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the lies that led to Vietnam https://books.google[...] HarperPerennial 2010-09-25
[30] 웹사이트 Arlington National Cemetery https://ancexplorer.[...]
[31] 웹사이트 Casting Band of Brothers http://www.dday-over[...]
[32] 서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草思社
[33] 뉴스 Maxwell D. Taylor, Soldier and Envoy, Dies http://www.nytimes.c[...] 2009-04-22
[34] 간행물 An American Soldier: the Wars of General Maxwell Taylor - Book Review http://findarticles.[...] Infantry Magazine 2003
[35] 웹사이트 West Point http://www.usma.edu/[...]
[36] 서적 Robert Kennedy: His Life and Times
[37] 서적 Dereliction of D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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