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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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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인엽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메이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항공학교와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등을 거쳐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수도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활약했고, 1950년에는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육군 제1, 6군단 군단장 등을 지내고, 1960년 부정축재 혐의로 전역했다. 백인엽은 선인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했으나, 학원 운영 과정에서 각종 비리와 부정행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1993년 선인학원을 시립으로 전환하는 조건으로 설립자 권한을 기증했고, 201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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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함상에서 작전 명령을 전달하는 육군 제17연대장 시절의 백인엽 육군 대령.
이름백인엽
한자 표기白仁燁
로마자 표기Paik In-yup
별명운봉(雲峰)
출생일1923년 2월 18일
사망일2013년 12월 14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사망지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본관수원(水原)
종교개신교
정당무소속
부모백윤상(부), 방효열(모)
배우자주광숙
자녀슬하 2남 1녀(그 중 맏딸 백남옥)
친척백복엽(누나)
백선엽(형)
백낙순(친조부)
방흥주(외조부)
주문숙(이복 처형)
유기석(이복 윗동서)
백희엽(사촌 누나)
백동엽(사촌 남동생)
군 복무
소속
복무 기간1944 - 1945 (일본 육군)
1946 - 1960 (한국 육군)
최종 계급육군 소위 (일본 육군)
육군 중장 (한국 육군)
근무육군본부
지휘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 국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경력
기타 이력선인학원 이사장
인하대 행정학과 초빙교수
웹사이트

2. 초기 생애 및 교육

白仁燁|백인엽중국어은 1923년[2]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에서 아버지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 사이에서 태어났다. 누나 백복엽(白福燁)과 형 백선엽[3]이 있었다. 인근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중규모 지주 가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와 세 자녀는 평양으로 이주했다.[4] 어머니와 누나가 일하여 가계가 안정되면서 백선엽과 白仁燁|백인엽중국어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5]

백인엽은 평안남도 강서 약송소학교,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교 경제학과(1943년), 일본 도쿄 육군항공학교(1945년)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 1기(1946년)로 졸업하고, 통위부 보병학교(1947년), 미국 육군보병학교(1949년), 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1950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1951년), 미국 육군참모대학교(1953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1기(1956년)를 졸업하였다.

2. 1. 출생 및 가계

白仁燁|백인엽중국어은 1923년[2]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에서 아버지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 사이에서 태어났다. 누나 백복엽(白福燁)과 형 백선엽[3]이 있다. 인근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중규모 지주 가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와 세 자녀는 평양으로 이주했다.[4] 어머니와 누나가 일하여 가계가 안정되면서 백선엽과 白仁燁|백인엽중국어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5]

백인엽 가계


2. 2. 학력

3. 군 경력

백인엽은 메이지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일본군 육군 소위(항공병과)가 되어 기후육군항공정비학교에서 근무하다 종전을 맞이했다.[2] 1946년 1월 22일 군사영어학교[8]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참위(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군번은 10023번이었다.

이후 여수·순천 사건 진압 작전에 참여했고,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옹진반도[10]를 경비하는 육군 제17보병연대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옹진반도 전투, 부산교두보 전투, 인천 상륙 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특히 기계·안강 전투에서 북한군 제12사단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인천 상륙 작전에서는 육군 제17보병연대를 이끌고 서울 수복에 기여했다.

전쟁 중 육군 준장,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육군본부 정보국장, 제1훈련소 소장, 제6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국방부 부참모장, 육군본부 기획참모부 부장, 제1군단장, 제6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6월, 부정축재 혐의로 전역했다.

주요 복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간내용
1950년 8월육군 수도보병사단 사단장
1950년 10월육군 준장 진급,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
1951년 1월육군 제1훈련소 소장
1952년 1월육군 제6보병사단 사단장
1952년 11월육군 소장 진급
1954년 6월육군 제9보병사단 사단장
1955년 5월육군 제2훈련소 소장
1955년 9월육군 중장 진급, 대한민국 국방부 부참모장
1955년 12월육군본부 기획참모부 부장
1956년 4월육군 제1군단장
1956년 9월육군 제6군단장
1959년 2월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부장
1959년 8월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 국장
1960년 6월전역 (부정축재 혐의)


3. 1. 일제강점기 군 복무

메이지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일본군 육군 소위(항공병과)가 되어 기후육군항공정비학교에서 근무하다 종전을 맞이했다.[2]

3. 2. 대한민국 국군 복무

1946년 1월 22일 군사영어학교[8]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참위(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군번은 10023번이었다. 임관 후 제1연대에서 근무하다가 제4연대(광주) D중대장을 역임했다.

1947년 3월에는 제4연대 제2대대장으로 소좌로 진급했다.

1948년 5월 5일, 육군 내에 항공부대가 창설되면서 초대 부대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최용덕, 김정렬, 장덕창, 이영무, 박범집, 이근석, 김영환 등 공군 창설 요원들이 자신보다 경력과 나이가 훨씬 선배임을 알고 수 주 만에 부대장직을 사퇴했다.[9]

1948년 8월에는 제12연대(군산) 부연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19일부터 발생한 여수·순천 사건 진압 작전에 제12연대 제2대대, 제3대대를 이끌고 참여했다.

1948년 11월 20일, 신설된 육군 제17보병연대 초대 연대장에 취임했다. 1949년 11월 15일에는 국경 분쟁이 잦았던 옹진반도[10]로 이동했고, 이후 대좌로 진급했다. 1950년 3월부터 제17연대는 옹진 지역을 경비하는 육군본부 직할 독립 연대 전투단이 되었다.

서울 북서쪽 옹진반도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 반도 기저부에 38선이 지나 한국 측에서는 섬과 같은 비지였다. 인천에서 해로로 연락하는 데는 10노트의 LST로 6시간이 걸렸다.[4]

제17연대는 보병 세 개 대대, 포병 한 개 대대(제7포병대대)를 중심으로 42km의 경비 전선을 담당했다. 개전 직전인 1950년 6월 22일경부터 국경선 북한군의 수송이 활발해지고 상당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여 육군본부에 보고하고, 일선 부대에 경계령을 발령했다. 6월 23일에도 같은 상황이 이어졌고, 6월 24일에는 대규모 불법 침입으로 판단했다. 옹진 지역의 당초 계획은 적의 대규모 공격 시 즉시 인천으로 후퇴하는 것이었지만, 미군 고문은 낙관적이었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의 후퇴는 불가능했으며, 결과적으로 후퇴 시기를 놓쳤다.[11]

이후의 주요 복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간내용
1950년 8월육군 수도보병사단 사단장
1950년 10월육군 준장 진급,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
1951년 1월육군 제1훈련소 소장
1952년 1월육군 제6보병사단 사단장
1952년 11월육군 소장 진급
1954년 6월육군 제9보병사단 사단장
1955년 5월육군 제2훈련소 소장
1955년 9월육군 중장 진급, 대한민국 국방부 부참모장
1955년 12월육군본부 기획참모부 부장
1956년 4월육군 제1군단 군단장
1956년 9월육군 제6군단 군단장
1959년 2월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부장
1959년 8월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 국장
1960년 6월전역 (부정축재 혐의)


3. 3. 한국 전쟁 참전

백인엽은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1946년 1월 22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8]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여수·순천 사건 진압에 참여했고, 1949년 11월 15일에는 국경 분쟁이 빈번했던 옹진반도[10]로 이동하여 제17연대를 이끌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전, 제17연대는 옹진 지역을 경비하는 육군본부 직할 독립 연대 전투단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백인엽 대령이 이끄는 제17연대는 옹진반도 전투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1950년 7월 3일, 우산 전투에서 미군기의 오폭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회복 후 수도사단장으로 부산교두보 전투에 참전, 기계·안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에 참여하여 서울 수복에 기여했다.

1950년 10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장 겸 특무부장, 준장으로 임명되었고,[13] 1951년에는 제주도 제1훈련소장,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1월 10일에는 제2군단 제6사단장에 임명되었다.[14][15]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3. 3. 1. 옹진반도 전투

1948년 11월 20일, 신설된 육군 제17보병연대(시흥) 초대 연대장에 취임했다. 1949년 11월 15일, 국경 분쟁이 빈번했던 옹진반도[10]로 이동했다. 1950년 3월부터 제17연대는 옹진 지역을 경비하는 육군본부 직할 독립 연대 전투단이 되었다.

서울 북서쪽 옹진반도는 지형적으로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고, 반도 기저부에 38선이 지나갔기 때문에 한국 측에서는 옹진 지역이 섬과 같은 비지가 되었고, 인천에서 해로로 연락하는 데는 10노트의 LST로 6시간이 걸렸다.[4]

제17연대는 보병 세 개 대대, 포병 한 개 대대(제7포병대대)를 중심으로 42km의 경비 전선을 담당했다. 제17연대에서는 개전 직전인 1950년 6월 22일경부터 국경선 북한군의 수송이 활발해지고 상당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여 육군본부에 보고하고, 일선 부대에 경계령이 발령되었다. 6월 23일에도 마찬가지였고, 6월 24일에는 대규모 불법 침입으로 판단했다. 옹진 지역의 당초 계획은 적의 대규모 공격 시 즉시 인천으로 후퇴하는 것이었지만, 미군 고문은 낙관적이었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의 후퇴는 불가능했으며, 결과적으로 후퇴 시기를 놓쳤다.[11]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14연대와 38경비 제3여단은 전차 8량을 포함한 총 1만 명의 병력으로 제17연대(2,700명)를 공격했다. 제17연대는 북한군과 피의 옹진 전투라 불리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연대에 있던 미군 고문 5명은 오전 9시경부터 연락기로 순차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육군 본부로부터 후퇴 명령이 내려왔고, 6월 26일 낮 무렵 제17연대는 LST 2척과 소형 여객선 2척으로 철수했다. 백선엽과 그의 부하 2명은 옹진에 남아 폐기된 자군의 차량과 포 등을 파괴했다. 백선엽은 태평양에서 전사한 일본군 장병들을 본받아 자결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그만두고 해상으로 탈출하여 해군의 구잠정에 구출되었다. 6월 28일, 제17연대는 대전에서 재편성되었다.

3. 3. 2. 부산교두보 전투

1950년 8월 7일 김석원의 뒤를 이어 수도사단장에 취임하였다.[12] 부산교두보 전투에서 동부 전선 방어를 담당했고, 기계·안강 전투에서 북한군 제12사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12] 이 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은 적의 박격포에 왼손을 부상당했지만,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여 개전 이래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12]

3. 3. 3. 인천상륙작전

인천 상륙 작전이 임박하자 한국군은 상륙부대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미군은 "가장 용감한 지휘관"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이에 백선엽과 신현준(해병 제1연대)이 선정되었다. 백선엽은 9월 2일 부산으로 돌아와 제17연대의 재건을 명령받았다. 제17연대는 미 제10군단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 수복에 참가했다.[12] 9월 27일, 제17연대는 서울에 입성하여 한국군 최초로 서울을 수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2] 앨먼드 군단장은 백선엽에게 은성장을, 장병 12명에게 동성장을 수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백선엽에게 태극무공훈장을, 부대에는 표창을 수여하며 그 공을 치하했다.[12]

3. 3. 4. 기타 주요 작전

1952년 6월, 중공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공세 조짐이 보이자, 미 제8군은 전선의 16개 사단에 "포로를 확보하라. 한 명을 잡을 때마다 백만 의 상금을 지급한다"는 이례적인 명령을 내렸다.[16] 그러나 포로를 잡는 데 많은 희생을 치르거나, 오히려 중공군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백인엽 사단장은 백군단장에게 포로 확보 공격 계획을 건의했다. 군단장의 승인을 받은 백 사단장은 제2연대 제2중대, 제7중대와 혼성중대 및 정찰중대를 선발하여 2주 동안 실탄 사격 훈련을 10회 실시했다. 작전 구상은 야간에 은밀히 적진 근처에 잠입하여 새벽녘에 돌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혼성중대는 금성(금성) 남동쪽의 꼽산을, 제2, 제7중대는 A, B 고지라 명명된 금성 동쪽 고지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동시에, 두 고지 중간의 계곡에서 B 고지 후방으로 돌아간 정찰중대가 포위하여 도망치는 적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면 미리 준비한 집중 사격으로 포획하는 계획이었다.[17]

훈련은 백 사단장이 직접 지도했다. 백 군단장도 가끔 조언했지만, 10번째 훈련을 보고 "이 정도면 할 수 있다. 미 제8군의 승인을 받을 테니, 이대로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6월 11일 밤 최전선으로 진출하여 12일 새벽 4시에 돌격을 개시했다. 예상과 달리 적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실수도 있었지만 6시에는 목표 지점인 두 고지를 점령하고 16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4. 교육 사업 및 선인학원 비리

백인엽은 1965년 선인재단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의 운영 방식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인근 주민의 재산을 침해하고 중국인 공동묘지를 훼손하여 외교 문제까지 일으켰으며, 교직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고 학생들을 부정하게 입학시키는 등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20] 이러한 행태로 인해 '인천의 무법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1년, 백인엽은 교육부 감사에서 대규모 부정 편입학과 7.5억 횡령 사실이 적발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석방 후에도 선인학원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제를 일으켰다.

4. 1. 선인재단 설립 및 교육 사업

1965년, 선인(善仁)재단을 설립하고 인천에서 선인학원(현재의 인천대학교)을 설립했다.[20]

백인엽은 선인학원 설립자로, 그의 전횡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근 주민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침해하고, 특히 부지 확장 과정에서 중국인의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버려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또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직원들을 무조건 해고하고,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돈을 받고 부정 입학·편입을 시키고 심지어 졸업장을 팔기까지 하였다. 신문에서는 이러한 백인엽의 활동을 ‘인천의 무법자’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부정 비리가 적발되어 백인엽 이사장은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을 검토하고 구속되었지만, 석방 이후에도 계속 주인 행세를 하면서 배후 조종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범(汎)선인 학원 정상화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학원 정상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는 인천의 시민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1993년 6월, 백인엽은 ‘(인천대학교의 학교 법인인) 선인학원의 공립화를 조건으로, 설립자로서의 권한 일체를 인천직할시장에게 기증한다.’라는 내용의 기증서를 당시 최기선 인천직할시장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선인학원은 운영하던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전문대 등 열 세 곳과 함께 시립으로 전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94년 시립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시립화 이후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학교들은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일부 학교는 학교 명칭이 변경되거나 위치가 이전되기도 하였다. 특히 2013년 인천대학교는 국립대학법인 형태로 국립 인천대학교로 개편되었다.

당시 인천대학교에서 조교로 일했던 이갑용 인천대학교 부총장은 “설립 초기에는 개강하는 날부터 시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수업은 늘 여름방학에 했다.”라며 “대표적인 문제 사학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백인엽은 인천대학교를 설립한 지 2년 만인 1981년 1월, 당시 교육부의 감사에서 2년 동안 선인학원 산하 각급 학교(당시 16개)에 무려 9,900여 명을 불법으로 편·입학시키고, 공금 7.5억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되어 법원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4. 2. 선인학원 비리 및 사회적 물의

설립 초기부터 각종 부정행위를 자행하였다. 1981년에는 공금 횡령 및 부정 편입학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20] 1990년대에는 '범(汎)선인 학원 정상화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고, 1993년 선인학원은 시립화(인천대학교 등)되었다. 2013년에는 인천대학교가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되어 국립 인천대학교가 되었다.

백인엽은 "인천의 무법자"로 불릴 정도로 심각한 비리를 저질렀으며, 그의 행태는 한국 사학 비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받는다. 그는 인근 주민의 재산을 불법 침해하고,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외교 문제까지 일으켰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교직원을 해고하고,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 보초를 서게 했다. 돈을 받고 부정 입학·편입을 시키거나 졸업장을 파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비리로 인해 백인엽은 구속되었지만, 석방 후에도 배후에서 학원을 조종하며 주인 행세를 했다. 이에 1990년대 '범(汎)선인 학원 정상화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학원 정상화를 위한 투쟁을 벌였고, 이는 인천 시민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3년, 백인엽은 선인학원의 공립화를 조건으로 설립자로서의 권한을 최기선 당시 인천직할시장에게 기증하는 내용의 기증서를 전달했다. 이에 따라 선인학원은 시립으로 전환되었고, 1994년 시립화가 완료되었다. 시립화 이후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학교들은 정상적으로 발전했으며, 일부 학교는 명칭 변경이나 위치 이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2013년 인천대학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개편되어 국립 인천대학교로 새롭게 출발했다.

당시 인천대학교에서 조교로 일했던 이갑용 인천대학교 부총장은 "설립 초기에는 개강하는 날부터 시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수업은 늘 여름방학에 했다"라며 "대표적인 문제 사학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백인엽은 1981년 교육부 감사에서 2년 동안 선인학원 산하 학교에 9,900여 명을 불법 편·입학시키고, 공금 7.5억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되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5. 사망

백인엽은 2013년 12월 14일 노환으로 사망했다.[21]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였기에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으나,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1] 유해는 국립묘지가 아닌 천안시의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1]

6.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백윤상1890년 - 1926년
어머니방효열1893년 - 1977년
외조부방흥주185X - 19XX
누나백복엽1917년 - 1990년
백선엽1920년 - 2020년
사촌누나백희엽1916년 - 1995년
배우자주광숙1941년 ~
자녀2남 1녀


참조

[1] 웹사이트 [태극무공훈장]백인엽(白仁燁) 육군 중장 http://kr.blog.yahoo[...] 2011-10-14
[2] 일반텍스트
[3] 서적 朝鮮戦争 (上) (歴史群像シリーズ (60))
[4]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5] 서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6] 일반텍스트
[7] 서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8] 일반텍스트
[9] 서적 항공 징비록 21세기북스
[10] 일반텍스트
[11]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中巻
[12]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13] 웹사이트 [태극무공훈장]백인엽(白仁燁) 육군 중장 http://kr.blog.yahoo[...] 2011-10-14
[14] 웹사이트 [태극무공훈장]백인엽(白仁燁) 육군 중장 http://kr.blog.yahoo[...] 2011-10-14
[15]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1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17]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18] 웹사이트 韓國戰爭史第9巻 對陣末期(1953.1.1~1953.7.27) http://www.imhc.mil.[...] 한국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8-10-16
[19] 웹사이트 [태극무공훈장]백인엽(白仁燁) 육군 중장 http://kr.blog.yahoo[...] 2011-10-14
[20] 웹사이트 백선엽 장군 동생 백인엽 예비역 중장 별세 http://news.khan.co.[...] 2014-09-04
[21] 웹사이트 백선엽 장군 동생 백인엽 예비역 중장 별세 http://news.donga.co[...] 2013-12-25
[22] 일반텍스트
[23] 일반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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