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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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태웅은 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법학자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노터데임 법과대학에서 국제인권법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으나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현재 하와이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재직하며, 유엔 인권이사회의 강제실종 실무그룹 위원 및 의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아시아 인권 공동체를 찾아서' 등이 있으며, 사노맹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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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웅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백태웅 |
로마자 표기 | Baek Taeung |
한자 표기 | 白泰雄 |
출생일 | 1963년 |
출생지 | 파주, 경기도, 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법학 교수 |
경력 | |
주요 활동 | 인권 전문가, 1992년 체포 |
소속 | 하와이 대학교 로스쿨 교수 |
기타 경력 | 유엔 인권 이사회 강제실종 실무그룹 의장 법무법인 원 고문변호사 |
학력 | |
최종 학력 | 노터데임 대학교 법학 박사 |
기타 | |
웹사이트 | 윌리엄 S. 리처드슨 로스쿨 교수진 소개 |
2. 생애
백태웅은 경기도 파주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모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이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노터데임 법과대학에서 국제인권법(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으로 LL.M. 및 JSD 학위를 받았다.[5] 제56차 유엔 인권증진 및 보호 소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의 법률 고문을 역임했으며, 뉴욕의 휴먼 라이츠 워치에서 북한과 남한 모두의 인권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컨설턴트로 활동했다.[5]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6]
1989년 박노해와 함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했다. 국제앰네스티는 백태웅이 사노맹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양심수로 지정했다.[7][8] 1992년 4월 29일,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백태웅이 반국가단체로 간주되는 사노맹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다.[9] 당시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반국가단체란 "대한민국 영토 내 또는 영토 밖에 있는 조직으로서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거나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조직된 지휘·통제 구조를 갖춘 단체 또는 집단"을 의미했다.[10]
1992년 7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백태웅은 법정에서 체포 후 22일 동안 심문을 받고 여러 가지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During the 22 days of interrogation by the NSP, I was subjected to various forms of torture, such as sleep deprivation, drug injections, and gang beatings. Undergoing these tortures, I was prepared to die three times… Five days before I was transferred to the prosecution, the investigators looked exhausted as they watched me being dragged to a special torture chamber. In the middle of the night, the investigators beat me for hours. They took turns beating me. Their demand was that complete silence was unacceptable.|국가안전기획부의 22일간의 심문 기간 동안 저는 수면 박탈, 약물 주사, 집단 구타와 같은 여러 가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고문을 겪으면서 세 번이나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검찰에 송치되기 5일 전, 수사관들은 제가 특별 고문실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지쳤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밤중에 수사관들은 수 시간 동안 저를 때렸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저를 때렸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완전한 침묵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영어[9]
1992년 10월 2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국제앰네스티는 다른 보고서를 인용하여 판사가 헌법에서 의무화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백태웅을 "사회로부터 무기한 격리시키기를" 원했다고 밝혔지만, 폭력을 포기한 사실 때문에 사형 구형을 면했다고 전했다. 고등법원은 1993년 2월 20일 백태웅의 형을 징역 15년으로 감형했다.[9] 국제앰네스티와 다른 시민단체들의 백태웅 석방 운동 끝에, 그는 6년 3개월의 수감 생활 후 1998년 8월 원주 원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경기도 파주시에서 출생하였고,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으로, 주로 부산에서 성장하였다. 부산성북초등학교, 부산진중학교, 부산동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학원에 경찰이 상주하는 상황에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독재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4학년이던 1984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에 당선되어 학원민주화 및 사회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학생자치조직으로서의 직선제 총학생회 건설을 주도했다. 이후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징역을 살았다. 석방 후 서울 구로 독산 지역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1989년 박노해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하였다. 1992년 국가보안법 상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임무종사죄 등으로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였고,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항소심에서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었다. 국제엠네스티에서 양심수로 지정하였고, 각계의 석방 운동에 힘입어 1999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노터데임 법과대학에서 유학하여 국제인권법(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석사(LL.M.) 및 박사(JSD) 학위를 받았다.[5] 이전에는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피터 A. 앨러드 법과대학에서 한국 법 연구 프로그램 조교수 겸 책임자를 역임했다.[5] 제56차 유엔 인권증진 및 보호 소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의 법률 고문을 역임했으며, 뉴욕의 휴먼 라이츠 워치에서 북한과 남한 모두의 인권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컨설턴트로 활동했다.[5]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6]
2. 2.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경기도 파주시에서 출생하였고,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군으로, 주로 부산에서 자랐다. 부산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학원에 경찰이 상주하는 상황에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독재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4학년이던 1984년 학도 호국단 총학생장에 당선되어 학원민주화 및 사회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학생자치조직으로서의 직선제 총학생회 건설을 주도했다.[7][8] 이후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징역을 살았다. 석방 후 서울 구로 독산 지역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1989년 박노해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하였다.[7][8]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임무종사죄 등)로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였고,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항소심에서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었다. 국제앰네스티에서 양심수로 지정하였고, 각계의 석방 운동에 힘입어 1999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국제앰네스티는 백태웅이 남한 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양심수로 지정했다.[9] 1992년 4월 29일,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는 백태웅이 반국가단체로 간주되는 사노맹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다.[9] 당시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반국가단체란 "대한민국 영토 내 또는 영토 밖에 있는 조직으로서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거나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조직된 지휘·통제 구조를 갖춘 단체 또는 집단"을 의미했다.[10] 국가안전기획부는 사노맹 이전에 백태웅이 "사노맹에 대한 인쇄물 20여 건을 출판 및 배포하고, 두 차례 경찰서를 공격하고, 다른 사노맹 회원들과 연락하며, 그들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9]
1992년 7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백태웅은 법정에서 체포 후 22일 동안 심문을 받고 여러 가지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During the 22 days of interrogation by the NSP, I was subjected to various forms of torture, such as sleep deprivation, drug injections, and gang beatings. Undergoing these tortures, I was prepared to die three times… Five days before I was transferred to the prosecution, the investigators looked exhausted as they watched me being dragged to a special torture chamber. In the middle of the night, the investigators beat me for hours. They took turns beating me. Their demand was that complete silence was unacceptable.|국가안전기획부의 22일간의 심문 기간 동안 저는 수면 박탈, 약물 주사, 집단 구타와 같은 여러 가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고문을 겪으면서 세 번이나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검찰에 송치되기 5일 전, 수사관들은 제가 특별 고문실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지쳤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밤중에 수사관들은 수 시간 동안 저를 때렸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저를 때렸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완전한 침묵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영어[9]
백태웅은 1992년 10월 2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국제앰네스티는 다른 보고서를 인용하여 판사가 대한민국 헌법에서 의무화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백태웅을 "사회로부터 무기한 격리시키기를" 원했다고 밝혔지만, 폭력을 포기한 사실 때문에 사형 구형을 면했다고 전했다. 고등법원은 1993년 2월 20일 백태웅의 형을 징역 15년으로 감형했다.[9]
국제앰네스티와 다른 시민단체들의 백태웅 석방 운동 끝에, 그는 6년 3개월의 수감 생활 후 1998년 8월 원주 원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5]
2. 3. 사노맹 사건과 수감 생활
1989년 박노해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하였다. 1992년 국가보안법 상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임무종사죄 등으로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였고,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항소심에서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었다.[9] 국제앰네스티는 백태웅이 남한 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지도자였기 때문에 양심수로 지정했다.[7][8]1992년 4월 29일,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는 백태웅이 반국가단체로 간주되는 사노맹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다.[9] 당시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반국가단체란 "대한민국 영토 내 또는 영토 밖에 있는 조직으로서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거나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조직된 지휘·통제 구조를 갖춘 단체 또는 집단"을 의미했다.[10] 국가안전기획부는 사노맹 이전에 백태웅이 "사노맹에 대한 인쇄물 20여 건을 출판 및 배포하고, 두 차례 경찰서를 공격하고, 다른 사노맹 회원들과 연락하며, 그들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9]
1992년 7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백태웅은 법정에서 체포 후 22일 동안 심문을 받고 여러 가지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During the 22 days of interrogation by the NSP, I was subjected to various kinds of torture, such as sleep deprivation, drug injection, and collective assault. Undergoing these tortures, I prepared myself for death three times… Five days before I was sent to the prosecution, the investigators looked tired, seeing me dragged to a special torture room. In the middle of the night, the investigators beat me for hours. They took turns beating me. Their demand was that complete silence was not acceptable.|국가안전기획부의 22일간의 심문 기간 동안 저는 수면 박탈, 약물 주사, 집단 구타와 같은 여러 가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고문을 겪으면서 세 번이나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검찰에 송치되기 5일 전, 수사관들은 제가 특별 고문실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지쳤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밤중에 수사관들은 수 시간 동안 저를 때렸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저를 때렸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완전한 침묵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영어 [9]
백태웅은 1992년 10월 2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국제앰네스티는 다른 보고서를 인용하여 판사가 헌법에서 의무화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백태웅을 "사회로부터 무기한 격리시키기를" 원했다고 밝혔지만, 폭력을 포기한 사실 때문에 사형 구형을 면했다고 전했다. 고등법원은 1993년 2월 20일 백태웅의 형을 징역 15년으로 감형했다.[9]
국제앰네스티와 다른 시민단체들의 백태웅 석방 운동 끝에, 그는 6년 3개월의 수감 생활 후 1998년 8월 원주 원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5]
2. 4. 석방과 유학
1999년, 백태웅은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 로스쿨로 유학을 떠나 2000년에 법학 석사 학위(LL.M)를 취득했다.[5] 2003년에는 뉴욕주에서 미국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6] 같은 대학원에서 국제인권법으로 법학박사 학위(J.S.D.)를 받았다.[5] 2002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비지팅 스칼라로 연구를 진행했고,[5] 2003년에는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법과대학(피터 A. 앨러드 법과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어 한국법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아 국제인권법, 한국법, 아시아 인권 등을 강의했다.[5] 2004년에는 유엔 인권 소위의 법률 자문역을 맡았다.[5]3. 학술 및 인권 활동
백태웅은 석방 이후 학술 및 인권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법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하버드 대학교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를 거쳐 하와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국제인권법, 비교법, 한국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유엔 인권이사회 강제실종 실무그룹 위원, 부의장, 의장 등을 역임하며 국제 인권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저서 "아시아의 새로운 지역 인권 시스템"의 번역 및 개정판인 창비에서 출간된 "아시아 인권 공동체를 찾아서"는 서울대학교 평화연구소 평화상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11]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꿈" 등 다양한 학술 논문도 발표했다.[1]
3. 1. 법학 교수 경력
1999년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 로스쿨로 유학하여 2000년 법학 석사 학위(LL.M)를 받고, 2003년 뉴욕주에서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동 대학원에서 국제인권법으로 법학박사 학위(J.S.D.)를 받았다. 2002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비지팅 스칼라로 연구를 하였고, 2003년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법과대학에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한국법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으며 국제인권법과 한국법, 아시아 인권 등을 강의하였고, 2004년에는 유엔 인권 소위의 법률 자문역을 맡았다. 2011년부터 미국 하와이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로스쿨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5년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강제실종 실무그룹에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임명되어, 부의장 (2018년-2020년)과 의장(2020년-2021년)을 역임하며 2022년까지 세계 각국의 강제실종 문제를 다루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하와이대 로스쿨에서 국제인권법, 비교법, 한국법 등을 가르치며,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백태웅은 "아시아의 새로운 지역 인권 시스템(Emerging Regional Human Rights Systems In Asia)"이라는 책의 저자이다.[11] 이 책의 번역 및 개정판은 2017년 창비에서 "아시아 인권 공동체를 찾아서(Seeking the Human Rights Community in Asia)"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IPUS(평화연구소)로부터 2017년 평화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으로부터 2018년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꿈(The Dream of Korean Socialist Movement)"의 저자이기도 하며, 여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1]
3. 2. 유엔 및 국제기구 활동
1999년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 로스쿨로 유학하여 2000년 법학 석사 학위(LL.M)를 받고, 2003년 뉴욕주에서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국제인권법으로 법학박사 학위(J.S.D.)를 받았다. 2002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비지팅 스칼라로 연구를 하였고, 2003년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한국법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으며 국제인권법, 한국법, 아시아 인권 등을 강의하였고, 2004년에는 유엔 인권 소위원회 법률 자문역을 맡았다. 2011년부터 미국 하와이 대학교 로스쿨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5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강제실종 실무그룹에 아시아·태평양 지역 대표 위원으로 임명되어, 부의장(2018-2020)과 의장(2020-2021)을 역임하며 2022년까지 세계 각국의 강제실종 문제를 다루었다. 현재 하와이대 로스쿨에서 국제인권법, 비교법, 한국법 등을 가르치며,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4. 저서
백태웅은 Emerging Regional Human Rights Systems In Asia영어라는 책을 썼다.[11] 이 책은 2017년 창비에서 아시아 인권 공동체를 찾아서|Seeking the Human Rights Community in Asia한국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번역 및 개정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IPUS(평화연구소)에서 2017년 평화상을 받았으며, 2018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The Dream of Korean Socialist Movement영어를 저술했고, 여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1]
5. 평가
2017년 9월 20일 백태웅은 SBS에 출연하여 젊은 시절 사노맹 활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80년대 수많은 젊은이들이 개인의 영달보다는 사회 공공선과 사회 약자를 위해 자신들을 내던지면서 민주주의도 요구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제기했었다"면서, "사노맹 활동을 부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2]
참조
[1]
웹사이트
About Professor Tae-Ung Baik
http://www.law.hawai[...]
William S. Richardson School of Law
2012-03-11
[2]
웹사이트
APPOINTMENTS TO BE MADE AT THE 29TH SESSION OF THE HUMAN RIGHTS COUNCIL
https://www.ohchr.or[...]
2022-03-02
[3]
웹사이트
Appointments to be made at HRC29 (15 June - 3 July 2015)
http://www.ohchr.org[...]
2016-03-28
[4]
웹사이트
Tae-Ung Baik | William S. Richardson School of Law
https://web.archive.[...]
2020-03-20
[5]
웹사이트
Tae-Ung Baik
https://web.archive.[...]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2020-03-20
[6]
웹사이트
Lawyer Tae-Ung Baik
http://lawyers.justi[...]
Justia Legal Services & Lawyers
2012-03-11
[7]
뉴스
Refugees give glimpse of human rights, prisons in North Korea
https://web.archive.[...]
2012-03-11
[8]
웹사이트
Through prison, illness and revolution, activist keeps marching
http://english.hani.[...]
The Hankyoreh
2012-04-03
[9]
웹사이트
Tae-Ung Baik Prisoner of Conscience
https://www.amnesty.[...]
Amnesty International
2012-03-11
[10]
웹사이트
Amnesty International Report 1997 - South Korea
https://archive.toda[...]
UNHRC
2012-03-11
[11]
뉴스
Law Faculty Members To Be Honored For Authoring Groundbreaking Books
http://www.hawaiirep[...]
2012-10-17
[12]
뉴스
백태웅, "조국 수석, 훌륭한 자질 가진 후배"
http://news.sbs.co.k[...]
SBS 뉴스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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