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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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법정은 후한 말, 촉한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다. 그는 유장 휘하에서 유비와의 연계를 모색하고 익주 평정에 기여했으며, 유비 휘하에서는 주요 책사로 활약하며 한중 공방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상서령과 호군장군에 임명되었으나 220년에 사망했으며, 유비는 그에게 익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갈량은 법정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으며, 진수는 법정을 정욱, 곽가와 비견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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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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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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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법정 |
로마자 표기 | Fa Zheng |
본관 | 부풍군 미현 |
자 | 효직 |
시호 | 익후 |
출생 | 176년 |
사망 | 220년 (향년 44세) |
관직 | |
주군 | 유장 → 유비 |
주요 경력 | 상서령 호군장군 양무장군 촉군태수 |
최종 관직 | 상서령 |
추증 | 익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법연 |
친척 | 법웅 (증조부) 법진 (할아버지) |
자녀 | 법묘 |
2. 가계 및 배경
법정의 선조는 현재의 산시성 메이현에 위치한 유푸펑군 메이현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역사적으로 전국 시대 제나라의 전발장이다. 전발장의 후손들은 기원전 221년 제나라 멸망 이후 성을 "전(田)"에서 "법(法)"으로 바꾸었다.[2]
법정은 맹달과 함께 유장의 부하가 되었으나 중용되지 못했으며, 익주 출신으로 함께 온 다른 이들에게 비방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5] 법정은 친구 장송과 함께 유장의 역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법정의 증조부 법웅은 후한 안제 재위 기간 동안 남군 (현재의 후베이성 징저우 일대) 태수를 지냈다. 법정의 할아버지 법진은 고결한 인품으로 알려진 은둔형 학자였다. 그는 학식이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정부에서 관직을 제안받았지만 여러 번 거절했다.[3] 법정의 아버지 법연(法衍|법연중국어), 자는 계모(季謀|계모중국어)는 정부 관료로 사도의 보좌관과 정위를 역임했다.[4]
3. 유장 휘하 시절
조조에게 사절로 갔던 장송은 푸대접만 받고 돌아온 후, 유장에게 유비와 동맹을 맺도록 권하고 법정을 형주로 보냈다. 익주로 돌아온 법정은 장송에게 유비의 인물됨을 칭찬하고 유비를 끌어들여 익주를 넘겨줄 계획을 모의했다.
이후 조조가 한중을 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송은 불안해하는 유장을 움직여 유비를 익주로 불러들였다. 법정은 장송의 말에 따라 유비에게 유장을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12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죽이고 익주를 공격할 무렵 장송은 본심이 탄로나 유장에게 처형당했다. 유장의 종사 정탁은 유장에게 청야 작전을 제안했다. 유비가 이를 듣고 걱정하자 법정은 정도의 계책이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고, 나중에 이 말은 맞아떨어졌다. 유장군이 연패하고 제갈량, 장비 등이 유비를 돕는 등 상황이 유장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법정은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냈으나 유장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3. 1. 초기 활동 및 불우
건안 연간(196년 ~ 220년) 초, 기근으로 인해 친구 맹달과 함께 익주로 가 유장을 섬겼다.[5] 유장 휘하에서 신도현(新都縣)의 현령(令|현령중국어)을 지냈고, 이후 군의교위()를 역임했다.[5] 그러나 지역 씨족과의 연고가 없었고, 익주로 이주해 온 다른 망명객들에게 비방을 받아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했다.[5] 그는 유장이 무능한 주지사라는 생각에 동조하는 장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
3. 2. 유비와의 연계 모색
208년,[6] 장송이 조조를 만나고 돌아온 후, 유장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유비와 우호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했다. 장송은 유비와 만나도록 유장의 대표로 법정을 추천했고, 법정은 처음에는 그 임무를 거절했지만 결국 수락했다. 법정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장송에게 유비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그를 따라 유비를 섬기라고 설득했다. 그들은 유비가 익주(현재의 사천성과 충칭시를 포괄)를 확보하는 것을 돕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7]
211년,[8] 유장이 조조가 한중군의 군벌 장로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게 되면서 그들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중군은 익주로 들어가는 북쪽 길목에 전략적으로 위치해 있었기에, 한중군이 조조의 손에 떨어진다면 유장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될 터였다. 장송은 유장에게 유비를 익주로 초청하여 조조가 제기한 위협에 대처하도록 제안했다. 유장은 이에 동의하여 법정을 특사로 보내 유비와 접촉하게 했다. 법정은 유비를 만나 은밀히 말했다. "장군, 당신의 총명함으로 무능하고 나약한 우리 주지사 유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유장의 측근인 장송은 장군의 첩자가 될 것입니다. 익주의 재산과 자원을 획득하고 천연의 방어벽을 갖추면, 당신은 쉽게 원대한 포부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9] 법정은 또한 유비의 혼인 문제를 보고 그에게 손부인을 오(吳)나라로 돌려보내도록 조언했다.[10]
4. 유비 휘하 시절
건안 원년(196년), 익주에 기근이 들어 맹달과 함께 익주목 유장에게 의탁했다. 유장 밑에서 신도현령과 군의 교위를 지냈으나, 등용되지 못했고 익주 출신 동료들에게 절개가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42]
이후 법정은 장송과 함께 유비의 익주 공략에 협력하기로 하고, 유장에게 조조와 단교하고 유비와 동맹을 맺도록 진언했다. 또한 장로의 위협을 이용해 유장을 움직여 유비에게 사자로 가서 익주로 들어올 것을 권했다. 팽요가 유비에게 벼슬을 구할 때 방통과 함께 추천했다.[42]
4. 1. 익주 평정 지원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유장 휘하의 정도는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군 내의 모든 곡창과 보급 기지를 파괴한 다음, 유비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방어선을 강화하는 청야 전술을 제안했다.[12] 유비가 이를 듣고 걱정하자, 법정은 유장이 백성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정도의 계획을 채택하지 않을 것이며, 정도를 파면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13]214년,[14]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했을 때, 법정은 유장에게 긴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고했다.[15] 법정은 이 편지에서 유장이 이미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으며 저항을 포기하고 유비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15] 유비가 익주를 장악한 후, 법정은 허정이 성도 포위 당시 성벽을 넘어 항복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불충하다고 여겨 냉대하는 유비에게 허정의 명성을 이용할 것을 설득했다.[20] 법정은 유비에게 "허정은 과장된 평판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 허정의 이름은 이미 온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이 그를 존경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재능 있고 덕망 있는 사람들을 얕잡아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고, 유비는 법정의 조언을 따랐다.[20]
4. 2. 주요 책사로 활약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법정은 촉군태수[42] 및 양무장군에 임명되어 제갈량과 함께 중앙 정치에 참여하며 유비의 책사 역할을 수행했다(《촉서》선주전). 유비는 이전에 촉군 태수였던 허정이 유장에게 항복하려 한 일로 그를 미워했으나, 법정은 허정이 명성이 높은 인물임을 들어 그의 허명[44]을 이용하도록 권했다. 또한, 손부인과 이혼한 유비에게 오의의 여동생 (목황후)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설득했다.[25]제갈량이 내정을 관리하는 동안, 법정은 유비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했다.[23][24]
제갈량과 법정은 성향이 달랐지만(《촉서》법정전), 공적인 면에서는 서로를 인정했다. 제갈량은 법정의 지략을 높이 평가하여 촉군 태수로서 그의 불공정한 행위를 용인하기도 했다.[45]
법정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답했고, 반대로 과거에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에게는 권력을 남용하여 복수했으며, 법적 권한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제갈량에게 법정의 영향력을 제한하도록 유비에게 건의하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제갈량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주군(유비)께서 공안현에 계실 때, 북쪽으로는 조조를 경계하고 동쪽으로는 손권을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영토에서조차 손부인이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법효직(법정)이 크게 지지하고 도와, 주군께서 날개를 펼쳐 높이 날아올라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영향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찌 법정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갈량은 유비가 법정을 매우 신뢰한다는 것을 알고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26]
역사가 손성은 법정의 권력 남용에 대한 제갈량의 태도를 "정의의 쇠퇴"라 비판하며, 과거의 공헌이 아무리 크더라도 법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7] 반면, 송나라 학자 당경은 저서 ''삼국잡사''(三國雜事)에서 법정을 범저, 이광, 곽진에 비유하며, 이들 모두 개인적인 원한을 풀도록 허용되었고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당경은 과거 통치자들이 뛰어난 영웅들을 활용하는 방식에는 그들만의 정의관이 있었다고 보았으며, 이를 간과한 손성을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했다.[28]
4. 3. 한중 공방전 참전
217년, 법정은 유비에게 한중군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한중은 원래 장로가 다스렸으나 215년 양평 전투에서 조조에게 함락된 상태였다. 법정은 한중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비가 조조의 장수들인 하후연과 장합으로부터 한중을 빼앗을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29]"조조는 단번에 장로를 항복시키고 한중을 차지했지만, 더 나아가 파와 촉을 정복하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두었는데, 이는 그의 실수이거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부 문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하후연과 장합은 우리 군대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우리가 진격하면 반드시 그들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곡식을 모아 창고를 채우고 어떤 기회든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적을 물리치고 황실을 회복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양주로 국경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준비할 가장 중요한 위치를 얻을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편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비는 법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중 공방전을 시작했다.[29]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유비의 진영을 공격해 오자, 법정은 유비에게 적절한 공격 시기를 조언했다. 유비는 장수 황충에게 명령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가 하후연의 군대를 공격하게 했고, 이 공격으로 황충은 하후연을 격파하고 죽였다.[30]
이후 조조가 장안에서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면서, 법정이 유비에게 한중 공격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조는 "유비는 이런 일을 할 능력이 없다. 분명 누군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일 거야."라고 말했다.[31][32]
5. 사망과 평가
219년,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한중왕(漢中王)을 자칭하며 법정을 상서령(尙書令) 겸 호군장군(護軍將軍)에 임명했다.[35] 220년에 법정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5]
제갈량은 이릉 전투에서 유비가 대패한 후, 법정이 살아있었다면 유비의 동정을 막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며 그의 정치적 판단력을 높이 평가했다.[37]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법정을 "판단력이 뛰어나고 비범한 계략을 지녔으나, 덕성으로는 칭찬받지 못했다"라고 평가하며 조위의 정욱, 곽가와 비견될 만하다고 언급했다.[39] 양희는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서 법정을 "전략에 재능이 있었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예측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0]
현대 대중문화에서 법정은 코에이의 게임 '진・삼국무쌍 7: 맹장전'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5. 1. 죽음과 시호
219년,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하며, 법정을 상서령(尙書令) 겸 호군장군(護軍將軍)에 임명했다.[35] 220년, 법정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비는 법정의 죽음을 슬퍼하며 며칠 동안 애도했고, '익후(翼侯)'라는 시호를 내렸다.[35] '익(翼)'은 글자 그대로 "측면"을 의미하지만, "날개"로도 번역될 수 있어 법정의 시호는 "날개의 후작"으로도 해석된다.[35]유비의 통치 기간 동안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 등 많은 오랜 동료와 장군들이 사망했지만, 법정만이 유일하게 시호를 받았다.[36] 이는 유비가 법정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준다. 법정의 아들 법묘(法邈)는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았고, 촉한에서 봉차도위(奉車都尉)와 한양군(漢陽郡) 태수를 지냈다.[36]
5. 2. 후대의 평가
제갈량은 이릉 전투에서 유비가 대패한 후, 법정이 살아있었다면 유비의 동정을 막았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이는 법정의 정치적 판단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37] 한중 공방전 당시 유비가 퇴각을 거부하며 위험에 처했을 때, 법정이 직접 나서 유비를 설득하여 함께 퇴각한 일화는 제갈량의 탄식에 설득력을 더한다.[38]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법정을 "판단력이 뛰어나고 비범한 계략의 소유자였으나, 덕성으로 칭찬받지는 못했다."라고 평가하며, 조위의 정욱, 곽가와 비견될 만하다고 언급했다.[39] 이는 법정의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지적한 객관적인 평가로 볼 수 있다.
양희는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서 법정을 "전략에 재능이 있었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예측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0]
현대 대중문화에서 법정은 코에이의 게임 '진・삼국무쌍 7: 맹장전'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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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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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蜀書
[43]
서적
蜀書
[44]
문서
법정은 허정은 허명 뿐인 인물이라고 유비에게 말했다.
[45]
문서
법정은 촉군 태수에 착임하자, 근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고, 자신을 비난한 자 수 명을 멋대로 살해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제갈량에 그것을 고하자, 제갈량은 「우리 군의 지금이 있는 것은 법정 덕분이다. 그 공적을 생각하면 처벌할 수 없다」라고 나무라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이 한중에서 군무에 종사했을 때는, 양홍이 태수를 대행하고 있다.
[46]
서적
正史三国志
ちくま学芸文庫
[47]
서적
華陽国志
[48]
문서
유비에게 시호를 받은 것은 법정 뿐이다
[49]
문서
원문은 "법효직약재、즉능주상제、영불동행。취부동행、필불경위의"
[50]
문서
蜀書法正伝注
[51]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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