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양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복양 전투는 192년부터 195년까지 조조와 여포 세력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황건적의 난 이후 연주를 침략한 황건적 잔당을 물리치고 조조가 연주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여포가 연주를 침공하여 조조와 전투를 벌였으며, 조조는 복양 전투에서 승리하여 연주를 탈환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여포는 유비에게 의탁하게 되었고, 조조는 중원 제패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복양 전투는 조조의 세력 확장과 여포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와 게임 《진 삼국무쌍》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년 중국 - 조조의 서주 침공
조조의 서주 침공은 193년과 194년에 조조가 도겸의 서주를 공격한 사건으로, 조숭의 피살을 계기로 발생하여 대규모 학살과 피해를 야기했으며, 유비의 성장과 조조에 대한 반감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 194년 중국 - 강동 평정
손책이 아버지 손견의 죽음 이후 195년부터 199년까지 강동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격파하고 복속시켜 강동과 강남 대부분을 장악하며 오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진 군사적, 정치적 활동이 강동 평정이다. - 195년 중국 - 헌제 탈출전
헌제 탈출전은 동탁 사후 이각과 곽사의 난으로 시작되어 헌제가 장안을 벗어나 조조에게 의탁하기까지의 사건으로, 헌제가 여러 세력의 도움과 배신 속에서 탈출을 감행한 끝에 조조의 도움으로 낙양에 도착하여 조조가 후한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5년 중국 - 강동 평정
손책이 아버지 손견의 죽음 이후 195년부터 199년까지 강동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격파하고 복속시켜 강동과 강남 대부분을 장악하며 오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진 군사적, 정치적 활동이 강동 평정이다. -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 황건적의 난
황건적의 난은 184년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후한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도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 양주의 난
양주의 난은 184년 부패한 한나라에 저항하여 강족 세력이 양주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한나라의 통치력 약화와 삼국 시대 도래의 계기가 되었다.
복양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 연주 전투 |
부분 | 후한 말의 전쟁 |
![]() | |
날짜 | 194년 ~ 195년 |
장소 | 연주 (현재의 산둥성 남서부와 허난성 동부) |
결과 | 조조의 승리, 여포 퇴각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조 |
교전국 2 | 여포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조조 순욱 정욱 전위 조인 하후돈 우금 악진 이전 하후연 원소 안량 |
교전국 2 지휘관 | 여포 진궁 장막 장초 장료 장패 성렴 학맹 조성 송헌 위속 후성 이봉 설란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80,000명 |
교전국 2 병력 | 60,000명 (10,000명 이상) |
2. 배경
조조가 서주성 전투에서 서주 태수 도겸을 정벌하고 있을 때,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는 비어 있었다. 이 틈을 타 진류 태수 장막과 그의 동생 광릉 태수 장초에게 의탁하고 있던 여포는 진궁의 의견에 따라 장막과 함께 연주를 공격해 연주성을 함락시켰다. 조조의 모사 순욱과 정욱은 3만 군사로 견성, 동아, 범형 세 고을만 겨우 지켜냈다.[1]
193년,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도겸의 부하 장개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여 도겸의 영토를 휩쓸고 수만 명의 서주 백성을 학살했다. 도겸은 담성으로 후퇴했지만, 조조는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군대의 보급이 부족해지자 퇴각했다.[1]
이듬해, 조조는 다시 도겸을 공격하여 서주의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을 점령했다. 바로 그때, 조조의 부하 장막과 진궁이 그에게 반역하여 여포를 도와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를 점령했다. 조조는 이에 도겸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연주를 되찾기 위해 돌아가기로 결정했다.[1]
2. 1. 조조의 연주 지배와 황건적의 침입
192년, 청주의 황건적 잔당이 연주를 침략하여 동평과 임성을 점령했다. 연주자사 유대는 황건적을 공격하려 했지만, 계북의 재상 포신은 이를 반대했다. 유대는 포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황건적과 교전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사망했다.[1]조조의 참모 진궁은 조조에게 연주를 장악하여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기반으로 삼을 것을 촉구했다. 진궁은 유대의 추종자들을 설득하여 조조에 합류하도록 자원했다. 조조와 우호적인 포신은 동군(현재의 복양시 남서쪽, 허난성)으로 가서 조조를 연주의 새로운 연주자사로 초청했다.[1]
조조는 수장에서 황건적을 공격했지만 격퇴하지 못했다. 그 후, 조조는 군대를 개편하고 군사 규칙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했으며, 부하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그는 황건적이 약탈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보급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에 조조는 황건적을 기습 공격하여 약탈을 막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황건적을 북쪽으로 퇴각시켰다. 조조는 황건적을 추격하여 계북(현재의 창칭구 남쪽, 산둥성)에서 다시 격파했다. 1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30만 명이 넘는 황건적이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항복한 병사들을 재편하여 청주병(淸州兵)을 만들었고, 백성들이 스스로와 군대를 부양할 수 있도록 둔전제를 시행했다.[1]
2. 2. 서주 대학살과 여포의 연주 침공
조조는 서주성 전투에서 서주 태수 도겸을 정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는 비어 있었다.이 틈을 노려 진류 태수 장막과 그의 동생 광릉 태수 장초에게 의탁하고 있던 여포는 동군종사 진궁의 의견에 따라 장막과 함께 연주를 공격해 연주성을 함락시켰다. 조조의 모사 순욱과 정욱은 3만 군사로 겨우 견성, 동아, 범형 세 고을만 지켜냈다.
3. 전투의 전개
조조가 서주 공격을 중단하고 연주로 돌아와 조인 등과 합류하자, 여포는 복양성으로 이동하여 군사를 주둔시켰다. 조조는 복양 근처에 영채를 세우고 맞섰으나, 여포의 부하 장수들인 장료, 장패, 학맹, 조성, 성렴, 송헌, 위속, 후성 등이 나서면서 첫 싸움에서 패했다.[1]
그날 밤 조조는 여포의 영채를 기습 공격했지만, 진궁의 계책으로 적들이 다시 반격하여 물러나야 했다. 조조는 복양성 안의 전(田)씨 성을 쓰는 부호가 돕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 또한 진궁의 계책이었다. 조조는 성 안으로 유인되어 고립될 뻔했으나, 간신히 탈출했다. 여포는 조조를 추격했지만, 조조의 반격으로 크게 패해 복양성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조조 역시 군사를 거두어 견성으로 돌아갔다.[1]
이후 조조와 여포의 군대는 100일 이상 교착 상태에 놓였고, 조조는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결국 기근으로 인해 여포는 진지를 포기했다. 조조는 거야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했다. 조조의 참모 순욱과 정욱은 연주의 성현, 범현, 동아를 방어했지만, 견고한 방어를 갖춘 현은 단 두 곳뿐이었다. 여포는 성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다가 다시 산양으로 이동했다.[1]
여포는 기병을 이끌고 나와 조조의 청주병을 공격했다. 청주병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고, 조조의 진형은 붕괴되었다. 혼란을 틈타 조조는 앞장섰지만, 화재가 발생하여 말에서 떨어져 왼손바닥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다. 조조군의 장수들은 대부분 주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안전을 걱정하여 야영지에 도달하기 전에 멈춰 섰다. 조조는 즉시 포위 공격 무기를 준비하여 여포를 다시 포위하도록 명령하면서, 간신히 병사들을 독려했다.[1]
장막은 여포를 따랐고, 그의 동생 장초는 광릉 태수로 영구에서 가족을 돌보게 했다. 조조는 영구를 몇 달 동안 포위했고, 결국 도시를 점령하여 장초와 그의 가족을 죽였다. 장막은 원술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그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동시에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일부는 인육을 먹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여포 역시 모든 식량, 말 사료, 곡물 공급을 다 써서 양측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2]
조조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 처음에는 여포 편이었던 영향력 있는 전씨 가문이 조조에게 충성을 돌리고 그의 군대가 도시에 진입하도록 허락했다. 조조는 되돌아갈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동쪽 문에 불을 질렀고, 그 직후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여포의 기병 중 일부가 조조를 생포했지만 그의 신원을 알지 못했다. 조조는 노란 말을 탄 사람을 보고 그가 자신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여포의 기병들은 그를 풀어주고 그 기수를 쫓아갔다. 조조는 불타는 동쪽 문을 통과하여 복양에서 탈출했다.[3]
2년 안에 조조는 연주의 모든 도시를 되찾고, 거야에서 여포를 격파했다. 여포는 그 후 동쪽으로 도망쳐 도겸에게서 서주를 물려받은 유비에게 합류했다.[1]
3. 1. 1차 전투 (복양 전투)
조조는 서주성 전투를 중단하고 연주로 돌아가 조인 등과 합류했다. 연주성에 있던 여포는 복양성으로 가 군사를 주둔하기로 했다. 조조는 복양 근처에 도착해 영채를 세우고 맞섰으나 장료, 장패, 학맹, 조성, 성렴, 송헌, 위속, 후성 등이 나서면서 첫 싸움에서 패했다.[1]그날 밤 조조는 여포의 영채를 기습 공격했지만 진궁의 계책으로 적들이 다시 반격해 다시 물러났다. 조조는 복양성 안에서 전(田)씨 성을 쓰는 부호가 자신들을 도와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것도 조조를 성 안으로 끌어들여 고립시켜 무찌르려는 진궁의 계책이었다.[1]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조조는 겨우 탈출하고 여포는 조조를 추격했지만 조조의 반격으로 크게 패해 복양성으로 다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조조도 군사를 거두어 견성으로 돌아갔다. 조조와 여포의 군대는 최소 100일 동안 교착 상태에 놓였고, 조조는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결국, 여포는 기근 발생으로 인해 그의 진지를 포기했다. 조조는 그 후 여포를 거야와 복양에서 포위했다. 조조의 참모 순욱과 정욱은 연주의 성현, 범현, 동아를 방어했지만, 견고한 방어를 갖춘 현은 단 두 곳뿐이었고,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여포가 도착했지만 성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서 복양에 주둔했다. 여포는 다시 군대를 동쪽 산양으로 이동시켰다.[1]
여포는 기병을 이끌고 나와 조조의 청주병을 공격했다. 청주병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고 조조의 진형은 붕괴되었다. 혼란을 본 조조는 재빨리 앞장섰지만, 화재가 발생하여 말에서 떨어져 왼손바닥을 태웠다. 조조군의 장수들은 대부분 주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안전을 걱정하여 야영지에 도달하기 전에 멈춰 섰다. 조조는 즉시 포위 공격 무기를 준비하여 여포를 다시 포위하도록 명령하면서, 간신히 병사들을 독려했다.[1]
장막은 여포를 따랐고, 그의 동생 장초를 광릉의 태수로 남겨 영구에서 가족을 돌보게 했다. 조조는 영구를 몇 달 동안 포위했고, 결국 도시를 점령하여 장초와 그의 가족을 죽였다. 장막은 원술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그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동시에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일부는 인육에 의존하게 되었다. 여포 역시 모든 식량, 말 사료, 곡물 공급을 다 써서 양측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2]
조조가 나중에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 처음에는 여포 편이었던 영향력 있는 전씨 가문이 조조에게 충성을 돌리고 그의 군대가 도시에 진입하도록 허락했다. 조조는 되돌아갈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동쪽 문에 불을 질렀고, 그 직후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여포의 기병 중 일부가 조조를 생포했지만 그의 신원을 알지 못했다. 조조는 노란 말을 탄 사람을 보고 그가 자신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여포의 기병들은 그를 풀어주고 그 기수를 쫓아갔다. 조조는 불타는 동쪽 문을 통과하여 복양에서 탈출했다.[3]
3. 2. 2차 전투 (연주성 탈환)
조조는 견성에서 황건적 잔당을 무찌르고 허저를 얻은 뒤, 여포가 연주성을 비운 틈을 타 설란과 이봉만 지키고 있던 연주성을 공격한다. 허저가 이봉을 베고, 여건이 활을 쏴 설란을 죽여 쉽게 연주성을 탈환한다.[1]여포는 복양성에서 나와 조조에 맞섰으나, 허저, 전위, 하후돈, 하후연, 악진, 이전 등 조조의 여섯 장수에게 패배한다. 여포는 복양성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전씨의 배반으로 성문이 닫히자 정도성으로 후퇴한다. 조조는 정도성을 총공격하고, 장초는 자살, 장막은 도주 중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여포는 군사 2/3를 잃고, 부하 성렴은 악진의 활에 맞아 전사한다.[1]
여포는 기주의 원소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원소는 조조의 편을 들어 안량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여포를 공격한다. 결국 여포는 서주의 유비에게 의탁하고, 조조는 연주를 되찾아 세력을 넓힌다.[1]
조조와 여포의 군대는 100일 이상 대치했고, 기근으로 여포가 먼저 진지를 포기했다. 조조는 거야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했다. 순욱과 정욱이 연주의 성현, 범현, 동아를 방어했지만, 견고한 방어를 갖춘 현은 두 곳뿐이었다. 여포는 성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다가 다시 산양으로 이동했다.[1][2]
여포는 기병으로 조조의 청주병을 공격하여 조조의 진형을 무너뜨렸다. 조조는 앞장섰다가 화재로 말에서 떨어져 왼손바닥을 다쳤다. 조조는 병사들을 독려하여 여포를 다시 포위했다.[1]
장막은 여포를 따랐고, 동생 장초는 광릉 태수로 영구에서 가족을 돌보게 했다. 조조는 영구를 점령하여 장초와 가족을 죽였다. 장막은 원술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메뚜기 떼와 기근으로 양측 모두 물러났다.[1][2]
조조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 전씨 가문이 조조에게 충성을 바쳐 조조 군대가 도시에 진입하도록 허락했다. 조조는 동쪽 문에 불을 질러 공격을 받았고, 여포의 기병에게 생포될 뻔했으나 탈출했다.[3]
2년 안에 조조는 연주의 모든 도시를 되찾고, 거야에서 여포를 격파했다. 여포는 유비에게 의탁했다.[1]
3. 3. 전투의 결과: 여포의 몰락과 조조의 성장
조조는 연주를 되찾기 위해 먼저 동족의 황건적 잔당을 공격해 무찌르고 힘세고 뛰어난 장수 허저를 얻는다. 견성에 있던 조조는 여포가 연주성을 비우고 부하 설란과 이봉만 지키고 있자 연주성을 되찾기로 결정한다.조조는 허저를 시켜 이봉을 베고 여건을 시켜 활을 쏴 설란을 죽여 연주성을 쉽게 되찾는다. 여포는 복양성에서 나와 조조에 맞서고 조조는 부하 허저, 전위, 하후돈, 하후연, 악진, 이전 등 6명의 장수들을 시켜 여포를 무찌른다. 여포는 복양성으로 가지만 전씨가 배반하여 연주성의 성문을 닫자 진퇴양난에 빠진 여포는 장막과 장초, 진궁 등을 이끌고 정도성으로 후퇴한다.
이에 조조가 남은 군사들까지 모두 모아 정도성을 총공격하자 장초는 불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장막도 겨우 탈출해 원술에게로 가려하지만 부하들에게 살해당한다. 여포 역시 군사의 2/3를 잃었고 부하 성렴도 조조의 부하 악진의 활에 맞아 전사한다.
여포는 기주의 원소에게로 가려하지만 원소까지 조조의 편을 들어 부하 안량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여포를 공격한다.
결국 여포는 서주의 유비에게로 가 의탁하기로 하고 조조는 연주를 되찾아 다시 세력을 넓힌다. 195년, 여포는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유비를 배신했고, 이로 인해 199년 하비 전투가 발발한다. 당시 조조와 유비 연합군은 서주에서 여포를 공격했고, 여포는 패배 후 조조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4. 전투의 영향
(이전 출력이 비어 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 제공이 필요합니다.)
5. 대중문화 속 연주 전투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진 삼국무쌍 5: 맹장전''에서 "연주 전투"라는 이름의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7''에서는 여포가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서주 전투"의 일부로 묘사된다. 이는 황건적 잔당을 다루는 "연주 전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ree Kingdoms, Volume 1, Biography of Cao Cao
[2]
서적
Records of Three Kingdoms, Volume 7, Biography of Lü Bu
[3]
서적
In the Annals of Emperor Xia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