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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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봉가는 여러 분가로 나뉘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왕족과 귀족 가문으로 번성했다. 클레르몽 가문에서 시작된 부르봉 가문은 부르봉 본가, 부르봉-방돔 가문, 부르봉-콩데 가문 등을 포함한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열었고, 루이 14세 시기에 절대 왕정을 확립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했다. 스페인에서는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고, 현재 펠리페 6세가 재위 중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부르봉-파르마 가문과 부르봉 양시칠리아 왕가가 존재했으나,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왕국이 병합되었다.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분가로, 현재 앙리 대공이 통치하고 있다. 부르봉 가문은 유럽 역사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스페인과 룩셈부르크에서 왕위를 유지하며 그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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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국왕인 루이 14세는 72년간 재위하며 절대 왕정을 강화하고 프랑스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했으나 잦은 전쟁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켜 절대 왕정의 전성기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 표시 이름과 문서 제목이 같은 위키공용분류 - 라우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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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국가 | 프랑스 스페인 룩셈부르크 나바라 |
민족 | 프랑스인 |
주된 가문 | 카페 왕조 |
가문명 유래 | 부르봉 |
설립 | 1272년 |
설립자 |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 부르봉 여후작 베아트리스와 결혼 |
마지막 통치자 | 프랑스 및 나바라: 샤를 10세 (1824–1830) 프랑스: 루이 필리프 1세 (1830–1848) 파르마: 로베르토 1세 (1854–1859) 양시칠리아: 프란체스코 2세 (1859–1861) |
현재 수장 | 루이 알퐁소 드 부르봉 |
웹사이트 | 스페인 왕실 웹사이트 |
칭호 | |
영토 | |
폐위 | |
분가 |
2. 부르봉 왕가의 기원과 발전
루이 9세의 여섯 번째 아들인 로베르 드 프랑스(Robert de France)가 부르봉 왕가의 시조이다. 로베르는 샤로래(Charolais프랑스어) 영주 장 드 부르고뉴(Jean de Bourgogne프랑스어)와 아니에스 드 부르봉(Agnès de Bourbon프랑스어)의 외동딸 베아트리스(Béatrice프랑스어)와 결혼하여 부르봉(Bourbon프랑스어)의 영주가 되었다.[3]
1327년 부르봉가의 루이 1세(Louis Ier de Bourbon프랑스어)를 위해 부르봉 영지는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루이 2세(Louis II de Bourbon프랑스어) (1337-1410)는 1371년 안 도베르뉴(Anne d'Auvergne프랑스어)와 결혼하여 영지를 확장했다.[3]
2. 1. 부르봉 가문의 분가
루이 9세의 막내아들 로베르 드 프랑스(Robert de France)로부터 시작된 부르봉 왕가는 여러 분가로 나뉘었다.- '''부르봉 공작 가문''' (1521년에 완전 멸족, 1503년에 남계 멸족)
- ** ''부르봉-라베당 가문 (사생아)'' (1744년에 멸족)
- ** ''부르봉-뷔세 가문 (비왕가)''
- ** ''부르봉-루시용 가문 (사생아)'' (1510년에 멸족)
- ** 부르봉-몽팡시에 가문, 몽팡시에 백작 (1527년에 멸족)
- * 부르봉-라 마르슈 가문 (1438년에 멸족)
- ** 부르봉-방돔 가문
부르봉 왕가, 프랑스 왕
* 아르투아 가문 (1883년에 멸족)
* 부르봉 왕가, 스페인 왕
** 칼리스타파 (1936년에 멸족)
** 알폰소파
*** 부르봉-앙주 가문
*** 부르봉 왕가, 스페인 왕
** 부르봉-세비야 가문
*** 부르봉-산타 엘레나 가문
**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
** 부르봉-브라간사 가문 (1979년에 멸족)
** 부르봉-파르마 가문
*** 룩셈부르크-나사우 가문
* ''부르봉-메인 가문 (사생아)'' (1775년에 멸족)
* ''부르봉-팡티에브르 가문 (사생아)'' (1793년에 멸족)
* 오를레앙 가문
** 오를레앙-브라간사 가문
** 오를레앙-갈리에라 가문
* ''부르봉-방돔 가문 (사생아)'' (1727년에 멸족)
부르봉-콩데 가문 (1830년에 멸족)
* 부르봉-콩티 가문 (1814년에 멸족)
* 부르봉-수아송 가문 (1692년에 완전 멸족, 1641년에 남계 멸족)
부르봉-생 폴 가문 (1601년에 완전 멸족, 1546년에 남계 멸족)
부르봉-몽팡시에 가문, 몽팡시에 공작 (1693년에 완전 멸족, 1608년에 남계 멸족)
- ** 부르봉-카랑시 가문 (1520년에 멸족)
부르봉-뒤장 가문 (1530년에 멸족)
- ** 부르봉-프레오 가문 (1442년에 멸족)
이 중 주요 분가는 다음과 같다.
- 부르봉 본가: 앙리 4세를 시작으로 프랑스 왕위를 이었다.
- 부르봉-방돔 가문: 방돔 백작 샤를의 아들 나바라의 앙투안이 나바라 왕국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면서 부르봉 본가의 시조가 되었다.
- 부르봉-콩데 가문: 방돔 백작 샤를의 아들 콩데 공 루이를 시조로 한다.
- 부르봉-몽팡시에 가문: 부르봉 공작 루이 1세의 차남 라 마르슈 백작 자크 1세의 후손으로, 샤를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편에 서면서 프랑스에서 작위를 잃었다.
- 부르봉-파르마 가문: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필리포가 파르마 공국을 상속받아 시작되었다.
-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아들 페르디난도 1세에게 물려주면서 시작되었다.
- 오를레앙 가문: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1세를 시조로 하며, 7월 혁명 이후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 왕이 되었다.
이 외에도 인도의 부르봉 가문이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샤를 3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그리스의 미카엘 공자는 그의 역사 소설 ''르 라자 부르봉''[8]에서 인도 출신의 발타자르 나폴레옹 4세 드 부르봉을 프랑스 왕위의 적통 계승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6][7][9]
3. 프랑스 부르봉 왕조
1589년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3]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 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랑스의 안정을 가져왔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고 절대 군주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루이 14세는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절대 왕정 시대를 열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 등 애첩들의 정치 개입으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루이 16세는 프랑스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처형당했다.[11]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봉 왕조는 잠시 단절되었다가, 나폴레옹 몰락 이후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샤를 10세는 반동적인 정책을 펼치다가 7월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7월 혁명 이후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은 막을 내렸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역대 국왕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위 기간 |
---|---|
앙리 4세 | 1589년 ~ 1610년 |
루이 13세 | 1610년 ~ 1643년 |
루이 14세 | 1643년 ~ 1715년 |
루이 15세 | 1715년 ~ 1774년 |
루이 16세 | 1774년 ~ 1792년 |
루이 18세 | 1814년 ~ 1824년 |
샤를 10세 | 1824년 ~ 1830년 |
루이 19세 | (명목상) |
앙리 5세 | (명목상) |
루이 필리프 1세 | 1830년 ~ 1848년 |
4. 스페인 부르봉 왕조
1700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스페인에서 합스부르고(합스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었다. 이 계획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초래했지만, 전쟁 결과 각국이 즉위를 승인하여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었다. 1931년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후 오랫동안 왕위를 잃었지만, 1975년 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여 왕정이 부활했다.
페르난도 7세 사후, 그의 딸인 이사벨 2세가 즉위했지만,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이에 반발하여 카를로스 5세로 독자적으로 즉위했다. 이후 스페인은 이사벨 2세파와 카를로스 5세파로 나뉘어 내전이 발발했는데, 카를로스 5세 및 그 자손을 지지하는 일파를 카를리스타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내전은 카를리스타 전쟁이라고 한다. 카를로스 5세의 남자 혈통 자손의 마지막 남자인 산 하이메 공작 알폰소 카를로스 (알폰소 카를로스 1세)가 사망한 후, 카를리스타는 각각 독자적인 왕을 옹립하며 분열되었다. 또한, 몬티손 백작 후안 카를로스 (후안 3세) 이후에는 정통주의의 요청에 따라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도 겸했다.
5. 이탈리아 부르봉 가문
프랑스 제국 몰락 이후,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왕좌로 복귀하여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부르봉 양시칠리아 왕가를 창건했다. 1820년 신민들의 반란으로 헌법을 수여해야 했으나, 1821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침공으로 헌법은 폐지되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1825년 아들 프란체스코 1세에게, 1830년에는 손자 페르디난도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848년 1월 시칠리아 혁명으로 페르디난도 2세는 다시 헌법을 수여했으나 1849년 폐지되었다. 1859년 5월, 페르디난도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프란체스코 2세가 왕위에 올랐다.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나폴리를 점령하자 프란체스코 2세는 헌법을 복원하며 주권 수호를 시도했다. 그러나 가에타 요새로 피신한 후, 1861년 2월 피에몬테 군대에 의해 포위, 함락되었다. 메시나 요새 함락(3월 12일 항복)과 함께 그의 왕국은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으나, 치비텔라델트론토의 나폴리 군대는 사흘 더 저항했다.
5. 1. 부르봉-파르마 가문
카를로 1세가 1731년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부르봉-파르마 가문이 시작되었다.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아헨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파르마 공국이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의 차남인 필리포에게 양도되었고, 곤차가 가문의 구아스탈라 공국과 합쳐졌다.필리포의 아들 페르디난도가 공위를 계승했지만, 파르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정복당했다. 페르디난도의 아들 루도비코는 에트루리아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에트루리아 왕국은 카를로 루도비코 시대에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카를로 루도비코는 빈 회의 결과 루카 공이 되었지만, 루카 공국은 1847년 토스카나 대공국에 합병되었고, 카를로 루도비코는 파르마 공위를 얻은 후 사망했다.
이후 파르마 공국은 카를로 3세와 로베르토 1세로 이어졌지만, 1860년 주민 투표에 의해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어 소멸했다. 로베르토 1세는 폐위 후 2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룩셈부르크 대공샤를로트와 결혼한 펠릭스 공자의 가계는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가로 이어지고 있다.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가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남계에서는 부르봉가의 후손에 해당한다.
다음은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역대 파르마 공작 목록이다.
이름 | 재위 기간 |
---|---|
카를로 1세 | 1731년 ~ 1735년 |
필리포 1세 | 1748년 ~ 1765년 |
페르디난도 1세 | 1765년 ~ 1802년 |
카를로 2세 | 1847년 ~ 1848년 |
카를로 3세 | 1848년 ~ 1854년 |
로베르토 1세 | 1854년 ~ 1860년 |
5. 2.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오래전부터 동군연합을 이루어왔다. 페르디난도 1세는 1806년부터 1815년까지 보나파르트 왕가가 나폴리 왕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리의 왕을 차지하지 못했다. 1816년에는 나폴리 왕국이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하고 양시칠리아 왕국이 되면서 왕가의 이름도 부르봉 양시칠리아로 변경되었다.- 카를로 7세 (1734년 ~ 1759년)
- 페르디난도 1세 (1759년 ~ 1816년, 나폴리-시칠리아 왕)
- 페르디난도 1세 (1816년 ~ 1825년, 양시칠리아 왕)
- 프란체스코 1세 (1825년 ~ 1830년)
- 페르디난도 2세 (1830년 ~ 1859년)
- 프란체스코 2세 (1859년 ~ 1860년)
양시칠리아 왕국은 사르데냐 왕국이 주도한 리소르지멘토로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된다.
프랑스 제국이 몰락하자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왕좌로 복귀하여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부르봉 양시칠리아 왕가를 창건했다. 1820년 그의 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헌법을 수여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그의 요청에 따라 1821년 3월에 침공하여 헌법을 폐지했다. 그는 1825년 아들 프란체스코 1세에게, 1830년에는 손자 페르디난도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848년 1월 시칠리아에서 혁명이 발발했고 페르디난도는 헌법을 수여해야만 했다. 이 헌법은 1849년에 폐지되었다. 페르디난도는 1859년 5월 아들 프란체스코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나폴리를 점령하자 프란체스코 2세는 자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복원했다. 그는 가에타 요새로 도망갔고, 1861년 2월 피에몬테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점령되었다. 그의 왕국은 메시나 요새가 함락된 후(3월 12일 항복),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치비텔라델트론토에 있던 나폴리 군대는 사흘 더 저항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리는 한때 프랑스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으나, 1816년 빈 회의를 통해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재출발했다.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3세)는 양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 양시칠리아의 부르봉가는 4대에 걸쳐 이어졌으나, 1860년에 가리발디에게 정복되어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폐위 후에도 가계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6. 룩셈부르크 부르봉-파르마 가문
7. 부르봉 가문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부르봉 왕가를 프랑스 왕가로 지지한 왕당파를 레지티미스트(Legitimists) 혹은 정통왕당파라고 한다. 이들은 보나파르트가 지지자인 보나파르티스트나, 같은 왕당파이지만 오를레앙가를 지지하는 오를레앙주의자(오를레앙파)와 대립하면서 오늘날까지 존재해 왔다.
샤를 10세의 손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 다르투아가 사망하여 루이 15세의 남계 남자가 끊어지자, 정통왕당파의 일부는 오를레앙주의에 합류했지만, 일부는 살리카법에 근거하여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족을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옹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스페인 부르봉가의 방계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부르봉가 가주", "프랑스 왕 루이 20세"로 지지받고 있다. 이에 대해 오를레앙주의는 파리 백작 겸 프랑스 공작 장 도를레앙 (장 4세)이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고 있다. 오를레앙가는 "파리 백작" 칭호를 정통왕당파로부터 인정받았지만, 루이스 알폰소가 사용하는 "앙주 공작" 칭호를 프랑스 공작은 인정하지 않아 프랑스 법원에 제소한 적이 있다(소송은 기각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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