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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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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 진종은 북송의 제4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 동안 과거 제도를 완성하고 문치주의를 추진했으나,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여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요나라의 침략으로 '전연의 맹'을 맺고, 서하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참파쌀을 도입하여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으며, 도교를 장려하고 봉선을 행하는 등 국위 선양을 위한 사업을 추진했지만 국고를 소모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022년에 사망했으며, 아들인 인종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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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진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송 진종 황제의 초상화. [[국립고궁박물원]](타이베이) 소장.
초상화, 국립고궁박물원(타이베이) 소장
조덕창(趙德昌) (968–983), 조원휴(趙元休) (983–986), 조원간(趙元侃) (986–995), 조항(趙恆) (995–1022)
출생일968년 12월 23일
출생지송나라
사망일1022년 3월 23일
사망지송나라
매장지영정릉(永定陵, 현재 공의시, 허난성)
묘호진종(眞宗)
시호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膺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 (1047년 추서)
존호충문광무성명인효황제(崇文廣武聖明仁孝皇帝)
충문광무의천존도보응장위성명인효황제(崇文廣武儀天尊道寶應章威聖明仁孝皇帝)
충문광무감천존도응진우덕상성흠명인효황제(崇文廣武感天尊道應真佑德上聖欽明仁孝皇帝)
체원어극감천존도응진보운문덕무공상성흠명인효황제(體元御極感天尊道應真寶運文德武功上聖欽明仁孝皇帝)
응천존도흠명인효황제(應天尊道欽明仁孝皇帝)
아버지송 태종(太宗)
어머니원덕황후(元德皇后)
재위 정보
즉위997년 5월 8일
퇴위1022년 3월 23일
재위 기간997년 5월 8일 – 1022년 3월 23일 (모두 장헌명숙황후 유씨와 함께)
선대 황제송 태종(太宗)
후대 황제송 인종(仁宗)
섭정장헌명숙황후 유씨
황후 및 배우자
황후장회황후 반씨 (983년 결혼, 989년 사망)
장목황후 곽씨 (991년 결혼, 1007년 사망)
장헌명숙황후 유씨 (1022년 사망)
후궁장의황후 이씨 (1022년 사망)
장혜황후 양씨 (995년–1022년)
자녀
자녀송 인종(仁宗)
조회공주(趙懷公主)
연호
연호함평(咸平) (998–1003)
경덕(景德) (1004–1007)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천희(天禧) (1017–1021)
건흥(乾興) (1022)
기타 정보

2. 생애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 대에 과거제도가 완성되었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 강화를 가져왔으나, 과도한 문관우대로 군사력이 쇠퇴하였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와 싸웠으나,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는 조건으로 화의했다. (전연의 맹)[7]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서하의 덕명(德明)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았다.

진종의 치세는 송나라의 권력 강화와 제국의 강화로 유명하다. 제국은 번영했고 군사력 또한 강화되었다. 그러나 북쪽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는데, 결국 굴욕으로 이어지게 된다.

1004년, 거란족은 송나라에 전쟁을 일으켰다. 진종은 군대를 이끌고 거란족을 공격했다.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1005년 진종은 취안위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세기 이상의 평화를 가져왔지만, 송나라가 요나라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매년 은 과 비단 20만 필 이상을 조공으로 바치는 대가를 치렀다.

1011년에서 1012년 사이에 복건성에서 재배 기간이 짧은 벼 씨앗 3만 부셸을 장강 유역으로 보내 농업을 개선하도록 명령했다.

진종은 그의 궁정에서 도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치세 동안 조씨(趙氏)를 찬양하는 하늘의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1013년부터 1015년까지 황제는 하늘의 최고 통치자로 옥황상제를 숭배하는 공식적인 조서를 발표했다.[1]

참파 벼는 진종의 치세 중 참파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2][3]

1020년, 진종은 병에 걸려 국정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진종의 황후인 유황후가 국정을 처리했다. 그녀는 진종의 남은 2년 동안 비공식적으로 중국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태종의 방침을 계승하여 문치주의를 추진했으나, 그 결과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함평(咸平) 2년(999년)에 서하(西夏)와 결탁한 거란의 성종의 남침을 받았다.[6] 처음에는 소규모 군사 행동이었으나, 경덕(景徳) 원년(1004년)에 성종과 섭정인 승천태후가 친정(親征)을 감행하여 20만이라 칭하는 대군을 남하시켰다.[6] 송나라는 동요했고, 왕흠약(王欽若) 등 많은 관료들은 강남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구준(寇準)은 단호히 항전을 주장했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 진종은 거란에 대한 친정을 결심했다.[6]

송과 거란의 양 친정군은 단주(澶州)(현재 허베이성(河北省)濮陽市)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송은 서하와의 군사적 긴장도 있었기에 거란에만 대군을 사용하는 것의 불리를 이해하고, 진종은 구준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란에 사자를 파견하여 화의가 성립되었다(단연의 맹(澶淵之盟)).[7] 화의에 따라 이후 송은 거란에 매년 은(銀) ·견(絹) 20만 필을 바쳤고, 송이 형, 거란이 아우의 예로써 서로 사귀게 되었다.[7]

이후, 진종은 구준을 왕흠약(王欽若)의 참언으로 파면했다. 또한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년)에는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행하고, 더욱이 궁궐 조영을 하는 등 국위 선양을 목적으로 하는 각 사업을 수행했으나, 국고를 소모시킨 것이 후세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정면에서는 대중상부 5년(1012년), 푸젠성(福建省)|복건로(福建路)에서 재배되던 참파쌀(占城稻)을 강남 각지에 보급한 것이 특필된다. 풍수해에 강하고 단기간에 재배 가능한 참파쌀의 보급은 강남 이남 지역에서 이모작(二毛作)이나 이기작(二期作)을 가능하게 하여 농업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건흥(乾興) 원년(1022년)에 붕어했다. 아들 인종이 즉위하였다.

진종의 능에 있는 무덤 수호자


진종의 능

3. 치세

태종의 아들 진종 대에 과거제도가 완성되었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 강화를 가져왔지만, 지나친 문관 우대로 인해 군사력이 약해졌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나라를 침공했다. 진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결국 요나라에 매년 재물을 보내는 조건으로 화의했다. (전연의 맹세)[7]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서하의 덕명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았다.

진종의 치세는 송나라의 권력 강화와 제국 번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북쪽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의 외교 정책은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1004년, 거란족은 송나라에 전쟁을 일으켰다. 진종은 군대를 이끌고 거란족을 공격했으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1005년 취안위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1세기 이상의 평화가 찾아왔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 이상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7] 이러한 굴욕적인 조약은 송나라의 외교 문제와 재정 고갈을 야기했다.

진종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1011년에서 1012년 사이 복건성에서 재배 기간이 짧은 벼 씨앗 3만 부셸을 장강 유역으로 보내 농업을 개선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참파 벼는 진종의 치세 중 참파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2][3]

진종은 도교를 중요시했다. 그의 치세 동안 조씨(趙氏)를 찬양하는 하늘의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1013년부터 1015년까지 황제는 하늘의 최고 통치자로 옥황상제를 숭배하는 공식적인 조서를 발표했다.[1]

1020년, 진종은 병에 걸려 국정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진종의 황후인 유황후가 섭정으로 활동했다.

태종의 문치주의 정책을 계승했으나, 군사력 약화를 초래했다. 999년 서하(西夏)와 결탁한 거란의 성종이 남침했다.[6] 1004년 성종과 승천태후가 친정(親征)을 감행하여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6] 송나라는 동요했고, 왕흠약(王欽若) 등은 강남 천도를 주장했으나, 구준(寇準)은 항전을 주장하여 진종은 거란에 대한 친정을 결심했다.[6]

송과 거란 양군은 단주(澶州)(현재 허베이성(河北省)濮陽市)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송은 서하와의 군사적 긴장도 있었기에 진종은 구준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란과 화의를 맺었다(단연의 맹(澶淵之盟)).[7] 화의에 따라 송은 거란에 매년 은(銀) 100000냥·견(絹) 20만 필을 바치고, 송이 형, 거란이 아우의 관계로 맺어졌다.[7]

이 화의는 서하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서하는 독자적으로 송에 대항하는 것의 한계를 이해하고 송과의 화의를 맺었다.

이후 진종은 왕흠약(王欽若)의 참언으로 구준을 파면했다. 1008년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행하고 궁궐 조영을 하는 등 국위 선양 사업을 수행했으나, 국고를 소모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내정 면에서는 1012년 푸젠성(福建省)|복건로(福建路)에서 재배되던 참파쌀(占城稻)을 강남 각지에 보급하여 농업 생산을 크게 증가시켰다.

1008년, 왕흠약과 도사들이 꾸민 천서 사건으로 대중상부로 개원하고, 봉선의 의식을 거행했다. 진종은 태종 때부터 중용되었던 도사 장수진을 존숭하여 익성보덕진군이라는 칭호를 주고, 1014년 그의 상을 세웠다. 그 후에도 도교를 존숭하여 도사에 대한 면세와 도관 건축을 하고, 도교 경전 정리를 명하여 1019년 『대송천궁보장』을 완성했다.

4. 연호

진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서력998년999년1000년1001년1002년1003년1004년1005년1006년1007년
간지무술기해경자신축임인계묘갑진을사병오정미
연호함평 원년2년3년4년5년6년경덕 원년2년3년4년
진종11년12년13년14년15년16년17년18년19년20년
서력1008년1009년1010년1011년1012년1013년1014년1015년1016년1017년
간지무신기유경술신해임자계축갑인을묘병진정사
연호5년
대중상부 원년
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천희 원년
진종21년22년23년24년25년
서력1018년1019년1020년1021년1022년
간지무오기미경신신유임술
연호2년3년4년5년건흥 원년


5. 존호, 시호, 묘호

999년 8월에 숭문광무성명인효황제(崇文廣武聖明仁孝皇帝)라는 존호를 받았고, 1008년 6월에는 숭문광무의천존도보응장감성명인효황제(崇文廣武儀天尊道寶應章感聖明仁孝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 1012년 10월에는 숭문광무감천존도응진우덕상성흠명인효황제(崇文廣武感天尊道應眞佑德上聖欽明仁孝皇帝)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1019년 7월에는 본원어극감천존도응진보운문덕무공상성흠명인효황제(体元御極感天尊道應眞寶運文德武功上聖欽明仁孝皇帝)라는 존호를, 1022년 2월에는 응천존도흠명인효황제(應天尊道欽明仁孝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1]

사후 시호는 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文明武定章成元孝皇帝)이며, 인종 때인 1047년에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로 추시되었다. 묘호는 '''진종'''(眞宗)이다.[1]

6. 재상

순서이름재임 기간칭호자(字)봉호시호
1여단(呂端)997년 ~ 998년참지정사(參知政事)

감수국사(監修國史)
역직
(易直)
-정혜
(正惠)
2장제현(張斉賢)998년 ~ 1000년--문정
(文定)
3이항(李沆)998년 ~ 1004년감수국사(監修國史)
참지정사(參知政事)
태초
(太初)
-문정
(文靖)
4여몽정(呂蒙正)1001년 ~ 1003년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성공
(聖功)
허국공
(許國公)
문목
(文穆)
5향민중(向敏中)1001년 ~ 1002년
1012년 ~ 1020년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상지
(常之)
-문간
(文簡)
6필사안(畢士安)1004년 ~ 1005년감수국사(監修國史)
참지정사(參知政事)
인수
(仁叟)
-문간
(文簡)
7구준(寇準)1004년 ~ 1006년
1019년 ~ 1020년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평중
(平仲)
애국공
(萊國公)
충민
(忠愍)
8왕단1006년 ~ 1017년참지정사(參知政事)

감수국사(監修國史)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자명
(子明)
위국공
(魏國公)
문정
(文正)
9왕흠약(王欽若)1017년 ~ 1019년정국
(定國)
기국공
(冀國公)
문목
(文穆)
10정위(丁謂)1020년 ~ 1022년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위지
(謂之)
진국공
(晉國公)
-
11이적(李迪)1020년참지정사(參知政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복고
(復古)
-문정
(文定)
12봉정(馮拯)1020년 ~ 1022년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도제
(道濟)
위국공
(魏國公)
문의
(文懿)


7. 가족 관계


  • 조부: 선조(宣祖) 소무황제(昭武皇帝) 조홍은
  • 조모: 소헌황후(昭憲皇后) 두씨(杜氏)
  • 부친: 태종(太宗) 광효황제(廣孝皇帝) 조경
  • 모친: 원덕황후 이씨(李氏)


진종은 여러 황후와 후궁을 두었으며, 자녀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이름비고
정실장회황후 반씨
황후장목황후 곽씨슬하에 차남 도헌태자 조우(9세에 요절)
황후장헌명숙황후 유씨
측실장의황후 이씨슬하에 육남 인종 조전(제4대 황제), 황녀 회국공주(정일제희)[8]
측실장혜황후 양씨인종의 양모
측실두총진(귀비)슬하에 황녀 노국장공주(소회제희) 조지충(어릴 적 출가하여 도사)[8]
기타귀비 심씨(심륜의 손녀), 현비 조씨(조빈의 딸), 현비 진씨, 순용 대씨(대흥의 딸), 미인 서씨, 재인 진씨, 전정 장씨, 장씨, 왕씨
생모 불명장남 조제(요절), 삼남 조기(요절), 사남 조지(요절), 오남 조기(요절)


7. 1. 황후


  • 장회황후 반씨(潘氏, 968년 ~ 989년)는 추존 황후이다. 정무혜왕 반미(潘美)의 딸이다.[9][10]
  • 장목황후 곽씨(郭氏, 975년 ~ 1007년)는 997년부터 1007년까지 황후였다. 팽충무왕 곽수문(郭守文)과 내국태부인 양씨(梁氏)의 딸이다.[11]
  • 장헌명숙황후 유씨(劉氏, 968년 ~ 1033년)는 1012년부터 1022년까지 황후였다. 위무의왕 유통(劉通)과 서국태부인 농씨(龐氏)의 딸이다.[12]
  • 장의황후 이씨(李氏, 987년 ~ 1032년)는 신비(宸妃)로 추존 황후이다. 경도군왕 이인덕(李仁德)과 월진국태부인 동씨(董氏)의 딸이다.[13][14]
  • 장혜황후 양씨(楊氏, 984년 ~ 1036년)는 숙비(淑妃)로 추존 황후이다. 양지엄(楊知儼)의 딸이다.[15][16]

7. 2. 후궁

봉호시호 (봉호)이름 (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귀비소정귀비 (昭靜貴妃)심씨 (沈氏)황태비994년 ~ 1076년[17]
현비귀비 (貴妃)두경진 (杜瓊眞)오진대사? ~ 1046년진종 사후 출가.
수원현비 (賢妃)조씨 (曹氏)? ~ 1026년
귀비 (貴妃)진씨 (陳氏)
사의현비 (賢妃)진씨 (陳氏)? ~ 996년진종 즉위 전 사망.
귀인순용 (順容)대씨 (戴氏)
등국부인미인 (美人)서씨 (徐氏)난릉군부인? ~ 1008년
귀인 (貴人)진씨 (陳氏)
장심미 (張甚微)온성황후의 고모. 작위 미상.
장씨 (張氏)작위 미상.


7. 3. 황자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별칭비고
1온왕(溫王)조제(趙禔)조졸함.
2주왕(周王)도헌황태자
(悼獻皇太子)
조현우(趙玄祐)
조우(趙祐)
995년 ~ 1003년장목황후 곽씨[18]
3창왕(昌王)조기(趙祇)조졸함.
4신왕(信王)조지(趙祉)조졸함.
5흠왕(欽王)조기(趙祈)조졸함.
6황태자(皇太子)조수익(趙受益)
조정
1010년 ~ 1063년장의황후 이씨3남 13녀
+ 1양자
[19]제4대 황제 인종.


7. 4. 황녀

순서봉호(공주)봉호(제희)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1혜국대장공주
(惠國大長公主)
정일대장제희
(靜一大長帝姬)
장의황후 이씨요절함.
2승국대장공주
(升國大長公主)
소회대장제희
(昭懷大長帝姬)
소회(昭懷)조지충(趙志冲)? ~ 1047년귀비 두씨[20]출가함.


8. 평가

진종의 치세는 송나라의 권력과 제국을 강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제국은 번영했고 군사력도 강해졌다. 그러나 북쪽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의 외교 정책은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1004년, 거란족은 송나라에 전쟁을 일으켰고, 진종은 군대를 이끌고 맞섰다. 초기에는 성공했지만, 1005년 취안위안 조약을 체결하면서 송나라는 요나라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 이상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굴욕적인 조약은 송나라의 외교 문제와 제국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태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문치주의를 추진했으나, 이는 군사력 약화를 초래했다. 999년에는 서하(西夏)와 동맹을 맺은 거란의 성종이 침입했다.[6] 1004년에는 성종과 승천태후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6] 송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왕흠약(王欽若) 등은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구준(寇準)의 강력한 항전 주장으로 진종은 직접 전장에 나섰다.[6]

송과 거란 군대는 단주(澶州)(현재 허베이성(河北省)濮陽市)에서 대치했다. 송나라는 서하와의 군사적 긴장 때문에 거란과의 장기전을 원치 않았고, 진종은 구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란과 화의를 맺었다(단연의 맹(澶淵之盟)).[7] 이 조약으로 송나라는 거란에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고, 송나라가 형, 거란이 아우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7]

이후 진종은 왕흠약(王欽若)의 모함으로 구준을 파면했다. 1008년에는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궁궐을 짓는 등 국위 선양 사업을 벌였으나, 이는 국고를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내정 면에서는 1012년 푸젠성(福建省)|복건로(福建路)에서 재배되던 참파쌀(占城稻)을 강남 지역에 보급하여 농업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킨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참파 벼는 진종의 치세 중 참파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2][3] 가뭄과 병충해에 강하고 생육 기간이 짧은 참파쌀은 강남 지역의 이모작(二毛作)과 이기작(二期作)을 가능하게 하여 식량 생산을 크게 늘렸다.

그는 도교를 중시하여, 재위 기간 동안 하늘의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선전하고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1013년부터 1015년까지는 옥황상제를 하늘의 최고 통치자로 숭배하는 조서를 발표했다.[1]

9. 기타

진종의 치세는 송나라의 권력 강화와 제국의 번영으로 유명하지만, 북쪽의 거란족과의 외교 정책은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1004년 거란족의 침입에 맞서 진종은 군대를 이끌었으나, 1005년 취안위안 조약을 체결하여 1세기 이상의 평화를 얻는 대가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 이상을 조공으로 바치게 되었다.[1] 이는 송나라의 외교 문제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진종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1011년에서 1012년 사이에 복건성에서 재배 기간이 짧은 벼 씨앗 3만 부셸을 장강 유역으로 보냈고, 참파 벼를 참파에서 도입했다.[2][3]

도교를 중시한 진종은 옥황상제를 숭배하는 조서를 발표하고,[1]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또한 도사 장수진(張守真)을 존숭하고 도관 건축과 도교 경전 정리를 지원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유물 중 일부는 진종의 소유였던 것으로, 마홍쿠이(馬鴻逵)가 발견했으나 공개하지 않았다. 이 유물들은 마홍쿠이 사후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었다.[4]

태종의 문치주의 정책을 계승했으나, 군사력 약화로 999년 거란 성종의 침입을 받았다.[6] 1004년 성종과 승천태후의 친정으로 송나라는 동요했고, 구준(寇準)의 항전 주장으로 진종은 친정을 결심했다.[6] 단주(澶州)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진종은 단연의 맹(澶淵之盟)을 맺어 매년 은과 비단을 바치고 형제 관계를 맺었다.[7]

이후 진종은 왕흠약(王欽若)의 참언으로 구준(寇準)을 파면하고, 1008년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행하는 등 국위 선양 사업을 펼쳤으나 국고를 소모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1012년 참파쌀(占城稻)을 강남에 보급하여 농업 생산을 크게 증가시킨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1008년 왕흠약과 도사들이 꾸민 천서 사건으로 연호를 대중상부(大中祥符)로 바꾸고 봉선의 의식을 거행했다. 진종은 도사 장수진을 익성보덕진군(翊聖保徳眞君)으로 칭하고 상을 세웠으며, 도교를 존숭하여 도사에 대한 면세와 도관 건축, 도장(道藏) 정리를 지원했다.

참조

[1] 서적 God's Chinese Son New York 1996
[2] 서적 A Concrete Panoply of Intercultural Exchange: Asia in World History M.E. Sharpe 1997
[3] 서적 The Earth and Its Peoples: A Global History, Brief Edition, Volume I: To 1550: A Global History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08-02-01
[4] 간행물 China archeology and art digest, Volume 3, Issue 4 Art Text (HK) Ltd. 2000
[5] 웹사이트 진종[宋]
[6] 서적 (제목 없음) 2020
[7] 서적 (제목 없음) 2020
[8] 서적 宋会要輯稿
[9] 인물 거국부인(莒國夫人)/장회황후(莊懷皇后)
[10] 인물 진종 즉위 후에 황후로 추존됨.
[11] 인물 노국부인(魯國夫人)/진국부인(秦國夫人)/장목황후(莊穆皇后)
[12] 인물 수의(修儀)/응천황태후(應天皇太后)/장헌명숙황후(莊獻明肅皇后)
[13] 인물 숭양현군(崇陽縣君)/순용(順容)/장의황후(莊懿皇后)
[14] 인물 사후 인종의 생모 자격으로 황후로 추존됨.
[15] 인물 황태비(皇太妃)/황태후(皇太后)/보경궁태후(保慶宮太后)/장혜황후(莊惠皇后)
[16] 인물 황태후 유씨 사후 황태후로 존봉. 사후 인종의 양모 자격으로 황후로 추존됨.
[17] 인물 조광윤 때 중서시랑 평장사, 송 태종 때 상서좌복야를 지낸 재상 심륜의 손녀, 광록소경 심계종의 딸
[18] 인물 신국공(信國公)/주도헌왕(周悼獻王)
[19] 인물 경국공(慶國公)/수춘군왕(壽春郡王)/승왕(昇王)
[20] 인물 위국장공주(衛國長公主)/청허영조대사(淸虛靈照大師)/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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