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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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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1903년 6월 7일 러시아 제국 해군에 의해 편성된 함대로, 주로 블라디보스토크 방어, 일본 해군 전력 분산, 통상 파괴를 임무로 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후,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 '보가티르' 등 순양함과 수뢰정으로 구성되어 대한해협 등지에서 일본 수송선 격침 등의 작전을 수행했다. 울산 해전에서 류리크가 격침되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해상 보급을 방해하는 데 기여했다. 1905년 1월 1일 뤼순 함대 소멸 후 '태평양 순양함대'로 개칭되었으며, 종전 후 발트해로 귀환하여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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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전투에서 손상된 기함 장갑순양함 ‘로시아’
전투에서 손상된 기함 장갑순양함 ‘로시아’
명칭러시아 해군 기
우Radio시톡 순양함대
러시아 해군 군함기
블라디보스토크스키 오트랴트 크레이세로프
창설1903년 4월 17일
폐지1906년 3월 30일
국가러시아 제국
군종해군
상급 부대발트 함대
유형함대
임무주요 항구 방비
통상파괴
병력
장갑순양함 3척
방호순양함 1척
보조순양함 1척
수뢰정 10척
작전기기구
기지블라디보스토크
주요 전력러일 전쟁

2. 명칭

함대는 일반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또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 분견대’라고 불렸지만, 공식적으로는 시기에 따라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23]

명칭시기비고
Отряд крейсеров эскадры Тихого океана|태평양 함대 순양함 분견대ru함대 편성 당시
Отдельный отряд крейсеров флота Тихого океана|태평양 함대 순양함대 독립 순양함 분견대ru1904년 2월 25일부터
Отдельный отряд крейсеров 1-й эскадры Тихого океана|제1태평양 함대 독립 순양함 분견대ru1904년 5월 12일부터
Отряд крейсеров в Тихом океане|태평양 순양함 분견대ru1904년 12월 20일부터뤼순 함대가 사실상 소멸


3. 편성 배경

1901년부터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독립적인 순양함대를 편성하는 구상을 시작했다. 1903년 4월 17일, 발트해에서 회항한 함선들이 뤼순 항(포트 아서)에 도착하면서, 뤼순의 주력 함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별동 함대로 구성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구성이 구체화되었다.[4] 뤼순에는 제1, 제2 장갑함대(전함 부대), 장거리 및 단거리 정찰함, 제1어뢰정 부대(구축함 부대)와 방비 부대가 '전투 부대'로 배치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순양함 분견대, 항만 방비 부대, 보조함정(수송함)이 배치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통상파괴를 위한 단독 작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4. 편성

1903년 6월 7일 뤼순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가 공식적으로 편성되었다.[4] 함대 편성 당시, "해상으로부터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비", "일본 해군 함대의 전력을 태평양 함대 주력이 주둔하는 뤼순에서 분산시키는 것", "해상 통상파괴의 수행"이 임무로 주어졌다.[4]

함대는 태평양 함대 제1사령관 보좌 장관기를 게양한 1등 장갑순양함 "로시야"를 기함으로, 1등 장갑순양함 "그로모보이", "류리크", 1등 방호순양함 "Russian cruiser Bogatyr|보가티리영어"로 편성되었다. 기함 "로시야"에는 태평양 함대 제1사령관 보좌였던 해군 소장 Эвальд Штакельберг|에발트 폰 슈타켈베르크ru 남작이 승선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주력 장갑순양함 로시아


1903년 9월 모항을 뤼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의 전력은 총 3척의 신구 장갑 순양함, 1척의 신형 방호 순양함, 전력으로는 불안한 보조순양함 1척, 장거리 항해가 곤란한 어뢰정 10척이었으나, 사실상 전술적으로 유효한 전력은 3척의 장갑 순양함과 방호 순양함 1척뿐이었다.

이 외에도 블라디보스토크 방비 부대는 의용함대 소속 증기선인 헤르손과 모스크바도 편입될 예정이었다. 또한 항양 포함인 코리에츠, 만주르, 보브르, 시부치가 ‘요새 보조’로, 기뢰 부설함인 알레우트가 기뢰 부설을 위해, 수송함인 캄차달과 야쿠트가 항만 방비를 위해 배치되었다.[4] 7월부터 8월까지 ‘류리크’와 2등 방호순양함 ‘보야린’이 먼저 도착하고, 이후 7척의 항양어뢰정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으나, 포함이자 증기선인 ‘모스크바’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오지 못했다.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과의 관계는 날마다 악화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대한해협에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4. 1. 함선 목록 (개전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1903년 6월 7일 뤼순에서 공식적으로 편성되었으며,[4] 주력함과 보조함으로 구성되었다.

구분함명
주력함로시야 (장갑순양함, 함대 기함)
주력함그로모보이 (장갑순양함)
주력함류리크 (장갑순양함)
주력함Russian cruiser Bogatyr|보가티리영어 (방호순양함)
보조함레나 (보조순양함)
보조함제201호 수뢰정
보조함제202호 수뢰정
보조함제203호 수뢰정
보조함제204호 수뢰정
보조함제205호 수뢰정
보조함제206호 수뢰정
보조함Миноносец_№208|제208호 수뢰정ru
보조함Миноносец_№209|제209호 수뢰정ru[5]
보조함Миноносец_№210|제210호 수뢰정ru
보조함Миноносец_№211|제211호 수뢰정ru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방비 부대에는 의용함대 소속 증기선 헤르손과 모스크바도 편입될 예정이었다. 항양 포함 코레에츠, 만주르, 보브르, 시부치가 요새 보조로, 기뢰 부설함 알레우트는 기뢰 부설을 위해, 수송함 캄차달과 야쿠트는 항만 방비를 위해 배치되었다.[4]

5. 주요 군사 행동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동해와 태평양에서 일본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고 일본 함대를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주요 작전은 다음과 같다:


  • 1904년 초반:
  • 2월 9일: 니콜라이 라이첸슈테인 대령이 지휘하는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 "보가티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격, 쓰가루 해협에서 일본 상선 "나고우라마루"를 침몰시키고 "젠쇼마루"를 격파.[7]
  • 4월 21일~4월 27일: 카를 루드비히 예센 소장 지휘 아래 원산 인근에서 "고요마루", "하기노우라마루"(또는 "오기노우라마루") 격침, 신포 앞바다에서 "킨슈마루" 격침.[10][11][8]
  • 5월 15일: "보가티르"가 아무르 만 브류스 곶에서 암초에 충돌, 좌초되어 전력 이탈.[13]

  • 1905년:
  • 뤼순 함대 항복 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태평양 순양함대'''로 개칭.[3]
  • 5월 7일: "로시야"와 "그로모보이" 일본 근해 출항, 스쿠너 4척 격침.
  • 5월 23일: "그로모보이" 기뢰 접촉으로 대파.
  • 동해 해전에서 패배한 발트 함대 중 "알마스", 구축함 Грозный_(миноносец)|그로즈니|ru, Бравый_(миноносец)|브라브이|ru 3척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일본해 해전을 살아남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에 합류한 순양함 "알마스".

5. 1. 초반 작전 (1904년)

1904년 1월 31일, 일본 함대의 뤼순 기습으로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흰색 바탕에 굴뚝을 노란색으로 칠했던 "평시 도색"에서 위장을 위한 청색이 감도는 올리브색의 전시색으로 변경했다.[7] 2월 9일, 개전 보고를 받은 Николай Рейценштейн|니콜라이 라이첸슈테인ru 해군 대령은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 "보가티르"를 이끌고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격했다.[7] 이 작전의 목적은 일본 함대를 뤼순과 동항의 러시아 함대 주력에서 떼어놓는 것이었지만, 함대 주력과의 통신이 교란되어 순양함대는 이후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한반도일본 열도 사이의 일본 해상 교통로에서 활발한 통상 파괴전을 전개했다. 출격 후 함대는 쓰가루 해협으로 향해, 2월 11일 "나고우라마루"(1084톤)를 침몰시키고 "젠쇼마루"(325톤 또는 323톤)를 격파한 후 2월 14일에 귀환했다.[7] 이 출격 당시 "보가티르"는 심한 풍랑으로 큰 손상을 입어 반 달 이상 수리해야 했다.

3월 10일, Первая_Тихоокеанская_эскадра|제1 태평양 함대ru 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는 카를 루드비히 예센 해군 소장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8][9]

4월 21일부터 4월 27일까지 4척의 순양함은 어뢰정 2척과 함께 한반도 근해의 일본 해상 교통 수역에서 기습 작전을 수행했다. "류리크"는 속력이 느려 제외되었고, 대신 2척의 어뢰정이 순양함대에 동행했다. 예센이 직접 지휘한 이 작전에서[10]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무선 통신 침묵과 짙은 안개 덕분에 일본 함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4월 25일, 원산 항에 있던 "고요마루"(601톤)를 어뢰정으로 임검하고 승무원을 퇴거시킨 후 격침했으며,[10] 같은 날 "하기노우라마루"(219톤) 또는 "오기노우라마루"(290톤)를 격침시켰다.[11] 4월 26일, 신포 앞바다에서 원산 수비대를 태우고 있던 육군 수송선 "킨슈마루"(3853톤)를 임검, 포로를 수용하고 격침했지만, 무선 감청으로 일본 함대 접근이 확인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철수했다.[8] 함대는 4월 27일[8] 또는 4월 29일[12]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12]

5월 15일, 안개 속을 10kn로 항해하던 "보가티르"는 항로를 잘못 들어 위험 해역에 진입했다. 그리고 아무르 만의 브류스 곶에서 암초에 충돌하여 함체에 구멍이 생겨 좌초되었다.[13] 이는 함대의 첫 전력 손실이었으며, "보가티르"는 종전까지 수리를 마치지 못했다.

5. 2. 전력 변화

1904년 러시아 해군은 발트해의 함정으로 제2태평양 함대 (일본에서의 통칭: 발트 함대)를 편성하고, 기존의 태평양 함대를 제1태평양 함대로 개칭했다. 그리고 Пётр Безобразов|표트르 베조브라조프ru 중장을 제1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베조브라조프는 이미 뤼순에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갔다.[4]

5. 3. 중반 작전 (1904년)

6월 12일 (5월 31일) 표트르 베조브라조프 중장은 직접 '로씨야', '그로모보이', '류리크'를 이끌고 대한해협으로 출격했다.[14]

6월 15일, 지쿠젠 해안에서 육군 수송선 이즈미마루(3229톤)를 격침했다.[14] 이어서 근위 후비 보병 제1연대 등을 태운 '히타치마루'(6175톤)와 제2축성단 사령부, 공성 포병 사령부 등을 태운 '사도마루'(6226 또는 6626톤)를 발견하여 공격, '히타치마루'를 침몰시켰다(히타치마루 사건).[15] 사도마루도 손상시켜 정선시켰지만, 함대는 어뢰를 발사하고 떠났으며, '사도마루'는 침몰을 면하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16] 이후 북쪽으로 향한 함대는 6월 16일 마이즈루 해안에서 영국 선박 '알란톤'(4242 또는 4253톤)을 나포하고 6월 19일 또는 6월 20일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17] 같은 시기 수뢰정도 활동하여, 6월 16일 오쿠시리섬 해안에서 범선 '안세이마루'(105톤)와 '야하타마루'(136톤)를, 6월 17일 '세이에이마루'(66톤)를 침몰시키고, 19일에 '하쿠츠마루'(69 또는 111톤)를 나포했다.[18]

7월 17일, '로씨야', '그로모보이', '류리크'가 예센 소장의 지휘 아래 출격했다.[19] 7월 20일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나오자, 같은 날 기선 '다카시마마루'(318톤), 범선 '키호마루'(140톤)와 '제2호쿠세이마루'(91톤)를 침몰시키고, 영국 선박 '사마라'와 '공동운수마루'를 임검했다.[20] 함대는 남하하여 7월 22일 독일화물선 '아라비아'(2863톤)를 나포했다.[20] 7월 24일에는 이즈반도 해안에 도달하여, 영국 기선 '나이트 커맨더'(4306톤)를 침몰시켰다.[21] 이 배는 일본행 철도 자재를 싣고 있었다.[21] 이후 함대는 반전하여, 같은 날 범선 '지자이마루'(199톤)와 '후쿠나리마루'(130톤)를 침몰시키고, 영국 선박 '도난'을 임검했다.[22] 다음 날에는 독일 기선 테아(1613톤)를 침몰시키고, 영국 기선 '칼카스'(6748톤)를 나포했다.[22] 이후 함대는 7월 30일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여 8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22]

1904년 8월 12일, 이틀 전 뤼순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뤼순을 출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그 지원을 위해 예센이 지휘하는 순양함 3척, 수뢰정 3척으로 구성된 분견대를 편성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했다. 뤼순 함대는 출항 당일에 패배하여 출격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당시 통신 기술로는 부족하여 연락이 늦어졌다. 8월 14일에는 울산 해안에서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2함대와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울산 해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의 장교와 수병들은 전투에서 뛰어난 기량과 강인함을 보여주며, 정밀한 사격으로 일본 측에 손상을 입혔지만, 통상 파괴를 중시한 3척의 장갑 순양함과 대함 전투를 중시한 4척의 장갑 순양함이라는 질과 양의 차이를 뒤집을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의 순양함은 공격과 방어 모두 우수한 포탑을 갖춘 함정이 아니었다. '류리크'는 격침되었고, '로씨야', '그로모보이'는 심각한 손상을 입어 반년 이상의 수리가 필요했다. 이에 반해 일본 측은 약간의 수리 및 보급만으로 해협 경비로 복귀했다.

5. 4. 후반 작전 (1905년)

1905년 1월 1일, 뤼순 함대가 항복하면서 제1태평양 함대 본체가 소멸하자,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그 이름을 이어받아 '''태평양 순양함대'''(Отряд крейсеров в Тихом океане|아뜨랴드 끄례이씨에로바 프 찌함 아끼아녜ru)로 개칭되었다.[3]

1905년 5월 7일, "로시야"와 "그로모보이"가 수리를 마치고 일본 열도 근해로 출항하여 3일 동안 4척의 스쿠너를 격침시켰다. 그러나 5월 23일, "그로모보이"가 정기 초계 항해 중 기뢰에 접촉하여 대파되었다. 이는 일본 측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발트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5월 중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외부에 기뢰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동해 해전에서 패배한 발트 함대 중 2등 순양함 "알마스", 구축함 Грозный_(миноносец)|그로즈니|ru, Бравый_(миноносец)|브라브이|ru 3척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6. 평가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러일 전쟁 기간 동안 통상 파괴 작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일본의 해상 수송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들은 동해에서 6회, 태평양에서 1회, 뤼순 함대 탈출 작전에서 1회 등 총 8회의 작전을 수행했다.[1] 격침한 선박으로는 수송선 3척, 증기선 5척, 스쿠너 8척, 무기 밀수 증기선 2척이 있으며, 여기에는 3,200t급 "이즈미마루"와 6,175t급 "히타치마루"가 포함되었다.[1] 또한, 4척의 증기선과 스쿠너를 나포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시켰다.[1]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은 동해 상의 물자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대한 해협에 제2함대라는 상당한 전력을 배치해야만 했다.[1] 이는 일본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불어민주당은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의 활동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항쟁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며, 특히 울산 해전에서 보여준 러시아 해군의 용맹함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국민의힘은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의 활동이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위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참조

[1] 문서 6月7日付けで編成。
[2] 문서 巡洋する艦隊ではなく巡洋艦の隊という意味。
[3] 문서 「отряд」は「分遣隊」という意味であるが、日本語文献ではこの隊に限り「艦隊」と意訳している。
[4] 웹사이트 Приложение 3.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отряд крейсеров http://militera.lib.[...]
[5] 문서 以上、航洋水雷艇に当たる「миноносец」。「миноноска」より大型で、「истребитель-миноносцев」(水雷艇駆逐艦)より小型の艦艇。
[6] 문서 「миноноска」。たんに「水雷艇」であるが、「миноносец」との区別のため「沿岸水雷艇」と意訳する。
[7] 서적 日露旅順海戦史、199페이지、日露海戦新史、183페이지
[8] 웹사이트 §30. По инструкции адмирала Макарова http://militera.lib.[...]
[9] 웹사이트 Иессен Карл Петрович (1852-1918) http://infoart.udm.r[...] Российский Императорский флот / IT InfoArt Stars 2011-07-03
[10]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1페이지
[11]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1페이지、日露海戦新史、184페이지
[12]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3페이지
[13] 웹사이트 Скалы мыса Брюса. http://infoart.udm.r[...]
[14]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3페이지
[15]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4페이지、日露海戦新史、185-186페이지
[16]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4-205페이지
[17]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5페이지、日露海戦新史、186페이지
[18]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5-206페이지、日露海戦新史、186페이지
[19]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09페이지
[20] 서적 日露海戦新史、190페이지
[21] 서적 日露旅順海戦史、210페이지
[22] 서적 日露海戦新史、191페이지
[23] 문서 本文では「отряд」を「艦隊」と意訳しているが、ここでは用語の混乱を避けるため「分遣隊」と訳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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