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모보이 (장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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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로모보이는 1900년 러시아 제국 해군에 배치된 장갑순양함이다. 1890년대 후반 설계되어, 12,350톤의 만재 배수량, 20노트의 속도, 234mm 주포 4문과 152mm 부포 16문을 장착했다. 3축 추진 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러시아 해군 군함으로, 1901년 장기간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우수한 항해 능력을 입증했다.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울산 해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수리를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05년 반란과 1911년 좌초 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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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모보이 (장갑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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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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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경력 | |
국가 | 러시아 제국 |
함명 | 그로모보이 () |
건조 | 발트 조선소, 상트페테르부르크 |
기공 | 1897년 6월 14일 |
진수 | 1899년 5월 8일 |
취역 | 1899년 11월 |
운명 | 1922년 7월 1일 고철로 매각 |
특징 | |
함 종류 | 장갑순양함 |
추진 | 3축, 3 수직 3단 팽창 증기 엔진, 32 Belleville 수관 보일러 |
항속 거리 | at |
승무원 | 874명 (장교 및 승조원) |
무장 | 4 × 1 - /45 포 16 × 1 - /45 포 24 × 1 - /50 포 12 × 1 - /43 포 18 × 1 - /23 포 4 × 어뢰 발사관 |
장갑 | 하비 갑옷 수선 장갑대: 갑판: 조타실: |
2. 설계 및 특징
"그로모보이"는 러시아의 개량형으로, 1895년 니콜라이 2세의 희망으로 추가 건조가 결정되었다.[49] 새로운 대양 순양함 설계를 위해 4가지 안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배수량 15,385t에 폐쇄 포탑을 갖춘 대형 장갑 순양함이었다.[31] 통상 파괴와 함대 행동 모두에 적합한 설계는 포탑 순양함(башенный крейсеръru)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황제의 희망과 공기 단축 문제로 "러시아"와 같은 현측 포좌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설계는 재검토되었으며, "러시아"의 설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은 선체뿐이었다.[50] 승인되지 않은 15,000t급 포탑 순양함[50]은 "페레스베트"급 함대 장갑함으로 개발이 이어졌다.[31].
초기 설계에서는 크루프 장갑으로 방어 장갑 두께를 줄여 중량 132t을 경감하고, 203mm 및 152mm 포좌에 방어를 적용할 계획이었다. 선체는 목재를 금속으로 변경하는 등 개선이 이루어졌으나, 장갑 제조사의 크루프 강 생산 능력 부족으로 하비 강이 혼용되었다.[31]
동력 장치는 "러시아"의 순항용 기관 대신 동일 출력 기관 3기를 탑재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 최초로 동일 출력 기관 3기를 갖춘 장갑선이 되었다. 기관 출력은 14,500로, 속력 19kn가 예상되었다.[31]. 배수 장치는 전용으로 개발되었고,[51] 연료와 식량 적재량 확대로 보급 없이 약 100일간 단독 행동이 가능했다.[52]
포격 방어는 이전 "류리크", "러시아"보다 개선되었다. 주포인 45구경 203mm 포 4문, 16문 등 포격 무장은 대부분 포곽에 수납되었고, 포탑은 채택되지 않았다. 단, 203mm 및 152mm 포 포곽에는 포탑형 방패가 장비되었다.[31] 선미 포곽은 방어 장갑이 없었으나, 포수 무방비 문제는 실전까지 지적되지 않았다.[50].
"그로모보이"는 전체 전장 약 146.61m, 최대 폭 약 20.91m, 흘수 약 7.92m였다. 배수량은 설계보다 약 96524.46kg 많은 약 12654865.38kg였으며, 생물 부착 방지를 위해 나무와 구리로 선체를 덮었다.[3]
2. 1. 설계 배경
그로모보이는 먼저 건조된 장갑순양함 로시아의 개량형으로 설계되었다. 1895년 7월 7주년 계획이 제출되자 니콜라이 2세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로시아'급 순양함이 한 척 더 건조되게 되었다.[94]새로운 대양 순양함 건조에는 4가지 설계 변경안이 고려되었다. 그중 하나는 배수량을 15,385톤으로 늘리고 둘레 포탑을 갖춘 대형 장갑순양함 계획안이었다.[91] 개발 과정에서 통상파괴 작전과 함대 작전에 모두 적합한 설계는 포탑 순양함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당초 요구된 '로시아'의 발전형으로는 채택되지 못했다. 황제의 강한 희망과 공사 기간 단축이 주된 이유였으며, 결국 로시아와 같이 현측에 포좌를 늘어놓은 포곽 순양함이 건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는 전반적으로 검토되었으며, '로시아'의 설계를 그대로 간직한 것은 거의 선체뿐이었다.[95] 승인되지 않은 15,000톤급 포탑 순양함도 개발이 진행되어 페레스베트급 전함이 되었다.
그로모보이의 초기 설계에서는 새로운 크루프 강을 채용하여 방어 장갑 두께를 줄이고 무게 132톤을 절감함으로써 203mm 포좌뿐만 아니라 152mm 포좌에도 방어를 계획했다. 선체 설계도 변경하여 목재 부분을 금속으로 바꾸는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로시아'와는 전혀 다른 설계가 되며, 장갑 제조를 담당한 이조르스키예 공장에서는 크루프 강을 필요한 만큼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해군 기술위원회의 요구와는 달리 장갑은 크루프 강과 하비 강을 혼용하게 되었다.[91]
동력 장치는 '로시아'에 탑재된 중간 순항용 기관 대신 모두 같은 출력을 내는 기관 3개를 탑재했다. 그리하여 그로모보이는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같은 출력을 내는 기관 3기를 탑재한 최초의 무장 함선이 되었다. 기관 출력은 14,500 지시 마력으로 계획되어, 속력은 19노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배수 장치는 전용으로 개발되었다.[96] 또한 연료와 식량 적재 능력을 확대하여 보급 없이 자립하고 단독 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 기간을 약 100일로 늘였다.[97]
이전의 류리크와 로시아에 비해 함포 공격 방어가 개선되었다. 주포는 45구경 203mm 포 4문이지만, 16문의 카네식 45구경 152mm 포를 비롯한 포, 공병 장비의 대부분은 포곽에 포함되었으며, 포탑은 채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203mm 포 및 152mm 포의 포곽에는 포탑형의 방순이 장착되었다. 선미 포곽에서는 방어 장갑을 없앴지만, 포수가 기대했던 자기 방어 대책 문제는 실전에서 문제가 생길 때까지 지적되지 않았다.[95]
2. 2. 구조적 특징
"그로모보이"는 먼저 건조된 장갑순양함 "러시아"의 개량형으로 설계되었다. 1895년 7월, 니콜라이 2세의 강력한 희망으로 '로시아'급 순양함이 1척 더 건조되었다.[94]새로운 대양 순양함 건조 과정에서 4가지 설계 변경안이 제시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배수량을 15,385톤으로 늘리고 포탑을 갖춘 대형 장갑순양함 계획이었다.[91] 포탑 순양함이 통상파괴 작전과 함대 작전에 모두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황제의 희망과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 '로시아'와 같은 현측 포곽 순양함이 건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는 전반적으로 검토되었으며, '로시아'의 설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은 선체뿐이었다.[95]
초기 설계에서는 크루프 장갑을 채용하여 장갑 두께를 줄이고 무게 132톤을 줄여 203mm 및 152mm 포좌에 방어를 계획했다. 선체 설계도 변경하여 목재 부분을 금속으로 바꾸었으나, 장갑 제조 공장의 크루프 강 생산 능력 부족으로 인해 하비 강과 혼용하게 되었다.[91]
동력 장치는 '로시아'의 순항용 기관 대신 모두 같은 출력의 기관 3개를 탑재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 최초로 같은 출력 기관 3기를 탑재한 장갑함이 되었다. 기관 출력은 14,500 지시 마력으로, 속력은 19노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96] 배수 장치는 전용으로 개발되었고,[96] 연료와 식량 적재 능력을 확대하여 자립, 단독 작전 실행 기간을 약 100일로 늘렸다.[97]
함포 공격 방어가 개선되어, 주포인 45구경 203mm 포 4문과 16문의 카네식 45구경 152mm 포를 비롯한 포격 무기는 대부분 포곽에 포함되었고, 포탑은 채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203mm 포 및 152mm 포의 포곽에는 포탑형 방순이 장착되었다. 선미 포곽에서는 방어 장갑을 제거했지만, 포수 방어 문제는 실전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지적되지 않았다.[95]
"그로모보이"는 전체 전장 약 146.61m였다. 최대 폭은 약 20.91m였으며, 흘수는 약 7.92m였다. 배수량은 설계보다 약 96524.46kg 더 많은 약 12654865.38kg였다. 생물 부착을 줄이기 위해 나무와 구리로 선체를 덮었다.[3]
2. 3. 추진력
'그로모보이'는 '로시아'에 탑재되었던 중간 순항용 기관 대신 모두 같은 출력을 내는 기관 3개를 탑재했다. 그리하여 그로모보이는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같은 출력을 내는 기관 3기를 탑재한 최초의 무장 함선이 되었다.[96] 기관 출력은 14,500 지시 마력으로 계획되었고, 이에 따라 속력은 19노트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었다.[96] 실제 시험에서는 15496ihp의 출력을 내어 최대 속도 를 기록했다. 32기의 벨빌 수관 보일러가 기관에 증기를 공급했다.[3]연료는 최대 의 석탄을 적재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속도로 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3] 또한 연료와 식량 적재 능력을 확대하여 보급없이 자립하고 단독 작전을 실행할 기간을 약 100일로 늘였다.[97]
2. 4. 무장
주무장은 203mm 45구경 1892년식 포 4문이었다. 선수에 2문이 갑판 위 포 방호벽 위에 설치되었고, 후방 2문은 미즈마스트 옆 스폰슨에 포 방패로 보호받으며 배치되었다.[5] 이 포는 -5°에서 18°까지 상하 각도 조절이 가능했다. 약 87.77kg 발사체를 2950ft/s의 포구 속도로 발사하여 13° 고각에서 약 10972.80m의 사거리를 낼 수 있었다.[6]부무장은 152mm 45구경 1892년식 포 16문이었다. 선수루와 선미에 각각 1문씩 설치되었으나 측면 발사는 불가능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방호벽에 장착되었고, 선수 쪽 2문은 상부 갑판의 203mm 포 앞에, 나머지는 주 갑판에 설치되었다. 한 쌍의 포는 포 방패로 보호받으며 상부 갑판에 장착되었다.[7] 회전식 마운트에 장착된 이 포는 -6°에서 +20°까지 상하 각도 조절이 가능했다. 약 41.46kg의 1907년식 고성능 폭발물 발사체를 2600ft/s의 포구 속도로 발사, 최대 고각에서 약 11521.44m의 사거리를 기록했다. 포탄은 포당 240발을 적재했다.[8]
어뢰정 방어를 위해 다양한 구경의 경무장이 제공되었다. 24문의 75mm 50구경 카네 1892년식 포가 갑판 스폰슨에 장착되어 포 방패로 보호받았다.[5] 이 포는 약 4.90kg 포탄을 최대 21° 고각에서 2700ft/s의 포구 속도로 약 약 7863.84m 사거리까지 분당 12~15발 발사했다.[9]
12문의 47mm 호치키스포가 탑재되었다.[5] 이 포는 분당 20발 속도로 약 1.50kg 포탄을 1476ft/s 포구 속도로 발사, 약 1847.09m 사거리를 기록했다.[10] 18문의 37mm 호치키스포도 탑재되었다.[5] 이 포는 분당 20발 속도로 약 0.50kg 포탄을 1450ft/s 포구 속도로 발사, 약 2777.95m 사거리를 냈다.[11]
''그로모보이''는 4문의 수중 약 38.10cm 어뢰 발사관을 장착했으며, 각 측면에 2문씩 배치되었다.[4]
2. 5. 장갑
그로모보이는 당초 크루프 장갑을 채택하여 방어 장갑의 두께를 줄이고 무게를 경감할 계획이었다. 203mm 포좌뿐만 아니라 152mm 포좌에도 방어를 적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장갑 제조를 담당한 이조르스키예 공장에서 크루프 강을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해군 기술위원회의 요구와는 달리 크루프 강과 하비 강을 혼용하게 되었다.[91]해군성은 그로모보이의 장갑 두께를 늘리고 무장의 장갑 방호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장에서는 당시 새롭고 더 강력한 크루프 장갑을 제조할 수 없었고, 대신 하비 장갑이 사용되었다.[2][12]
실제로 그로모보이의 수선 장갑대 두께는 구형 함선보다 약 5.08cm 줄어든 6인치가 되었다. 장갑대 길이는 약 30.48m 단축된 약 91.44m였고, 높이는 약 22.86cm 줄어든 약 2.13m였다. 장갑대는 수선 위로 약 0.61m, 아래로 약 1.52m 뻗어 있었으며, 앞뒤로 6인치 격벽으로 막혀 있었다.[13]
포방의 두께는 약 11.94cm였고, 뒷면은 2인치, 지붕은 약 2.54cm였다. 2인치 두께의 가로 격벽이 앞뒤에서 사격을 보호했다. 갑판은 평평한 부분에서는 1.5인치, 장갑대와 만나는 경사진 부분에서는 약 6.35cm 두께였다. 방호 갑판은 장갑 갑판의 앞뒤로 뻗어 있었고, 두께는 약 6.35cm 에서 약 7.62cm였다. 사령탑 벽은 약 30.48cm 두께였으며, 크루프 장갑으로 만들어졌다. 연통 흡입구와 탄약 호이스트는 하부 갑판과 중간 갑판 사이에서 1.5인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2]
3. 건조 및 취역
1896년 발주 계약 체결 후, 1897년 6월 14일[98]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트 조선소에서 건조가 시작되었다. 1899년 5월 8일 진수,[92] 카를 에센 1등 영관이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1899년 10월 26일부터 11월 9일까지 계선 시험 후, 11월 12일 크론시타트로 이동했다.[99][56] 유빙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력으로 3일 만에 도착했다.[31] 1900년 9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1월 1일 리예파야를 거쳐 11월 28일 극동으로 출항했다.[57][58][31]
카를 에센 함장의 지휘 아래 유럽에서 인도양을 거쳐 호주까지 항해했다. 1901년 4~5월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 헌법 하사 행사에 참석, 1901년 7월 17일 여순항에 도착하여 발트 함대 태평양 함대에 편입되었다.[59][31] 이 항해에서 20.3 노트를 기록했다.[31]
3. 1. 건조 과정
1896년에 발주 계약이 체결되어, 1897년 6월 14일[98]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트 조선소에서 새로운 석조 도크 공사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12월 7일[99], 선대의 프리깃을 기념하여 ‘그로모보이’로 명명되었고[95], 해군에 등록되었다. 공식적인 기공일은 다음 해인 1898년 5월 7일이 되었다.[90] 1899년 5월 8일에 진수했다.[92]함장은 카를 에센 1등 영관이 임관했다. 계선 시험은 1899년 10월 26일에서 11월 9일까지 실시되었다. 같은 해 11월 12일에는 마무리 공사를 위해 크론시타트로 견인되었으나, 견인 선단은 해협에 빽빽이 몰려 든 유빙에 갇혀 버렸다. 그 이후 그로모보이는 자력으로 단독 회항했다.
그러나 페테르고프 연안 북서풍과 유빙으로 함은 해협 남쪽 끝으로 떠밀렸다. 견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바람과 파도의 방향이 바뀌어 자연과 얕은 물에서 탈출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크론시타트까지 항해는 총 3일이 걸렸다. 1900년 9월부터 실시된 시험에서는 계획 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같은 해 11월 1일에 크론시타트에서 리예파야를 향해 출항하여 11월 28일에 그곳에서 극동을 향해 출항했다.
3. 2. 취역 후 활동
1899년 10월 26일부터 11월 9일까지 계선 시험을 실시하였고, 11월 12일 마무리 공사를 위해 크론시타트로 견인되었다.[99][56] 그러나 견인 선단은 해협에 빽빽이 몰려 든 유빙에 갇혀 버렸고, 그로모보이는 자력으로 단독 회항했다. 페테르고프 연안 북서풍과 유빙으로 함은 해협 남쪽 끝으로 떠밀렸고, 견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바람과 파도의 방향이 바뀌어 자연과 얕은 물에서 탈출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크론시타트까지의 항해는 총 3일이 걸렸다.[31]1900년 9월부터 실시된 시험에서는 계획 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같은 해 11월 1일 크론시타트에서 리예파야를 향해 출항하여 11월 28일에 극동으로 출항했다.[57][58][31]
카를 에센 함장의 지휘 아래 그로모보이는 유럽에서 인도양을 돌아 호주에 이르렀다. 1901년 4월부터 5월까지 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 미국 해군, 독일 제국 해군, 네덜란드 해군의 각 함선과 함께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개최된 오스트레일리아 헌법 하사 행사에 참석했다.[15] 1901년 7월 17일 여순항에 도착하여 발트 함대 태평양 함대에 편입되었다.[59][31] 항해 중 그로모보이는 대양 항해에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여 20.3 노트를 기록했다.[31]
4. 러일 전쟁
1903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그로모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에 소속되어 있었다.[62] 1904년 2월 9일 개전과 동시에 장갑순양함 "로시야", "류리크", 방호순양함 "보가티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격하여, 2월 11일 아오모리현 츠가자키 부근에서 상선 "나고우라 마루"를 격침시키고 "젠쇼 마루"를 손상시킨 후 2월 14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63]
4월 23일에는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 "보가티르"와 어뢰정 2척이 출격했지만, "류리크"는 속도가 느려 귀환했다.[64] 나머지는 원산으로 향하여 4월 25일에 어뢰정이 원산항 내에서 "고요 마루"를 격침시켰다.[65] 같은 날, "하기노우라 마루" 또는 "오기의우라 마루"를 침몰시켰고,[66] 26일에는 일본 해군 수송선 "긴슈 마루"를 침몰시켰다.[67]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68]
6월 12일 또는 13일,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격하여 대한해협으로 향했다.[69] 6월 15일, "그로모보이"가 일본 육군 수송선 "이즈미 마루"를 격침시켰다.[70] 이어서 "히타치 마루"를 침몰시키고, "사도 마루"를 손상시켰다.[71] 6월 16일에는 영국 선박 "알라톤"을 나포하고, "다이큐 운코 마루"를 정선시켜 "이즈미 마루"의 포로를 이송했다.[72] 6월 19일 또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73]
6월 28일,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와 가상 순양함 "레나", 어뢰정 8척이 출격했다.[74] 6월 30일에 어뢰정이 원산을 습격했고, 이후 "레나"와 어뢰정은 귀환했다.[74] 대한해협으로 향한 순양함 3척은 7월 1일에 일본 제2전대와 조우하여 도주했다.[75] 이후 7월 2일에 영국 선박 "첼튼엄"을 나포하고, 7월 3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76]
7월 17일,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격하여[77] 7월 20일에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여, 기선 "다카시마 마루", 범선 "기호 마루", "다이니 호쿠세이 마루"를 침몰시키고, "교도 운유 마루"와 영국 선박 "사마라"를 임검했다.[78] 남하한 함대는 7월 22일에 독일 선박 "아라비아"를 나포하고, 7월 24일에는 영국 선박 "나이트 커맨더"와 범선 "지자이 마루", "후쿠나리 마루"를 침몰시키고, 영국 선박 "토난"을 임검했다.[79] "아라비아"는 "그로모보이"에서 나온 회항원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졌다.[80] 7월 25일, 함대는 독일 선박 "테아"를 침몰시키고, 영국 선박 "칼카스"를 나포했다.[80] 그 후 함대는 다시 쓰가루 해협을 지나 8월 1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81]
1904년 8월 14일, 울산 해전에서 "그로모보이"는 사망자 94명, 부상자 182명을 냈다.[82]
1904년 10월 13일, "그로모보이"는 포시에트 만에서 암초에 충돌하여 함저를 손상시켰다.[83] 수리는 1905년 2월까지 소요되었다.[82]
1905년 5월 24일, "그로모보이"는 무선 장치 시험 중 기뢰에 접촉했다.[84] "그로모보이"가 복귀한 것은 9월 초였으며, 이미 전쟁은 끝난 상태였다.[85]
4. 1.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1903년 창설된 제1태평양 함대 블라디보스토크 분견대에 소속되어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일본 해상 무역로에서 활발한 통상파괴 작전을 전개하여, 개전 직후부터 연이어 일본 수송선을 격침했다.[62]1904년 4월 12일에는 ‘하기노라마루’(萩ノ浦丸)를,[66] 4월 13일에는 리원에서 원산을 향해 항해 중인 수송선 ‘킨슈마루’(金州丸)를 격침시켰다.[67] 6월 2일에는 3900톤급 대형 수송선 ‘이즈미마루’(和泉丸)와[70] 군부대와 군수 물자를 수송 중인 육군 징용 운송 선박 ‘히타치마루’를 현해탄에서 침몰시켰다.([71]히타치마루 사건)

같은 해 7월 4일에서 7월 19일까지 일본의 스쿠너 6척, 영국 증기선 ‘나이트 커맨더’,[79] 독일 제국의 증기선 ‘데아’를 격침시켰다.[80]
1904년 8월 1일, 여순항의 주력 함대가 포위를 돌파하는데 호응하여 출격했지만, 한반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제2함대와 조우해 전투(울산 해전)가 벌어졌다.[81] 이 전투에서 《그로모보이》는 심한 손상을 입었고, 전사 91명, 부상 185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82]
같은 해 9월 30일, 포시예트 만에서 조함 실수로 암초에 충돌하여[83] 1905년 2월 말까지 수리했다. 1905년 5월 11일에는 루스키 섬 앞바다에서 기뢰에 부딪혀[84] 같은 해 9월까지 수리했다.
1905년 4월 25일에서 4월 28일까지 4척의 일본 상선을 격침했다.
이 무렵, ''그로모보이''는 카를 예센 제독이 지휘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 전대에 배속되었다. 다른 함선으로는 장갑순양함 ''로시야''와 방호순양함이 있었다. 이 전대는 전쟁 초기에 일본 상선을 상대로 여러 차례 출격했다. 1904년 6월 15일, 뤼순항 포위전에 투입될 18문의 28cm 공성포와 1000명 이상의 병력을 수송하던 ''히타치 마루''를 격침시키며 한 차례 비교적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17]
4. 2. 울산 해전
1904년 8월 14일, 그로모보이는 울산 해전에 참가했다. 러일 전쟁 중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소속이었던 그로모보이는 로시야, 류리크와 함께 여순항의 주력 함대가 포위를 돌파하는 데 호응하여 출격했다. 그러나 한반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제2함대와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 무렵, 쓰시마 해협을 순찰하던 카미무라 히코노조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 함대는 4척의 장갑 순양함 (이와테, 이즈모, 도키와, 아즈마)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측 함대는 05:23경 8500m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했고,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함대의 후미 함선인 ''류리크''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류리크''가 집중 포격을 받고 함대에서 뒤처지자, 예센 제독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떠오르는 태양 때문에 러시아 포수들의 시야가 가려졌다. 이후 ''류리크''는 조타실에 물이 차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속도가 감소하여 일본군의 포화에 더욱 취약해졌다.
예센은 ''류리크''를 구원하기 위해 일본 함대와 ''류리크'' 사이에 자신의 함선을 배치하려 했지만, ''류리크''는 갑자기 우현으로 방향을 틀고 속도를 높여 일본 함대와 예센의 함선 사이를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이와테''가 피탄되어 6인치포 3문과 12파운드포 1문이 파괴되고 32명이 사망, 43명이 부상당했다.
전투 중 ''로시야''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카미무라는 ''류리크''를 남쪽으로 돌면서 다른 두 척의 러시아 함선이 자신의 북쪽에 도달하도록 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로를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예센은 다시 ''류리크''에게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북쪽으로 향했다.
이후 카미무라의 노후 방호 순양함 2척(나니와, 다카치호)이 접근하여 ''류리크''를 처리하는 동안, 카미무라는 장갑 순양함으로 예센을 추격했다. 추격전 중 ''아즈마''의 엔진 고장, ''이즈모''의 탄약 부족 보고 등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결국 ''류리크''는 침몰했다.
''그로모보이''는 이 전투에서 87명(또는 94명[82])이 사망하고 170명(또는 182명[82])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22] 함체 우현에 15번, 좌현에 7번 피탄되었으며, 굴뚝, 보트, 갑판 등에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수선 라인 벨트가 관통되지 않아 심각한 손상은 피했다.[23]
4. 3. 전쟁 후 수리 및 개장
러일 전쟁 종결 후, 그로모보이는 다른 함선들과 함께 발트해로 귀환했다. 1907년부터 1911년에 걸쳐 크론시타트 해양 공장에서 오버홀을 받았다.[4] 이 과정에서 보일러가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고, 8문의 152mm 포와 선체 앞부분의 203mm 포에도 포곽이 장착되었다. 수중 어뢰 발사관은 Ленинградский_металлический_завод|레닌그라드 금속 공장ru에서 제작한 457mm 장치 2문으로 교체되었다. 방어 장치가 부족했던 선미의 203mm 포는 두께 76.2mm에서 25.4mm의 포곽으로 방어되었다. 152mm 포 중 선체 끝에 설치되어 있던 2문은 제독실 위로 이전되었다. 선수 및 선미에는 측거의용 장갑 Рубка (деталь корабля)|사령탑ru이 설치되었고, 상층 갑판의 추가 포곽도 방어를 강화했다. Фок-мачта|전마스트ru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앞에서 2번째 위치에 있던 Грот-мачта|대마스트ru가 이전되었고, Besanmast|후마스트de는 수리되었다. 새로운 대마스트(전마스트)와 후마스트에는 각각 90cm 직경의 탐조등과 초소가 설치되었다. 기관 관련 공사는 Адмиралтейские_верфи|아드미랄체이스키에 베르피ru(프랑스-러시아 공장)에서 진행되었다.[4]
1911년에 완료된 개장에서는 엔진과 보일러가 재정비되었고, 후방 어뢰 발사관이 제거되었다. 전방 15인치 어뢰 발사관은 약 45.72cm 발사관으로 교체되었다. 전방 돛대는 제거되고 고물 돛대로 대체되었으며, 주 돛대는 고물 돛대 대신 뒤쪽으로 이동되었고, 각 돛대에 탐조등이 플랫폼에 설치되었다. 후방 8인치 포 주위에는 3인치 측면과 1인치 지붕이 있는 포곽이 건설되었고, 후방 6인치 포는 뒤로 이동되어 2인치 측면과 약 1.91cm 지붕이 있는 포곽으로 보호되었다. 상부 갑판 포곽의 두께는 2인치로 증가했다. 사거리 측정기를 위해 전후방에 장갑탑이 건설되었다. 경무장은 75mm 포 4문과 47mm 포 4문으로 줄었다. 1910년 말에 엔진 시험이 실시되었지만 9979ihp만 제공하면서 과열되어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 시험은 1911년 7월 27일에 다시 실시되었으며, ''그로모보이''가 18.5kn에 도달하는 동안 13337ihp을 개발하여 더 만족스러웠다.[4]
5.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로모보이는 핀란드만 순찰 임무에 투입되었다.[86] 이후 기뢰 부설함을 엄호하고, 발트 함대의 경쾌속함대가 수행한 정찰 및 습격 임무에도 참가했다.[86]
1915년 6월에는 개수 공사를 통해 포병 무장을 203mm 포 6문과 152mm 포 20문, 기관총 2정으로 강화했다. 또한 높아지는 공중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63.5mm 고사포 2문과 47mm 고사포 2문을 증설하고, 이를 위한 전용 승강기를 설치했다.[86]
1916년 6월에는 적 통상로에서의 습격 작전을 수행했다.[86]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의 관할에 놓였으며, 10월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의 관할 하에 놓여 적색 발트 함대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11월 26일부터 11월 27일에 걸쳐, 독립 분위기가 고조된 핀란드 헬싱포르스에서 크론시타트로 퇴피했다.[87][88] 1918년 5월 이후 크론시타트 군항에서 장기 보관 상태에 들어갔으며, 1919년에는 152mm 포가 철거되어 리가를 방어하는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해군에 제공되었다.[86]
1922년 7월 1일, 러시아-독일 합작 기업인 '데르메탈'에 매각되었다. 같은 해 10월 12일 해체를 위해 '루드메탈토르크'에 인도되었고, 10월 30일 독일로 예인되던 중 리에파야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되었다. 이 사고로 기구가 파손되어 예인이 포기되었고, 이후 민간 회사에 의해 인양 및 해체되었다.[86]
5. 1. 핀란드만 순찰
1914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핀란드만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86] 발트 함대 제2 순양함 여단에서 복무했으며, 200개의 기뢰를 탑재할 수 있는 빠른 기뢰 부설함으로 개조되었다.[4] 1915년 8월 10일에는 핀란드만 입구에서 독일 순양전함 (SMS Von der Tann)과 교전했다.5. 2. 무장 강화
1915년 6월, 그로모보이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통해 무장이 강화되었다. 주포는 기존의 6인치(152mm) 포에서 8인치(203mm) 포 6문으로 교체되었고, 6인치 포 20문과 기관총 2정이 추가되었다.[86]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항공기의 위협이 커지자, 그로모보이는 고사포를 증설하여 대공 능력을 강화했다. 63.5mm 고사포 2문과 47mm 고사포 2문이 새롭게 장착되었으며, 이를 위해 전용 승강기도 설치되었다.[86]
1916년에서 1917년 사이에는 선수와 선미의 6인치 함포가 8인치 함포로 교체되었다. 이로써 측면 포격 화력은 8인치 함포 4문과 6인치 함포 11문으로 증가했다. 남아있던 경포는 모두 제거되고, 2.5인치 대공포 2문과 47mm 대공포 2문이 장착되었다. 이러한 개량으로 배수량은 약 약 13411820.40kg톤으로 증가했다.[4]
6. 혁명과 최후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로모보이'''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1920년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함선을 자침시켰으나, 이후 인양되어 독일에 매각되었다. 독일로 예인되던 중 좌초되어 결국 해체되었다.
6. 1. 반란과 해체
1920년 10월 말, '''그로모보이'''의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크론슈타트 해역에서 함선을 장악했다. 이들은 '''그로모보이'''의 정치 위원과 장교들을 살해하고 함선을 자침시켰다.[27] 이후 '''그로모보이'''는 인양되었고, 1922년 7월 1일에 독일 회사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 10월 30일, 독일로 예인되던 중 리예파야 근처에서 폭풍으로 좌초되어 그 자리에서 해체되었다.[26][28][29]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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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dates used in this article are New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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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aughlin,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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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aughlin, pp. 55,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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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n 6"/45 (15.2 cm) Pattern 1892 152 mm/45 (6") Pattern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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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n 75 mm/50 (2.95") Pattern 1892 --- French 7.5 cm/50 (2.95") Canet Model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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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47 mm/5 (1.85") Hotchkiss gun 47 mm/1 (1.85") Hotchkiss gun [3-pdr (1.4 kg) Hotchkiss g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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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37 mm/5 (1.5") Hotchkiss Gun 37 mm/1 (1.5") Hotchkiss Gun [1-pdr (0.45 kg) Hotchkiss G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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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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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differ on the type of armour actually used. Brook, Gardiner and Grey, and Watts all state that Krupp cemented armour was u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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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 pp. 34,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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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 pp. 39,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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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 p.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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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 pp. 43,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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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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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 pp. 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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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aughlin, pp.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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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zbon, p.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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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aughlin, 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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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rial and Foreign News I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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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 Cruisers Lost In St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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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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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огибли без боя. Катастрофы русских кораблей XVIII–XX в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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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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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月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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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eu-ocr.narod.ru/Cruisers/chap05.html#chap5_3 «Громобой»]”, Крестьянинов, В. Я. (2003)
[32]
문서
5月21日
[33]
문서
1908年までバルト艦隊(Балтійскій флотъ)、同年からバルト海海軍(Морскія силы Балтійскаго моря)、1909年にバルト海作戦海軍(Действующій флотъ Балтійскаго моря)、1911年にバルト海海軍(Морскія силы Балтійскаго моря)、1914年にバルト海艦隊(Флотъ Балтійскаго моря)、赤軍については1918年にバルト海海軍(Морские силы Балтийского моря)、1919年に赤色バルト艦隊(Красный Балтийский флот)、1920年にバルト海海軍(Морские силы Балтийского моря)に改称している。 флот と Морские силы の訳し分けが困難なため、ここでの日本語訳は便宜上のもの。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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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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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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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рейсера I ранга 1892 -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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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роненосные крейсера 1907 -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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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рабли с 1850 до 1917 года. "Громобо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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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で触れる「ペレスヴェート」級を除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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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2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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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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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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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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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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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月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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すなわち、艦隊決戦での使用に主眼を置かない、通商破壊艦および護衛艦としての見地。大洋巡洋艦はそれら巡洋艦的任務のほかに、艦隊主力艦としての能力を重視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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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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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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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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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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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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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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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69]
서적
日露旅順海戦史
[70]
서적
日露海戦史の研究 下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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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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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海戦史の研究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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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海戦史の研究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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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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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海戦史の研究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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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旅順海戦史
[75]
서적
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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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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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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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海戦史の研究 下
[79]
서적
日露海戦史の研究 下
[80]
서적
日露海戦史の研究 下
[81]
서적
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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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Riurik to Riur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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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旅順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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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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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露旅順海戦史
[84]
간행물
From Riurik to Riur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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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旅順海戦史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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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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