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 (독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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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3세는 빌헬름 1세의 맏아들로, 1888년 3월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재위 99일 만에 사망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녔으며, 1858년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다. 왕세자 시절에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고 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했으나, 보수적인 비스마르크와의 갈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되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괄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지만, 역사가들은 그의 이른 죽음이 독일 제국 내 자유주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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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 (독일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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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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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리드리히 3세 |
로마자 표기법 | Friedrich III |
전체 이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콜라우스 카를 |
독일어 이름 | Friedrich Wilhelm Nikolaus Karl |
별칭 | 프리츠 |
출생일 | 1831년 10월 18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 |
사망일 | 1888년 6월 15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포츠담 신궁전 |
매장일 | 1888년 6월 18일 |
매장지 | 독일 제국 포츠담 평화교회 카이저 프리드리히 영묘 |
종교 | 루터교 (프로이센 연합 교회) |
서명 | Friedrich III's Signature.svg |
통치 | |
직위 | 독일 황제 프로이센 국왕 |
재위 시작 | 1888년 3월 9일 |
재위 종료 | 1888년 6월 15일 |
선임자 | 빌헬름 1세 |
후임자 | 빌헬름 2세 |
섭정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수상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가문 | |
왕가 | 호엔촐레른 가 |
아버지 | 빌헬름 1세 |
어머니 |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빅토리아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1858년 1월 25일 결혼 |
자녀 |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빅토리아 발데마르 소피아 마르가레테 |
군사 복무 | |
소속 | 프로이센 육군 |
계급 | 원수 |
참전 |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 |
2. 사생활
프리드리히 3세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엄격한 군사적 전통 속에서 자랐지만[5], 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어머니 아우구스타 공주의 영향을 받아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았다.[4][166] 그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부모 사이에서 다소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냈으나[163][166][4], 여동생 루이제 공주와는 평생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167] 젊은 시절 본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자유주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14][174], 이는 그의 정치적 신념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853년에는 프리메이슨리에 입문하기도 했다.[15]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와의 결혼은 정략결혼의 성격이 있었으나[175][16], 두 사람은 자유주의라는 공통된 정치적 이상을 공유하며 서로 깊은 애정을 나누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178][179][19][20] 빅토리아 공주는 남편의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조언하며 영향을 미쳤다.[167][11] 부부는 슬하에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두 아들 지기스문트와 발데마르를 어린 나이에 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180][21] 특히 장남인 빌헬름과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평생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유지했다.[183][184][24][25]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콜라우스 칼은 1831년 10월 18일,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의 신궁에서 빌헬름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당시 독일의 여러 국가 중 가장 강력했던 프로이센의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이었고, 큰아버지는 당시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였다. "프리츠"라는 애칭으로 불린[5] 어린 프리드리히는 아버지 빌헬름의 뜻에 따라 호엔촐레른 가문의 엄격한 군대식 가풍 속에서 교육받았다. 빌헬름 왕자는 군사 전통 속에서 성장하여 엄격한 규율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사촌인 폴란드 귀족 엘리자 라지빌 공주를 사랑했으나, 왕실에서는 엘리자의 신분이 왕자의 배우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아우구스타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했다.[2][162]
어머니 아우구스타는 바이마르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바이마르는 헌법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했고 군주의 권한이 제한된 곳이었다.[163][164] 이러한 배경 덕분에 아우구스타는 뚜렷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인물로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3][165] 아버지 빌헬름과 어머니 아우구스타는 가정 환경과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인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했고,[163][164]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불안정한 가정 환경 속에서 다소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163][166][4] 그에게는 8살 어린 여동생 루이제 공주(훗날 바덴의 대공비)가 있었는데, 둘의 우애는 매우 돈독했다. 또한 "왕좌에 앉은 로맨티스트"라 불리던 백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67]
프리드리히는 자유주의 세력이 독일 전역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던 1840년대의 격동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성장했다.[6][168]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독일 통일과 입헌군주제 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모든 인민의 평등권, 재산권, 기본 인권 보장을 위한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7][169] 즉,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정부를 원했던 것이다.[8][164] 프리드리히가 17세 되던 1848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기치로 내건 1848년 독일 혁명이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혁명 세력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보장과 독일 의회 수립,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6][9][168][170] 비록 독일에서의 혁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프리드리히가 어린 시절 목격한 자유주의는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10][171]
호엔촐레른 가문의 엄격한 군사 교육 전통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아우구스타는 프리드리히가 고전 교육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166]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군사 훈련과 함께 자유과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개인 교사는 유명한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였다.[11][167] 프리드리히는 재능 있는 학생으로, 특히 외국어에 뛰어나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라틴어도 공부했다. 또한 역사, 지리, 물리, 음악, 종교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웠고, 체육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프로이센 왕가의 전통에 따라 승마술도 수준급이었다.[12][172] 호엔촐레른 왕가의 왕자들은 어릴 때부터 군대식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기에, 프리드리히 역시 10세에 근위병 제1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최고 훈장인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173]
18세가 된 프리드리히는 가문의 전통을 따르기보다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 법학, 정치학, 공공 정책 등을 공부했다. 그는 1850년부터 1852년까지 본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당시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와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달만과 같은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1][167] 본 대학교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4][174] 1853년에는 아버지 빌헬름 왕자에 의해 프리메이슨리에 입문했으며, 훗날 독일 프리메이슨 조직의 수장이 되기도 했다.[15]
2. 2. 결혼과 가족

19세기 유럽에서는 왕실 간의 정략결혼이 흔했는데, 이는 국가 간 동맹을 강화하고 왕가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85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독일 태생의 부군 앨버트 공은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를 프로이센의 왕자 프리드리히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영국 왕가는 독일계 혈통이 강했으며, 앨버트 공은 이 결혼을 통해 프로이센이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기를 기대했다.[175][16] 빅토리아 여왕 부부의 숙부인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 역시 이 결혼을 지지하며 양측에 혼사를 추진했다.[176][17]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인 빌헬름 왕자(훗날 빌헬름 1세)는 영국과의 결혼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러시아 제국의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175][16] 반면, 프리드리히의 어머니 아우구스타는 영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이 결혼을 적극적으로 원했다.[156][5] 1851년, 아우구스타는 프리드리히를 영국으로 보내 런던에서 열린 1851년 만국 박람회를 참관하게 했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자유주의와 산업혁명의 중심지인 영국이 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영국 방문 중 앨버트 공이 프리드리히를 돌보았고, 당시 11세였던 빅토리아 공주는 박람회장에서 독일어로 프리드리히를 안내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발전시켰다.[167][11]

프리드리히는 1855년 빅토리아 공주에게 청혼했고, 약혼은 1857년에 발표되었다.[177][18] 1858년 1월 25일, 두 사람은 런던의 성 제임스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을 기념하여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서로 잘 맞았고 금슬이 매우 좋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178][179][19][20] 빅토리아 공주 역시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아 남편과 정치적 견해를 공유했으며, 결혼 생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7][11]

부부는 주로 왕세자궁에 거주하며 슬하에 4남 4녀, 총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미지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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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헬름 2세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 훗날 독일 제국의 황제. (1)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 결혼 (자녀 있음), (2) 헤르미네 로이스 추 그라이츠와 재혼 (자녀 없음). 선천적으로 왼팔이 불편했는데, 이는 분만 시의 문제나 가벼운 뇌성마비 때문으로 추정된다.[181][182][22][23] | ||||
]] || 샤를로테 || 1860년 7월 24일 || 1919년 10월 1일 || 작센-마이닝겐 공작 베른하르트 3세와 결혼 (자녀 있음). | ||||
]] || 하인리히 || 1862년 8월 14일 || 1929년 4월 20일 || 해군 제독. 사촌인 이레네 폰 헤센다름슈타트와 결혼 (자녀 있음). | ||||
]] || 지기스문트 || 1864년 9월 15일 || 1866년 6월 18일 || 수막염으로 21개월 만에 요절.[180][21] | ||||
]] || 빅토리아 || 1866년 4월 12일 || 1929년 11월 13일 || (1) 아돌프 폰 샤움부르크-리페 후작과 결혼 (자녀 없음), (2) 알렉산더 주브코프와 재혼 (자녀 없음). | ||||
]] || 발데마르 || 1868년 2월 10일 || 1879년 3월 27일 || 디프테리아로 11세에 요절.[180][21] | ||||
]] || 조피 || 1870년 6월 14일 || 1932년 1월 13일 ||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결혼하여 그리스 왕비가 됨 (자녀 있음). | ||||
]] || 마르가레테 || 1872년 4월 22일 || 1954년 1월 22일 ||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과 결혼 (자녀 있음). 그는 1918년 잠시 핀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장남 빌헬름은 훗날 빌헬름 2세로 황제가 되었으나, 부모의 자유주의 사상을 계승하지 않고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어머니 빅토리아는 아들을 "골수 프로이센인"이라 부르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183][24] 이러한 정치적 견해 차이는 부모와 빌헬름 2세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평생에 걸쳐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183][184][24][25]
3. 정치 생활
1861년 1월 2일, 아버지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하자 29세의 프리드리히는 왕세자가 되었다. 그는 이후 독일 제국 황태자 시절까지 포함하여 27년간 왕위 계승자의 자리를 지켰다. 자유주의 성향이었던 프리드리히와 진보 세력은 새 국왕이 자유주의 정책을 펼치기를 기대했으나,[185] 빌헬름 1세는 곧 보수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186] 프리드리히는 "내정과 외교에 있어 필수적인 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185] 아버지와의 정치적 견해 차이는 점차 벌어졌다.
빌헬름 1세는 군비 증강 예산을 둘러싸고 의회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1862년 9월, 의회가 예산안을 거부하자 빌헬름 1세는 퇴위까지 고려했으나, 프리드리히는 왕실과 국가에 대한 위협이라며 만류했다.[187] 결국 빌헬름 1세는 론 육군장관의 추천으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권위주의적인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무시하며 군비 확장을 밀어붙였고,[174] 이는 자유주의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원했던 프리드리히와의 깊은 갈등을 유발했다.[174] 프리드리히는 비스마르크의 '피와 철' 정책 대신 '도덕적 정복'을 통한 통일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74] 1863년 6월, 프리드리히가 단치히(현 그단스크)에서 비스마르크의 언론 탄압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188][189][190] 빌헬름 1세는 격노했고, 이후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재위 기간 내내 주요 국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167] 그는 주로 외국 순방이나 의례적인 행사에서 왕실을 대표하는 역할에 머물렀으며,[191] 장모인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배려로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192]
정치적으로 소외된 프리드리히에게 군사 활동은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였다.[167] 그는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비록 전쟁 자체에는 반대했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프로이센 군대를 강력히 지지하며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167]
첫 참전은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으로, 총사령관 브랑겔 원수 휘하에서 장군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독일의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에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동족상잔'이라 부르며 반대했으나,[193] 전쟁이 발발하자 제2군 사령관으로서 블루멘탈 장군을 참모장으로 두고 참전했다. 그의 군대는 결정적인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적시에 도착하여 프로이센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고,[194] 이 공로로 최고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았다.[157] 그러나 전쟁의 참상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167]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시는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195]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는 남부 독일군으로 구성된 제3군을 지휘하며[196][197] 비상부르 전투와 뵈르트 전투, 스당 전투, 파리 공성전 등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군사적 명성을 높였다.[197] 그는 전쟁 중에도 적군 부상병을 돌보는 등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보여 프랑스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198] 한 프랑스 기자는 "왕세자는 적국 땅에서 헤아릴 수 없는 친절과 인간미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으며,[198] 《더 타임스》는 "왕세자는 전쟁에서의 기량만큼 온화한 태도로 두터운 인망을 얻었다"고 보도했다.[198] 승리 후 프리드리히는 파리 기자들에게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58]
3. 1. 왕세자 시절
1871년 프로이센의 승리 이후, 독일의 여러 주들이 독일 제국으로 통합되었다. 아버지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면서 프리드리히는 새로운 제국의 황태자가 되었다. 빌헬름 1세는 황제가 된 날을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 중 하나로 여겼지만, 프리드리히는 독일 역사상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게 되어 기뻐했다.[11]
그러나 제국 총리가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를 싫어했으며, 황태자와 그의 부인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마리 루이
정치적으로는 소외되었지만, 황태자는 여러 공공 사업에 참여했다. 포츠담 근처 보른슈테트 지역에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45][46] 수도 베를린을 위대한 문화 중심지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노력을 도와 공립 박물관의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그가 수집한 상당한 규모의 예술품 컬렉션은 훗날 베를린의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현재의 보데 박물관)의 소장품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47]
1878년, 아버지 빌헬름 1세가 암살 시도로 인해 국정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프리드리히가 잠시 섭정으로서 그의 임무를 대행했으나, 곧 다시 실권 없는 자리로 물러나야 했다.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은 그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11]
1879년부터 1881년 사이, 독일에서는 민족주의 역사가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와 궁정 목사 아돌프 슈토커 등이 주도하여 독일 유대인의 해방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48] 황태자 부부는 이러한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강력히 반대했다. 황태자비 빅토리아는 트라이치케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장 위험한 광신자들"로, 슈토커 목사는 정신병원에 가야 할 인물로 간주했다.[49] 그녀는 트라이치케와 슈토커 같은 이들이 "다른 종교와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 대해 증오심에 차 행동하는 것" 때문에 독일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적었다.[49]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원수 제복을 입고 부인 빅토리아와 함께 1880년 베를린의 한 유대교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트라이치케의 "수치스러운 공격"에 맞서 관용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49] 얼마 후, 그는 연설을 통해 독일 내 반유대주의 운동을 "우리 시대의 수치스러운 오점"이라고 규탄하며, "베를린에서 모든 체면을 벗어던진 ''Judenhass''[유대인 증오 선동]가, 심지어 궁정 목사들의 보호 아래 번성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49] 1881년에는 부부 동반으로 비스바덴의 유대교 회당 예배에 다시 참석하여 "우리의 신념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행동했다.[49] 프리드리히는 유럽의 "가난하고 학대받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는 발언도 이어갔다.[49]
프리드리히의 장모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연설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며 딸이 그와 같은 인물과 결혼한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49] 독일 내 보수적인 융커 계층은 유대인을 옹호하는 그의 행동을 널리 비판했다.[49] 비판자 중에는 그의 장남인 빌헬름 2세도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를 영국인 아내와 유대인들에게 휘둘리는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로 폄하했다.[49] 영국 역사가 존 C. G. 뢰를에 따르면, 독일의 "반동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계층" 다수는 "황태자와 그의 자유주의적인 영국인 아내는 왕위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될 이질적이고 비(非)독일적인 세력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49]
3. 2. 황태자 시절, 그리고 짧은 치세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다. 아버지 빌헬름 1세가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프리드리히는 독일 제국의 황태자가 되었다. 빌헬름 1세는 황제 즉위일을 일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라 회고했지만, 프리드리히는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며 감격했다.[167] 그러나 제국 수상이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와 빅토리아 황태자비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경계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프리드리히 황태자는 아버지나 비스마르크와 달리 제국의 자유주의 세력을 꾸준히 지지했으며,[199] 군비 증강과 군대 확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00]
황태자 시절 프리드리히는 여러 공공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포츠담 근처의 보른슈테트(Bornstedt)에 학교와 교회를 건설하는 일을 감독했다.[201][202] 또한 수도 베를린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던 아버지 빌헬름 1세의 정책을 지지하여 국립박물관장 직책을 맡아 미술품 수집에 힘썼다. 이때 수집된 미술품들은 훗날 그의 이름을 딴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현 보데 박물관)의 소장품 기반이 되었다.[203] 1878년, 아버지 빌헬름 1세가 암살 미수 사건으로 부상을 입자 잠시 섭정을 맡기도 했으나, 빌헬름 1세가 회복하면서 다시 실권 없는 위치로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때로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167]
1887년 초부터 프리드리히는 목소리가 쉬는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50] 처음에는 만성 후두 카타르로 진단받고 여러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50] 1887년 5월, 독일 의사들은 종양을 후두암으로 진단하고 수술을 권유했다.[50] 그러나 영국의 저명한 후두 전문의 모렐 매켄지(Morell Mackenzie)는 생검 결과 암세포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수술에 반대했고, 보존적 치료를 주장했다.[51][52] 비스마르크 역시 수술에 반대하며 황제의 결정을 압박했다.[52] 매켄지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의 상태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1887년 가을,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요양하던 중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목소리를 완전히 잃었다.[56][58][60] 추가 검진 결과 새로운 종양이 발견되었고, 매켄지를 포함한 모든 의사들은 결국 후두암 진단을 내렸다.[60][61] 프리드리히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위험성이 높은 후두 전체 절제술은 거부하고 질식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기관절개술을 받기로 결정했다.[61]
1888년 초, 프리드리히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호흡 곤란과 고열, 기침에 시달렸다.[65] 결국 1888년 2월 8일, 기관절개술을 받게 되었다.[66] 수술 중 에른스트 폰 베르크만 교수가 실수를 저질러 출혈과 농양 형성을 유발했고, 이는 프리드리히에게 남은 생애 동안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67][69] 프리드리히는 이후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글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68] 기관절개술 이후에도 그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3월 6일 객담 검사를 통해 후두암 진단이 최종 확정되었다.[66]
1888년 3월 9일, 아버지 빌헬름 1세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프리드리히는 마침내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했다.[74] 즉위명 결정 과정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계승을 고려한 '프리드리히 4세'를 선호했으나, 비스마르크의 반대로 프로이센 국왕 시절의 이름을 따르게 되었다.[74]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고, 후두암 말기 상태였다. 독일의 진보적인 세력들은 그의 즉위로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통치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44][75] 그의 건강 상태는 이미 매우 위중했다.
병세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책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즉위 직후 아내 빅토리아에게 자신의 검은 독수리 훈장을 달아주며 황후로서의 지위를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77] 재위 기간 동안 장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스웨덴-노르웨이 국왕 오스카르 2세의 공식 방문을 받았고, 차남 하인리히 왕자와 조카 이레네 공주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고작 99일에 불과했고,[78] 이 짧은 기간 동안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79] 즉위 전 구상했던 헌법에 따라 황제와 수상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령은 발표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81] 다만, 1888년 6월 8일에는 라이히스타크 선거 개입 사실이 드러난 보수적인 프로이센 내무장관 로베르트 폰 푸트카머를 경질하며 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82]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느꼈지만,[82]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독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한탄하기도 했다.[84]
1888년 6월 초, 암이 식도까지 전이되어 음식을 삼킬 수 없게 되었고,[85] 1888년 6월 15일 오전 11시 30분, 포츠담에서 사망했다.[85] 그의 뒤를 이어 29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포츠담의 프리덴스키르헤(평화 교회) 왕실 영묘에 안장되었다.[86]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일 역사의 잠재적인 전환점으로 여겨지며,[89] 영국의 전 총리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톤은 그를 "바르바로사식 독일 자유주의자"라고 칭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87] 황후 빅토리아는 남편의 자유주의 사상을 이어가려 했으나 더 이상 정부 내에서 권력을 갖지 못했다.[88]
4. 업적과 평가
프리드리히 3세는 국가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자유주의적 군주였다.[188][228] 그는 오랫동안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아왔으며, 즉위 전부터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황태자비 빅토리아나 다른 이들에게 꾸준히 피력했다. 특히 영국의 의회 제도와 장인인 앨버트 공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200][229] 아내 빅토리아와 함께 공동으로 통치하며 친자유주의적 인사를 장관에 임명하여 독일의 자유화를 이루고자 했다.[230] 부부는 제국수상실의 권한을 크게 축소하고,[221] 영국의 자유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여 독일을 재편하기를 희망하였다.
윌리엄 하벗 도슨(William Harbutt Dawson)이나 에리히 에익(Erich Eyck) 같은 많은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 3세의 이른 죽음이 독일 제국 내 자유주의 세력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한다.[163] 이들은 만약 프리드리히가 건강하여 더 오래 재위했더라면, 독일을 개혁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화시키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군국주의적 행보를 막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19][231][232] J. 맥컬러프(J. McCullough)는 프리드리히 황제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바이마르 공화국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32] 마이클 밸포(Michael Balfour)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더 나아가 자유주의적 성향의 프리드리히 황제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또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33] 작가 마이클 프론드(Michael Freund)는 프리드리히 3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234] 역사학자 프랭크 팁튼(Frank Tipton)은 “만약 빌헬름 1세가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프리드리히 3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독일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의 짧은 통치가 남긴 아쉬움을 표현했다.[235]
그러나 빌헬름 몸젠(Wilhelm Mommsen)이나 아서 로젠버그(Arthur Rosenberg) 등의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가 오래 재위했더라도 독일의 자유화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다.[163] 이들은 프리드리히가 독일을 개혁하기 위해 부황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에게 감히 맞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프리드리히 역시 전형적인 군인으로서 호엔촐레른 왕가의 군대식 가풍에 익숙했으며, 10살 때 육군에 임관하자 아버지 빌헬름에게 기쁘게 임관 신고를 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156] 안드레아스 도팔렌(Andreas Dorpalen)은 프리드리히가 생애 초반부터 아버지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가 수립한 정책들을 따랐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다.[229][236] 로젠버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자유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와 그가 만든 제도를 굳게 신뢰했다.[237] 도팔렌은 더 나아가 프리드리히 3세의 재위 기간이 길었더라도, 독일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그의 역량이 부족하고 성격이 너무 약했다고 비판했다.[204][238] 제임스 J. 시한(James J. Sheehan)은 당시 독일의 정치적 환경과 정당 제도가 매우 보수적이어서 프리드리히가 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이를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다.[239] 도팔렌은 또한 프리드리히 사후 독일의 진보주의 세력이 자유주의 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의 자유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으며,[240] 아들 빌헬름 2세가 저지른 여러 실책들이 반사적으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를 더욱 긍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241]
프리드리히 3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로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황제 기념 교회(Kaiser-Friedrich-Gedächtniskirche)와 쾨니히스베르크(현 칼리닌그라드)의 칼트호프 교회가 있다. 또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 저비스 강 근처에는 그의 이름을 딴 프레더릭 윌리엄 산이 있다.[245]
5. 경칭과 작위, 서훈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으로서 공식적으로 폐하(His Imperial and Royal Majesty|히스 임페리얼 앤드 로열 마제스티eng), 구어체로는 폐하(Your Imperial and Royal Majesty|유어 임페리얼 앤드 로열 마제스티eng)로 불렸다. 그 외에 Sire|사이어eng라는 경칭으로도 불렸다.
5. 1. 작위
기간 | 작위 | 경칭 |
---|---|---|
1831년 10월 18일 ~ 1861년 1월 2일 | 프로이센 왕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 전하[112] |
1861년 1월 2일 ~ 1871년 1월 18일 | 프로이센 왕세자 | 전하[113] |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독일 황태자 겸 프로이센 왕세자 | 폐하[114] |
1888년 3월 9일 ~ 1888년 6월 15일 |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국왕 | 폐하[115] |
5. 2. 서훈
프리드리히 3세는 열 살에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173] 또한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린 공으로 푸르 르 메리트 훈장도 받았다.[157]6. 자녀
부인인 빅토리아와의 사이에 4남 4녀를 두었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 | 빌헬름 2세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82세) | (1) 1881년 2월 27일,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녀와 결혼, 슬하 6남 1녀 (1921년 사별). (2) 1922년 11월 9일, 헤르미네 로이스 추 그라이츠 후작영애와 결혼, 자녀 없음. |
![]() | 샤를로테 폰 프로이센 왕녀 | 1860년 7월 24일 | 1919년 10월 1일 (59세) | 1878년 2월 18일, 작센 마이닝겐공 베른하르트 3세와 결혼, 슬하 1녀. |
![]()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 1862년 8월 14일 | 1929년 4월 20일 (66세) | 1888년 5월 24일, 사촌 이레네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와 결혼, 슬하 3남. |
![]() | 지기스문트 폰 프로이센 왕자 | 1864년 9월 15일 | 1866년 6월 18일 (1세) | 수막염으로 21개월의 나이에 요절.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 중 첫 사망자. |
![]() | 빅토리아 폰 프로이센 왕녀 | 1866년 4월 12일 | 1929년 11월 13일 (63세) | (1) 1890년 11월 19일, 아돌프 폰 샤움부르크리페 공자와 결혼, 자녀 없음 (1916년 사별). (2) 1927년 11월 19일, 알렉산더 줍코프와 결혼, 자녀 없음. |
![]() | 발데마르 폰 프로이센 왕자 | 1868년 2월 10일 | 1879년 3월 27일 (11세) | 디프테리아로 요절. |
![]() | 조피 폰 프로이센 왕녀 | 1870년 6월 14일 | 1932년 1월 13일 (61세) | 1889년 10월 27일,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와 결혼, 슬하 3남 3녀. |
![]() | 마르가레테 폰 프로이센 왕녀 | 1872년 4월 22일 | 1954년 1월 22일 (81세) | 1893년 1월 25일,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와 결혼, 슬하 6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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