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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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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간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위·진 무제 시대에 안양정후, 평양향후 등을 역임하고 평원왕에 봉해졌다. 그는 혜제 즉위 후 좌광록대부로 승진했으며, 금장자수를 하사받아 삼공 다음의 서열에 올랐다. 사마간은 기행으로도 유명했는데, 재능에 따라 인사를 등용하고, 봉록을 썩히는 등 특이한 행적을 보였다. 팔왕의 난 시기에는 사마륜과 사마경을 평가하며, 가문의 쇠퇴를 예견했다. 그는 80세에 사망했으며, 영가의 난으로 가문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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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간
기본 정보
사마간의 초상화
사마간의 초상화
사마(司馬)
간(榦)
시호효(孝)
작위평원왕(平原王)
생몰년232년 ~ 265년
아버지사마의
어머니복부인(伏夫人)
형제사마사, 사마소, 사마량, 사마경, 사마준, 사마제, 사마염
생애
작위 봉분평원왕(平原王)으로 봉해짐
관직진군장군(鎭軍將軍)
사망265년 사망, 효왕(孝王)으로 시호를 받음
특징성격이 침착하고 신중함.
업적자신의 봉국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을 받음.
후손아들 사마륭(司馬隆)이 작위를 이음.

2. 가계

사마간의 조부는 사마방, 아버지는 사마의, 어머니는 장춘화이다. 형제로는 사마사, 사마소가 있으며, 누이로는 남양공주가 있다.

2. 1. 가족 관계

관계이름
조부사마방
숙부사마랑
아버지사마의
어머니장춘화
사마사
형수하후휘
형수양휘유
사마소
형수왕원희
조카사마염
누이남양공주
세자사마광
아들사마영


3. 생애

사마간은 위 시대에 안양정후, 평양향후를 거쳐 산기상시, 무군중랑장을 역임했다. 264년 오등작이 창설되자 정도백으로 개봉되었다.[1]

265년, 조카 사마염선양으로 황제에 즉위하자 평원왕에 봉해졌고, 11300호의 식읍, 고취와 말 2필을 하사받았으며, 시중의 복식을 더했다. 사마염은 일족 제왕들을 봉국으로 가게 했지만, 사마간은 중병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욕심이 적어 도성에 머물렀다. 태강 말 광록대부에 임명되었고, 시중이 더해졌으며, 금장자수를 하사받아 서열은 삼공 다음이었다.[1]

사마간은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는 않았으나, 인재를 기준으로 인사를 했다. 작위와 봉록을 받았음에도 무관한 듯 행동했고, 녹봉과 피륙은 쌓아두고 썩힐 정도였다. 장마철에는 수레를 밖에, 덮개 없는 수레(노거)를 안에 들였다. 이유를 묻자 "덮개가 없는 것은 안에 넣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조신이 방문해도 수레와 말을 문 밖에 세워둔 채 밤새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천자를 알현할 때는 온화하고 공손하게 응대하여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사랑하는 첩이 죽으면 관에 못질을 하지 않고 빈 방에 둔 채 며칠간 보러 가거나 시체에 음란한 행위를 했으며, 시체가 썩어 문드러진 후에야 장례를 치렀다.[1]

이복 동생 사마륜이 혜제를 보좌하게 되자, 사마간은 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301년, 혜제를 협박하여 제위에 오른 사마륜에 여러 왕들이 반발하여 사마경이 사마륜을 물리치자, 사마간은 백 전을 품에 지니고 사마경을 만나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신이 천하를 위해 거병한 것은 당신의 공적입니다. 지금 백 전으로 당신을 축하하려 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1]

사마륜이 패하고 혜제가 복위하자, 사마간은 다시 시중이 되었고, 태보가 더해졌다. 사마경이 보좌하자, 사마간은 사마경을 찾아가 "당신은 백 여자애를 흉내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백녀는 아버지 사마의의 측실인 박부인을 가리키며, 백 여자애는 사마륜을 지칭했다.[1]

302년, 사마경이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에게 주살되자, 사마간은 통곡하며 "종실은 날마다 쇠퇴하고 있는데, 이 아이(사마경)가 가장 훌륭했는데 죽임을 당했으니, 앞으로의 앞날이 위태롭다!"라고 말했다.[1]

사마간의 예상대로, 사마경이 죽은 후 팔왕의 난이 계속되어 진(晋) 왕조는 약화되었다. 304년 사마예는 사마영·사마옹 등에 의해 끓는 물에 삶겨 죽임을 당했고, 306년에는 사마영과 사마옹은 사마월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1]

영가 5년(311년) 정월 경진(2월 26일), 80세로 사망했다. 사마간이 죽은 직후 유총의 낙양 침략이 있었기에, 시호를 추증할 여유가 없었다. 적남 사마광은 일찍 죽었다. 차남 사마영은 290년에 안덕현공에 봉해졌고, 산기상시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선량한 인물이었다. 영가의 난을 겪어 일문이 멸망했다.

3. 1. 위·진 무제 시대

위 시대에 안양정후(安陽亭侯)·평양향후(平陽鄕侯)를 받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무군중랑장(撫軍中郎將)에 임명되었다. 함희 원년(264년)에 오등작(五等爵)이 창설되자 정도백(定陶伯)으로 개봉되었다.

태시 원년(265년), 조카인 사마염(무제)이 선양으로 황제에 즉위하자, 평원왕(平原王)에 봉해졌으며, 11300호의 식읍, 고취(鼓吹)와 말 2필을 하사받았고, 시중(侍中)의 복식을 더했다. 사마염은 함녕(咸寧) 초에 일족의 제왕들을 봉국으로 가게 했지만, 사마간(司馬榦)은 중병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성격이 지극히 순수하며 욕심이 적었으므로 특별 조서로 도성에 머물게 했다. 태강 말에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제수받았고, 시중을 더했으며, 특별히 금장자수(金章紫綬)를 하사받아 서열은 삼공 다음이었다.

3. 2. 기행

사마간은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는 않았으나, 인사이동 시에는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작위와 봉록을 받았음에도 자신과는 무관한 듯 행동했고, 녹봉과 피륙은 쌓아두고 썩힐 정도였다. 장마철에는 수레를 밖에, 덮개 없는 수레(노거)를 안에 들였다. 이유를 묻자 "덮개가 없는 것은 안에 넣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조신이 방문해도 수레와 말을 문 밖에 세워둔 채 밤새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천자를 알현할 때는 온화하고 공손하게 응대하여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사랑하는 첩이 죽으면 관에 못질을 하지 않고 빈 방에 둔 채 며칠간 보러 가거나 시체에 음란한 행위를 했으며, 시체가 썩어 문드러진 후에야 장례를 치렀다.

3. 3. 팔왕의 난과 그 이후

이복 동생인 조왕(趙王) 사마륜이 혜제를 보좌하게 되자, 사마간은 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영녕 원년(301년), 혜제를 협박하여 제위에 오른 사마륜에 여러 왕들이 반발하여 제왕(齊王) 사마경이 사마륜을 물리치자, 종족과 조정 신하들은 모두 소와 술을 가져와 사마경을 치하했지만, 사마간은 백 전을 품에 지니고 사마경을 만나 백 전을 꺼내며 말했다.[1]

: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신이 천하를 위해 거병한 것은 당신의 공적입니다. 지금 백 전으로 당신을 축하하려 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 조심해야 합니다."[1]

사마륜이 패하고 혜제가 복위하자, 사마간은 다시 시중이 되었고, 태보가 더해졌다. 사마경이 보좌하자, 사마간은 사마경을 찾아갔고, 사마경은 그를 맞이했다. 사마간은 사마경의 저택에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아 사마경을 앉히지 않고 말했다.[1]

: "당신은 백 여자애를 흉내내서는 안 됩니다."[1]

백녀는 백에 나무 변을 더한 것으로, 즉 아버지 사마의의 측실인 박부인을 가리키며, 백 여자애는 사마륜을 지칭했다.[1]

영녕 2년(302년), 사마경이 사마륜 주살을 함께 모의한 상산왕(常山王) 사마예·성도왕(成都王) 사마영·하간왕(河間王) 사마옹에게 주살되자, 사마간은 통곡하며 측근에게 말했다.[1]

: "종실은 날마다 쇠퇴하고 있는데, 이 아이(사마경)가 가장 훌륭했는데 죽임을 당했으니, 앞으로의 앞날이 위태롭다!"[1]

사마간의 예상대로, 사마경이 죽은 후 주도권을 놓고 사마예와 사마영·사마옹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영안 원년(304년)에 사마예는 사마영·사마옹 등에 의해 끓는 물에 삶겨 죽임을 당했다. 더 나아가, 사마영과 사마옹은 사마예 토벌에 호응한 동해왕(東海王) 사마월의 손에 의해 광희 원년(306년)에 죽임을 당하는 등, 일족끼리의 골육상쟁(팔왕의 난)이 계속되어 진(晋) 왕조는 약화되었다.[1]

3. 4. 만년

영가 5년(311년) 정월 경진(2월 26일), 80세로 사망했다. 사마간이 죽은 직후 유총의 낙양 침략이 있었기에, 시호를 추증할 여유가 없었다. 적남 사마광은 일찍 죽었다. 차남 사마영은 태희 원년(290년)에 안덕현공에 봉해졌고, 산기상시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선량한 인물이었다. 영가의 난을 겪어 일문이 멸망했다.

참조

[1] 문서 榦」は「幹」の異体字
[2] 진서 평원왕 간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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