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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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토 주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40년 미에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졸업하고 미쓰이 은행에서 근무했으며, 런던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72년 부친의 사망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여러 당직을 거치며 참의원 의원, 후생대신, 참의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참의원 의장 재임 중 선거 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나, 여야 간 갈등으로 사퇴했다. 2004년 정계 은퇴 후 사회복지 관련 단체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2018년 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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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주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사이토 주로 |
원어명 | 斎藤十朗 |
출생지 | 일본 제국 미에현 이가시 |
정당 | 자유민주당→무소속→자유민주당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전직 | 미쓰이 은행 행원 |
현직 | 사회복지법인 중앙공동모금회 회장, 전국사회복지협의회 고문 |
국회의원 | 참의원 의원 |
선거구 | 미에현 선거구 |
당선 횟수 | 6회 |
임기 시작 | 1972년 10월 23일 |
임기 종료 | 2004년 7월 25일 |
기타 직책 | [[File: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18대 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회장 |
임기 시작일 | 1992년 |
임기 종료일 | 1995년 |
주요 직책 | |
참의원 의장 | 제21-22대 |
취임일 | 1995년 8월 4일 |
퇴임일 | 2000년 10월 19일 |
원수 | 아키히토 |
후생대신 | 제66대 후생대신 |
연금 문제 담당 대신 | '' |
내각 | 제3차 나카소네 내각 |
취임일 (후생대신) | 1986년 7월 22일 |
퇴임일 (후생대신) | 1987년 11월 6일 |
학력 | |
출신 학교 | 게이오기주쿠 대학 |
가계 | |
친족 | 아버지 사이토 노보루 |
훈장 | |
훈장 | 동화대수장 |
2. 생애
1940년 2월에 미에현 이가시에서 4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사이토 노보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1958년에 도쿄 교육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1962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는데 학창 시절에 승마를 배웠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 때는 마술경기위원으로 일했다.[1][2] 대학을 나와서 미쓰이 은행에서 일하다가 런던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1] 1972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지역구를 물려받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정치인이 됐다.[1]
소속 파벌은 목요 클럽이었다가 다나카 가쿠에이가 몰락하자 다케시타 노보루가 이끄는 경세회로 옮겼다.[3] 대장정무차관과 자민당 사회부회장 등을 거쳐[3] 1986년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후생대신을 역임했다.[4] 나카소네 내각이 물러난 뒤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참의원 간사장, 참의원 의원 회장 등의 당직을 거치면서 경력을 쌓아 참의원의 프린스, 미스터 참의원과 같은 별명도 생겼다.[4] 이 무렵 하시모토 류타로의 몇 안 되는 측근이 되었다.[4]
1989년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의 협치가 중요해졌다. 이때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을 맡고 있던 사이토는 대응에 고심했다. 1995년에는 제21대 일본 참의원 의장에 취임하여 관례에 따라 자민당에서 잠시 탈당했다. 같은 해 일본사회인단체 마술연맹 회장직을 맡았다. 1998년에 전 총리대신 다케시타 노보루의 지지를 받아 참의원 의장 재임에 성공했다. 재임 이후 참의원 개혁에 진력했지만 한편으론 1999년 범죄 수사를 위한 통신 감청에 관한 법률 등 범죄조직 대책 3법 표결 때 표결 시간을 제한해 야당의 소걸음 전술을 무력화하는 등 대야당 강경책을 펼쳤다.
2000년에 참의원 비례구에서 비구속식 정당명부제 도입 등 선거제 개혁을 둘러싸고 여야가 격렬한 갈등을 빚었다. 야당이 선거 제도를 논의하는 특별위원회에 위원 명부 제출을 거부하며 심의 거부 전술을 들고 나오자 사이토는 의장 직권으로 야당 위원을 선출했다. 그럼에도 제도 개정을 둘러싸고 여야간 조정에 실패하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10월 19일 의장에서 사퇴했다. 사퇴 이후 잠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1년 4월 2일 자민당에 복귀하고 자민당 미에현연합회장이 되었다.
2004년에 참원선 불출마를 표명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쓰다 겐지가 지역구를 물려받았지만 민주당의 시바 히로카즈에게 패배했다. 2001년 참원선에서도 자민당이 패배했기 때문에 미에현의 의석 2개가 모두 민주당에게 넘어갔고 이 상황은 2013년까지 이어졌다. 한동안 미에현은 1인구로서는 드물게 자민당이 힘을 쓰지 못한 곳이 되었다. 은퇴 후 연금 미납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이토도 연금을 미납한 사실이 발각됐다.
은퇴 후에는 전국사회복지협의회장, 중앙공동모금회장, 전국노인클럽 회장 등을 맡았다.
2018년 가을 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5]
2. 1. 정계 입문
사이토 주로는 1940년 2월 미에현 이가시에서 4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사이토 노보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1958년에 도쿄 교육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1962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1] 대학 졸업 후 미쓰이 은행에서 근무했고, 런던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1]1972년 부친 사이토 노보루가 사망하자, 지역구를 물려받아 참의원 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치인이 되었다.[1] 이후 6회 연속 당선되었다. 자민당 내에서는 다나카 파 → 다케시타 파 → 오부치 파 → 하시모토 파에 소속되었다. 대장 정무 차관, 자민당 사회부회장 등을 거쳐[3] 1986년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후생 대신으로 첫 입각했다.[4] 부친 사이토 노보루는 제2차 사토 내각·제3차 사토 내각에서 후생상을 역임하여 부자 2대에 걸쳐 후생상에 취임했다.
1989년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의 협치가 중요해졌는데, 이때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을 맡고 있던 사이토는 '심의 시간은 길게 잡을 수 있어도, 최종적으로는 표결·가결·중의원 송부를 할 수밖에 없다'고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 등 당 집행부에 말하게 되어, 소비세 폐지 법안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2. 2. 정치 활동
사이토 주로는 1940년 2월 미에현 이가시에서 참의원 의원을 지낸 사이토 노보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게이오기주쿠 대학 상학부를 졸업하고 미쓰이 은행에서 근무했으며, 런던 대학교 유학 후 197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승마 경기위원을 맡았다.[2]자민당 내에서 목요 클럽, 헤이세이 연구회 등 파벌에 소속되었고, 대장 정무 차관, 자민당 사회부회장 등을 역임했다.[3] 1986년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후생 대신으로 첫 입각하여,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후생상을 역임했다.[3] 이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참의원 간사장, 참의원 의원 회장 등을 거치며 '참의원의 프린스', '미스터 참의원'으로 불렸다.[4] 하시모토 류타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4]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한 후, 일본사회당과의 협치가 중요해졌고, 사이토는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으로서 소비세 폐지 법안 심의에 대응했다. 1995년 제21대 일본 참의원 의장에 취임하여 관례에 따라 자민당에서 탈당했고, 일본 사회인 단체 승마 연맹 회장을 맡았다. 1998년 다케시타 노보루의 지지로 참의원 의장 재임에 성공했다.
참의원 개혁에 힘썼으나, 1999년 범죄 수사를 위한 통신 감청에 관한 법률 등 범죄조직 대책 3법 표결 때 야당의 소걸음 전술을 무력화하기 위해 투표 시간을 제한하는 등 강경책을 펼쳤다. 2000년 참의원 비례구 선거제도 개혁을 둘러싼 여야 갈등에서 조정에 실패하자 책임을 지고 의장직에서 사퇴했다. 2001년 자민당에 복귀하여 미에현 연합회장이 되었고,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연금 미납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연금 미납 사실이 드러났다.
은퇴 후에는 전국 사회복지협의회, 중앙 공동 모금회, 전국 노인 클럽 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8년 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5]
2. 3. 참의원 의장 시절
사이토 주로는 1995년에 55세로 제21대 일본 참의원 의장에 취임하여 관례에 따라 자민당의 당적을 이탈했다.[4] 같은 해 일본 사회인 단체 승마 연맹 회장도 맡았다.[4] 1998년에는 전 총리대신 다케시타 노보루의 지지를 받아 참의원 의장 재임에 성공했다.[4] 재임 기간 동안 참의원 개혁에 힘썼으며, 푸시 버튼식 투표를 도입했다.[4]1999년, 통신 감청법 등 '조직 범죄 대책 3법' 표결에서 야당이 소걸음 전술을 펼치자, 사이토는 의장 직권으로 투표 시간을 제한하여 소걸음을 봉쇄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4]
2000년에는 참의원 비례구에서 비구속 명부식 도입을 둘러싼 선거 제도 개혁을 놓고 여야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야당이 선거 제도를 논의하는 특별위원회에 위원 명부 제출을 거부하며 심의를 거부하자, 사이토는 의장 직권으로 야당 위원을 선출했다.[4] 그러나 선거 제도 개혁을 둘러싼 여야 간 조정에 실패하자, 사이토는 2000년 10월 19일 책임을 지고 의장직에서 사퇴했다.[4]
2. 4. 의장 사퇴 이후
1995년 제21대 일본 참의원 의장에 취임하여 관례에 따라 자민당에서 잠시 탈당했다.[1] 같은 해 일본사회인단체 마술연맹 회장직을 맡았다.[1] 1998년에는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지지를 받아 참의원 의장 재임에 성공했다.[1] 재임 이후 참의원 개혁에 진력했지만, 한편으론 1999년 통신 감청법 등 범죄조직 대책 3법 표결 때 표결 시간을 제한해 야당의 우보 전술을 무력화하는 등 대야당 강경책을 펼쳤다.[1]2000년에 참의원 비례구에서 비구속식 정당명부제 도입 등 선거제 개혁을 둘러싸고 여야가 격렬한 갈등을 빚었다.[1] 야당이 선거 제도를 논의하는 특별위원회에 위원 명부 제출을 거부하며 심의 거부 전술을 보이자, 사이토는 의장 직권으로 야당 위원을 선출했다.[1] 그럼에도 제도 개정을 둘러싸고 여야간 조정에 실패하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10월 19일 의장에서 사퇴했다.[1] 사퇴 이후 잠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1년 4월 2일 자민당에 복귀하고 자민당 미에현연합회장이 되었다.[1]
2004년에 참원선 불출마를 표명하며 정계를 은퇴했다.[1] 쓰다 겐지가 지역구를 물려받았지만 민주당의 시바 히로카즈에게 패배했다.[1] 2001년 참원선에서도 자민당이 패배했기 때문에 미에현의 의석 2개가 모두 민주당에게 넘어갔고 이 상황은 2013년까지 이어졌다.[1] 한동안 미에현은 1인구로서는 드물게 자민당이 힘을 쓰지 못한 곳이 되었다. 은퇴 후 연금 미납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이토도 연금을 미납한 사실이 발각됐다.[1]
은퇴 후에는 전국사회복지협의회장, 중앙공동모금회장, 전국노인클럽 회장 등을 맡았다.[1]
2018년 가을 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5]
3. 정계 은퇴 이후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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