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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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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함경북도 경원 출신이다. 1902년 사범학교 졸업 후 만주로 망명하여 중광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 등으로 단체를 개편하며 무장 항쟁을 이끌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많은 동지를 잃고 책임을 느껴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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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서일
서일
인적 정보
이름서일
한글서일
한자徐一
로마자 표기Seo Il
출생명 (한글)서기학
출생명 (한자)徐夔學
출생명 (로마자 표기)Seo Gihak
호 (한글)백포
호 (한자)白圃
호 (로마자 표기)Baekpo
출생1881년 2월 26일
출생지함경북도 경원 이천
사망1921년 6월 27일 (40세)
배우자채씨
자녀장녀: 서모 (徐模, 1902~?)
차녀: 서죽청 (徐竹淸, 1906~?)
아들: 서윤제 (徐允濟, 1908-1969) 독립운동가
손자: 서경섭 (徐京燮, 1925~2008)
손자: 서만섭 (徐萬燮, 1930~)
친척장인: 권씨 (?~1931)
사위: 최관 (1900~?)
활동
직업독립운동가
소속대한독립군단 총재

2. 생애

함경북도 경원군 출신으로, 1902년 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11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 1911년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고,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고, 무장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를 거점으로 무장 항쟁을 꾀했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개칭되었는데, 이범석과 김좌진이 소속되어 있었고 서일은 총재를 맡았다.[6]

1921년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8일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가 사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6]

서일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1881년 ~ 1910년)



서일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고, 아호는 백포(白圃)이다.[1][2] 경성에 있는 함일학교의 전신인 경성유지 의숙에 입학하여 한문을 공부하고 1902년 졸업했으며,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1910년까지 교사로 활동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의 항일 투쟁의 어려움을 느껴 1911년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여 명동학교와 청일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여 포교 활동을 하며 본격적인 항일 활동을 펼쳤다.[3][2]

2. 2. 만주 망명과 중광단 조직 (1911년)

1902년 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3][4] 1911년경 5적 암살단 출신의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3] 그리고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했다.[6]

서일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 부대의 잔여 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의 지도자로 취임했다. 그는 단원들에게 반일 의식을 고취하고 대종교의 교리를 교육했지만, 무기 부족으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지안다오 지역에 명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3][4]

2. 3. 대종교 입교와 민족의식 고취 (1912년 ~ 1918년)

1911년경 5적 암살단 출신의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했다.[6]

2. 4.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부 (1919년)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6]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다. 이범석과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은 총재를 맡았다.

1919년 3월, 서일은 계화(桂和)와 함께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여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3] 그들의 목표는 무장 투쟁이었지만, 처음에는 군사 훈련만을 실시했으나, 김좌진의 호응에 따라 전투 태세를 갖추고, 체코 군단의 도움을 받아 단원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3]

대한정의단의 지도자는 서일이었으며, 그는 또한 일민보와 신국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1919년 8월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시작하자 대한정의단도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대한정의단은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조성환, 박찬익 등이 활동하던 길림 군정부와 연합하여 1919년 10월 대한군정부를 결성했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4]

이 무렵, 대종교 2대 교주인 무원종사 김교헌은 그에게 교주직을 넘기려 했으나, 그는 독립군 훈련과 일제에 대한 무장 항쟁에 먼저 집중하기 위해 5년 동안 거절했다.[3][1]

2. 5. 북로군정서와 무장 투쟁 (1920년)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대한정의단으로 개편하고, 무장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시도했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개칭되었다. 이범석과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은 총재를 맡았다.[6]

1920년 8월, 한국정의군은 무장 독립군과 북간도 전역을 행정 구역으로 하는 행정부를 갖춘 군정으로 개편되어 항일 조직으로 발전했다. 현천묵, 김좌진, 김규식, 이장녕, 이범석 등과 함께 군사 훈련, 무기 구매, 대한국민회 권익 옹호, 대중 교섭, 항일 투쟁 전략 수립 등을 추진했다. 1920년 12월에는 상하이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3] 군정의 명칭을 북군정청으로 변경하고, 러시아에서 구입한 무기로 무장한 약 1,600명으로 구성된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훈련했다. 또한 각지에 경찰 업무와 정보 연락을 제공하고, 지역 산업을 진흥시켰으며, 각지에 초등학교와 야간학교를 설립했다. 훈련소 설립을 통해 교육 사업도 펼쳤다.[1] 이들은 각지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자들의 기부금과 함경도 주민들의 모금으로 유지되는 군자금을 기반으로 지역 치안을 유지했으며, 신병 모집과 무기 수입을 담당했다.[3]

2. 6. 대한독립군단과 자유시 참변 (1921년)

1921년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6]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주력 부대는 북만주 미산현 당벽진으로 이동했다. 대한독립군단에는 대한독립군, 국민군, 군사부, 의용군 사령부 등 밀산현에 진입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통합되었다.[3]

서일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3,500명의 병력으로 3개 대대를 조직하고 대일 항전을 다시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로 이동하여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1] 그러나 소련 붉은 군대(볼셰비키)는 일본과 비밀리에 타협하여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주의 세력과 함께, 러시아 도시 아무르(스보보드니)에 집결해 있던 상하이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대한 독립군을 섬멸했다. 조선 공산당 내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 간의 내분으로 인해, 붉은 군대는 대한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와 해산을 요구했지만, 독립군은 이를 거부했다.[5]

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났다.[6] 자유시 수비대 제29연대, 제2군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 연대, 자유 대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의 무장 해제를 시작했고, 곧 전투가 벌어졌다.[3] 그러나 러시아 군인들은 사할린 부대와 대한 독립군 병사, 그리고 러시아 군인을 구별하지 못해 혼란이 발생했다. 동원된 러시아군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해 많은 젊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청천, 오광선, 조안무의 잔존 부대는 붉은 군대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3]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서일은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6]

2. 7. 자결과 사후 (1921년)

1921년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동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졌다.[6] 같은 해 8월 26일, 밀산에서 재기를 계획하던 중, 다시 적의 공격을 받아 자신뿐만 아니라 머물고 있던 마을 주민들까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독립군의 수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결국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대종교의 수련법 중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을 사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5]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기념관 내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적힌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3. 사상과 신념

(주어진 원본 소스가 없으므로, '사상과 신념'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가족

관계이름출생사망
부인채씨
장녀서모1902년?
차녀서죽청1906년?
사위최관1900년?
아들서윤제1908년1969년
며느리권씨1907년1931년
손자서경섭1925년2008년
손자서만섭1930년

[2]

5. 평가

대종교에서는 서일을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통해 종교 교리를 체계화한 성인으로 숭배한다.[3]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높이 평가받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3]

5. 1. 긍정적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3] 독립기념관 내에는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적힌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통해 종교 교리를 체계화한 성인으로 숭배한다.[3]

6. 기념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3] 독립기념관에는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적힌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임시정부 군무총장 서일 (徐一) https://m.cafe.daum.[...] m.cafe.daum.ne 2023-09-10
[2] 웹사이트 '[102주년 삼일절] 청산리 전투의 숨은 영웅 ‘백포 서일’' http://www.joongboo.[...] Joongbu Ilbo 2023-09-10
[3] 웹사이트 Seo Il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9-10
[4] 웹사이트 북로 군정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10
[5] 뉴스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유시 참변' 직후 자결 https://www.jayupres[...] Jayu Press 2023-09-10
[6] 문서 대한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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