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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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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승은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병마절제사, 중추원 부사 등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세조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능지처참을 당했다. 숙종 때 사육신으로 복권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 좌찬성에 증직되고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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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승
기본 정보
성승의 초상
성승의 초상
본관창녕(昌寧)
태첨(泰瞻)
야촌(野村)
시호충경(忠景)
생애
출생1416년
사망1456년
관력
과거문과 급제
주요 관직집현전 교리
예조 참판
형조 참판
공조 참판
이조 참판
동지중추부사
첨지중추부사
사후 증직이조판서
가족 관계
아버지성달생(成達生)
어머니정경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
부인정경부인 해주 최씨(海州崔氏)
아들성세명(成世明), 성담명(成聃命), 성개명(成盖命), 성수명(成遂命)
의정부 좌찬성 증 영의정 정간공(貞簡公) 윤사로(尹師路)에게 출가
사후
추증이조판서
배향창렬서원(昌烈書院)

2. 생애

성승은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자,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아버지 성희와 사촌 형제간이다.[1]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1440년(세종 22) 경상도병마절제사로 부임하였고, 1446년 중추원 부사가 되었다. 1447년(세종 30)과 1451년(문종 1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53년(단종 1년) 도진무로 부임하였고, 1455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강압으로 양위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1]

2. 1. 생애 초반

성승은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자,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아버지 성희와 사촌 형제간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1440년(세종 22) 경상도병마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446년 중추원 부사가 되었다. 1447년(세종 30) 중국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다. 1451년(문종 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正朝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년) 도진무로 부임하였고, 1455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강압으로 양위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

2. 2. 세조 반정 직후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의 왕위를 강압으로 양위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1]

1455년 단종이 왕숙 수양대군을 추대하는 훈신들의 압력에 의해 양위하자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1] 세조의 회유책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고 이후 아들 성삼문, 박팽년, 류성원, 하위지, 이개, 김문기, 허조, 박쟁, 박중림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다.[1]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공신들을 축하하는 한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중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上)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의 뒤에 운검(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1]

2. 3. 거사 실패와 최후

1456년 6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될 때 거사를 정하여 별운검으로 참여, 세조와 의경세자, 해양대군 삼부자의 목을 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신숙주, 한명회 등이 연회를 취소하고 조사하면서 체포되었다.

1456년 6월 7일 세조가 잔치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고 명을 내렸으므로 그날의 거사는 중지되고, 뒷날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인 관가(觀稼)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의 실패로 체포를 염려한 김질의 밀고로 발각됨에 따라 모의하던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6월 8일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형(凌遲處斬刑)을 당했다.[1] 이때 그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죽음을 당했고, 조카들과 사촌 성희 등도 연좌되어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성달생의 묘소는 석물을 뒤엎어버리고 부관참시되었다.[1]

2. 4. 사후

성승은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자,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아버지 성희와 사촌 형제간이다. 그의 상세한 행적이나 전기가 없는 이유는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1] 숙종사육신이 모두 복권되면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1] 정조 8년(1784년)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로 신원되고, 증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1] 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향되고,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되었다.[1] 시호는 충숙(忠肅)이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성석용성석린의 동생
종조부성석린
아버지성달생
어머니풍양 조씨(趙氏)조운개(趙云价)의 딸
부인죽산 박씨박첨의 딸
아들성삼빙
(? - 1456년)
며느리의정(義貞)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의 노비가 됨[3]
손자성한
아들성삼문
(1418년 ~ 1456년 6월 8일)
며느리신씨
며느리연안 김씨(延安金氏)김잉(仍)의 딸, 차산(次山)
손자성맹첨
(? - 1456년)
손자며느리현비(現非)전균(田畇)의 노비가 됨[3]
손자성맹년
(? - 1456년)
손녀성씨성맹년의 딸, 유자미의 며느리
손자성맹종
(? - 1456년)
효옥사육신 처형 당시 미혼으로, 노비가 됨
성씨
(1439 ~ 1489)
사위박림경
(1436 ~ 1485)
외손박증
(1461 ~ 1517)
외손박호
(1466 ~ 1533)
외손박한
(? ~ ?)
성씨
(? ~ ?)
외손엄찬
아들성삼고
(? - 1456년)
며느리김씨(金氏)[4]김수손(金首孫)과 재혼, 이름은 사금(四今)[3], 김련(金憐)의 딸, 김잉의 손녀
손녀성씨[3]
아들성삼성
(? - 1456년)
며느리명수(命守)홍달손(洪達孫)의 노비가 됨[3]
부인미치(未致)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의 노비가 됨[3]
이름 미상
서녀성금(性今)신숙주(申叔舟)의 노비가 됨[5]
서녀옥동(玉童)박원형(朴元亨)의 노비가 됨[5]
외할아버지조운개(趙云价)조운흘의 동생, 본관은 풍양
장인박첨(朴瞻)본관은 죽산


4. 묘소

그의 묘소는 두 곳이다. 사형 직후 누군가 시신을 수습하여 아들 성삼문과 함께 서울 노량진에 장사하였으나 실전되었고, 처가가 있던 충청남도 홍주(洪州) 노은동(홍성군 홍북면 노은동)에 본부인 죽산 박씨의 묘소와 쌍분으로 된 묘소가 있다.[1] 홍성군에는 성삼문의 유허지와 함께 성삼문의 유품을 모신 가묘도 함께 전하고 있다.[1]

5. 관련 작품

6. 기타

사후 그의 아버지 성달생의 묘는 연좌되어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아들 성삼문,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손자 네 명이 모두 처형당하여 그의 후사는 끊겼다. 가까운 친척으로는 그의 사촌 성희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현존하고 있다. 외손으로는 문화 류씨 사헌부감찰 유자미([6])의 아들에게 출가한 증손녀의 후손과 박림경에게 출가한 손녀의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7]

생전에 손자 성한[8]의 과거 급제를 봤고[9], 아들 성삼문의 손녀딸이 태어나는 것을 봤다.

참조

[1] 웹사이트 Seong Seung http://koreandb.nate[...] 2013-01-29
[2] 웹사이트 Seong Seung http://100.daum.net/[...]
[3] 문헌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1456-09-07
[4] 문헌 옥리가 창원 부사 권유순을 잡으려 하자 목매어 죽은 그의 아내 김씨에 대한 사론 1463-06-23
[5] 문헌 형조에 명하여 조석문·강맹경·박종우 등에게 계집종을 내려 주다 1457-08-21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웹사이트 성한(成漢):네이트 한국학 http://koreandb.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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