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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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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위지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경상도 선산 출신이다. 1438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을 거쳐 세종의 사가독서를 거쳤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으며, 문종 대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세조 즉위 후 육조 직계제를 반대하다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처형당했다. 사후 숙종 때 복권되었으며,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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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한글 이름하위지
한자 이름河緯地
로마자 표기Ha Wiji
시대조선
출생1387년 (일설) / 1412년
사망1456년
직업문신 (文臣), 학자
주요 활동단종 복위 운동 가담
관직
최종 관직예조참판
추증이조판서
가족 관계
아버지하담
형제하강지
자녀하호(河琥), 하박(河珀)
시호
시호충렬(忠烈)
본관
본관진주 하씨
아호
천장(天章), 중장(仲章)
단계(丹溪), 적촌(赤村), 연풍(延風)

2. 생애

하위지는 1387년생과 1412년생 설이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경상도 선산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하담(河澹)이고,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진주 하진의 13대 후손(사직공파)으로, 형 하강지, 동생 하기지 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형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 김질, 신숙주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집현전 학자로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1440년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444년 집현전 교리에 임명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 편찬에 참여했다. 1446년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여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11] 이후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세종의 명으로 《역대병요》(歷代炳燿) 편집에 참여했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 이듬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 편찬, 개수 작업에 합류하였다.

1450년 문종 즉위 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1451년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陣說) 교정과 《역대병요》 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집현전으로 승진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정부영의정 겸 섭정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에 물러갔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사퇴하였다.[1]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어 불당 훼철을 주장하였다.[1]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에 춘추관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청에서 경연시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1]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고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마지못해 취임했고, 녹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별실에 쌓아두었다.[1] 이후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세조는 육조 직계제를 추진하였으나, 하위지는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12]

1456년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김질의 배반으로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 후 순절했다. 세조는 "잘못을 했다"고 말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설득했으나, 듣지 않고 거열형에 처해졌다. 하위지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琥)·하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2. 1. 생애 초기

하위지는 경상도 선산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하담(河澹)이고,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증조부는 하윤(河胤),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이다. 진주(晉州) 하진의 13대 후손(사직공파)으로, 위로 형 하강지, 동생 하기지 등이 있었다. 출생년도는 1387년생과 1412년생 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하위지가 태어난 날부터 3일 동안 그의 생가 앞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아호를 단계(丹溪)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 김질, 신숙주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집현전 학자로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2. 1. 1. 출생과 가계

하위지는 경상도 선산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하담(河澹)이고,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증조부는 하윤(河胤),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고려 후기에 사직을 지낸 사직공 하진의 13대 후손(사직공파)이다. 위로 형 하강지, 동생 하기지 등이 있었다. 하위지의 출생년도는 불확실하여 1387년생과 1412년생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출생한 날로부터 3일 동안 그의 생가집 앞을 흐르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 하며, 여기에서 자신의 아호를 따서 단계(丹溪)라 하였다 하며,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전한다.

2. 1. 2. 과거 급제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세종대왕의 특별 명령으로 성삼문, 김질, 신숙주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기도 했다. 그 뒤 집현전 학자가 되어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2. 2. 관료 생활

하위지는 1440년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444년 집현전 교리에 임명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 편찬에 참여했다. 1446년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여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11] 이후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歷代炳燿) 편집에 참여했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 편찬, 개수 작업에 합류하였다.

1450년 문종 즉위 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1451년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陣說) 교정과 《역대병요》 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집현전으로 승진했다.

2. 2. 1. 훈민정음 창제 반대와 세종의 신임

1446년 세종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그는 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한때 세종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11]

2. 2. 2. 문종과 단종 대의 활동

1440년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특별히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도관찰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특별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세종 26) 집현전 교리에 임명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 편찬에 참여했다.

1446년 전라도 나주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탐람죄를 범하여 탄핵을 받자 전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형 하강지는 병중이었고 스스로 인책사퇴로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옥중에 있던 형 하강지의 병을 간호하였다.

1446년 세종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그는 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한때 세종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11]

그 뒤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歷代炳燿)의 편집을 착수했는데 당시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이를 총재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편찬, 개수 작업에 합류하였다.

세종은 평소에도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 단종을 부탁한다고 거듭 지시하였는데, 1450년 장남 왕세자 향은 병약하여 일찍 죽을 것을 예감한 세종은 자신이 병으로 임종하게 되자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하위지도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451년(문종 1)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집현전으로 승진했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2. 2. 3. 수양대군과의 갈등

1453년(단종 1) 봄, 세종 때부터 편찬해오던 《역대병요》가 간행되자,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청하여 편집에 공로가 큰 신하들에게 가자(加資)를 내리도록 하였다. 당시 사헌부 집의(執義)였던 하위지는 이에 대해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위태로운데, 왕족(수양대군을 가리킴)이 작상(爵賞)을 가지고 조신(朝臣)을 농락하면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 일로 훈신들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비난했으나, 수양대군과는 사적으로 친한 사이였으므로 수양대군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1]

1453년 하위지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1]

2. 3. 생애 후반

1453년 음력 10월 수양대군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의정부영의정 겸 섭정에 오르자 하위지는 벼슬을 버리고 선산에 물러가 있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사퇴하였다.[1]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어 왕실에 이롭지 못한 불당을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1]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에 겸임 춘추관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청에서 경연시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1]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고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마지못해 취임했고, 녹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별실에 쌓아두기만 했다.[1] 이후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 직계제를 추진하였으나, 하위지는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12]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김질의 배반으로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 후 순절했다. 세조는 하위지에게 "잘못을 했다"고 말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설득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거열형에 처해졌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아껴 모의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하위지는 "이미 반역자로 정해져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새삼 물을 것이 무엇인가?"라고 답했다. 세조는 노여움이 풀려 하위지만 낙형을 면제했다.[12]

하위지는 국문에서 세조에게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세조가 자신의 편이 될 것을 요청했지만, 하위지는 거절하였다.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12]

하위지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琥)·하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노비로 끌려가게 된 누이동생에게 두 주인을 섬기지 말 것을 부탁한 다음 태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2. 3. 1.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1453년 음력 10월 수양대군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의정부영의정 겸 섭정에 오르자 하위지는 벼슬을 버리고 전사간(前司諫)의 자격으로 선산에 물러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1] 1454년(단종 2)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1]

같은 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겸임 춘추관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청에서 경연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1] 부제학·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55년(단종 3) 다시 직제학이 되었다가 예조참의가 되었다.[1]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예조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녹을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두기만 했다.[1] 곧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임하게 되었다.[1] 그 뒤 예조판서로 다시 승진 제수되었다.[1]

2. 3. 2. 세조의 강권정치 반대

세조는 즉위 직후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삼정승과 좌찬성, 우찬성육조판서들의 정무를 결재하는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육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참판인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12]

하위지는 세조의 강권 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추국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왕권 강화책으로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육조 직계제를 시행하였다. 하위지는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반대하고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12]

2. 3. 3. 단종 복위 운동과 죽음

1456년 (세조 2)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 후 함께 순절했다. 이때 국문장에 나타난 세조는 하위지와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 그에게 "잘못을 했다"는 말을 한다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설득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거열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부인에 의해 수습되어 선산군 서쪽 고방산(古方山) 기슭에 안장되었으며, 1977년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에도 가묘가 조성되었다.

2. 3. 4. 사형 직전

1456년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꾀한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아껴 몰래 그에게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타일렀으나 그는 일소(一笑)에 부쳤다. 문초를 받을 때 그는 “이미 반역자로 정해져서 사형을 받게 된 바에야 새삼 물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라고 대답하여 세조도 노여움이 좀 풀려 하위지만이 낙형(烙刑)을 받지 않았다.[12]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12]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 유응부 등이 당한 작형(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12]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琥)·하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이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 조명(朝命)이 없더라도 자결해야 마땅할 입장입니다.”라고 말하고, 노비로 끌려가게 된 누이동생에게 여자의 의리를 지켜 두 주인을 섬기지 말 것을 부탁한 다음 태연히 죽음을 받으니, 모두들 그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 칭찬했다.

2. 4. 사후

숙종 때 명예가 회복되어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1]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강원도 영월군의 창절사(彰節祠), 경상북도구미시의 월암서원(月巖書院), 충청남도논산시 연산의 충국서원, 경상북도의성군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하담? - ?
하강지? - 1456년
조카하분미성년자라 처형을 모면[14], 1468년 9월 6일 석방[14]
동생하기지? - ?[15]
조카하포미성년자라 처형을 모면[14], 1468년 9월 6일 석방[14]
동생하소지? - ?
아내귀금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의 노비로 분배[16]
목금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의 노비가 됨[16]
아들하호? - 1456년
아들하박? - 1456년
양자하원1451년 - 1518년, 하소지의 아들 하귀동(河龜同)이 개명



두 동생은 일찍 병사하여 형 하강지만이 연좌로 처형당했으나, 세조와 친하게 지냈던 덕에 어린 조카 세 명은 무사하였다. 이는 성삼문의 조카들과 종손들이 처형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후일 동생 하소지의 아들 하귀동(河龜同)이 하원으로 개명하고 양자가 되어 그의 제사를 받들었다.[14]

4. 평가

하위지는 과묵하고 공손한 성품으로, 항상 집현전에서 열리는 경연(經筵)에 왕을 모시며 학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17] 그는 강직한 품성으로 대사간의 직분에 있으면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문종 초기에 왕이 병약하여 힘이 없자, 권력을 농단하는 대신들의 월권행위와 실정, 부패 행위 등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대신들과 문종의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과 정창손 등의 비호로 무사하였다.[17]

남효온은 저서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는 침착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었으나,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물이 고여도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 인물을 논할 때 그를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17]

4. 1. 세조의 월권행위 비판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와 병서(兵書)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다. 역대병요와 병서의 책임자가 수양대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위지는 서적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 승진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하게 시행할 수 없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하위지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5. 하위지를 연기한 배우

6. 기타

하위지는 자신의 두 조카 하원하포가 연좌되지 않은 것을 알고[8], 그들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유산 상속 분재기가 현재 전한다.

단종 복위 운동을 함께 한 성삼문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나, 하위지는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위지의 본관이 단계(丹溪)라는 주장이 있다. 하위지의 조상이 진주에서 분파되었음이 밝혀져 있고, 하위지의 호로 여겨지는 단계(丹溪)와 적촌(赤村)은 모두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조선왕조실록[18]에 따르면, 박팽년의 후손 박해철이 하위지의 본향이 단계(丹溪)라고 주장했으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이 그 조상과 함께 화를 입어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하위지의 지방(紙牓)과 축문의 격식은 '단계(丹溪) 하선생(河先生)'이라고 본관만을 썼다.
  •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하위지 등 27명이 각각 관향(貫鄕)을 썼는데, 하위지는 '단계'라고 썼다는 사실이 명나라의 《요해편》과 조선의 《황화집》에 실려 있다.

참조

[1] 문서 1387년생설도 있다.
[2] 문서 이때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성삼문 등은 후일 그와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다.
[3] 웹사이트 하위지 http://koreandb.nate[...]
[4] 문서 성삼문의 갓난 조카와 종손들까지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5] 실록 계유년의 난신에 연좌된 사람들을 방면하다 세조실록 1468-09-06
[6] 실록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세조실록 1456-09-07
[7] 서적 추강집
[8] 문서 일설에는 1387년생 설도 있다.
[9] 문서 단계(丹溪)과 적촌(赤村)이 둘 다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10] 문서 김질 자신의 장인 정창손을 통해 밀고했다.
[11] 문서 이때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성삼문 등은 후일 그와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다.
[12] 웹사이트 하위지 http://koreandb.nate[...]
[13] 문서 성삼문의 갓난 조카와 종손들까지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14] 실록 계유년의 난신에 연좌된 사람들을 방면하다 https://sillok.histo[...] 세조실록 1468-09-06
[15] 웹인용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4월 17일 무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
[16] 실록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https://sillok.histo[...] 세조실록 1456-09-07
[17] 서적 추강집
[18] 실록 고종실록 고종 42년 4월 26일 양력 1번째 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https://sillok.histo[...] 190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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