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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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축조한 일본식 성곽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여 1597년 9월부터 11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축성되었다. 검단산성의 육지부를 파내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왜교'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만 4천 명의 병력으로 순천왜성에 주둔하며 조선·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현재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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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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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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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일본식 성곽 (왜성) |
높이 | 18m |
소재 | 돌, 나무, 회반죽 벽 |
축조 연도 | 1597년 |
축조자 | 고니시 유키나가 |
사용 기간 | 1593년 - 1598년 |
철거 여부 | 불명 |
문화재 지정 |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
면적 | 188,428m² |
역사 | |
축조 | 고니시 유키나가 |
개축 |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 도도 다카토라 |
통치자 | 고니시 유키나가, 도도 다카토라 |
함락 연도 | 1598년 |
주요 전투 | 불명 |
과거 지휘관 |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 도도 다카토라 |
군사 정보 | |
주둔 부대 | 불명 |
명칭 | |
한국어 명칭 | 순천왜성 (순천시) |
로마자 표기 | Suncheon Waeseong |
별칭 | 왜교성, 예교성 |
2. 역사
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 기지 겸 최후 방어 기지로 삼기 위해 우키타 히데이에,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축조하였다. 축성 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1만 3천 7백 명의 병력으로 이 성에 주둔하였다. 1598년 조명 연합군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 최대 격전이 벌어졌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1]
광해군 때 이수광이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왜성이라는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망해대'''(望海臺)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도록 했다.[1]
순천왜성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 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1934년 제정)에 의거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 1월 21일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호 '승주 신성리성'으로 지정되었다.[6] 1997년 1월 1일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됨과 동시에 도지정문화재 지정 권고를 받았다.[7]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 '순천왜성'으로 지정되었다.[7]
2. 1. 축성 배경
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 기지 겸 최후 방어 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왜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구한 무리한 강화 조건으로 임진왜란 강화 교섭이 결렬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2차 조선 침략(정유재란)에 착수하였다.[1] 일본군 총대장으로 임명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본군을 좌, 우 2개 군과 수군으로 편성하여 우키타 히데이에와 모리 히데모토가 이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 지휘하의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여 8월 16일에 함락시키고,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고, 모리 히데모토 지휘하의 우군도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뒤 전주에 들어와 좌군과 합류하였다.[2]전라도 진출에 성공한 일본군은 전주에서 다시 좌우군의 역할을 재조정하여, 우군은 계속 북진하여 충청도 지방을 점령하고 좌군은 전라도 점령을 고착시키기로 하였다. 하지만 충청도로 북상하던 우군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의 일본군은 1597년 9월 초 직산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패배한 일본군은 9월 중순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여 분산 주둔하며 각 지역의 요충지를 택하여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연말 이전에 순천왜성 등에 축성을 완료하였는데, 이는 직산 패전 이후 내륙 지역에 침략군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본국과 가까운 지역, 즉 병참 보급선이 원활한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가 다시 북상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었다.[2]
순천왜성의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난중잡록」 정유년 9월 초하루 기사에 "행장 등 적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3]고 한 것과 그 해 12월 초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토라 앞으로 축성 완료 서장을 보낸 것으로 보아,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약 3개월간 고니시 유키나가가 축성을 담당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2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에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토라가 순천성을 구축했다고 기술한 데서 비롯되어, 이 두 인물이 축성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4][5]
당시에는 검단산성의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낮에는 다리로 다니고, 밤이면 다리를 끊어 들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연합군에 의해 불러지던 '''왜교'''(倭橋), '''왜교성'''(倭橋城), 예교성(曳橋城), 예교(曳橋)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 2. 축성 과정 (1597년 9월 ~ 1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리한 강화 조건을 요구하여 임진왜란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재차 조선 침략(정유재란)에 착수하였다. 일본군 총대장으로 임명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본군을 좌·우 2개 군과 수군으로 편성하여 우키타 히데이에와 모리 히데모토가 지휘하도록 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의 좌군은 고성, 사천, 하동을 거쳐 남원성을 공격하여 8월 16일에 함락시키고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고, 모리 히데모토 휘하의 우군은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뒤 전주에서 좌군과 합류하였다. 전라도 진출에 성공한 일본군은 전주에서 다시 좌우군의 역할을 재조정하여, 우군은 계속 북진하여 충청도 지방을 점령하고 좌군은 전라도 점령을 고착시키기로 하였다.[2]충청도로 북상하던 우군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의 일본군은 1597년 9월 초 직산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패배한 일본군은 9월 중순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여 분산 주둔하며, 각 지역 요충지에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체로 연말 이전에 순천 왜교 등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이는 직산 패전 이후 내륙 지역에 침략군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본국과 가까운 지역, 즉 병참 보급선이 원활한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가 다시 북상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주력 대군을 왜교성에 배치한 것은 이 성이 호남 공략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순천왜성에서 남해왜성, 사천왜성, 고성왜성, 창원왜성, 양산왜성, 울산왜성으로 이어지는 상호 협력 체제가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2]
순천왜성의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난중잡록」 정유년 9월 초하루 기사에 "행장 등 적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3]고 한 것과 그 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가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토라 앞으로 축성 완료 서장을 보낸 것으로 보아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약 3개월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4]
당시에는 검단산성의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낮에는 다리로 다니고, 밤이면 다리를 끊어 들였다. 임진왜란 당시 순천왜성을 조·명 연합군에 의해 불리던 '''왜교'''(倭橋), '''왜교성'''(倭橋城), 예교성(曳橋城), 예교(曳橋)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 2. 1. 축성 참여 인물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약 3개월간 순천왜성이 축조되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가 축성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토라가 순천왜성을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4] 이는 1922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에서 이 두 장수가 순천성을 구축했다고 기술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5]2. 3. 왜교성 전투 (1598년)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 최대의 결전이 벌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1] 고니시 유키나가는 1만 4천 명의 병력과 함께 이 성에 주둔하여 조명 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2. 3. 1. 전투 관련 주요 인물
순천왜성 전투에는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 양측에서 많은 인물들이 참여하였다.조명 연합군 | 일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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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 이수광이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그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망해대'''(望海臺)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도록 했다.[1]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100년 후 신성리로 주민들이 이주해 왔는데, 왜교성 전투에서 죽은 왜인의 악귀가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주민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1697년경 충무사(忠武祠)를 짓고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하였다.2. 5. 문화재 지정 및 해제
순천왜성은 일제강점기 1938년 조선 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1934년 제정)에 의거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 1월 21일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호 '승주 신성리성'으로 지정되었다.[6] 1996년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 산하 중앙문화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를 재평가했고, 1997년 1월 1일 순천왜성은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됨과 동시에 도지정문화재 지정 권고를 받았다.[7]순천시는 1997년 3월 4일 왜성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하면서, 지정 면적을 내성으로만 한정하여 총 37,858평(125143m2)만 신청하였다. 유적의 실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주민들의 민원과 주변 공단 건설 등으로 인해 내성 일대만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추진, 축소 신청한 것이다.[6] 1997년 6월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 원래 지정 구역이었으나 제외된 외성 지역의 유구 확인 조사를 거치도록 하였고, 문화재관리국 허가를 받아 순천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구간의 유적은 훼손이 심했으나 주변에서 일부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처음 순천시에서 지정 신청했던 내성과 입구의 해자, 왜교 부분을 포함하는 총 188428m2를 국가사적이었다는 점과 역사적·학술적 가치, 보존 상태 등을 감안하여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 '순천왜성'으로 지정하였다.[7]
3. 구조
순천왜성은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로 구성된 본성과, 본성을 육지쪽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3겹의 외곽성으로 구분된다. 전체적인 구조는 바다에 면한 본성을 중심으로 외곽부를 3겹으로 둘러싼 제곽식(梯郭式)이다. 해안에서는 급경사를 이루고, 육지에서는 3겹의 외곽을 둘러 방어 기능을 강화했다.
성의 위치는 작은 반도 지형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며, 서쪽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구릉 능선을 따라 석축으로 장성을 쌓아 외곽으로 적의 침입을 막았다.
본성과 외곽성 사이에는 인위적으로 넓은 해자를 설치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여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하였고,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주변 바다는 얕은 바다였기 때문에 해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어렵다는 이유로 성을 버리는 안이 제출되기도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거절했다. 실제로 명·조선군이 공격해 왔을 때는 오히려 얕은 바다가 다행이 되어 많은 명·조선의 군선이 좌초하였다.
전남대학교 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문지 2개 소, 건물지 1동, 해자 2개 소(1개 소는 주황), 천수대 동편 성벽, 본성 북단 평탄면 등이 확인되었다.[1] 본성과 외성 사이에서 확인된 해자는 최소 너비 23m, 최대 깊이 4.7m이다.[1]
- 야구라(망루): 최소 3개
- 축조 연대: 1597년 12월 2일
- 건설자: 우키타 히데이에, 도도 다카토라
- 등록: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 면적: 188428m2
-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3. 1. 본성 (本城)
순천왜성은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로 구성된 본성과, 본성을 육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3겹의 외곽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성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1만 3천 7백 명의 일본군이 주둔했고 천수대 등의 시설이 있었다.천수대가 있는 중심 구역에는 석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방어를 중심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복잡한 형상과 배치를 하고 있다. 타원형 형태인 혼마루를 중심으로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제1방어선이 무너지면 제2, 제3방어선에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곽은 대부분 직선으로, 많은 부분에 꺾임과 치성인 요코야가카리(橫矢|횡시일본어)를 두었으며, 2중문 형태인 마스가타 고구치(枡形虎口)도 서로 근접시켜 방어력을 극대화하였다.
동남쪽은 급경사로 바다(광양만)와 접하여 유구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섬호집에는 목책을 두 겹으로 둘렀다는 기록이 있다.
본성과 외곽성 사이에는 인위적으로 넓은 해자를 설치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여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했고,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3. 1. 1. 천수각 (天守閣)
순천왜성의 천수는 쓰키 망루(付櫓)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식 천수로, 평면의 크기는 약 18m × 14m이고 높이는 6m 정도이다. 정왜기공도권에는 이 천수 위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라는 글씨와 건물이 그려져 있어 천수각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현재 천수대만 남아있다.[1]
왜성 대부분에는 천수대를 중심으로 많은 기와편이 산재해 있으며, 이 기와편은 천수 지붕에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는 빨강, 다갈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깔로 발견된다. 이 기와는 짧은 축성 기간으로 보아 인근 사찰 등에서 약탈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약탈 장소와 운반 과정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천수대 주변에 산재한 기와편 중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소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천수대는 부산왜성, 웅천왜성, 서생포왜성, 죽도왜성, 사천선진리성 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 왜성에서 천수대는 혼마루 모서리에 위치하나, 순천왜성의 천수대는 주 구루와 내부 북쪽 중앙에 덴슈마루가 독립되어 위치하고 있다. 마치 길다란 배의 조타석 위치처럼 북쪽에 자리한다.[1]
순천왜성에서 천수대를 이 위치에 선정한 이유는 천수대 아래가 커다란 암반이고, 주변을 멀리 조망할 야구라가 필요했으며, 장대로써 권위적인 모습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
본성은 동쪽 최후방 바다 쪽으로 돌출된 작은 산에 축조되었고, 여기에 석축을 쌓아 정상에는 3중의 천수각을 세웠다.[6]
3. 2. 외곽성 (外郭城)
순천왜성의 외곽성은 석벽과 성루가 혼용된 축대 형식으로, 대체로 선형에 가까우나 고구치(虎口) 부분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육지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본성을 3겹으로 둘러싼 형태로, 방어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천수대가 있는 중심 구역에는 석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복잡한 형상과 배치를 보인다.
혼마루는 한 겹으로 쌓여진 타원형 형태이며, 여러 겹으로 중첩된 방어선을 구축하여 제1방어선이 무너지면 제2, 제3방어선에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곽은 대부분 직선으로, 많은 부분이 꺾임과 치성인 요코야가카리(橫矢)를 두고 있으며, 2중문의 형태인 마스가타 고구치도 서로 근접시켜 방어력을 극대화하였다.
동남쪽은 급경사로 바다(광양만)와 접해 있어 유구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섬호집에 목책을 두 겹으로 둘렀다는 기록이 있다. 본성과 외곽성 사이에는 인위적으로 넓은 해자를 설치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여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하고,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외성(外城)은 120600m2 규모이며, 흙과 돌을 사용하여 건설되었다. 3개의 외곽성과 12개의 성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3. 3. 해자 (垓字)
순천왜성 본성과 외곽성 사이에는 인위적으로 넓은 해자를 설치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이는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하기 위함이었으며,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1] 전남대학교 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본성과 외성 사이에서 확인된 해자는 최소 너비 23m, 최대 깊이 4.7m이다.[1]3. 4. 고구치 (虎口)
순천왜성에 현재 남아 있는 고구치(虎口)는 6개소로 외곽성에 3개소, 본성에 3개소가 있다. 왜성은 일반적으로 여러 겹으로 축성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치가 여러 개일 수밖에 없다. 고구치a를 제외한 모든 고구치는 평면상 굴절되어 꺾인 형태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배치이다. 고구치b는 육축 부분에서 문의 넓이가 넓어 방어보다는 공격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마스가타 고구치(枡形虎口)가 설치된 모든 고구치의 출입 방향이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의도적임을 알 수 있으며, 방어 방향, 무기 사용에 따른 공격에 유리한 배치로 볼 수 있다.[8]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서적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3]
저널
난중잡록
1592-09-01 #정유년 9월 초하루를 1592년 9월 1일로 변환
[4]
웹인용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경남연구9》, 2013.12
https://web.archive.[...]
2020-03-20
[5]
서적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6]
웹인용
순천왜성
https://web.archive.[...]
2008-10-01
[7]
백과사전
순천왜성
http://kr.dic.yahoo.[...]
2008-09-28
[8]
논문
순천왜성(順天倭城)의 구조(構造)와 축성방법(築城方法)에 대한 조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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