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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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의 협상에 참여했으나,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 논란이 일었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사후 관직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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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현종 - 심재
심재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좌의정 심희수의 후손이며, 문과 급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나 갑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 조선 현종 - 명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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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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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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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심집 |
한자 표기 | 沈諿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569년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644년 |
사망지 | 조선 |
국적 | |
국적 | 조선 |
학력 | |
과거 급제 | 1596년 (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
경력 | |
주요 관직 |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
기타 경력 | 병자호란 당시 가칭 대신 |
종교 |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관계 | |
부 | 심우정 |
모 | 증 정부인 광주 안씨 |
배우자 | 정부인 남양 홍씨 |
형제 | 심혜(형), 심현(형) |
자녀 | 심동귀(아들) |
친척 관계 | |
증조부 | 심달원 |
조부 | 심자 |
종조부 | 심전 |
당숙 | 심우승 |
6촌 | 심액 |
숙부 | 심우직 |
사촌 | 심간 |
당질 | 심기원 |
조카사위 | 박훤 |
손자 | 심유 |
5세손 | 심성희 |
7세손 | 심염조 |
8세손 | 심상규, 심응규 |
10세손 | 심희순, 심건택 |
11세손 | 심상만, 심상익 |
11세손서 | 이해승 |
2. 가계
심집의 가문인 청송 심씨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명성을 떨친 대표적인 사대부 가문 중 하나이다. 증조부 심달원(沈達源)은 사림파 학자로서 기묘명현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종조부 심전(沈銓)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심집의 가계는 왕실과도 인연이 있었는데, 형수인 청주 한씨는 중종의 부마였던 청원위 한경록(韓景祿)의 손녀이다. 심집의 후손들은 여러 대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 가문의 명맥을 이었다. 특히 8대손 심상규(沈象奎)는 정조와 순조 대에 활약하며 영의정과 문형(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지내 가문의 영예를 드높였다.
시대가 흘러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의 활동은 이어졌다. 11대손 심상만(沈相萬)의 며느리는 대한제국 황족이자 내무독판 등을 지낸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의 딸이다. 그녀의 오빠는 일제 강점기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李埼鎔)이었다. 또한 심집의 11대손녀는 일제 강점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李海昇)과 혼인하였는데, 이해승은 항일 계몽 소설 상록수의 저자로 유명한 심훈(沈熏)의 처남이기도 하다.
2. 1. 주요 가계
- 증조부 : 심달원(沈達源) - 기묘명현, 승문원 판교, 증 이조판서
- 종조부 : 심전(沈銓) - 경기도 관찰사, 증 영의정,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 당숙 : 심우승(沈友勝) -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2등공신에 책록됨, 경기도 관찰사, 증 영의정,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 * 6촌 : 심액(沈詻) - 이조판서, 좌참찬, 판의금부사, 청송군(靑松君)
- 조부 : 심자(沈鎡) - 선공감 첨정, 증 좌찬성
- 숙부 : 심우직(沈友直) - 은산현감
- * 사촌 : 심간(沈諫) - 청풍군수
- ** 당질 : 심기원(沈器遠) - 인조반정 정사1등공신, 좌의정,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 아버지 : 심우정(沈友正) - 여주목사, 증 이조판서
- 어머니 : 증 정부인 광주 안씨
- * 형 : 심혜(沈譓)
- * 형수 : 청주 한씨 - 도사 한완(韓浣)의 딸, 중종의 부마 청원위 한경록(靑原尉 韓景祿)의 손녀
- * 형 : 심현(沈誢) -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의 외조부, 돈녕부 도정으로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부인 여산 송씨와 함께 순절(자결)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 형수 : 여산 송씨
- ** 조카 : 청송 심씨
- ** 조카사위 : 고령 박씨 박훤(朴烜) -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의 아버지, 박정희(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 박근혜(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의 선조
- * 본인 : 심집(沈諿) -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자호란 당시 가칭 대신, 예조판서
- * 부인 : 정부인 남양 홍씨
- ** 아들 : 심동귀(沈東龜) - 홍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증 대사헌
- ** 며느리 : 경주 김씨 - 첨지중추부사 김수렴(金守廉)의 딸,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의 손녀
손자 : 심유(沈攸) -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 증손자 : 심한주(沈漢柱) - 고양군수, 증 이조참의
** 고손자 : 심봉휘(沈鳳輝) - 능주목사, 증 이조참판
*** 5대손 : 심성희(沈聖希) - 이조참판, 증 이조판서
6대손 : 심공헌(沈公獻) - 증 좌찬성
* 7대손 : 심염조(沈念祖) - 규장각 직제학, 황해도 관찰사, 증 영의정
** 8대손 : 심상규(沈象奎) - 초계문신, 규장각 제학, 육조판서, 문형(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영의정, 원상
*** 9대손 : 심정우(沈正愚) - 증 비서승(비서원 승지)
10대손 : 심희순(沈熙淳) - 양자, 심연원(沈連源) · 심광세(沈光世)의 후손인 심의필(沈宜弼)의 아들, 이조참의, 대사성, 증 홍문관 제학
* 11대손 : 심상만(沈相萬) - 이조참의, 대사성, 비서승, 경효전 제조, 영희전 제조, 종묘서 제조, 봉상사 제조, 장례원 소경, 홍릉 제조, 기로소 비서장
* 11대손자며느리 : 전주 이씨 - 내무독판, 종정경, 판돈녕부사,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의 딸, 일제 강점기 자작위를 수여받고 귀족원(상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李埼鎔)의 여동생
** 8대손 : 심응규(沈應奎) - 서흥부사, 증 규장각 직제학
*** 9대손 : 심정의(沈正誼) - 양자, 형조판서 심의면(沈宜冕)의 동생, 승지, 증 규장각 제학
10대손 : 심건택(沈健澤) - 충청남도 관찰사, 지돈녕사사
* 11대손 : 심상익(沈相翊) - 전라남도 관찰사, 내부협판
* 11대손녀 : 청송 심씨
* 11대손녀사위 : 전주 이씨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 - 일제 강점기 후작위를 수여받음, 상록수의 저자이자 항일 계몽운동가인 심훈(沈熏)의 처남
2. 2. 혼맥
- 증조부 : 심달원(沈達源) - 기묘명현, 승문원 판교, 증 이조판서
- 종조부 : 심전(沈銓) - 경기도 관찰사, 증 영의정,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 당숙 : 심우승(沈友勝) - 호성공신 2등, 경기도 관찰사, 증 영의정,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 * 6촌 : 심액(沈詻) - 이조판서, 좌참찬, 판의금부사, 청송군(靑松君)
- 조부 : 심자(沈鎡) - 선공감 첨정, 증 좌찬성
- 숙부 : 심우직(沈友直) - 은산현감
- * 사촌 : 심간(沈諫) - 청풍군수
- ** 당질 : 심기원(沈器遠) - 정사공신 1등, 좌의정,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 아버지 : 심우정(沈友正) - 여주목사, 증 이조판서
- 어머니 : 증 정부인 광주 안씨
- * 형 : 심혜(沈譓)
- * 형수 : 청주 한씨 - 도사 한완(韓浣)의 딸, 중종의 부마 청원위 한경록(靑原尉 韓景祿)의 손녀
- * 형 : 심현(沈誢) - 돈녕부 도정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부인 여산 송씨와 함께 순절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장원(朴長遠, 이조판서, 증 영의정)의 외조부이다.
- * 형수 : 여산 송씨
- ** 조카 : 청송 심씨
- ** 조카사위 : 고령 박씨 박훤(朴烜) -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의 아버지이며,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와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의 선조이다.
- * 본인 : 심집(沈諿) -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 * 부인 : 정부인 남양 홍씨
- ** 아들 : 심동귀(沈東龜) - 홍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증 대사헌
- ** 며느리 : 경주 김씨 - 첨지중추부사 김수렴(金守廉)의 딸,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의 손녀
손자 : 심유(沈攸) -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 증손자 : 심한주(沈漢柱) - 고양군수, 증 이조참의
** 고손자 : 심봉휘(沈鳳輝) - 능주목사, 증 이조참판
*** 5대손 : 심성희(沈聖希) - 이조참판, 증 이조판서
6대손 : 심공헌(沈公獻) - 증 좌찬성
* 7대손 : 심염조(沈念祖) - 규장각 직제학, 황해도 관찰사, 증 영의정
** 8대손 : 심상규(沈象奎) - 초계문신, 규장각 제학, 육조판서, 문형(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영의정, 원상
*** 9대손 : 심정우(沈正愚) - 증 비서승(비서원 승지)
10대손 : 심희순(沈熙淳) - 심연원(沈連源)과 심광세(沈光世)의 후손인 심의필(沈宜弼)의 아들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조참의, 대사성, 증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 11대손 : 심상만(沈相萬) - 이조참의, 대사성, 비서승, 경효전 제조, 영희전 제조, 종묘서 제조, 봉상사 제조, 장례원 소경, 홍릉 제조, 기로소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 11대손자며느리 : 전주 이씨 - 내무독판, 종정경, 판돈녕부사,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의 딸이다. 그녀의 오빠는 일제 강점기 자작 작위를 받고 귀족원(상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李埼鎔)이다.
** 8대손 : 심응규(沈應奎) - 서흥부사, 증 규장각 직제학
*** 9대손 : 심정의(沈正誼) - 형조판서 심의면(沈宜冕)의 동생으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승지, 증 규장각 제학을 지냈다.
10대손 : 심건택(沈健澤) - 충청남도 관찰사, 지돈녕사사를 역임하였다.
* 11대손 : 심상익(沈相翊) - 전라남도 관찰사, 내부협판을 지냈다.
* 11대손녀 : 청송 심씨
* 11대손녀사위 : 전주 이씨 이해승(淸豐君 李海昇) - 일제 강점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항일 계몽 소설 상록수의 저자인 심훈(沈熏)의 처남이기도 하다.
3.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96년 (선조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걸쳐 활동하였다.[1] 초기에는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세자시강원 보덕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1] 인조반정 이후에는 병조참지, 예조참판, 도승지, 형조판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1]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청나라와의 협상 과정에서 보인 태도로 인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2][3][4][5] 1644년 아들 심동귀(沈東龜)가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면서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의 여파로 사후 관작이 추탈되었으나[6], 1681년(숙종 7년) 영의정 김수항 등의 건의로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9]
3. 1. 선조조
1596년 (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 1598년에는 예문관 검열과 대교를 지냈고, 1604년에는 성균관 전적과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1] 이듬해인 1605년에는 사간원 정언과 세자시강원 문학을 맡았으며, 1606년에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하였다.[1] 1607년에는 죽산 부사를 지냈다.[1]3. 2. 광해군조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1614년에는 양호염철조도사(兩湖鹽鐵調度使)와 군자감 정(正)을 지냈다. 1617년에는 성균관 사예, 성균관 사성, 의정부 검상(檢詳),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했으며, 1619년에는 세자시강원 필선과 세자시강원 보덕 등을 거쳤다.3. 3. 인조조
인조반정 후, 1623년(인조 1년) 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1627년(인조 5년)에는 동지의금부사, 1628년에는 예조참판을 지냈다. 1629년에는 도승지와 형조판서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스스로 안변부사로 나가기를 청했다.[1]1633년 부모 봉양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후 1635년 공조판서, 1636년 형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에서 화의를 청하기 위해 청나라 군 진영에 갔던 최명길이 돌아와, 청나라 측이 왕의 아우(왕제, 王弟)와 대신을 인질로 요구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능봉수(綾峯守) 이칭(李偁)을 왕의 아우라 속이고, 판서였던 심집을 대신으로 속여 보내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 장수가 진위 여부를 묻자 심집이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거짓임이 발각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3] 이 일로 유백증 등의 탄핵을 받아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나, 1638년 대사령(大赦令)으로 용서받았다.[4][5]
1640년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644년 아들 심동귀(沈東龜)가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3. 4. 효종 · 현종조
1655년(효종 6년) 심집은 관작이 추탈되고 아들 사간원 사간 심동귀(沈東龜)는 사판에서 삭제되었다.[6]1659년(현종 즉위년) 심집의 손자이자 심동귀의 아들 사헌부 지평 심유(沈攸)가 조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7] 1661년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심지원도 심집의 신원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3. 5. 숙종조
1681년(숙종 7년), 숙종은 심한 가뭄(한재, 旱災) 때문에 죄수들의 형량을 줄여주는 소결(疏決)을 시행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민정중은 재앙을 멈추게 하는 방법으로, 고인이 된 재상 심집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우의정 이상진 역시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신원설치, 伸寃雪恥)시켜 줄 만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숙종은 심집의 직첩(관직 임명장)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9]4. 사후 평가
심집 사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강화 교섭을 위해 사신으로 갔을 때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 논란은 계속되었다.
손자 심유는 현종 대에 상소를 올려, 조부의 행적이 잘못 알려졌으며 억울하게 관작을 추탈당했다고 주장하며 신원을 요청했다.[1] 당시 비변사는 심집의 죄가 명확한 실상 없이 퍼진 말에 근거하고 억울하다는 여론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즉각적인 신원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였고, 현종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심집에 대한 비판은 주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발언과 사헌부의 탄핵 내용에 근거했으며, 이로 인해 효종 대에는 관작이 추탈되기도 하였다.[1] 반면 인조는 생전에 심집을 변호한 바 있으며,[1] 아들 심동귀는 아버지의 억울함으로 고통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결국 송시열과 좌의정 민정중 등의 노력이 이어졌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관작이 회복될 수 있었다.[1]
4. 1. 긍정적 평가
손자 지평 심유(沈攸)는 상소를 올려 조부 심집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했다. 심유는 상소에서 병자호란 당시 형조판서였던 심집이 능봉군 이칭과 함께 임시 대신 자격으로 청나라 진영에 갔을 때의 일을 설명했다. 청나라 장수가 왕자나 왕의 동생을 인질로 요구하자, 심집은 국모 인렬왕후의 상중인 어린 왕자와 의리가 중한 왕의 동생 모두 보낼 수 없다고 맞섰다고 주장했다. 또한 세자는 나라의 다음 임금(貳君)이므로 더욱 인질로 보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고 강조했다.심유는 당시 심집이 대답을 잘못했다는 비방은 와전된 것이며, 인조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축년 겨울, 헌장 유백증이 심집을 탄핵했을 때 인조는 "만약 그 사정을 따지지 않고 자취에 의거해 죄를 논한다면 죽어서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며 심집을 변호했다. 이후에도 인조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것도 아니고 또 사행(使行)을 면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을 보건대 간사한 마음이 없는 자이다"라고 말하며 심집에 대한 탄핵이 부당하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비록 대사헌 홍무적과 원두표 등의 탄핵으로 관작을 추탈당했지만, 당시 비변사에서는 "심집의 죄는 단지 일종의 전파된 말에서 나왔지 원래 드러난 실상이 없었으므로 관작을 추탈당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며 신원의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심집의 아들 심동귀는 아버지의 억울함 때문에 등에 종기가 날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으며, 죽을 때 "나는 죽어도 반드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눈을 감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송시열이 경연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좌의정 민정중이 그 억울한 상황을 현종에게 진달하여 마침내 관직이 회복되었다.[1]
4. 2. 부정적 평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강화 교섭을 위해 적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의 행적이 주요 비판 대상이 된다.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가 이전 정묘호란 때 조선이 가짜 왕자를 보냈던 일을 언급하며 이번에 온 왕자(실제로는 능봉군 이칭)의 진위를 묻자, 심집이 두려워하며 "이번 역시 가짜 왕자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1] 이 답변은 청나라 측을 격노하게 하여 강화 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1]
정축년(1637년) 겨울, 사헌부는 심집이 '가짜 왕의 동생', '임시 대신'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사신인 박난영의 설명과 배치되는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청나라 측을 자극하여 박난영이 해를 입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1] 또한 사행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나라를 팔아먹고 화를 일으켰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그를 유배 보낼 것을 요구했다.[1]
인조는 심집에게 다른 마음(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의도)이 없었고 사행을 피하려 한 것도 아니라며 비호했다.[1] 하지만 대간의 거듭된 탄핵에 결국 그를 잠시 문외출송(門外黜送, 도성 밖으로 쫓아냄)시키는 선에서 무마했다.[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되어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1]
이후 임진년(1652년, 효종 3년) 가을, 대사헌 홍무적, 원두표 등이 다시 심집의 병자호란 당시 발언(“와언”)을 문제 삼아 결국 사후에 관작이 추탈되는 수모를 겪었다.[1]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당시에도 비변사 등에서 부당하다는 논의가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겼다.[1]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숙종 때 좌의정 민정중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1]
4. 3. 종합적 평가
병자호란 당시 청과의 강화 교섭 과정에서 보인 심집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과 평가가 존재한다.핵심 쟁점은 그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적진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발언이다.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과거 조선이 가짜 왕자를 보낸 전례를 언급하며 이번 왕자(능봉군 이칭)는 진짜인지를 묻는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에게 심집이 두려워하며 "이번 역시 가짜 왕자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발언이 청나라 측을 격노시켜 왕세자를 요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정축년(1637년) 사헌부에서는 심집이 능봉군을 '왕의 가짜 동생', 자신을 '임시 대신'이라 칭함으로써, 박난영이 능봉군을 진짜 왕의 동생이자 대신이라고 주장한 것과 어긋나게 만들어 박난영에게 해를 입혔다고 비판했다. 사헌부는 이를 사행(使行)을 면하려 나라를 팔아먹은 행위로 규정하고 먼 곳으로의 유배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된다. 인조는 사헌부의 탄핵에 대해 심집에게 죄는 있으나 다른 마음(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의도)은 없었으며,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죄를 논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그를 변호했다. 또한 심집이 간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지나친 처벌에 반대했다. 사헌부가 "설사 두려워서 말을 잘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역시 크다"고 재차 주장하자, 인조는 잠시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명했으나 오래지 않아 예조판서로 복직시켰다.
심집의 손자 심유(沈攸)는 현종 대에 이르러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심집이 적진에서 왕자나 왕제(왕의 동생)를 인질로 보낼 수 없다고 당당히 맞섰으며,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더욱 보낼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변론했다. 심집에 대한 비난은 당시 잘못 퍼진 소문 때문이며, 인조 역시 그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비변사에서는 심집의 죄가 명확한 실상이 없는 전파된 말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관작 추탈을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면서도, 당장의 신원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였다. 현종 역시 즉각적인 신원 요구는 외람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집은 효종 대인 임진년(1652년) 가을,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이 과거의 논란을 다시 문제 삼아 결국 관작을 추탈당했다. 그의 아들 심동귀(沈東龜)는 아버지의 억울함으로 인해 등에 종기가 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었으며, 죽을 때 눈을 감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송시열이 경연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으나 신원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좌의정 민정중이 다시 그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마침내 관작이 회복되었다.
결론적으로 심집의 행적은 당시 급박했던 외교 상황과 이후의 정치적 해석 속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명확한 실체적 증거보다는 엇갈리는 기록과 소문에 기반한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명예는 사후에 일부 회복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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