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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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 19세기부터 아르메니아인과 오스만 제국 간의 민족주의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으며 강제 이주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튀르키예는 이 사건을 전시 상황의 혼란으로 인한 불행으로 간주하며 조직적인 학살을 부정하지만, 여러 국가와 국제기구는 이를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고 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국제적인 논쟁의 대상이며, 터키와 아르메니아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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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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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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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
다른 명칭 |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짐. |
시기 | 1915년–1917년 |
위치 | 오스만 제국 |
목표 |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
유형 | 집단 학살, 죽음의 행진, 이슬람화 |
사망자 | 60만–150만 명 |
가해자 | 연합진보위원회 |
관련 사건 | 제1차 세계 대전 |
2. 박해 배경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두 차례 발생했다.[5]
- 하미디안 학살: 압둘 하미드 2세 치세인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쳐 발생. 이스탄불 등 서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됐다.
-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 통일과 진보위원회(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발생.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서아르메니아)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와 함께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어 약 백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동맹국 측에 참전했다. 연합국 소속 러시아 제국과의 경계 지역이자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서 코카서스(캅카스)에 걸쳐 전장이 형성되었다.

1923년 오스만 제국 멸망 후 튀르키예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해 전시 상황에서의 강제 이주로 인한 사망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며, 아르메니아 민족 탄압이 아닌 전쟁 중 희생된 사람들 중에 아르메니아인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조직적 학살이었다고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에서 튀르키예에 이르는 “튀르키예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4월 24일은 1915년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기념하는 날로, 매년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벌어진다.
아르메니아인 외에도, 아시리아인과 아나톨리아에 사는 그리스계 폰토스인 (룸)에 대한 학살 사건도 일어났다.[15][16][17]
2. 1.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지위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 사회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농민들의 농촌 사회와, 이스탄불 등의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후자는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해 부유한 상인층을 형성했고, 건축가나 조폐관 등의 직무를 맡아 궁정·중앙 행정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많았다.[18]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 제도를 통해 비무슬림에게 사회에서 종속적이지만 보호받는 위치를 제공했다.[12] 샤리아는 이슬람 우월성을 명시했지만, 지즈야라는 특별세를 내는 대가로 비무슬림(''딤미'')에게 재산권과 예배의 자유를 보장했다.[13] 이러한 배경으로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충실한 밀레트'(Millet-i Sadaka)라고 불렸다.2. 2. 민족주의 대두와 갈등 심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민족주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이 남카프카스를 점령하고,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의 북동부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러시아는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권리 향상을 위한 개혁을 약속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 운동이 시작되었고,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훈체크, 다시나쿠시툰(다시나크파) 등의 정당들이 결성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오스만 제국 내에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 점령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무슬림 난민들로부터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 군대와 협력하여 무슬림을 몰아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인과 튀르키예인, 쿠르드족 사이의 적개심이 커졌고,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은 아르메니아인을 외국과 내통하고 테러를 벌이는 위험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19]
2. 3. 토지 분쟁과 개혁
동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준 봉건제적 조건에서 살았으며, 강제 노동, 불법적인 조세, 강도, 살인, 성폭행 등 처벌받지 않는 범죄에 직면했다.[1] 19세기 중반 쿠르드족 토후국의 폐지로 오스만 정부는 아르메니아 농민들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쿠르드족 지주들은 계속해서 불법적으로 세금을 징수했다.[2]
19세기 중반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은 쿠르드족의 정착과 무하지르 (주로 체르케스인)의 러시아-체르케스 전쟁 이후 이주민들의 도착으로 인해 대규모 토지 탈취에 직면했다.[3] 1876년 압둘 하미드 2세 술탄이 권력을 잡았을 때, 국가는 동부 지방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무슬림 이민자에게 주어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 인구를 줄이는 체계적인 정책을 시작했다.[4]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제국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했다.[5]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1890년에 설립된 혁명적 정치 정당에 가입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은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ARF)이었다.[6]
1877~1878년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동부 아나톨리아 등의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아르메니아 대표단의 국제적 압력 하에 오스만 정부는 개혁을 수행하고 아르메니아 신민의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기로 동의했지만, 시행 메커니즘은 없었고[7]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8]
3. 제1차 아르메니아인 학살 (1894-1896)
1894년, 아나톨리아 동부의 비틀리스 주에서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 간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충돌을 진압했고, 2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 정당은 국제 사회에 호소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스만 제국의 대응을 비판했다. 1895년 1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은 공동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행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그 이행을 오스만 제국에 통보했다. 1896년 아르메니아인 혁명 조직이 이스탄불의 오스만 은행을 습격·점령한 사건이 발생했고, 결국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충돌이 다시 재연되었다.
짐미(즈밈미) 신분으로 살아온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청년 투르크 혁명으로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지만, 1909년 4월 13일에 일어난 아다나 학살로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 15,000~30,000명이 무슬림 주민에게 학살당했다.[23][24][25][26][27] 이때, 알렉산드레타(현 이스켄데룬)의 한 시설은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들로 가득 찼고, 메르신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의 군함 3척에는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오스만 군도 폭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활동했다. 영국 해군의 순양함 다이애나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레타에 기항했지만, 폭동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4. 청년 튀르크 혁명과 아다나 학살 (1908-1909)
압뒬 하미트 2세의 독재는 청년 튀르크당이라는 반대 운동을 촉발시켰다. 청년 튀르크당의 한 파벌은 비밀스럽고 혁명적인 통일진보위원회(CUP)였으며, 메흐메트 탈라트(탈라트 파샤)가 주요 구성원으로 부상했다.[1] 1908년, CUP는 청년 튀르크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았고, 압뒬 하미트는 1876년 헌법을 복원하고 오스만 제국 의회를 재설치해야 했다. 이는 모든 민족과 종교의 오스만인들에게 환영받았다.[2]
1909년 초, CUP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실패한 반 쿠데타를 일으켰다.[3] 반 쿠데타 소식이 아다나에 전해지자,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 구역을 공격했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반격했다. 오스만 군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폭도들에게 무기를 제공했다.[4] 아다나 학살로 아르메니아인을 포함하여 20,000명에서 25,000명 사이의 사람들이 아다나와 인근 마을에서 사망했다.[5] 1890년대 학살과는 달리, 이 사건은 중앙 정부가 조직한 것이 아니라 아다나의 CUP 지지자를 포함한 지역 관리, 지식인, 이슬람 성직자들이 선동했다.[6]
5. 제2차 아르메니아인 학살 (1915-1917)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통일과 진보 위원회(청년 투르크당) 정권은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를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주장이 있다. 4월 24일은 이 학살을 추모하는 기념일로, 매년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벌어진다.[9]
아르메니아인 사망자 수는 자료에 따라 6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까지 다르게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 100만에서 15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10][11][12][13]
이 사건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비견되는 조직적인 학살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튀르키예 정부는 전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며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을 부정하고 있다.
1918년 3월에는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바쿠에서 타타르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34][35][36][37]
5.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오스만 제국의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동맹국 측에 참전했다. 연합국 측 러시아 제국과의 경계이자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서 캅카스에 이르는 지역이 전장이 되었다.[5] 오스만 제국은 흑해 공격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5. 2.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와 학살
1915년 5월 23일, 탈라트 파샤는 반, 비틀리스, 에르제룸에 있는 모든 아르메니아인의 추방을 명령했다.[18] 이미 동부 지역과 실리시아에서 진행 중이던 추방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내각은 당국이 의심스러운 사람을 추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임시 추방법을 승인했다.[19][20][21] 6월 21일, 탈라트는 제국 전역의 모든 아르메니아인의 추방을 명령했으며, 심지어 러시아 전선에서 2000km 떨어진 아드리아노폴까지도 명령했다.[22] 1915년 8월,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제거된 후, 아나톨리아 서부와 유럽령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추방 대상이 되었다.[23][24]국가, 지역, 지방 정부는 통일과 진보 위원회(청년 투르크당)와 협력하여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25] 부족 및 이민 정착국(IAMM)은 비어 있는 집과 토지에 무슬림 이민자들의 추방과 재정착을 조정했다. 탈라트의 내무부의 통제하에 있는 IAMM과 CUP 중앙 위원회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특별 조직은 모든 활동을 긴밀하게 조정했다.[26] 이중 추적 시스템이 명령을 전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의 추방에 대한 명령은 공식 채널을 통해 지방 총독에게 전달되었지만, 절멸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범죄 성격의 명령은 당 채널을 통해 전송되었고 수령 즉시 파기되었다.[27][28]
추방 호송대는 대부분 헌병이나 지역 민병대가 호위했다. 전선 근처의 살인은 특별 조직에 의해 수행되었고, 멀리 떨어진 지역은 지역 민병대, 강도, 헌병 또는 쿠르드 족에 의해 지역에 따라 수행되었다.[34] 제3군이 통제하는 지역 내에서, 동부 아나톨리아를 점령한 이 군대는 반, 에르제룸, 비틀리스의 빌라예트에서만 집단 학살 잔혹 행위에 관여했다.[35]
가해자들은 이데올로기, 복수, 아르메니아 재산에 대한 욕망, 그리고 출세주의를 포함한 여러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36] 가해자들을 동기 부여하기 위해, 국가가 임명한 이맘들은 아르메니아인 살해를 장려했고[37] 살인자들은 아르메니아 동산의 3분의 1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38][39] 집단 학살에 반대하는 오스만 정치인과 관리들은 해고되거나 암살되었다.[40][41][42] 정부는 당국의 의지에 반하여 아르메니아인을 숨겨준 모든 무슬림을 처형하라고 포고했다.[43][44]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의도적이고 국가가 후원한 살해는 1917년 1월 말경에 대부분 중단되었지만, 산발적인 학살과 기아는 계속되었다.[45] 약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집단 학살 중에 사망했다고 추산되며,[46][47] 사망자 수는 60만 명에서 150만 명에 달했다.[48] 80만 명에서 120만 명 사이의 아르메니아인이 추방되었고,[49][50] 1916년 말까지 20만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추산했다.[51]
5. 3. 이슬람화
아르메니아인의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체계적인 국가 정책으로 수행되었으며, 이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주요 구성 요소였다. 약 10만에서 2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31] 청년 튀르크당은 아르메니아 여성들이 무슬림 가정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는 이 여성들이 아르메니아 정체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중 강간과 성적 학대가 만연했다.아르메니아 지도자들은 아르메니아 여성과 무슬림 포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아르메니아인으로 분류하기 위해 전통적인 부계 사회를 버렸다. 알렉산드로폴의 고아원은 세계 최대 규모인 25,000명의 고아를 수용했다. 1920년 콘스탄티노플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은 10만 명의 고아를 돌보고 있으며, 또 다른 10만 명이 억류되어 있다고 추산했다.
5. 4. 피해자 수
이 일련의 박해로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의 수는 튀르키예 측의 최소 추산으로는 20만 명, 아르메니아 측의 최대 추산으로는 200만 명에 이른다.[10][11][12][13]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령 동부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약 150만 명으로 추정되며, 20년 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도 자연 증가와 유출에 따른 감소로 거의 같은 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이미 러시아령으로 도망친 사람,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강제 이주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을 제외한 상당수가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 수는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일부 연구자들은 60만 명에서 80만 명 정도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일반적으로는 100만 명에서 15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6. 집단학살에 대한 견해 차이
튀르키예 측은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전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희생으로 간주하며, 조직적인 학살을 부정한다.[6] 튀르키예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 전시하의 강제 이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즉,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대전 중에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에서 아르메니아 민족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6] 튀르키예는 희생자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인 것은 전시 상황에서 최전선의 혼란으로 인한 불행으로 간주하며, 살해된 사람은 전투원이나 러시아와 내통한 스파이뿐이라고 주장한다.[6]
반면 아르메니아 측은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집시들을 탄압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조직적 학살이었다고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에서 튀르키예에 이르는 “튀르키예 국가”가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6] 4월 24일은 1915년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일이어서, 매년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행해지고 있다.[6]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동정하는 여론이 우세하다.[6] 여러 국가에서 아르메니아 로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회에서 비난 결의를 행했던 나라도 있고,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6]
7. 국제 사회의 반응
1915년 5월 24일, 삼국 협상 국가들(러시아, 영국, 프랑스)은 오스만 제국을 "인도에 대한 범죄와 문명"으로 공식 비난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1]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우''(1916) 및 ''모겐소 대사의 이야기''(1918)와 같은 책으로 관련 증언이 출판되어 학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였다.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군사 동맹국이었다.[2] 독일 외교관들은 1915년 초 아르메니아인들의 제한적인 이주를 승인했으며, 학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3][4] 이는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5][6]
아르메니아인 생존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수십 개 국가에서 구호 활동이 조직되었다. 1925년까지 49개국 사람들이 인도주의적 노력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난민의 식단을 섭취하는 "황금률 일요일"을 조직했다. 1915년과 1930년 사이에 근동 구호 위원회(Near East Relief)는 오스만 제국 난민을 위해 1억 1천만 달러(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10억달러)를 모금했다.[7]
8.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문제의 영향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터키령으로 되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 문제는 영토 문제를 내포하는 정치 문제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튀르키예 영토의 옛 아르메니아인의 거주 지역은 쿠르드인이 대부분 살고있는 쿠르디스탄의 한 부분으로서, 쿠르드족 문제도 관계있다.
2012년 1월 23일 프랑스 의회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인 금지법"을 통과시키면서 양국간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튀르키예는 이에 정치, 군사 관계를 중단시켰다.[42] 그러나 2012년 2월 28일, 프랑스 헌법 재판소(헌법 법원)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부정 금지 법안을 "사상과 발언의 자유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위헌이라고 판단했다.[43]
터키 정부의 지속적인 부인에 대응하여, 많은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활동가들은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한 국제적인 공식 인정을 위해 로비를 해왔다. 1970년대부터 많은 국가들은 터키와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인정을 회피했다. 2023년 기준으로, 31개의 UN 회원국이 교황 프란치스코와 유럽 의회와 함께 집단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아제르바이잔, 파키스탄, 터키는 집단학살을 명시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2019년 10월 29일, 미국 하원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초당적인 찬성 다수로 가결했고, 터키 정부는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4] 2021년 4월 24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학살이 제노사이드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책임 추궁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바이든의 성명을 비난했다.[48]
2016년 6월 2일, 독일 연방 의회 (하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했다.[52]
9.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국교 정상화 시도와 그 이후
2009년 10월 10일,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서방의 지원 아래 지역 안정을 꾀하며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장이 좁혀지지 않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포함한 합의 문서 내용은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이었다.[50]
2014년 4월 23일,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터키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추도 의사를 표명했다.[5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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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reban Mail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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