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노 나가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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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노 나가노리는 1667년 에도에서 태어난 아코 번의 3대 번주이다. 그는 9세에 아코 번주가 되었으며, 재임 기간 동안 번찰 도입, 염전 기술 전파, 치수 사업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1701년, 그는 에도 성 소나무 복도에서 키라 요시나카를 칼로 공격하는 사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할복하게 된다. 그의 사후, 가신들은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라 요시나카를 살해하는 겐로쿠 아코 사건을 일으켰고, 이 사건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복수극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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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나가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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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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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간분 7년 음력 8월 11일(1667년 9월 28일) |
사망 | 겐로쿠 14년 음력 3월 14일(1701년 4월 21일) |
아명 | 이누치요 (犬千代) |
통칭 | 마타이치로, 마타시로 |
시호 | 바이타니 (梅谷) |
계명 | 냉광원전전소부조산대부취모현리대거사 (冷光院殿前少府朝散大夫吹毛玄利大居士) |
묘소 | 고야산 실지원 (고야산시치인) |
관위 | 종5위 하・내장료 두 (内匠頭)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도쿠가와 쓰나요시 |
번 | 하리마국아코번 번주 |
씨족 | 아사노 씨 |
가문 | 고리 속에 매 깃털(丸に違い鷹の羽)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사노 나가토모 |
어머니 | 나이토 다다마사의 딸 하치 |
형제자매 | 나가노리, 나가히로 |
배우자 | 정실: 요젠인(아사노 나가하루의 딸) |
경력 | |
아코번주 임기 | 1675년 ~ 1701년 |
전임 | 아사노 나가토모 |
후임 | 개역→아코 사건 나가이 나오히로 |
2. 가계
아코 아사노 가문은 히로시마번 아사노 가문의 방계 가문으로, 아사노 나가마사의 셋째 아들인 아사노 나가시게를 시조로 한다. 아사노 나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에도에서 아사노 나가토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히로시마에 본가를 둔 아사노 씨의 분가였다. 할아버지 나가나오가 5만 석의 다이묘였으며, 아버지 나가토모가 잠시 뒤를 이었으나 1675년 사망하자 나가노리가 아홉 살의 나이로 가문을 계승했다.
아코 아사노 가문은 게이초 16년(1611년), 나가마사 사후 그의 은거료였던 히타치국 마카베번 5만 곡을 나가시게가 상속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나가시게는 겐나 8년(1622년) 카사마번으로 영지를 옮겼다. 간에이 9년(1632년) 나가시게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아사노 나가나오가 뒤를 이었다. 나가나오는 쇼호 2년(1645년) 하리마국 아코번으로 전봉되어 초대 아코번주가 되었다. 나가나오는 아코성 축성, 성 아래 마을의 상하수도 정비, 아코 소금 개발 등을 통해 번 통치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나가나오가 1671년에 사망하자 아들 아사노 나가토모가 2대 번주 자리를 계승했으나, 1675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아사노 나가노리는 에도에서 나가토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1675년,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3대 아코번주가 되었다.
3. 생애
1680년, 황실 관련 업무를 상징하는 명예직인 ''다쿠미노카미(内匠頭)''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여러 하위 직책을 맡았다. 1683년에는 황실 사신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막부의 의례 책임자였던 고케 키라 요시나카를 처음 만났다.
1694년 심각한 병을 앓았으나 자녀가 없어 후계자가 없었다. 당시 후계자 없이 다이묘가 사망하면 가문이 단절되고 영지가 몰수되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동생 나가히로(다이가쿠)를 양자로 입양하여 막부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1701년, 다시 칙사 접대역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키라 요시나카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나가노리는 에도 성 안의 소나무 복도(松之大廊下)에서 와키자시(짧은 칼)를 뽑아 키라를 공격했으나 살해에는 실패하고 부상만 입혔다. 사건 당일, 제5대 도쿠가와 막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그에게 셋푸쿠를 명령했다. 나가노리는 죽음의 시를 남기고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3. 1. 아코 번주
간분 7년 8월 11일 (1667년 9월 28일) 에도 뎃포즈(현 도쿄도 주오구 아카시초)의 아사노 가문 상저택(현재 세이로카 국제대학 자리)에서 아사노 나가토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가토모의 정실이자 도바번주 나이토 타다마사의 딸 하치이다. 아명은 조부 나가나오, 아버지 나가토모와 같은 '''마타이치로'''(又一郎)였다.
엔포 3년 1월 26일 (1675년 2월 20일) 아버지 나가토모가 사망하자, 같은 해 3월 25일 (4월 19일) 만 7세(세는나이 9세)의 나이로 아코 아사노 가문의 가독을 이어 제3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7일 (5월 1일)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처음 배알했다. 또한 같은 해 윤4월 23일 (6월 16일) 미요시번주 아사노 나가하루의 딸 아구리 공주와의 혼인이 에도 막부에 신청되어 8월 8일 (9월 27일) 수리되었고, 텐와 3년(1683년) 5월 18일 아구리와 정식으로 혼인했다.
엔포 8년(1680년) 8월 18일 종5위하에 서임[2]되었고, 21일에는 조부 나가나오와 같은 다쿠미노카미(内匠頭) 관직을 받았다[3]. 이 직책은 명목상에 불과했지만, 다이묘로서 도쿠가와 막부의 여러 임시 하위 직책에 여러 번 임명되었다.
텐와 2년 3월 28일 (1682년 5월 5일) 조선 통신사 접대역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이즈 미시마(현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에서 통신사 이지관 등을 접대했다.
텐와 3년 2월 6일 (1683년 3월 4일) 레이겐 천황의 칙사 하나조노인 사다마코와 치구사 아리토시의 접대역을 명받았다. 이때 고케 기라 요시나카가 접대 지도를 맡았으며, 나가노리는 이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이때 처음으로 기라 요시나카를 만났다.
같은 해 6월 23일 (8월 15일) 처음으로 영지인 아코에 들어가 오이시 요시오 등 가신들과 대면했으며, 이후 산킨코타이로 에도와 아코를 오갔다. 조쿄 원년(1684년) 동생 나가히로와 함께 야마가 소코에게 맹서를 제출했다.
겐로쿠 3년 12월 23일 (1691년 1월 21일) 혼조(本所) 소방 다이묘로 임명되어 활동했다[4].
겐로쿠 6년(1693년) 12월 22일 (1694년 1월 17일) 빗추 마쓰야마번 미즈노 가문 개역에 따른 마쓰야마성 인수 책임자가 되었다. 나가노리는 군사를 이끌고 1694년 2월 23일 (3월 18일) 성을 인수받았으며, 이후 가로 오이시 요시오에게 성 관리를 맡겨 약 1년 9개월간 아사노 가문이 성을 관리했다.
겐로쿠 7년 8월 21일 (1694년 10월 9일), 아구리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동생 나가히로(다이가쿠)를 양자로 맞이하고 신전 3,000석을 주어 하타모토로 삼았다. 다음 해인 겐로쿠 8년 12월 29일 (1696년 2월 2일) 나가노리가 천연두에 걸려 위독해지자 나가히로를 정식 후계자로 삼았으나[5], 이후 병세가 호전되어 겐로쿠 9년(1696년) 5월경 완치되었다.
겐로쿠 9년 5월 9일 (6월 8일) 혼조 재목창 화번(火番)으로 임명되었고, 겐로쿠 11년(1698년) 칸다바시(神田橋) 오반(御番, 경비 책임자)을, 겐로쿠 13년(1700년)에는 사쿠라다몬(桜田門) 오반을 맡았다.
겐로쿠 14년 2월 4일 (1701년 3월 13일) 두 번째로 칙사 접대역을 명받았다[6]. 이때 기라 요시나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긴장이 고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번째 칙사 접대 임무 중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나가노리는 할복하게 된다.
3. 2. 덴추 칼부림 사건
겐로쿠 14년(1701년) 2월 4일(3월 13일), 아사노 나가노리는 두 번째로 칙사 접대역을 맡게 되었다.[6] 그는 이전인 1683년에도 칙사 접대역을 맡은 경험이 있었는데, 당시 의례 지도를 담당했던 고케 키라 요시나카와 이때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좋지 않았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겐로쿠 14년 3월 14일(1701년 4월 21일), 에도 성 혼마루(本丸)의 오로카(大廊下, 큰 복도), 통칭 '마쓰노오로카(松之大廊下)'에서 나가노리는 와키자시(짧은 칼)를 뽑아 키라 요시나카에게 휘둘렀다. 키라는 등과 이마에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고, 나가노리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제지당했다.
사건 당일, 제5대 막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나가노리에게 즉시 셋푸쿠(할복)를 명령했다. 나가노리는 다무라 다쓰아키의 저택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할복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죽음의 시(지세이)를 남겼다.
:''「風さそう花よりも / なお我はまた / 春の名残を / いかにとやせん」''
:''"kaze sasou / hana yori mo nao / ware ha mata / haru no nagori wo / ika ni toyasen."''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보다도 / 더욱 나는 또다시 / 봄날의 마지막 자취를 /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하네."''
나가노리가 체포된 후 취조에서 어떤 진술을 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사료는 부족하다. 막부의 관리였던 타몬 시게토모가 남긴 『타몬 필기』(다만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취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키라에게 조금도 원한은 없었으나, 나의 개인적인 유감이 있어 앞뒤 생각 없이 베어 죽이려 칼을 휘둘렀다. 어떤 처벌을 받든 더 할 말은 없으나, 키라를 죽이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개인적인 유감 때문에 칼을 휘둘렀다고 인정했지만, 구체적인 동기나 사건 경위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키라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며 키라의 상태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적혀있다.
3. 3. 할복
겐로쿠 14년( 1701년 ), 나가노리는 두 번째로 칙사 접대역을 맡게 되었다.[6] 이 임무 수행 중 에도 성 안의 소나무 복도(松之大廊下)에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케 키라 요시나카에게 와키자시(짧은 칼)를 뽑아 공격했다. 그러나 키라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살해하지는 못했다.
사건 당일, 제5대 막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이 사건에 크게 분노하여 나가노리에게 즉시 할복을 명령했다. 오메쓰케(大目付) 다몬 덴추(多門伝八郎) 등 일부 관료는 키라에게도 원인이 있을 수 있으니 신중한 조사를 건의했지만, 쇼군의 측근인 소요닌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당일 할복이 결정되었다. 이는 에도 성 내 칼부림 사건에 대해 당일 할복 명령이 내려진 첫 사례였다. 과거 나가노리의 외삼촌 나이토 타다카츠나 사촌 이나바 마사야스가 비슷한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처벌이 가벼웠던 점을 고려하여, 쓰나요시가 이번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는 설도 있다.
나가노리는 무쓰 이치노세키번주 다무라 다테아키의 에도 저택(현재 도쿄도 미나토구 신바시 소재)으로 이송되어 그곳에 맡겨졌다. 오후 늦게 다무라 저택의 정원에서 할복을 명받고, 다음과 같은 지세이(辞世, 죽음의 시)를 남긴 뒤 생을 마감했다. 향년 35세였다.
>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보다도
> 더욱 나는
> 봄날의 마지막 자취를
> 어찌하면 좋을지
나가노리의 할복으로 아코번 아사노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단절되었으며, 가신들은 주군을 잃고 로닌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아코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의 묘소는 에도 다카나와의 센가쿠지에 마련되었다.
4. 사후
막부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은 아사노 나가노리는 다무라 가문의 저택으로 이송되었다. 이치노세키 번의 기록인 『내장두(다쿠미노카미) 맡아둠 건』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신시(申の刻, 오후 4시 30분경)에 다무라 저택에 도착하여 '만남의 방'에 수용되었다. 그는 입고 있던 다이몬(大紋)을 벗은 뒤, 제공된 1즙 5채의 식사 대신 탕즈케(湯漬け, 밥에 국을 말아먹는 것) 두 그릇을 청해 먹었다. 다무라 가문 측에서는 즉시 할복이 집행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하고 장기간의 감금을 예상하여 방의 미닫이를 못 박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신시의 시모노코쿠(申の下刻, 오후 6시 10분경), 막부의 정검사역 오메츠케 쇼다 야스토시와 부검사역 메츠케 다몬 시게토모, 오쿠보 타다토시 등이 다무라 저택에 도착하여 나가노리에게 할복과 개역(영지 몰수)을 선고했다. 나가노리는 "오늘 불초법스러운 방식으로 어떤 식으로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을 할복이라고 말씀하시니, 감사하게 생각하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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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리는 죽기 전, 측근인 카타오카 타카후사와 이소카이 마사히사에게 "이 일은, 미리 알려야 할 것 같으나, 오늘 부득이하게 알릴 수 없으니, 의심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는 의미가 불분명한 유언을 남겼다고 『내장두 맡아둠 건』에 기록되어 있다. 이 유언의 정확한 의미나 전체 내용이 막부를 의식하여 삭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나가노리의 할복 소식을 들은 아사노 가문의 가신 카타오카 타카후사, 카스야 칸자에몬, 타테베 키로쿠, 타나카 테이시로, 이소카이 마사히사, 나카무라 세이에몬 등이 다무라 저택으로 가서 유체를 확인했다. 카이샤쿠 과정에서 목을 두 번 베는 실수가 있었으며, 이때 튄 피가 묻었다고 전해지는 '핏빛 매화'가 센가쿠지에 남아 있다. 가신들은 나가노리의 유체를 수습하여 타카나와 센가쿠지에 매장하였다.
나가노리의 할복 소식이 전해지자, 에도의 상인이나 낭인들이 아코 번 저택에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약 40~50명에 달하는 이들은 배를 타고 침입하기도 했으며, 이에 오가키 번과 아사노 본가인 히로시마 번에서 경호 인력이 파견되었다. 호리베 야스베 등 아코 번 가신들도 저택을 지키기 위해 폭도들과 싸우며 금품 강탈과 파괴를 막았다.[10] 나가노리의 죽음으로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가신들은 주군을 잃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
다무라 가문 상옥 저택 터에 있던 추도비는 철거되었지만[11], 인근에 "아사노 다쿠미노카미 종언의 땅" 비가 남아 있다. 이 비석은 한때 이유를 알 수 없이 뒤쪽으로 세워져 있었으나[12], 현재는 재설치되어 수정되었다.
4. 1. 겐로쿠 아코 사건
아사노 나가노리가 할복한 후, 막부는 그의 영지를 몰수했고, 그의 가신들은 낭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지휘 아래, 이들은 주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1702년 12월 15일, 가신들은 에도에 있는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하여 기라 요시나카를 살해했다. 이 사건이 바로 겐로쿠 아코 사건이다.복수에 참여한 전직 가신들은 사십칠 ''로닌''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들의 복수극은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사건은 이후 충신장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나가노리는 센가쿠지 묘지에 묻혔다.
나가노리가 최후를 맞은 다무라 가문 상옥 저택 터에 있던 추도비는 철거되었지만[11], 저택 터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아사노 다쿠미노카미 종언의 땅" 비석이 남아 있다. 이 비석은 한때 이유를 알 수 없이 뒤쪽으로 세워져 있었으나[12], 현재는 다시 설치되어 바로 세워져 있다.
4. 2. 아코 아사노 가문의 이후
아사노 나가노리가 할복한 후, 막부는 그의 영지인 아코 번을 몰수하였다. 이로 인해 나가노리를 섬기던 가신들은 주군을 잃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가신들은 주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중심으로 뭉친 옛 아코 번 가신들은 1702년 12월 15일, 에도에 있는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이들은 이후 사십칠 ''로닌''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들의 복수극은 일본 역사상 매우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나가노리의 유신(遺臣)들이 기라 저택에 쳐들어간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코 사건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칼부림의 이유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 안에서 키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두른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나가노리 본인이 체포된 후 취조 과정에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식적인 취조가 있었는지조차 확실한 사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 막부의 관리였던 타몬 시게토모가 남긴 『타몬 필기』(단, 타몬은 평소 과장된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져 기록의 신뢰도에는 주의가 필요하다)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취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키라 개인에게 조금도 원한은 없었으나, 나 자신의 유감이 있어 개인적인 분노로 앞뒤 생각 없이 칼을 휘둘렀다.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더 할 말은 없으며, 키라를 죽이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키라에 대한 '개인적인 유감' 때문에 칼을 휘둘렀다고 인정했지만, 그 유감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건의 자세한 경위는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키라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며 키라의 상태만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타몬이 "고령이시고 얼굴에 상처를 입어 걱정된다"고 답하자 나가노리가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나가노리가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칼부림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주요한 설은 다음과 같다.
# 뇌물설: 키라 요시나카가 나가노리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나가노리가 이를 거절하자 키라가 모욕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이는 『도쿠가와 실기』나 오와리 도쿠가와 가 가신 아사히 시게아키의 일기 『앵무롱중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사건을 극화한 『충신장』 계열의 작품들에서 주로 채택되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 되었다.
# 예산 절감설: 칙사 접대 비용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는 설이다. 하이쿠 스승이었던 미즈마 점토쿠의 『점덕수필』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막부의 비용 절감 지시에 따라 접대 비용을 700량으로 줄이려 했으나, 키라가 물가 상승 등을 이유로 1200량을 요구하며 반대하여 불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가노리가 처음 칙사 접대를 맡았을 때 비용이 400량이었고[22], 당시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도 1200량은 과도하게 높은 금액이라는 지적도 있다.
# 염전 분쟁설: 아코 번의 특산품인 소금 제조법이나 에도의 소금 시장을 둘러싸고 다툼이 있었다는 설이다. 미카와국 출신 작가 오자키 시로가 주장했으나, 키라의 영지로 알려졌던 염전이 실제로는 다른 가문의 영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여겨져 부정되고 있다.
# 다다미 교체설: 조조지에서 칙사 참배 준비 중 다다미 교체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는 설이다. 아키타 번 가로 오카모토 모토토모의 일기 등에 따르면, 나가노리가 키라에게 다다미 교체 필요 여부를 묻자 키라는 불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행사 전날이 되어서야 키라가 노중 아베 마사타케의 지시라며 다다미를 새로 깔라고 말을 바꾸었고, 이에 나가노리가 항의하자 키라가 "모든 일에 인색하게 굴면 접대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답하면서 갈등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각 설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더 자세한 내용과 신빙성이 낮은 설들에 대해서는 아코 사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성격
아사노 나가노리의 성격에 대해서는 동시대 기록들마다 다양한 평가가 나타난다.
유학자 무로 큐소는 그의 저서 『아코 의인록』에서 나가노리를 "사람됨이 강경하고 굽히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머리를 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기록했다. 한편, 키라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 쿠리자키 도유는 『쿠리자키 도유 기록』에서 아사노 나가노리가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고 적었다.
1690년경 여러 다이묘들의 평판을 기록한 『토개구수기』에서는 나가노리에 대해 "지혜가 있고 영리하다. 가신과 백성들의 처신도 좋으므로, 무사도 백성도 풍족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극심하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간사한 아첨꾼들이 주군의 취향에 맞춰 여자를 바치며 출세하고, 정치는 가신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지적했다.[25] 이 책에서 나가노리는 전체 다이묘 중 중하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26] 다만, 나가노리가 여색을 밝혔다는 기록은 『토개구수기』 외 다른 동시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측실을 두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 평가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27]
겐로쿠 14년(1701년)에 쓰인 『간징기후세이』라는 기록물에서도 나가노리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이 기록은 나가노리가 학문(문도)과 지혜가 부족하고 경솔한 면이 있지만, "순수하고 정직하며", 일상적인 행동이 의리에 어긋나지 않고 사치하지 않으며 충성심을 중시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과거 부인의 하녀와 관련된 좋지 않은 일(1687년 저택 하녀 방화 사건으로 추정됨[29][30])로 인해 세간의 평판이 나빠졌으며, 영지민을 수탈하는 등 좋지 않은 행실이 있어 앞날이 위태롭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했다.[28]
하타모토였던 이세 사다타케는 『46의사 논평』에서 나가노리가 "성격이 매우 급한 사람"이었으며, 가신들이 키라에게 뇌물을 보내라고 권했지만 "무사로서 아첨으로 뇌물을 보내고 남의 그림자 아래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기록했다.[23] 하지만 이세 사다타케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와의 만남 시기가 연대적으로 맞지 않아, 이 기록의 신뢰성은 매우 낮게 평가된다.[24]
7. 지병
나가노리는 감정이 격해졌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는 '체(つかえ)' 또는 비기(痞気)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레이코 군 어전기』에는 "11일 미명, 전주중 에도 어착좌 레이코 군(아사노 나가노리)에게는 조금 불쾌함이 있어 이로 인해 어보양하시고, …… 지병은 이 비기가 되셨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체'라는 단어를 근거로, 나가노리가 정신병, 특히 조현병을 앓았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에도 시대의 의학적 관점에서 정신 장애는 '경(驚)'(경련을 주 증상으로 하는 소아 질환), '전(癲)'(큰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 '경전(驚癲)'(신경증 계열 질환), '광(狂)'(조현병 해당)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광(狂)'은 다시 '강광(剛狂)'(긴장형 조현병)과 '유광(柔狂)'(파과형 조현병)으로 분류되었고, 현대의 정신 지체에 해당하는 '치준(痴鵔)', 섭식 장애에 해당하는 '불식(不食)' 등의 용어도 당시 문헌에서 발견된다.[31]
아사노가 앓았던 '체(つかえ)'는 이러한 분류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체'는 감정이 격해졌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 배 안에 덩어리 같은 것이 있어 아픈 병, 또는 유아의 배앓이 등으로 여겨졌다.[32] 중국의 의학서 『황제팔십일난경』이나, 이를 연구하여 해석본을 낸 도쿠가와 막부의 어의 다키 겐인(多紀元胤)의 『황제팔십일난경소증』 등에서도 비기(痞気)는 "비(脾)의 적(積)"으로, 위완(胃脘)에 발생하며 간장이나 비(소화 기관)와 관련된 병으로 설명되었다.[33]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당시 의학적 기준으로 '체(つかえ)'나 비기를 현대적인 의미의 정신병이나 조현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34]
8. 치세
아사노 나가노리는 번주로서 아코 번의 발전에 기여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제염 기술 전파당시 아코 번에서 도입했던 염수 농축법에 의한 입빈 염전 기술을 다른 번에도 가르치고, 타 번 사람들이 기술을 배우러 오는 것을 허가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엔포 8년(1680년) 리쿠젠국(현 미야기현) 모토요시군 마류무라의 사토 산에몬이 있다. 그는 제철 기술 조사를 위해 주고쿠 지방을 방문했다가 귀로에 아코에 들러 선진적인 제염법을 목격했다. 기존의 원시적인 제염법은 막대한 연료를 소모했기에, 산에몬은 효율적인 반슈식 제염법 도입을 결심했다. 덴나 3년(1683년), 그는 번의 허가를 얻어 동생 등과 함께 아코에 머물며 제염 기술을 배웠고, 돌아갈 때는 아코의 기술자(하마코) 2명을 2년간 고용해 갔다. 이듬해에도 다시 아코를 방문하여 기술자(하마 대목)를 고용했다. 당시 아코의 오토시요리(お年寄り, 번의 중역)나 쇼야(庄屋, 촌장)가 이러한 고용 계약을 승인한 문서가 남아있다.[35] 사토 산에몬이 도입한 새로운 제염법은 기존 방식보다 약 3배의 성과를 거두어 큰 이익을 남겼고, 그는 오오반사(大番士, 막부 직책)로 출세했다. 아코의 제염 기술은 이후 도호쿠 지방 각지로 전파되었다고 한다.[36] 이러한 중요한 기술 전수는 당시 번주였던 아사노 나가노리의 허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35]
다만, 이 시기 입빈 염전법은 아코뿐만 아니라 세토 내해 연안의 하리마, 빈고, 빗추, 아키, 스오, 나가토, 아와, 사누키, 이요 등 10개 국(國)에 이미 퍼져 '십주 염전(十州塩田)'이라 불릴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다.[37] 따라서 아코 번이 기술을 비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번찰 도입나가노리는 번찰(藩札, 번에서 발행한 화폐) 도입에도 비교적 일찍 착수했다. 번찰은 간에이 7년(1630년) 빈고 후쿠야마 번, 간분 원년(1661년) 에치젠 후쿠이 번 등에서 시작되었지만, 많은 번들이 18세기 이후에 도입한 것과 달리 아코 번은 엔포 8년(1680년)부터 번찰을 도입했다. 번찰 도입에는 번주의 결정과 막부 신고가 필요했다. 아코 번은 영지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영내에서 번찰만 사용하도록 하는 정책(전일 유통)을 철저히 시행했음이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38] 이는 영내 통화 부족 해소, 재정 적자 보전, 그리고 번찰 유통을 통한 금융 정책 장악 등을 목적으로 한 선도적인 시도였다고 평가된다.
치수 사업하리마국(현 효고현 남서부)은 연 강수량이 전국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세토 내해식 기후로 인해 만성적인 물 부족을 겪는 지역이었으며, 예로부터 치수 사업이 활발했다.[39] 아사노 나가노리 역시 치세 동안 다음과 같은 치수 사업을 벌였다.
특히 우류 오이케는 물 부족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나가노리가 큰 연못을 파고, 파낸 흙으로 새로운 밭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엔쿄 4년(1747년)의 문서에는 나가노리가 우류 오이케를 포함한 저수지 3곳을 축조하고, 겐로쿠 12년(1699년)에 새로 개간된 밭 등에 대한 검지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치수 사업이 실제 백성들의 삶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42]
9. 유품
- '''「구선안 나가노리·종오위하·내장두」'''(口宣案 長矩・従五位下・内蔵頭일본어): 엔포 8년(1680년)에 아사노 나가노리가 종오위하 내장두에 임명된 것을 증명하는 관위 임명서이다. 본래 아사노 다이가쿠(浅野長広) 가문에 의해 처분되어 흩어졌으나, 2006년에 발견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43].
- '''「아코군 사요군 어연공 납장」'''(赤穂郡佐用郡御年貢納帳일본어): 겐로쿠 5년(1692년)과 동 11년(1698년)의 기록으로, 아사노 나가노리가 아코번을 다스리던 시기 아코군과 사요군의 연공(연간 세금) 미납 및 완납 상황을 기록한 장부이다.
10. 일화 및 속설
『다몬필기』에 따르면, 나가노리는 할복 전에 "風さそう 花よりも猶 我はまた 春の名残を いかにとかせん|카제 사소우 하나요리모 나오 와레와 마타 하루노 나고리오 이카니토카센일본어" (바람이 이끄는 꽃보다도 오히려 나는 또한 봄의 여운을 어찌할까)라는 사세구를 남겼다고 한다. 또한 이 기록에는 다몬의 배려로 가타오카 다카후사가 주군 나가노리와 마지막 면회를 할 수 있었다고도 적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오직 『다몬필기』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다몬필기』는 야나기사와 데와노카미를 미노노카미로 잘못 기록하거나, 센고쿠 호키노카미를 후대의 칭호인 단고노카미로 적는 등 인물 정보에 오류가 있다. 또한 칼부림 사건 현장을 "다다미에 엄청난 양의 피가" 흘렀다고 과장되게 묘사하는 등 신뢰하기 어려운 기술이 많아, "『다몬필기』는 후세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나가노리의 사세구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에 자신의 심경을 빗댄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건 전날의 비바람으로 벚꽃이 이미 다 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다몬필기』에는 나가노리의 할복 장소가 격이 낮은 뜰이었던 것에 대해 다몬이 검사역 쇼다 야스토시에게 항의했으나, 쇼다가 "부사인 주제에 정사인 나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며 무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다몬 본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쇼다는 이듬해 기라 요시히사의 동료이자 친구인 고케 오토모 요시타카 및 기라 요시히사의 친동생인 도조 후유시게 등 기라파 하타모토들과 함께 소환되어 "근무 태만이 문제된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는 쇼다가 실제로 기라 측에 편향된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가노리가 일으킨 마츠노오로카 사건으로 아코 번이 개역(改易, 영지 몰수)되자 영지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떡을 찧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에도 시대 후기인 분카 3년(1806년)에 간행된 반 코케이의 수필집 『칸덴지히츠』(閑田次筆)로 여겨진다. 『칸덴지히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코의 정무는 오노 구로베가 상석 가로로서 모든 것을 처리했는데,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징수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나가노리의 칼부림 사건으로 성이 몰수되자, 아코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떡을 찧는 등 매우 번성했다. 이후 오이시 구라노스케가 나와 정무를 맡아 처리하며, 번이 곤궁할 때 빌렸던 금은을 모두 변제하자 아코 사람들은 크게 놀라 '아코 번에도 이런 훌륭한 인물이 있었구나' 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칸덴지히츠』는 사건 발생(겐로쿠 14년, 1701년)으로부터 약 100년 뒤에 간행되었고, 내용 자체도 "或人の曰く|아루히토노 이와쿠일본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출처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영민들이 개역을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사료적 신빙성이 부족한 속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아코 성 접수 책임자였던 와키자카 야스테루의 가신이자, 현장에서 실무를 지휘했던 타츠노 번 가로 와키자카 민부(脇坂民部)가 남긴 『아코 성 재번 일기』(赤穂城在番日記)에는 당시 아코 성과 성하 마을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는 성 접수 이후 아코의 아이들이 성 해자에서 낚시를 하는 등 평온한 일상이 묘사되어 있을 뿐, 영민들이 개역을 기뻐하는 모습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당시 아코에서 영민들이 기뻐하는 분위기는 없었음을 시사한다.
11. 다른 다이묘와의 관계
=== 다테 가문 (伊達家) ===
아사노 나가마사와 다테 마사무네의 악연으로 인해 아사노 가문과 다테 가문은 에도 시대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45] 아코 아사노 가문과 요시다 다테 가문(센다이 다테 가문의 분가)도 같은 직책을 맡는 경우가 있었지만, 긴밀하게 소통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사노 나가노리 시대에 아코번에서 행해지던 염전 기술(입빈 염전법)을 센다이 번에 제공하고 기술 도입을 지원하는 등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아코 아사노 가문과 센다이 다테 가문이 반드시 적대적이지만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35]
하지만 나가노리가 할복할 당시, 다테 가문의 일족인 이치노세키 번주 다무라 다쓰아키(建顕)는 나가노리에게 매우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나가노리는 입고 있던 예복(다이몬)을 벗겨지고, 감금된 방의 미닫이문은 못으로 박혔다. 술이나 담배를 달라는 나가노리의 요구도 거절당했다. 또한, 다무라 가문은 나가노리를 정원의 멍석 위에서 할복하게 했으며, 가신이 할복 보조(가이샤쿠)에 사용하려고 다무라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칼을 가져오자 번주 다쓰아키가 격노했다고 한다.[46] 할복 장소에는 이후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고,[47] 나가노리의 유언을 숨겼다는 의혹도 있다.[48]
겐로쿠 15년(1703년)의 아코 사건 때는 센다이 번주 다테 쓰나무라가 센다이 번 저택 앞에 병사를 배치하여 아코 낭사들의 통행을 막으려 했다.[49] 결국 아코 낭사들은 다테 가문의 번 저택을 피해 다른 경로로 센가쿠지로 향했다.[50][51]
=== 호소카와 가문 (細川家) ===
구마모토 번의 4대 번주 호소카와 쓰나토시는 젊은 나이에 아코 번주가 된 아사노 나가노리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52] 호소카와 쓰나토시의 사적을 기록한 『어가보속편』(御家譜続編)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십삼개조 간언서"(十三ヶ条諫言書)가 수록되어 있다.[53][52] 이 간언서는 나가노리가 15세, 쓰나토시가 39세 때 쓰인 것으로, 쓰나토시가 나가노리에게 다이묘로서 갖춰야 할 마음가짐, 가신 대우, 일상생활 방식 등을 상세히 조언하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이는 당시 호소카와 쓰나토시가 젊은 나가노리의 후견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52]
또한 『어가보속편』에는 "히라 곤베에 앞으로의 서장"(平権兵衛宛ての書状)도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쓰나토시가 나가노리가 고용한 소년의 처우에 대해 간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53][52] 이에 대한 나가노리의 답신("호소카와 쓰나토시 앞으로의 아사노 나가노리의 서장")도 남아 있는데, "이유도 묻지 않고 소년을 내놓고 (호소카와 님에게) 맡기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으니 이유를 묻고 싶다. 그 후에 적절히 처우를 결정하겠다"는 내용으로, 다소 퉁명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연장자인 쓰나토시를 '호소 츄젠'(細中将, 호소카와 쓰나토시의 관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54] 이 서장은 현재 에이세이 문고에서 보존 및 전시되고 있다.
나가노리가 성장한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서로 격의 없이 서신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인다.[52]
이러한 관계 때문에 아사노 나가노리가 사망하고 아코 낭사들이 복수를 감행하자, 호소카와 쓰나토시는 오이시 구라노스케 이하 17명의 낭사들을 자신의 번 저택에 받아들여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55][56] 호소카와 가문의 낭사들에 대한 대우는 다음과 같았다.
- 도착 당일 밤, 모든 낭사에게 고소데(小袖, 속옷) 두 벌씩 지급되었고, 연말에는 옷 한 벌과 오비(帯, 허리띠) 등이 추가로 주어졌다.[57]
- 식사는 매우 정성스러운 진수성찬이었으며, 1즙 5채(一汁五菜) 외에 과자, 야식 등이 제공되었고 나중에는 '약주'(薬酒)라는 명목으로 술까지 나왔다.[57]
- 너무나 풍성한 대접에 오이시를 비롯한 낭사들은 "저희는 낭인 신분으로 간소하게 먹고 살았는데, 이곳에 온 후 훌륭한 요리 때문에 오히려 배탈이 납니다. 지금은 보리밥에 소금절인 정어리가 그립습니다. 부디 음식을 간소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으나, 담당자인 호리우치 덴에몬(堀内伝右衛門)이 요리사에게 전달했음에도 요리사가 화를 내는 바람에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7]
- 목욕이나 물을 긷는 것 등 사소한 부분까지 정중하게 대우하여, 목욕물은 한 사람마다 새로 갈아주었고, 물을 길을 때마다 한 사람씩 승려가 물을 뿌려주었다.[57]
- 이러한 극진한 대우에 낭사들이 오히려 간략하게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57]
- 호소카와 저택에서 오이시 부자(요시오, 노부키요) 등은 흥에 겨워 밤에 춤을 추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접대역인 호리우치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호리우치가 술안주나 담배,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을 위한 차나 과자를 내놓지 않아 낭사들에게 불평을 듣기도 했다.(호소카와 가문 문서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堀内伝右衛門覚書))
- 낭사들의 할복은 시로카네 저택 대서원의 무대 옆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호소카와 쓰나토시는 낭사들이 머물렀던 대서원의 다다미를 교체하려는 것을 막으며 "열일곱 명의 용사들은 저택의 훌륭한 수호신이다"라고 말했고, 다다미 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신들은 이에 깊이 감동했는데, 낭사들을 맡았던 다른 세 가문은 할복 장소를 깨끗이 치웠고, 특히 센고쿠 가문(仙石家)은 다다미부터 창호지까지 전부 교체했기 때문이다. 이후 쓰나토시는 마음이 맞는 손님들에게 할복 장소를 명소처럼 보여주었다고 한다.[58]
그러나 엔쿄 4년(1747년) 에도 성 안에서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이타쿠라 가쓰카네(板倉勝該)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호소카와 가문은 아코 낭사의 묘와 제사 시설을 모두 파괴했다. 당시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묘의 받침대 부분과 공양탑의 잔해로 추정되는 돌무더기 정도만 남아있다).[59] 또한 센가쿠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소카와 가문에서 기증받은 범종을 폐기했다.[60]
다만, 아코 낭사의 머리카락(유발)은 당시 접대역이었던 호리우치 덴에몬(堀内伝右衛門)이 주군 쓰나토시에게 간청하여 받아냈다. 이 유발은 호리우치 덴에몬의 보리사(菩提寺)인 닛린지(日輪寺)에 묻혔고, 이때 호리우치가 세운 공양탑과 유발탑은 쓰나토시 사후 덴에몬이 가로(家老) 미야케 도헤이(三宅藤兵衛)에 의해 처벌받은 후에도 보존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전쟁 후에는 매년 2월 4일 의사(義士) 제삿날에 "의사 축제"(義士祭)가 열려 유발탑 앞에서 위령제가 거행되었으나,[59] 2022년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호소카와 가문의 아코 낭사 대우에 대한 이야기는 접대역 중 한 명이었던 아시가루 대장(足軽頭) 호리우치 덴에몬(堀内伝右衛門)이 쓴 『아코 의신 대화』(赤穂義臣対話),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堀内伝右衛門覚書) 등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호리베 다케쓰네(호리베 야스베에)의 할복 후, 그의 양자 호리베 후미노리(堀部文矩, 겐신)[61]는 동족인 구마모토 호리베 씨가 섬기던 호소카와 가문에 고용되었다.[62] 호리베 가문(후미노리 가계)은 이후 대대로 호소카와 가문을 섬겨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52] 메이지 시대 이후 이 가문에서는 제9 국립은행장을 지낸 호리베 나오토미(堀部直臣) 등이 나왔다.[63]
=== 와키자카 가문 (脇坂家) ===
다쓰노 번주 와키자카 야스테루는 나가노리의 거성인 아코 성을 인수하는 정사(正使)를 맡았으며, 이후 1년 반 동안 아코 성의 재번(在番, 성을 지키는 임무)을 담당했다.
겐로쿠 14년(1701년) 6월 25일, 아코 성에서 번주의 대리로서 재번 지휘를 맡고 있던 와키자카 가문의 중신 와키자카 사지로에(脇坂左次郎)가 정신 착란을 일으켜 동료 사다에몬(定右衛門)을 베어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와키자카 아코 사건).[64] 이 사건 때문에 와키자카 가문은 인접한 아코 지역의 영지를 추가로 받는 것이 어려워졌고,[65] 결국 나가이 나오히로(永井直敬)가 새로운 아코 번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쓰노시는 아사노 나가노리와 관련된 물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나, 아코 아사노 가문의 유물 관리 소홀(散佚) 책임을 이유로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66]
12. 평가
1690년경 여러 다이묘들의 평판을 기록한 『토개구수기』에서는 아사노 나가노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가노리는 현명하고 영리하다. 아코 번과 백성에 대한 통치도 좋으므로, 가신과 백성도 풍족하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마음을 가진 아첨하는 자가 주군의 취향에 따라, 좋은 여자를 찾아내어 바치는 자는 출세한다. 하물며, 그렇게 바쳐진 여자와 인연 있는 무리는 때를 얻어 출세하고, 부를 얻는 자가 많다. 밤낮으로 규방에서 희롱하고 정치는 어린 시절부터 성장한 지금까지 가로에게 맡긴다."[25]
같은 책에서 에치젠국 후쿠이 번의 마츠다이라 마사치카는 '대악의 무도인', 비젠국 오카야마 번의 이케다 쓰나마사는 '어리석고 어두운 장수', 데와국 쇼나이 번의 사카이 타다나오는 '암군', 야마토국 고리야마 번의 혼다 타다히라는 '어리석은 장수', 오미국 제제 번의 혼다 야스요시는 '전대미문의 악주'로 평가받는 등, 도쿠가와 일문이나 후다이 다이묘 중에서도 혹평을 받은 인물이 많았다.[26] 이에 비하면 아사노 나가노리는 전반부 평가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여색 문제와 정치를 가신에게 맡기는 점 등을 비판받아, 전체적으로는 여러 다이묘 중에서 중간 이하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26]
다만, 나가노리가 여색을 밝혔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토개구수기』 외 다른 동시대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측실을 두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토개구수기』 자체의 평가 기준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27]
겐로쿠 14년(1701년)에 쓰인 『간징기후세이』라는 기록물 역시 당시 다이묘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데, 나가노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수가 즐겨야 할 것은 문(文)의 길이다. 문이 없는 장수는 반드시 소행이 소홀해진다. 나가노리는 문도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기질은 뽐내지 않고, 소심하고 율의하다고는 하지만, 경솔하므로, 훗날 소행에 대해서는, 미덥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가노리는 순수하고 정직하며, 일상적인 행위는 의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 사치하지 않고, 충성심을 중요하게 여기며, 세상과의 관계도 좋다고 한다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몇 년 전, 부인의 하녀에 대해, 약간, 비도의 사태가 있어서, 요즘 세상의 평판이 좋지 않다. 이미, 이 집은 위태로운 일이라고 비판했지만, 아무 일 없이 해결되었다. 본래, 나가노리는 좋은 정치를 거의 하지 못하므로, 영민으로부터 수탈하고, 소행에도 약간 좋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나가노리의 앞날은 매우 위태롭다."[28]
이 평가에서는 전반적으로 평이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후반부에서는 부인의 하녀와 관련된 사건과 세간의 평판, 그리고 정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부인의 하녀에 대한 비도의 사태'라는 기술은 죠쿄 4년(1687년) 6월에 있었던 아사노 가문 저택의 여종 방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29][30]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날짜 (죠쿄 4년, 1687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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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 | 아코 아사노 가문 저택 내 여종의 방 지붕에서 화재 발생. 범인은 나가노리의 부인 아구리(阿久里)의 하녀 2명으로 판명됨. 나가노리는 여종 처리에 대해 마치부교(町奉行) 호조 아와노카미에게 문의함. |
6월 22일 | 나가노리, 영지(아코 번)로 돌아갈 휴가를 받음. |
7월 | 호조 아와노카미가 처리를 곤란해하자, 나가노리는 여종 방화 사건을 로주 오쿠보 타다토모에게 문의함. |
7월 2일 | 나가노리가 에도 출발 연기를 문의하자, 오쿠보 타다토모는 서한을 통해 귀국 연기와 저택 내 진정 및 방화 주의를 지시함. |
7월 10일 | 나가노리, 방화 사건을 본가인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미쓰아키에게 보고하고 답장을 받음. |
7월 21일 | 오쿠보 타다토모가 나가노리에게 저택으로 올 것을 요청함. 타다토모는 방화 여종 건은 상담 후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에도를 출발해도 좋다고 지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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