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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즈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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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즈키 씨는 오쿠라 씨의 방계 가문으로, 헤이안 시대부터 규슈 지역에서 활동한 무가(武家)이다. 고키 친왕의 후손으로, 헤이케의 가신으로 시작하여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아키즈키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 남북조 시대와 전국 시대를 거치며 여러 다이묘에게 종속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협력하여 에도 시대에 다카나베 번을 다스렸다.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 작위를 받았으며, 아키즈키 타네키는 메이지 유신에 헌신하여 정계에서 활동했다. 아키즈키 씨는 다수의 당주와 일족, 주요 가신단을 배출했으며, 영화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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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즈키씨
개요
아키즈키 씨 가문 문장
아키즈키 씨 가문 문장
성씨 (한자)秋月氏
성씨 (로마자 표기)Akizuki-shi
가문 문장
윤차이에 당화
본성오쿠라 씨 아손
종별무가, 화족 (자작)
현재 당주아키즈키 타네타카
기원 및 가계
시조오쿠라노 하루자네
선조 가문오쿠라 씨
창시하라다 타네카츠 (原田 種雄)
근거지지쿠젠국 아사쿠라군 아키즈키성
지쿠젠 아키즈키번
휴가 다카나베번
아와국 아와군 아키즈키쇼 아키즈키성 (아키즈키무라)
도쿄시 시바구 시로카네산코초
주요 인물아키즈키 후미타네
아키즈키 타네자네
우에스기 요잔
아키즈키 타네미츠
아키즈키 타네시게
역사
창건 연도1202년
기타
봉록각종 봉록

2. 기원

아키즈키 씨는 오쿠라 씨의 방계 가문으로, 아치노오미의 증손이자 한나라 영제의 아들인 고키 친왕의 후손인 ''도래인'' 가문이라고 주장했다. 고키 친왕은 오진 천황 재위 기간 동안 고분 시대에 일본에 정착했다. 헤이안 시대 동안 오쿠라 씨는 이요 국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보상으로 지쿠젠 국 미카사 군 하라다에 영지를 받았다. 지쿠젠에 정착한 가문의 방계는 "하라다" 성을 채택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의 많은 소규모 가문과 마찬가지로, 하라다는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에서 지지했던 헤이케 씨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또한 기소 요시나카의 군대에 의해 교토에서 쫓겨났을 때 어린 안토쿠 천황과 헤이케 씨의 다른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하라다 타네나오는 이 도주 동안 자신의 거주지를 안토쿠 천황의 임시 거처로 사용했는데, 이 이야기는 안토쿠 천황의 운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 때문에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배한 후, 하라다 타네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전쟁 포로로 가마쿠라로 보내졌다. 그는 결국 1190년에 사면을 받고 1202년에 가마쿠라 막부의 가신으로 지쿠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의 아들 타네카츠는 탈출했고, 나중에 현재의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인 "아키즈키"의 영지를 받았다. 그는 이름을 아키즈키 타네카츠로 바꾸었고, 이 가문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아키즈키 씨의 본성은 오오쿠라 씨이며, 이 씨족은 후한의 영제의 현손인 고귀왕이 일본으로 귀화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손인 오오쿠라 하루자네가 헤이안 시대이요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토벌에 공적을 세워, 그 은상으로 지쿠젠국미카사군 하라다를 소령으로 받아 처음에는 "하라다 씨"라고 칭했다.

3. 역사

헤이안 시대 말기, 하라다 씨는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케 씨를 지지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하라다 타네나오는 안토쿠 천황과 헤이케 일족이 기소 요시나카에게 쫓겨 교토에서 도망칠 때 자신의 거주지를 임시 거처로 제공했다. 그러나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배하면서 타네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에 체포되어 가마쿠라로 보내졌다.

타네나오는 1190년에 사면받고 1202년 가마쿠라 막부고케닌으로서 지쿠젠 국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그의 아들 타네카츠(타네오)는 아키즈키의 영지를 받고 이름을 아키즈키 타네카츠로 바꾸어 아키즈키 씨의 시조가 되었다.

겐큐 2년(1191년), 쇼니 씨(무토 씨)는 가마쿠라 막부의 명령을 받아 헤이케 몰관령을 순검했다.[2] 쇼니(무토) 스케요리는 진제이 봉행에 취임하고 히젠 국, 지쿠젠 국, 부젠 국, 이키 국, 쓰시마 국의 슈고가 되었다.[2] 오쿠라 씨에서 비롯된 하라다 타네나오의 소령 3700정보는 모두 쇼니 스케요리의 소령이 되었다.[2] 이로 인해 헤이안 시대부터 규슈에 토착해 헤이케를 따르던 무가들은 가마쿠라 막부의 의향을 띤 쇼니 씨, 오토모 씨, 시마즈 씨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2]

겐닌 3년(1203년)경, 하라다 타네오는 아키즈키에 들어가 아키즈키 씨가 되었다.[2]

남북조 시대에 아키즈키 씨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기쿠치 씨의 산하에서 아소 씨, 가마치 씨 등과 함께 남조로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4] 이후 아키즈키 씨는 오우치 씨에게 종속되었다.[3]

전국 시대에 1557년 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모리 씨의 세력이 북규슈까지 진출해오자, 당시 아키즈키 씨의 당주 후미타네는 오토모 씨로부터 이반하여 모리 씨와 손을 잡았다. 같은 해 7월, 오토모 군의 맹공격을 받아 후미타네와 적자 하루타네가 전사하여, 아키즈키 씨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2]

후미타네의 차남 타네자네는 모리 씨에게 도망쳐, 후에 그 보호 아래 재흥을 이루어 오토모 씨에게 항거했다. 오토모 씨가 쇠퇴하자 사쓰마의 시마즈 씨와 손을 잡고 세력을 확대했다.[2] 아키즈키 씨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잠시 지쿠젠의 6개 군, 지쿠고의 4개 군, 부젠의 1개 군을 지배했으며, 추정 고쿠다카는 36만 에 달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평정에서는 시마즈 씨에 속해 도요토미 세력에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했다. 타네자네는 명기 "나라시바 어깨걸이"를 헌상함으로써 항복은 허락되었지만, 휴가국 다카나베로 이봉되었다.[3]

에도 시대아키즈키 다네나가 휘하의 아키즈키 씨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구로다 나가마사의 지휘 아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에 참전했다.[4]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미노 국의 오가키 성을 방어하도록 배정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의 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동군으로 전향하여 성의 모든 친 도요토미 지휘관을 살해했다. 이후, 미즈노 가쓰시게의 도움을 받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다카나베번 영지를 인정받았다.[4]

번 초기에는 재정 압박 등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에도 시대 중반에 이르러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요네자와번우에스기 요잔(하루노리)은 다카나베의 6대 다이묘인 아키즈키 다네미쓰의 둘째 아들이었다.[4]

바쿠마쓰 시대에 아키즈키 다네타쓰는 와카도시요리로 임명되었지만, 사쓰마번의 도움을 받아 에도에서 탈출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교토로 가서 메이지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4]

메이지 시대 이후, 1871년 폐번치현 이후, 아키즈키 다네타쓰는 도쿄로 이주했다. 1872년 유학을 갔으며, 1875년부터 1880년까지 겐로인 의원을 지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다카나베 출신의 전 사무라이들이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4] 1884년, 화족 작위를 받아 자작이 되었고, 1894년에는 일본 제국 의회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3. 1. 가마쿠라 시대

헤이안 시대 말기, 하라다 씨는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케 씨를 지지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하라다 타네나오는 안토쿠 천황과 헤이케 일족이 기소 요시나카에게 쫓겨 교토에서 도망칠 때 자신의 거주지를 임시 거처로 제공했다. 그러나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배하면서 타네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에 체포되어 가마쿠라로 보내졌다.

타네나오는 1190년에 사면받고 1202년 가마쿠라 막부고케닌으로서 지쿠젠 국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그의 아들 타네카츠(타네오)는 아키즈키의 영지를 받고 이름을 아키즈키 타네카츠로 바꾸어 아키즈키 씨의 시조가 되었다.

겐큐 2년(1191년), 쇼니 씨(무토 씨)는 가마쿠라 막부의 명령을 받아 헤이케 몰관령을 순검했다.[2] 쇼니(무토) 스케요리는 진제이 봉행에 취임하고 히젠 국, 지쿠젠 국, 부젠 국, 이키 국, 쓰시마 국의 슈고가 되었다.[2] 오쿠라 씨에서 비롯된 하라다 타네나오의 소령 3700정보는 모두 쇼니 스케요리의 소령이 되었다.[2] 이로 인해 헤이안 시대부터 규슈에 토착해 헤이케를 따르던 무가들은 가마쿠라 막부의 의향을 띤 쇼니 씨, 오토모 씨, 시마즈 씨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2]

겐닌 3년(1203년)경, 하라다 타네오는 아키즈키에 들어가 아키즈키 씨가 되었다.[2]

3. 2. 남북조 시대

남북조 시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천황의 군대에 패배하여 규슈로 도망쳐 새로운 군대를 일으키려 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조정에 충성을 유지하고 있던 아키즈키 다네미치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아키즈키 씨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에게 패배했다.[3] 이후 아키즈키 씨는 오우치 씨에게 종속되었다.[3]

아키즈키 씨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기쿠치 씨의 산하에서 아소 씨, 가마치 씨 등과 함께 남조로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4]

3. 3. 전국 시대

남북조 시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군대에 패배하여 규슈로 도망쳐 새로운 군대를 일으키려 했다. 그는 조정에 충성을 유지하고 있던 아키즈키 타네미치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아키즈키 씨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남북조 시대에 아키즈키 씨는 오우치 씨에게 종속되었다. 1551년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인 스에 하루카타에게 살해된 후에는, 분고의 오토모 씨의 배하가 되었다.[1]

1557년 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모리 씨의 세력이 북규슈까지 진출해오자, 당시 아키즈키 씨의 당주 후미타네는 오토모 씨로부터 이반하여 모리 씨와 손을 잡았고, 이 때문에 같은 해 7월, 오토모 군의 맹공격을 받아 후미타네와 적자 하루타네가 전사하여, 아키즈키 씨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2] 아키즈키 타네자네는 모리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토모 씨와의 전투에서 규슈 북부에서 모리 씨가 패배한 후, 아키즈키 씨는 시마즈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미타네의 차남 타네자네는 모리 씨에게 도망쳐, 후에 그 보호 아래 재흥을 이루어 오토모 씨에게 항거했다. 게다가 오토모 씨가 쇠퇴하자 사쓰마의 시마즈 씨와 손을 잡고 세력을 확대했다.[2] 아키즈키 씨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잠시 지쿠젠의 6개 군, 지쿠고의 4개 군, 부젠의 1개 군을 지배했으며, 추정 고쿠다카는 36만 에 달했다. 한때는 지쿠젠에 6군, 지쿠고에 4군, 부젠에 1군과 추정 36만 석에 달하는 광대한 세력 범위를 구축하여, 아키즈키 씨의 최성기를 현출했다.[2]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평정에서는 시마즈 씨에 속해 도요토미 세력에 저항했지만, 원래 20만 명이라는 압도적인 대군을 옹해서 침공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타네자네는 명기 "나라시바 어깨걸이"를 헌상함으로써 항복은 허락되었지만, 본령 안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휴가국 다카나베로 이봉되었다.[3] 그러나 이러한 짧은 전성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 (1586년~1587년)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키즈키 씨는 도요토미 군에게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시마즈 씨의 가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아키즈키 영토는 몰수되었고, 씨족은 휴가의 다카나베로 훨씬 작은 영지로 이전되었다.

3. 4. 에도 시대

아키즈키 다네나가 휘하의 아키즈키 씨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구로다 나가마사의 지휘 아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에 참전했다.[4]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미노 국의 오가키 성을 방어하도록 배정받았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의 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동군으로 전향하여 성의 모든 친 도요토미 지휘관을 살해했다. 이후, 미즈노 가쓰시게의 도움을 받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현재의 다카나베번 영지를 인정받았고, 이는 3만 고쿠의 다카나베번의 시작을 알렸다.[4]

번의 초기 몇 년은 재정 압박, 높은 부채, 가로의 폭압적인 정책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에도 시대 중반에 이르러 번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1689년, 4대 다이묘인 아키즈키 다네마사가 3000 고쿠를 동생에게 할당하여 번의 수입은 27,000 고쿠로 감소했고, 이후 다카나베의 수입은 역사상 나머지 기간 동안 27,000 고쿠로 유지되었다.[4] 요네자와번의 유명한 다이묘인 우에스기 요잔(하루노리)은 다카나베의 6대 다이묘인 아키즈키 다네미쓰의 둘째 아들이었다. 1778년, 다카나베의 번교인 메이린도가 설립되어 교육의 중심지로서 다카나베에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4]

다카나베번의 주요 에도 저택의 위치는 현재 도쿄도 미나토구 아자부 지역의 아자부 고등학교가 점유하고 있다.[4]

바쿠마쓰 시대에 다카나베의 마지막 다이묘의 아들인 아키즈키 다네타쓰는 1867년 막부에 의해 와카도시요리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어린 나이와 도자마 다이묘 가문의 후계자라는 신분 때문에 매우 이례적인 승진이었지만, 아키즈키 다네타쓰는 교육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막부가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이 그에게 분명했고, 그는 질병을 이유로 명령이나 복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막부는 의사를 보낼 위협까지 했고, 그는 사쓰마번의 도움을 받아 사쓰마 배를 타고 에도에서 탈출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그는 교토로 가서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4]

3. 5. 메이지 시대 이후

1871년 폐번치현 이후, 아키즈키 다네타쓰는 도쿄로 이주했다. 1872년에는 유학을 갔다. 1875년부터 1880년까지 겐로인 의원을 지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카나베 출신의 전 사무라이들이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동생 아키즈키 다네지는 반란에 가담하여 가고시마의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망했다. 1884년, 아키즈키 다네타쓰는 화족 작위를 받아 자작이 되었다. 1894년에는 일본 제국 의회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의 아들 아키즈키 다네히데는 자작 작위를 상속받았고, 1914년부터 1947년 폐지될 때까지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아키즈키 다네키는 메이지 유신 당시 왕정 복고에 헌신했다. 그 공적으로 1868년에 유신 정부에 참여했다.[4] 더 나아가 메이지 천황의 시독, 공의소 의장, 대학 대감, 좌원 소의관, 원로원 의관 등을 역임했다.[4] 의회 창설 후에는 귀족원의 칙선 의원도 지냈다.[4]

1884년 7월에 화족령이 시행됨에 따라 다네키의 아들 다네시게가 구 소번 지사로서 자작에 서임되었다.

다네시게의 아들이자 자작위를 계승한 다네히데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아키즈키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전기에 도쿄시 시바구 시로카네 산코초에 있었다.

4. 계보

秋月氏|아키즈키 씨일본어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1]

동한이파기
각고
구니
고폐
오오쿠라 히로스미
구니아시
이즈미
마로
고아시
마사카츠
히로카츠
츠네나오
하루미
하루타네
타네미츠
타네자이
타네히로
타네스케
타네나마
타네오
하라다 타네나오타카하시 요리타네
아키즈키 타네오1
타네유키2
타네이에3
타네요리4요코오지 타네츠구
타네스케5
타네사다6
타네타카7
타네아키8
타네미치9
타네타다10
타네우지11
타네테루12
타네토모13
타네토키14
후미타네15타네자네16타카하시 타네후유나가노 스케모리
타네나가17타네이치타카하시 모토타네아키즈키 타네사다
타네사다타네하루18사쿄쵸키치
타네하루타네노부19
타네츠네타네마사20[깃하타]
타네호
타네토시사쿠마 카츠치카
타네히로21타네하네마키노 타다츠라타네스케마츠우라 노부히데나카무라 미치시게
타네요시22타네스케
타네시게23우에스기 하루노리사가라 아키나가오오쿠보 타다요시[신코지로 아키즈키 가문]
타네치카
나카조 노부요시사이토 토시쿠니타네카게
타네토쿠24쿠로다 나가나가타네비타네가타네타케타네코쿠
타네토25미야타 아키즈키 가문
타네켄
타네코쿠
타네이26타네키타네코토타네비
타네키27타네가
타네시게28타네에이29타네하쿠
타네포30타네아키타네키
타네히사31타네코토
타네타카32(현 당주)


5. 아키즈키 씨 역대 당주

대수이름
1아키즈키 타네오
2아키즈키 타네사키
3아키즈키 타네이에
4아키즈키 타네요리
5아키즈키 타네스케
6아키즈키 타네사다
7아키즈키 타네타카
8아키즈키 타네아키
9아키즈키 타네미치
10아키즈키 타네타다
11아키즈키 타네우지
12아키즈키 타네테루
13아키즈키 타네토모
14아키즈키 타네토키
15아키즈키 후미타네
16아키즈키 타네자네
17아키즈키 타네나가
18아키즈키 타네하루
19아키즈키 타네노부
20아키즈키 타네마사
21아키즈키 타네히로
22아키즈키 타네미츠
23아키즈키 타네시게
24아키즈키 타네노리
25아키즈키 타네타다
26아키즈키 타네토미
27아키즈키 타네타츠
28아지크지 타네시게
29아키즈키 타네히데
30아키즈키 타네츠무
31아키즈키 타네히사
32아키즈키 타네타카
2아키즈키 타네유키
22아키즈키 타네요시
25아키즈키 타네아츠
26아키즈키 타네키
27아키즈키 타네모리
30아키즈키 타네즈토


6. 아키즈키 씨 일족

7. 주요 가신단

이름비고
에리 노부타카
이다 치카우지
아쿠타 아쿠로쿠베에
우치다 사네히사
시라이 타네모리우치다 사네히사의 6남
시라이 타네시게시라이 타네모리의 적남
아키즈키 타네마사우치다 사네히사의 7남


8. 문화적 영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1958년 아키즈키 씨족에 관한 영화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을 연출했다. 이 영화에서 씨족의 문장은 초승달로 묘사된다.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은 2008년 히구치 신지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참조

[1] 서적 Akizuki at Nobiliar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03
[2] 문서 福岡県朝倉市秋月 (朝倉市)
[3] 문서 板野郡土成村#歴史土成村
[4] 웹사이트 秋月種樹 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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