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폰 비츨레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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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빈 폰 비츨레벤은 프로이센 출신의 독일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30년대 초 나치 정권에 반대하며 여러 차례 쿠데타에 가담했으며, 1938년 조기 퇴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서부 전선 사령관을 역임했으나, 1944년 7·20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인민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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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폰 비츨레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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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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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1년 12월 4일 |
출생지 | 브로츠와프(브레슬라우), 슐레지엔 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현재의 폴란드 돌니실롱스크 주 브로츠와프) |
사망일 | 1944년 8월 8일 |
사망지 | 베를린 플뢰첸제 교도소, 나치 독일 |
소속 | |
소속 국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1901년–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1933년) 나치 독일 (1933년–1944년) 독일 저항 (1944년) |
군대 | 독일 제국군 프로이센 육군 국방군 (육군) |
복무 기간 | 1901년–1944년 |
최종 계급 | 원수 |
지휘 | 제1군 서부 방면군 총사령관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베르됭 전투 샹파뉴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자르 공세 프랑스 공방전 |
수훈 | 기사십자 철십자장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에르빈 폰 비츨레벤은 프로이센 왕국 실레지아의 브로츠와프(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우라델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리그니츠 기사 아카데미와 리히터펠데에서 프로이센 사관 후보생 과정을 마친 후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군에서 복무했다.
2. 1. 초기 생애
에르빈 폰 비츨레벤은 프로이센 왕국의 실레지아 브로츠와프(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튀링겐의 비츨레벤에서 기원한 오래된 귀족 가문으로, 많은 군 장교들을 배출한 우라델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 폰 비츨레벤(1838–1898)은 프로이센군의 하우프트만(대위)이었으며, 어머니는 테레제 브란덴부르크였다.비츨레벤은 실레지아의 리그니츠 기사 아카데미와 베를린 근처 리히터펠데에서 프로이센 사관 후보생 과정을 마쳤다. 1901년 6월 22일, 그는 실레지아의 리그니츠(현재 폴란드의 레그니차)에 있는 제7 근위 보병 연대 "König Wilhelm I"에 로이테난트(소위)로 입대했으며, 1910년 오버로이테난트(상위)로 진급했다.
1907년, 그는 켐니츠 출신의 엘제 클레에베르크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비츨레벤은 제19 예비 보병 여단의 부관으로 복무했으며, 1914년 10월에는 대위(Hauptmann|하우프트만de)로 진급하여 제6 예비 보병 연대에서 중대장이 되었다. 이후 같은 연대에서 대대장을 역임했다. 그의 부대는 베르됭 전투, 샹파뉴 지역, 플랑드르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참모본부 훈련을 받았으며, 제121 사단의 제1 참모 장교로서 종전을 맞이했다.2. 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비츨레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국방군에 남아 중대장을 맡았다. 1923년 드레스덴의 제4사단 참모 소령으로 전속되었다. 1928년에는 제6보병 연대 대대장이 되었고, 이듬해 중령으로 진급했다. 1931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오데르강 프랑크푸르트의 제8(프로이센) 보병 연대 지휘관이 되었다.
3. 나치 정권과의 갈등
비츨레벤은 1933년 수권법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직후부터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전 총리와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 등 군인이 숙청되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과 함께 국방군 수뇌부에 특별 조사 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베르너 폰 프리치가 실각당하자, 비츨레벤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고, 그 결과 조기 퇴임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던 히틀러는 그를 다시 필요로 했다. 비츨레벤은 오스터 음모를 비롯하여 히틀러를 제거하고 전쟁을 막으려는 여러 쿠데타 계획에 가담했지만, 뮌헨 협정 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3. 1. 나치 정권 초기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수권법으로 권력을 잡기 직전, 비츨레벤은 하노버의 제6보병사단 지휘관이 되었다. 1934년 2월 1일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포츠담의 제3보병사단 지휘관이 되었고,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의 후임으로 제3군관구 사령관을 겸임했다. 1935년 9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베를린 제3군단 사령관이 되었고, 1936년에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전 총리와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 등 군인이 숙청되자, 비츨레벤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과 함께 국방군 수뇌부에 특별 조사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며 나치 독일 정권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폰 프리치가 실각당하자 이에 대한 비판으로 비츨레벤은 조기 퇴임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던 히틀러는 그를 다시 필요로 했다.
3. 2. 히틀러 암살 음모 가담
비츨레벤은 1934년 초부터 나치 정권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과 함께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우 장군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에서 베르너 폰 프리치가 박해받는 것을 비판한 결과, 비츨레벤은 1938년에 조기 퇴역해야 했다.1937년부터 비츨레벤은 오스터 음모에 가담했다. 이 그룹에는 루트비히 베크, 에리히 회프너, 카를-하인리히 폰 쉴프나겔 장군,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한스 오스터 중령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히틀러를 몰아내고 주데텐란트 위기로 인해 유발될 뻔한 유럽 전쟁을 막으려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인해 음모는 좌절되었다. 당시 베를린 방어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비츨레벤의 부대는 쿠데타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1938년 11월, 비츨레벤은 제2집단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쿠르트 프라이헤르 폰 함머슈타인-에쿠오르트의 1939년 음모 계획에도 참여했다. 함머슈타인-에쿠오르트는 히틀러를 정면 공격으로 사로잡고, 비츨레벤은 나치 본부를 폐쇄할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 역시 실패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전 총리와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 등 군인이 숙청되었을 때, 비츨레벤은 국방군 수뇌부에 특별 조사 위원회 설치를 요구했고, 이후 나치당에 대한 반대자가 되었다. 1938년 2월,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불사 외교 정책에 반대했던 베르너 폰 프리치에 대한 실각 공작의 불법성을 비난했다.
같은 해 주데텐 위기 당시, 루트비히 베크 참모총장, 빌헬름 카나리스 국방군 정보부장, 에리히 회프너 중장,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참모 차장 등 장군들과 함께 히틀러 타도 쿠데타를 계획했다. 수도 베를린 주둔 부대를 장악하고 있던 비츨레벤은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가 성공을 거두면서 중지되었다. 1938년 11월,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의 제2군단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1939년에도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 상급 대장의 쿠데타 계획에 가담하여, 연병을 시찰하는 히틀러를 체포할 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과 처형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음모자들은 비츨레벤을 계획의 핵심 인물로 여겼다. 쿠데타 성공 시 비츨레벤은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할 예정이었다. 루트비히 베크 전 참모총장은 임시 국가 원수로, 에리히 회프너 대장은 국내 예비군 부대를 지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가 동프로이센의 볼프스샨체에서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날, 비츨레벤은 쿠데타군 지휘를 위해 조센에 위치한 OKH-HQ에서 베를린의 벤들러블록에 늦게 도착했다. 오후 8시경 쿠데타 실패가 분명해지자, 그는 슈타우펜베르크 등의 실수를 비난하고 협력을 거부하며 사령부에서 퇴거했다. 이후 조센으로 돌아가 포병 대장 에두아르트 바그너에게 상황을 보고한 후, 30마일 떨어진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으나 다음 날 비토르 린나르츠 중장에게 체포되었다.[3]
이후 그는 암살 시도 후 설치된 장교 회의인 "명예 법정" (''Ehrenhof'')에 의해 국방군에서 추방되었다. 이 법정은 음모에 연루된 국방군 장교들을 독일 군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나치 인민 법정 (''Volksgerichtshof'')에서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4]
1944년 8월 7일, 비츨레벤은 인민재판소에 회부된 첫 번째 그룹에 속했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쇠약해진 그는 나치식 경례를 하며 판사석으로 다가갔고,[2] 재판장인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이를 질책하며 조롱했다. 비츨레벤은 8월 8일 사형을 선고받고, 프라이슬러에게 "당신은 우리를 사형 집행인에게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3개월만 지나면 분노하고 고통받는 민중이 당신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고, 당신은 산 채로 길거리에 끌려 다니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츨레벤의 재판을 포함한 법정 절차는 독일 주간 뉴스 영화 ''Die Deutsche Wochenschau''를 위해 촬영되었지만,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은 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츨레벤은 같은 날 플뢰첸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는 피아노 줄로 알려진 얇은 삼 밧줄에 매달려 고기 걸이에 매달리는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되었고,[3] 이 장면은 촬영되었으나,[4][5] 영상은 유실되었다.[6] 처형 장면은 히틀러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되었고, 육군 사관학교에서 상영되기도 했지만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4. 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서부 전선
1939년 9월, 당시 상급대장이었던 비츨레벤은 제1군 사령관이 되어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공격 당시 제1군은 C 집단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6월 14일, 제1군은 마지노 선을 돌파했고, 3일 이내에 여러 프랑스 사단을 항복시켰다. 이 공로로 비츨레벤은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았으며, 1940년 7월 19일 1940년 야전 원수 진수식에서 원수로 진급했다.1941년 5월 1일, 비츨레벤은 룬트슈테트 원수의 후임으로 OB 서부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1년 뒤인 1942년 3월 15일 건강상의 이유로 그 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에서의 소련 침공에 대해 정권을 비판한 후 강제로 은퇴당했다고 주장한다.
4. 2. 7월 20일 사건과 처형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음모자들은 비츨레벤을 계획의 핵심 인물로 여겼다. 쿠데타 성공 시 비츨레벤은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할 예정이었다.[2] 루트비히 베크 전 참모총장은 임시 국가 원수로, 에리히 회프너 대장은 국내 예비군 부대를 지휘할 예정이었다.그러나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가 동프로이센의 볼프스샨체에서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날, 비츨레벤은 쿠데타군 지휘를 위해 조센에 위치한 OKH-HQ에서 베를린의 벤들러블록에 늦게 도착했다. 오후 8시경 쿠데타 실패가 분명해지자, 그는 슈타우펜베르크 등의 실수를 비난하고 협력을 거부하며 사령부에서 퇴거했다. 이후 조센으로 돌아가 포병 대장 에두아르트 바그너에게 상황을 보고한 후, 30마일 떨어진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으나 다음 날 비토르 린나르츠 중장에게 체포되었다.[3]
이후 그는 암살 시도 후 설치된 장교 회의인 "명예 법정" (''Ehrenhof'')에 의해 국방군에서 추방되었다. 이 법정은 음모에 연루된 국방군 장교들을 독일 군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나치 인민 법정 (''Volksgerichtshof'')에서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4]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를 장으로 빌헬름 카이텔, 슈로트, 키르히하임, 크리벨, 하인츠 구데리안 등이 명예 법정에 관여하여 비츨레벤을 포함한 55명이 군적을 박탈당했다.
1944년 8월 7일, 비츨레벤은 인민재판소에 회부된 첫 번째 그룹에 속했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쇠약해진 그는 나치식 경례를 하며 판사석으로 다가갔고,[5] 재판장인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이를 질책하며 조롱했다. 비츨레벤은 8월 8일 사형을 선고받고, 프라이슬러에게 "당신은 우리를 사형 집행인에게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3개월만 지나면 분노하고 고통받는 민중이 당신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고, 당신은 산 채로 길거리에 끌려 다니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츨레벤은 같은 날 플뢰첸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는 피아노 줄로 알려진 얇은 삼 밧줄에 매달려 고기 걸이에 매달리는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되었고,[6] 이 장면은 촬영되었으나,[7][8] 영상은 유실되었다.[9] 처형 장면은 히틀러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되었고, 육군 사관학교에서 상영되기도 했지만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전후 독일에서 비츨레벤은 반나치 투사로 현창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가 많이 존재한다. 베를린 플뢰첸제의 처형장 터는 현재 반나치 저항 운동 기념관이 되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 윌리엄 L. 시러가 출판한 소설과 1960년 나치 독일 역사서인 ''제3제국의 흥망성쇠''에 1944년 히틀러 전복 음모에서 비츨레벤의 역할이 묘사되어 있다.[9]
- 동독 배우 오토 디리히스는 1970년 동구권 합작 영화 ''해방''에서 비츨레벤을 연기했다.
- 요아힘 비스마이어는 2004년 TV 영화 ''슈타우펜베르크''에서 비츨레벤 역을 연기했다.
- 영국 배우 데이비드 스코필드는 2008년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비츨레벤을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Exponat: Photo: Witzleben, Erwin von, 1941–1944
http://www.dhm.de/le[...]
2014-08-05
[2]
서적
In the Name of the Volk: Political Justice in Hitler's Germany
I. B. Tauris
1997-11-15
[3]
서적
The Men Who Tried To Kill Hitler
Pocket Books Inc.
1966
[4]
뉴스
Witzleben, Erwin v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1
[5]
간행물
[6]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1960
[7]
웹사이트
Generalfeldmarschall Job Wilhelm Georg Erdmann Erwin von Witzleben
https://web.archive.[...]
2014-05-30
[8]
서적
The Traitor
Farrar, Straus
1950
[9]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A History of Nazi Germany
Simon and Schuster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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