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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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범은 예양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빼어난 용모로 읍의 유씨 딸과 혼인했다. 난리를 피해 수춘으로 이주하여 손책을 만나 신임을 얻어 강동 정벌에 참여했다. 손책 사후 손권을 보좌하며 적벽대전에서 활약했고, 유비 억류를 건의하기도 했다. 유수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양주목이 되었으며, 대사마로 승진했지만 사망했다. 여범은 위엄 있는 성품과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받았으며, 손권의 신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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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여범 |
원어 이름 | 呂範 |
로마자 표기 | Lǚ Fàn |
자 | 자형(子衡)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예주여남군 세양현 |
사망 | 228년 |
사망지 | 양주단양군건업현 |
배우자 | 유씨 부인 |
자녀 | 이름 미상의 첫째 아들 여거 |
직업 | 군사, 정치인 |
작위 | 남창후(南昌侯) |
관직 | |
대사마 | 228년 |
군주 | 손권 |
승상 | 고옹 |
양주목 | 223년 ~ 228년 |
군주 (양주목) | 손권 |
승상 (양주목) | 손소(222년–225년) 고옹(225년부터) |
전장군 | 222년 이전 ~ 228년 |
군주 (전장군) | 손권 |
승상 (전장군) | 손소(222년–225년) 고옹(225년부터) |
단양태수 | 220년 ~ 222년 이전 |
건위장군 | 220년 ~ 222년 이전 |
평남장군 | 220년 이전 |
팽택태수 | 209년 ~ ? |
소속 | |
섬긴 군주 | 손책 손권 |
2. 초기 생애 및 손책과의 만남
여범은 여남군 예양현(細陽縣) 출신으로, 젊은 시절 군의 관리를 지냈다. 용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뛰어나다는 평판을 받았다. 유씨 성을 가진 여성과 결혼했으며, 원술 휘하의 하급 관리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때 원술 휘하의 장군 손책을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후 여범은 손책이 원술의 깃발 아래에서 싸운 전투와 나중에 손책이 자신의 권한으로 군벌로서 싸운 전투에 동행했다.[1]
여범은 바둑을 통해 손책에게 자신을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손책이 좋지 않은 포석을 두자 여범은 이를 활용하여 실수를 지적했고, 손책은 이에 감명을 받아 여범에게 관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여범은 높은 자리를 받는 대신 군대를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낮은 자리에 머물기를 원했다. 손책은 더욱 감명을 받았고, 그 이후 두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문제의 바둑 게임은 "손-여 기보"라고 불리며, 기보가 한 수 한 수 기록된 최초의 바둑 게임으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2]
2. 1. 혼인
여범은 예양현(細陽縣) 여남군 출신으로, 현재의 타이허현 부근이다. 젊은 시절 현(県)의 관리로 일했으며, 풍채가 빼어나다는 평판을 받았다. 고향의 호족인 유씨(劉氏)의 딸과 혼인했는데, 장인 유씨는 여범의 관상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여범이 가난했던 것을 걱정하는 아내의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2. 2. 손책과의 만남과 초기 활동
손책이 원술 휘하에 있을 당시, 여범은 전란을 피해 수춘으로 와서 손책을 만났다. 여범은 손책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스스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100명의 식객을 이끌고 손책에게 의탁했다.[1] 손책은 여범을 보내 강동에 있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셔오게 했다.[3] 이 과정에서 여범은 서주목 도겸에게 첩자로 오해받아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나,[1] 식객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3]손책의 신임을 얻은 여범은 손하와 더불어 손책을 측근에서 보좌하며,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고락을 함께했다.[1] 손책은 여범을 가족처럼 대우하며, 그의 어머니 오부인 앞에서 함께 식사하도록 허락했다.[3]
여범은 바둑을 통해 손책에게 자신을 추천했다는 일화가 있다.[2] 손책이 좋지 않은 포석을 두자, 여범은 이를 활용하여 실수를 지적했고, 손책은 이에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2]
3. 손책 휘하에서의 활약
여범은 젊어서 군의 관리가 되었는데, 용모가 빼어났다. 그는 읍의 부잣집 딸 유씨에게 청혼하여 혼인했다. 이후 난리를 피해 수춘으로 이주했고, 1백 명의 수하를 이끌고 당시 원술 휘하에 있던 손책에게 의탁했다.[3]
당시 손책의 어머니 오부인은 강도에 있었는데, 손책은 여범을 보내 오부인을 맞이하게 했다. 그러나 서주목 도겸은 원술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여범을 간첩으로 의심하여 고문했다. 다행히 여범은 식객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여범과 손하만이 손책을 곁에서 보좌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3] 손책은 여범을 매우 신뢰하여 그를 손씨 가문의 일원처럼 대했으며, 심지어 오부인 앞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도 허락했다.[3]
이후 여범은 정로중랑장에 임명되었고, 강하를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파양을 평정했다. 199년경, 손책은 상주문을 올려 여범을 계양군 태수로 추천했다.[6]
3. 1. 강동 정벌 참여
손책이 여강의 육강을 공격할 때와 유요를 공격할 때 여범이 동행했다. 여범은 유요의 부하 장영과 우미를 격파하고, 소단양과 호숙을 함락시켜 호숙상을 겸임했다.[3] 손책이 곡아와 말릉을 평정하고 유요와 착융의 잔당을 흡수하면서 여범에게 병사 2천 명과 말 50필을 하사했고,[3] 이후 여범은 원릉현령을 거쳐 단양의 불복종 세력을 격파하고 도독으로 승진했다.[3]194년부터 199년까지 여범은 강동 정벌에 참여하여 정포와 서곤 다음으로 큰 공을 세웠다.[4] 그는 엄백호의 부하 진무를 격파하고 죽였다.[4]
하비의 명족 진우가 오군태수를 자칭하며 광릉군 해서에 군사를 모아 엄호의 잔당을 선동하려 하자, 손책은 여범과 서일을 보내 진우를 공격하게 했다. 여범은 진우의 부하 진목을 죽였고,[5] 손책이 능양의 조랑과 용리의 태사자를 정벌할 때도 참여했다.
3. 2. 진우 토벌
진규(陳珪)와 일족인 진우(陳瑀)가 오군 태수를 자칭하고 해서에 주둔하며, 엄백호(嚴白虎)와 내통했다. 여범은 서일과 함께 진우를 공격하여 대장 진목의 목을 베었다.[4] 《강표전》에 따르면 진우의 관리, 병사, 처자 4천 명을 사로잡았다.[4]3. 3. 태사자, 조랑 정벌 참여
손책이 능양의 조랑과 용리의 태사자를 정벌할 때에도 여범이 참여했다.[5]3. 4. 군사적 재능과 군 기강 확립
여범은 손책과 바둑을 두던 중 군대의 기강 해이를 지적하고, 스스로 도독 직을 맡아 군율을 바로잡았다는 일화가 있다.[4] 손책은 여범에게 군대 훈련을 맡겼고, 여범은 사실상 강동의 전체 군사 행정을 통제하게 되었다.[4] 이후 여범은 정로중랑장에 임명되었으며, 강하 공격 후 파양을 평정했다.4. 손권 휘하에서의 활약
손책이 죽은 후, 손권이 뒤를 이어 강남 지역에서 그의 영토와 군대를 장악했다. 208년, 한나라 중앙 정부를 장악한 군벌 조조는 남중국의 라이벌인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었다. 손권은 주유와 노숙의 조언을 받아들여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여범은 주유의 지휘 하에 적벽 대전에 참여하여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데 기여했다.[7]
여범은 220년 동한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손권 아래에서 계속 복무했다. 비록 손권은 처음에는 조위 국가(조조의 후계자 조비에 의해 설립)의 속국 왕이 되는 것에 동의했지만, 그는 조비와 관계를 끊고 222년에 자신의 동오 정권의 통치자로서 독립을 선언했다.
4. 1. 손권 보좌 및 유수
손책이 죽자 오에서 분상했으며, 손권이 강하를 칠 때 장소와 함께 남아서 지켰다.[7] 208년, 조조가 쳐들어오자, 주유와 함께 적벽에서 맞서 싸워 격파했다. 비장군·팽택태수에 임명되었으며, 팽택·시상·역양을 봉읍으로 받았다. 이후 평남장군이 되어, 시상에 군대를 주둔시켰다.유비가 경성을 방문하자, 손권에게 유비를 그대로 억류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권은 관우를 토벌할 때, 여범의 집을 통해 "예전에 경의 말을 따랐더라면 이런 고생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를 취할 터이니, 경은 나를 위해 건업을 지켜주시오"라고 말했다.
관우를 격파한 직후, 손권은 무창으로 천도하고, 여범을 건위장군·완릉후·단양태수로 임명하여, 건업에 관청을 두게 하고, 부주에서 바다까지의 지역 수비를 맡겼다. 봉읍은 이전 것을 회수하고, 대신 여양, 회안, 영국을 주었다.
222년 위가 세 갈래 길로 침공해 오자, 조비는 완에 주둔하며, 친정군을 지휘하여 조휴, 조진, 조인 등을 지원했다. 손권은 여범 등에게 오군(2~3만 명)의 지휘를 맡기고, 수군으로 조휴 등을 막게 했으며, 서성, 전종, 손소 등을 이끌고 동구에서 위의 조휴, 장료, 장패 등의 9개 주의 26개 군(10만 명 이상)과 대치했다.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가절을 받았으며, 남창후로 개봉되었다. 그러나, 함대가 폭풍우에 휩싸여, 배가 잇따라 전복되고, 배가 조휴 등의 군영으로 떠내려갔다. 조휴는 장료, 장패, 가규, 왕릉 등과 함께 여범의 함대를 격파했고, 수천 명이 전사·익사했다. 위군과 싸우는 중, 손랑은 여범의 명령을 어기고 불을 사용하여 군수 물자를 태우는 실책을 저질렀다. 여범은 수군을 지휘하여 손랑과 패군을 강남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남아 전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조비는 위군에게 급히 강을 건너도록 명했고, 그 과정에서 하제의 함대가 동구에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의 군단을 하제군이 보충했다. 하제의 군단으로 위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여범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함께 위군을 격파하고, 승세를 타 조휴와 장료 등을 격파하여, 위군을 물러나게 했다 (『건강실록』). 동구에서 강동으로 개선한 여범은, 이 공적으로 양주목도 받았다.[8]
어린 손권은 돈을 탐내어 종종 공금을 유용했고, 주곡이 장부를 속여 주었다. 손책은 어느 날 여범에게 회계 사무를 맡겼다. 손권은 여러 번 여범에게 돈을 요구했지만, 여범은 반드시 손책의 허가를 구했고, 손권에게 마음대로 돈을 쓰게 하지 않았다. 손권은 이 일로 처음에는 여범을 싫어했지만, 후에 손권이 당주가 되자 여범의 절도를 크게 칭찬하고 신임했다고 한다.
4. 2. 적벽대전 참여
208년, 조조가 쳐들어오자, 주유와 함께 적벽에서 맞서 싸워 격파했다 (적벽대전).[7] 비장군, 팽택태수에 임명되었으며, 팽택, 시상, 역양을 봉읍으로 받았다.4. 3. 유비 억류 건의
유비가 손권을 찾아왔을 때, 여범은 손권에게 유비를 억류할 것을 건의했다.[7] 그러나 손권은 노숙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를 억류하지 않았다. 훗날 손권은 관우를 칠 때 여범을 찾아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예전에 경의 말을 따랐더라면 이런 고생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4. 관우 격파 이후
손권이 관우를 격파하고 무창으로 천도하자, 여범은 건위장군, 완릉후, 단양태수에 임명되었고, 건업에 관청을 두고 부주에서 바다까지의 지역 수비를 맡았다. 봉읍은 여양, 회안, 영국으로 바뀌었다.[7] 또한 평남장군이 되어 시상에 주둔했다.[7]4. 5. 유수구 전투 (동구 전투)
222년 조비가 대대적으로 오나라를 침공하여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로 진격하게 하고, 조인에게는 유수로,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강릉으로 나아가게 했다.[7] 손권은 여범에게 서성, 손소, 전종을 지휘하여 동구에서 조휴 등을 막게 하고, 주환에게 조인을,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는 조진 등을 막게 했다. 여범은 전장군으로 승진했고, 가절을 받았다.그해 11월, 여범이 이끄는 군대는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혀 익사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이 틈에 위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여 장강 남쪽으로 회군했다. 조휴 등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으나, 서성, 전종 등이 활약하여 위군을 막아냈다.[7] 이후 여범은 양주목이 되었다.[7]
223년, 여범은 동구 전투에서 조휴와 장패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에 맞서 오나라 군대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오나라에게 매우 불리하여, 오나라 함대는 심한 공격을 받았고 함대의 많은 부분이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게다가 손권의 이복 동생인 손랑이 실수로 오나라 군대의 식량과 무기를 불태웠다. 그러나 여범의 부하 손소와 서성의 노력으로 오나라 군대는 반격을 가해 간신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8]
동구에서 강동으로 개선한 여범은, 이 공적으로 양주목도 받았다.[7]
4. 6. 죽음
呂範|여범중국어은 228년에 대사마로 승진했으나, 인수를 받기도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9] 손권은 여범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곡례를 행하고, 유족에게 인수를 추증했다. 도읍이 건업으로 돌아온 후에는 여범의 묘를 찾아, 자(字)로 부르며 눈물을 흘리며 추도했다.[7] 장남은 일찍 사망했고, 차남인 여거가 뒤를 이었다.5. 평가 및 일화
여범은 젊은 시절 현(県)의 관리로 일했으며, 풍채가 빼어나다는 평판을 받았다. 고향 호족 유씨(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장인 유씨는 여범의 관상을 보고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가난을 걱정하는 아내의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
수춘에서 원술을 의지하던 손책을 만나 신하의 예를 갖추고 식객 100명을 이끌고 의탁했다. 손책은 강동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여범을 사자로 임명했으나, 서주목 도겸에게 첩자로 의심받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와 식객들이 관청을 습격하여 여범을 구출했다.
손책의 여강 침공과 강동 진출에 동행했으며, 호숙과 소단양을 점령한 후 호숙의 상이 되었다. 말릉과 곡아 점령 후에는 2천의 병사와 50명의 기병을 받아 원릉현령이 되어 단양의 불복종 백성을 격파했다. 오군으로 돌아와 도독이 되었고, 하비의 진우를 공격하여 그의 부하 진목을 베었다. 손책이 7개 현을 평정하자 정려중랑장에 임명되었고, 파양 공략에도 참여했다.
200년 손책 사후 손권의 강하 원정 때 장소와 함께 유수를 지켰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주유와 함께 조조군을 격파하고 비장군·팽택태수에 임명되었으며, 팽택·시상·역양을 봉읍으로 받았다. 평남장군이 되어 시상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성을 방문했을 때 손권에게 유비를 억류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훗날 손권은 관우 토벌 때 여범에게 "예전에 경의 말을 따랐더라면"이라며 후회하며 건업 수비를 맡겼다.
관우 격파 직후 손권은 무창으로 천도하고 여범을 건위장군·완릉후·단양태수로 임명하여 건업에 관청을 두고 부주에서 바다까지의 지역 수비를 맡겼다. 봉읍은 여양, 회안, 영국으로 바뀌었다.
222년 위의 침공 때 손권은 여범 등에게 오군(2~3만 명) 지휘를 맡겨 수군으로 조휴 등을 막게 했다. 서성, 전종, 손소 등과 함께 동구에서 위의 조휴, 장료, 장패 등과 대치했다.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가절을 받았으며 남창후로 개봉되었으나, 폭풍우로 함대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손랑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유지하고 하제의 군단과 함께 위군을 격파하여 양주목을 받았다.
228년 대사마로 승진했으나 인수를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손권은 곡례를 행하고 인수를 추증했으며, 도읍이 건업으로 돌아온 후 여범의 묘를 찾아 추도했다. 장남은 일찍 사망했고, 차남 여거가 뒤를 이었다.
5. 1. 성품과 용모
여범은 위엄을 중시하는 성격이었다. 육손, 전종과 같은 명문가 출신 귀공자들도 여범을 존경하고 경의를 표했다.[1] 여범은 사치를 좋아했지만, 공무에 성실하고 법을 준수하여 손권의 신임을 받았다.[10] 어떤 사람이 여범과 하제의 사치스러움을 비난하자, 손권은 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옹호했다.[1]『오서』에서는 여범의 용모에 대해 "외모가 훌륭하고 풍채가 좋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0]
5. 2. 손권과의 관계
어린 시절 손권은 공금을 유용하는 일이 잦았는데, 여범은 이를 손책에게 솔직하게 보고하여 손권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11] 그러나 훗날 손권은 여범의 충성심과 청렴함을 높이 평가하고 신임했다. 손권은 노숙을 등우에, 여범을 오한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다.[10]손권이 도읍을 건업으로 옮기고 문무대회가 열렸을 때, 엄준은 손권이 노숙과 여범을 실질 이상의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납득할 수 없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다. 이에 손권은 여범에 대해 "사치를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다른 군무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며, 스스로 군을 편성하고 본래의 직무도 신중히 노력했으며, 충성심이 두텁고 깨끗하며 올곧았고, 공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그것이 오한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엄준은 이 말을 듣고 납득했다.[10]
5.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 외모로 묘사된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차갑고 냉정한 용모에 날씬하고 깨끗한 몸매를 지녔다.[12] 처음에는 원술 휘하의 군사였으나, 후에 손책과 손권의 모략가, 참모로서 활약한다. 원술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밀담을 손책과 주치가 나누는 것을 듣고 동참할 것을 청하여 손책의 부하가 된다. 손권 시대에는, 주유와 함께 혼례를 위해 오나라를 방문한 유비의 암살을 진언하고, 가화를 시켜 실행하려 했으며, 사태가 드러나자 가화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관우 토벌 때는 점을 쳐서 관우의 퇴로를 예측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정사에서 점을 친 것은 오범이다). 동구 전투에서 여범은 조휴 등에게 크게 승리했다.6. 가계
여범은 적어도 두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일찍 사망했다. 차남 여거는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으며, 오나라 황제 손량 재위 기간에 민첩 기병 대장군(驃騎將軍|표기장군중국어)까지 올랐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이름 불명) | ? ~ ? | 요절 |
여거 | ? ~ ? | 후사, 민첩 기병 대장군 |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6
[2]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6
[3]
서적
Sanguozhi vol. 56
[4]
서적
Sanguozhi vol. 56
[5]
서적
Sanguozhi vol. 56
[6]
서적
Sanguozhi vol. 56
[7]
서적
Sanguozhi vol. 56
[8]
서적
Sanguozhi vol. 56
[9]
서적
Sanguozhi vol. 56
[10]
서적
Sanguozhi vol. 56
[11]
서적
Sanguozhi vol. 56
[12]
서적
三国志演義(嘉靖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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