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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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강군은 조선 시대의 왕족으로, 해안군의 서자로 태어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복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후사가 없어 선조의 아들 의안군과 신성군을 양자로 맞이했다. 1638년에는 양자 문제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39년 정의대부에 승계되었으며, 1648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에는 가계 계승 문제로 족보에서 소거되기도 했으나, 20세기에 와서 선조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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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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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오강군 |
원래 이름 | 오강군(烏江君) |
작위 | 부수(副守) 수(守) 부정(副正) 정(正) 군(君) 중의대부(中議大夫) 정의대부(正義大夫) |
휘 | 이건(李鍵) |
배우자 | 군부인 한양 조씨(적실 부인) 그 외에 측실 2명 |
자녀 | 의안군 이성(양적장자) 신성군 이후(양적차자) 철원부수 이의남(친서자) 회원부수 이철(친서자) 화원수 이효성(양서자) |
출생일 | 1560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해안군 사저 |
사망일 | 1648년 (89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복성군 가통 사저 (신장풍과 소갈증의 합병증으로 병사) |
왕가 | 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 왕조 |
매장지 | 경기도 고양 |
종교 | 유교(성리학) |
아버지 | 복성군 이미(양부) 해안군 이기(생부) |
어머니 | 복성군부인 파평 윤씨(양모) 해안군 계부인 거창 신씨(생모) |
친인척 | 이운환(양누이) 조민원(장인) 중종 이역(조부) 인종 이호(이복 숙부) 덕흥군 이초(이복 숙부) 명종 이환(이복 숙부) 선조 이연(사촌 형) 능원군 이보(양손자) 능창군 이전(양손자) 평운군 이구(양손자) 영풍군 이식(양증손자) 인평군 이요(양증손자) |
2. 생애
오강군은 '''오강부수'''(烏江副守)에 봉작되고 '''오강정'''(烏江正)으로 승작되었다가, 중의대부(中議大夫)로 승계받아 군에 봉작되었다. 그는 복성군의 양자로 지명되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스스로도 별도의 양자를 세웠으며, 양손자 평운군의 후손들은 20세기에 와서 그를 선조로 인정하였다.
1639년 4월 4일 노인직으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승계되었으며, 이듬해 1640년부터 만성 신장풍과 만성 소갈증의 합병 증세로 와병하다가 8년 후 1648년에 향년 89세로 병사하였다.
그는 복성군의 양자로 지명되었지만 후사가 없어, 선원보략에는 복성군에서 바로 신성군으로 가계가 이어지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오강군은 생전에 별도의 양자를 두었으며, 양손자 평운군의 후손들은 20세기에 와서야 그를 선조로 인정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 46-1) 묘좌에 안장되었으며, 생부 해안군 이기와 생가 형 오천군 이굉, 생조모 숙의 홍씨의 묘소 근처이다.
2. 1. 어린 시절
해안군 이기(海安君 李㟓)의 여섯째 서자로 출생한 오강군은 어린 시절부터 이복 숙부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1565년 6세에 '''오강부수'''(烏江副守)에 책봉되었고, 1566년 '''오강수'''(烏江守)에 진책되었다. 1567년 '''오강부정'''(烏江副正)에 진봉되었고, 같은 해 큰아버지 복성군 이미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1568년 '''오강정'''(烏江正)으로 승작되었고, 1569년 '''오강군'''(烏江君)에 봉군되었다.2. 2. 복성군 양자 입후
복성군의 양자로 지명되었지만 후사가 없었고, 스스로도 별도의 양자를 세웠으며, 양손자 평운군의 후손들은 20세기에 와서 그를 선조로 인정하였다.원래 복성군 이미의 사후 양자로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연이 내정되었으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결국 오강군이 복성군 이미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오강군도 후사가 없어, 1580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양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일 선조의 서4남 신성군을 양자로 입후하였다. 선조는 오강군을 복성군의 양자로 지정하고도, 1580년 다시 선조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지명하여 유성룡 등이 종조부와 종손자 관계이며 중간에 아버지가 없다 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오강군은 후일 다시 친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화원수 이효성을 양자로 입양했다가 관직을 받으려고 허위로 고했다 하여 1638년(인조 16) 12월 25일 종부시 도제조 김세렴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2. 3. 양자 문제와 논란
복성군 이미의 사후 양자로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연이 내정되었으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결국 오강군이 복성군 이미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오강군도 후사가 없어, 1580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양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일 선조의 서4남 신성군을 양자로 입후하였다. 선조는 오강군을 복성군의 양자로 지정하고도, 1580년 다시 선조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지명하여 유성룡 등이 종조부와 종손자 관계이며 중간에 아버지가 없다 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오강군은 후일 다시 친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화원수 이효성을 양자로 입양했다가 관직을 받으려고 허위로 고했다 하여 1638년(인조 16) 12월 25일 종부시 도제조 김세렴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2. 4. 말년과 사망
1639년 4월 4일 노인직으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승계되었으며, 이듬해 1640년부터 만성 신장풍과 만성 소갈증의 합병 증세로 와병하다가 8년 후 1648년에 향년 89세로 병사하였다.3. 사후
오강군은 복성군의 양자로 지명되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별도의 양자를 세웠으나, 양손자 평운군의 후손들은 20세기에 와서야 그를 선조로 인정하였다.
그의 시신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 46-1 묘좌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생부 해안군 이기, 생가의 형 오천군 이굉, 생조모 숙의 홍씨의 묘소 근처이다.
3. 1. 가계 계승 문제
복성군의 양자로 지명되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1580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양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일 선조의 서4남 신성군을 양자로 들였다. 선조는 오강군을 복성군의 양자로 지정하고도, 1580년 다시 선조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지명하여 유성룡 등이 종조부와 종손자 관계이며 중간에 아버지가 없다 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오강군은 후일 다시 친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화원수 이효성을 양자로 입양했다가 관직을 받으려고 허위로 고했다 하여 1638년 (인조 16) 12월 25일 종부시 도제조 김세렴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양손자 평운군의 후손들은 그를 건너뛰고 복성군, 계후 신성군, 양자 평운군으로 가계도를 작성했고, 오강군 스스로도 생전에 별도의 양자를 세웠다. 광무 연간에 편찬된 선원보략에도 그를 삭제하고 복성군에서 바로 신성군으로 넘어가 족보를 작성하였다. 20세기에 와서 그를 선조로 인정하였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중종 | |
양아버지 | 복성군 이미 | 중종의 서장자, 이복 백부 |
양어머니 | 복성군부인 파평 윤씨 | |
부인 | 군부인 한양 조씨 | 부사 조민원(趙敏元)의 딸 |
양자 | 의안군 이성 | 선조의 셋째 서자 |
양자 | 신성군 이후 | 선조의 넷째 서자 |
양며느리 | 평산군부인 평산 신씨 | 신립의 딸, 신경진의 누이 |
양손녀 | 현주 이씨 | 1592년 ~ ? |
손녀사위 | 안홍량 | 죽산 안씨 |
양손자 | 평운군 이구 | 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이주의 셋째 아들 |
친서자 | 철원부수 이의남 | |
친서자 | 회원부수 이철 | |
양서자 | 화원군 이효성 | 서천군 이금(西川君 李錦)의 서자, 처음에 수(守)에 책봉, 사후 군(君)에 추증 |
생부 | 해안군 이기 | 중종의 서자 |
생모 | 거창 신씨 | 우찬성 홍유(弘猷)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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