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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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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니성은 남북조 시대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아자이 씨족의 거성으로 사용된 산성이다. 아자이 씨족은 오미 국 북부를 지배하며 세력을 키웠으나,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아네가와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성은 1573년 함락되었으며, 이후 해체되어 나가하마 성의 건설 자재로 사용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성곽 구조는 능선과 계곡을 활용한 험준한 산성으로, 여러 구루와와 해자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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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니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오다니 성 유적
이름오다니 성
원어 이름小谷城 (오다니-조)
종류야마시로 스타일의 일본 성
위치시가현나가하마시
축조 시기1516년
축조자아자이 스케마사
사용 시기센고쿠 시대
철거1573년
현재 상태유적
공개 여부공개 (공공 시설 없음)
역사
건축 년도1516년경
건축가아자이 료마사
재건축아자이 씨
통치자아자이 씨
하시바 히데요시
유적구루와
호리키리
도루이
석벽
다테보리
초석
고구치
폐성 년도1575년

2. 역사

남북조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 초기까지 오미 국 북부(현 시가현)은 교고쿠 씨족이 지배했지만, 교토에 머물며 막부 정치에 관여하느라 권위가 약해졌다. 이 틈을 타 아자이 씨족이 세력을 키웠고, 1516년 아자이 스케마사1520년까지 교고쿠 씨족의 대리인이던 아사미 씨족을 몰아내고 사실상 북부 오미의 독립 세력이 되었다. 이 무렵 오다니 성 건설이 시작되었다.[5][6]

그러나 아자이 씨족은 1525년 롯카쿠 씨족의 공격을 받아 아사쿠라 씨족에 지원을 요청하여 그들의 하위 세력이 되었다. 1558년 아자이 히사마사는 롯카쿠 씨족에 충성을 맹세하고 영토 일부를 양도해야 했다. 1560년 롯카쿠 씨족이 침략했으나, 아자이 씨족은 이들을 격파했고, 아자이 히사마사의 아들 아자이 카타마사는 아자이 나가마사로 개명했다. 이후 나가마사는 세력을 확장했고, 오다니 성도 강화되었다.

아자이 나가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결혼했지만,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씨족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면서 상황이 변했다. 1570년 가네가사키 포위전 (1570년)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은 노부나가를 협공하여 퇴각시켰다. 이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 씨족은 패배하여 영토 절반을 잃고 포위되었으나, 오다니 성은 아사쿠라 씨족의 지원으로 버텼다.

오다니성터의 석비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활약으로 1573년 아사쿠라 씨족이 멸망하자 아자이 씨족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히데요시의 군대가 오다니 성의 세 번째 보루까지 진입하자 아자이 히사마사와 아자이 나가마사는 자결했고, 오다니 성은 함락되었다.[9][10] 히데요시는 비와호 근처에 나가하마 성을 건설하고 오다니 성을 폐성했다.

오다니 성은 2006년 일본성 재단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7] 일본 5대 산성 중 하나로 꼽힌다.[8] 1937년 4월 17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 1. 남북조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 초기

남북조 시대 동안, 북부 오미 국(현 시가현)은 아시카가 막부의 가신인 교고쿠 씨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교고쿠 씨족은 교토에서 막부의 내부 정치에 참여하고, 영지는 대리 통치를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권위는 점차 약해졌고, 아자이 씨족과 같은 지방 영주들이 권력을 잡았다.[4] 북부 오미는 교고쿠 씨족의 대리인으로서 아사미 씨족의 명목상의 지배하에 있었다. 1516년부터 아자이 스케마사는 소규모 군벌 동맹을 결성하여 1520년까지 아사미 씨족을 몰아냈다. 교고쿠 다카키요는 아자이 스케마사를 자신의 부지사로 임명했지만, 실질적으로 아자이 씨족은 북부 오미에서 독립 세력으로 부상했다. 오다니 성의 건설은 이 무렵 시작되었다.[5][6]

그러나 아자이 씨족은 약했고, 1525년 남부 오미의 롯카쿠 씨족의 공격을 받은 후,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씨족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그 결과, 아자이 씨족은 아사쿠라 씨족의 하위 세력이 되었고, 교고쿠 씨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에 직면했다.

1558년, 아자이 히사마사 치하에서 아자이 씨족은 롯카쿠 씨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부 영토를 양도해야 했으며, 그의 아들 아자이 카타마사를 롯카쿠 요시카타의 딸과 결혼시켜야 했다. 불만을 품은 가신들은 다음 해에 히사마사를 은퇴시키고 아자이 카타마사가 씨족의 수장이 되었다. 1560년 롯카쿠 씨족은 2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략했으나, 아자이 씨족은 롯카쿠 씨족을 격파했고, 아자이 카타마사는 이름을 아자이 나가마사로 개명했다. 그는 남부 오미와 미노 국에서 롯카쿠 씨족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였고, 아자이 씨족의 권력이 증가하면서 오다니 성도 확장되고 강화되었다.

『아자이 삼대기』에 따르면, "1516년 9월 28일에 착공하여 같은 해 10월 20일에 완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자이 삼대기의 기술에는 의문점도 많아, 1525년 롯카쿠 사다요리가 에호쿠에 침공했을 때, 아자이 스케마사가 오다니성에서 농성전을 벌인 것으로부터, 그 1, 2년 전인 1523년 - 1524년 축성설이 유력하다. 여러 설이 있지만, 1525년까지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538년에도 롯카쿠 사다요리가 공격해 왔지만, 이때도 아자이 스케마사는 오다니성을 버리고 미노국으로 도망했다.


2. 2. 아자이 나가마사 시대와 오다 노부나가와의 갈등

아자이 히사마사의 뒤를 이은 아자이 나가마사는 롯카쿠 씨족과의 갈등에서 승리하고, 미노 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와 충돌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나가마사가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으나,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씨족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공격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3]

1570년 가네가사키 포위전에서 아자이 군대는 아사쿠라 씨족과 협공하여 노부나가를 퇴각시켰다. 이후 아네가와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의 절반을 잃고 오다니 성은 포위되었으나, 아사쿠라 씨족의 지원으로 오랫동안 버텼다.[3]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활약으로 아사쿠라 씨족이 멸망하면서 아자이 씨족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1573년 히데요시의 군대가 성의 세 번째 보루까지 진입하자, 아자이 히사마사와 아자이 나가마사는 자결하고 성은 함락되었다.[3]

같은 해 아네가와 고전장 터에서 벌어진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격돌하여 오다 군이 승리했지만, 노부나가는 오다니 성의 견고함을 고려하여 성 공격을 단념했다. 대신 아네가와 남안에 있던 아자이 씨의 지성 요코야마 성을 함락시킨 후 기노시타 히데요시를 배치하여 아자이 씨에 대한 전선 기지로 삼았다.

1573년 (텐쇼 원년) 8월 8일, 아베 사다유키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책략에 따라 오다 측에 배신하면서 오다니 성의 포위가 가능하게 되었다. 8월 12일 (그레고리력 9월 8일), 오다 노부나가는 폭풍을 틈타 오다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도네자카 전투에서 아사쿠라 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8월 26일에는 에치젠에서 아사쿠라 씨를 멸망시킨 후, 8월 27일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세가 오다니 성 교고쿠 마루를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그날 안에 소환을 함락시키고 아자이 히사마사는 자결했다. 본환도 함락되어 9월 1일, 아자이 나가마사는 자결하여[9][10] 아자이 씨는 멸망했다.


2. 3. 오다니 성 전투와 아자이 가문의 멸망

남북조 시대 동안, 아시카가 막부의 가신인 교고쿠 씨족이 오미 국 북부(현 시가현)를 다스렸으나, 교토에 머물며 막부 정치에 관여하느라 권위가 약해졌다. 이 틈을 타 아자이 씨족이 세력을 키웠다.[4] 1516년 아자이 스케마사는 소규모 군벌 동맹을 결성, 1520년에는 교고쿠 씨족의 대리인이던 아사미 씨족을 몰아냈다. 아자이 스케마사는 교고쿠 씨족의 부지사가 되었지만, 명목상일 뿐 사실상 북부 오미의 독립 세력이었다. 이 무렵 오다니 성 건설이 시작되었다.[5][6]

그러나 아자이 씨족은 1525년 롯카쿠 씨족의 공격을 받아 아사쿠라 씨족에 지원을 요청, 그들의 하위 세력이 되었다. 1558년 아자이 히사마사는 롯카쿠 씨족에 충성 맹세와 함께 영토 일부를 양도하고 아들 아자이 카타마사를 롯카쿠 요시카타의 딸과 결혼시켜야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은 히사마사를 은퇴시키고 아자이 카타마사를 씨족 수장으로 세웠다. 1560년 롯카쿠 씨족이 25,000명의 군대로 침략했으나, 아자이 씨족은 이들을 격파했고, 아자이 카타마사는 아자이 나가마사로 개명했다. 이후 나가마사는 남부 오미와 미노 국에서 롯카쿠 씨족 영토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고, 오다니 성도 강화되었다.

아자이 나가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결혼했지만,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씨족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공격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1570년 가네가사키 포위전 (1570년)에서 아사쿠라, 아자이 연합군은 노부나가를 협공하여 퇴각시켰다. 이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 씨족은 패배하여 영토 절반을 잃고 포위되었으나, 아사쿠라 씨족의 지원으로 오다니 성은 버텼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자이 장군들을 회유하고, 히키다 성 포위전과 이치조다니 성 전투에서 아사쿠라 군을 격파했다. 아사쿠라 씨족이 멸망하자 아자이 씨족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573년 8월, 히데요시의 군대가 오다니 성의 세 번째 보루까지 진입하자 아자이 히사마사와 아자이 나가마사는 자결했고, 오다니 성은 함락되었다.[9][10]



이후 히데요시는 비와호 근처에 나가하마 성을 건설하고 오다니 성을 폐성했다.

3. 성곽 구조

오다니 성은 오다니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활용해 지은 남북으로 긴 산성이다. 처음에는 현재의 혼마루 터보다 북쪽에 있는 오다케 성 부근에 혼마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히사마사나가마사 시대에 걸쳐 성을 확장하면서 현재와 같은 성곽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함락된 후, 나가하마 성을 짓기 위한 자재로 쓰려고 오다니 성을 해체했지만, 산노마루 부근에 남아있는 큰 돌담을 통해 당시로서는 선진적이고 규모가 큰 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은 여러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혼마루(본성)와 그 뒤를 잇는 나카마루(中丸, 중성) 사이에 깊이 5m~10m 정도의 호리키리(해자)를 두어 크게 남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구루와들을 방어하기 위해 무사 저택 터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시미즈다니(清水谷, 청수곡) 등 주요 지점에는 중신들의 저택이 있었다.

오다니 성터의 구루와 분포도


산노마루에서 오다케 성 방향을 촬영

3. 1. 개요

가스가야마성, 나나오성, 간논지성, 갓산토다성과 함께 일본 5대 산성으로 꼽힌다. 성의 주요 구역은 길이가 800m가 넘으며, 주변 산 능선에 있는 외부 요새까지 포함하면 전체 면적은 1km2가 넘는다.[3]

오다니성은 주변 지역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지어진 험준한 산성이다. 주요 지역의 중심부에는 폭 20m의 거대한 마른 해자가 있으며, 이 해자는 성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해자 뒤의 내부는 성의 더 오래되고 더 중요한 부분으로, 산의 가장 높은 지점에 3의 구루와가 위치해 있었다. 이 시대의 일본 성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성의 구조는 흙으로 된 성벽과 마른 해자로 이루어진 수많은 구획으로 구성되었다. 큰 해자 앞 지역은 더 현대적인 부분으로, 돌로 된 성벽과 연합된 문, 그리고 거대한 야구라 망루로 보호되는 구획에 아자이 씨족의 궁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성터에는 마른 해자와 석벽의 일부 파편만 남아있다. JR 서일본 호쿠리쿠 본선 가와케역에서 도보로 45분 거리에 부지 입구가 있으며, 산 정상의 폐허에 도달하려면 거기서부터 산을 1시간 더 등산해야 한다.[3]

일본 5대 산성 중 하나로 꼽힌다.[8] 표고 약 495m의 오타니산(이베산)에서 남쪽 능선에 축조되었으며, 아사이 나가마사와 오이치노카타의 비극적인 무대로 묘사되는 성이다.

전국 다이묘 아자이 씨의 거성이었으며, 견고한 산성으로 알려졌으나 겐키덴쇼의 소란 때, 4년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에게 공격받아 함락되었다. 이후 북오우미의 거점은 나가하마성으로 옮겨져 폐성이 되었다. 현재는 토루・구루와 등 외에도 선구적으로 도입된 석축 등도 유구로 남아 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3. 2. 주요 구역

오다니성은 가스가야마성, 나나오성, 간논지성갓산토다성과 함께 일본 5대 산성으로 꼽힌다.[8] 성의 주요 구역은 길이가 800m가 넘으며, 주변 산 능선에 있는 외부 요새까지 포함하면 전체 면적은 1제곱킬로미터가 넘는다.

오타니산 (이베산) 남쪽 능선에 축조되었으며,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이치노카타의 비극적인 무대로 묘사되는 성이다. 전국 다이묘 아자이 씨의 거성이었으며, 견고한 산성으로 알려졌으나 겐키덴쇼의 소란 때, 4년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에게 공격받아 함락되었다. 이후 북오우미의 거점은 나가하마성으로 옮겨져 폐성이 되었다. 현재는 토루・구루와 등 외에도 선구적으로 도입된 석축 등도 유구로 남아 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다니 성은 주변 지역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지어진 험준한 산성이다. 주요 지역의 중심부에는 폭 20미터의 거대한 마른 해자가 있으며, 이 해자는 성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해자 뒤의 내부는 성의 더 오래되고 더 중요한 부분으로, 산의 가장 높은 지점에 3의 구루와(三の丸)가 위치해 있었다. 이 시대의 일본 성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성의 구조는 흙으로 된 성벽과 마른 해자로 이루어진 수많은 구획으로 구성되었다. 큰 해자 앞 지역은 더 현대적인 부분으로, 돌로 된 성벽과 연합된 문, 그리고 거대한 야구라 망루로 보호되는 구획에 아자이 씨족의 궁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리키리(해자) 북쪽에는 나카마루(中丸)가 있는데, 오호리키리(큰 해자) 북쪽에 있으며 3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구획으로, 각 단마다 요코야(横矢, 측면 공격)를 구축하고 있다.

1525년 아사쿠라 소테키가 입성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롯카쿠 사다요리와의 조정을 위해 사용되었다. 능선에는 여러 개의 호리키리와 도루이가 남아있다.

어차야시키 구루와는 반소(번소) 터 위에 있는 구루와로, 주곽부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 하나의 구획으로 중앙에 낮은 토루가 있으며, "어차야시키"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군사 시설이다.

오마야시키 구루와는 혼마루를 방비하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삼면이 높은 토루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오마야시키 구루와의 시미즈다니(청수곡) 사면에는 몇 개의 세로 해자가 보인다. 이 근처에는 말 씻는 연못 터가 있으며, 남북 9m × 동서 6.6m의 석조 연못으로 중앙에 칸막이가 있다. 구로가네 문 터 앞에는 수거석이 있는데, 이마이 히데노부를 진쇼지(신조사)에서 살해하고 목을 이곳에 내걸었다는 전승이 있다.

어차야 터 구루와


오마야시키 구루와


말 씻는 연못 터


수거석

3. 2. 1. 혼마루(本丸)

본환 구루와는 에도 시대 중기의 오다니 성 옛 그림에 "종환(鐘丸) 공"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종을 울리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 40m, 동서 25m의 규모이며, 상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쪽 기슭에는 토루가 있으며, 본환 아래의 센조시키 구루와 방향으로는 돌담이 쌓여 있다. 『전국대공성전』에서는 이 본환터에 2층 천수가 세워졌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본환 아래에 있는 돌담


오다니 성의 천수가 나가하마 성을 거쳐 히코네 성의 서쪽 야구라로 이전되었다는 전승이 있지만, 1955년의 해체 수리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1853년에 8할 가까이가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의 건축물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히코네 성 서쪽의 야구라


북쪽에는 깊이 10m, 폭 15m, 길이 40m의 대규모 해자 터가 있다. 이 해자는 상부와 하부를 명확하게 분단한다. 『전국의 견성』에 따르면, 상부의 구루와는 이 해자 때문에 하부 구루와에서 튼튼하게 방어할 수 있지만, 상부에서 하부로, 또는 하부에서 상부로 전력을 유연하게 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대호리키리


대호리키리

3. 2. 2. 교고쿠마루(京極丸)

교고쿠 다카쓰구(어머니는 아자이 히사마사의 딸 교고쿠 마리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교고쿠 씨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자이 스케마사가 옛 주군인 교고쿠 씨를 유폐했던 곳이라 하여 쿄고쿠마루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이 구루와는 『노부나가 공기』에 의해 동시대에도 이 이름으로 불렸다). 성내에서는 센조지키 구루와(千畳敷曲輪) 다음으로 두 번째로 넓은 구루와 터이다.

1573년 8월 27일,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세가 시미즈다니의 급경사에서 오다니 성 교고쿠마루를 급습하여 함락시키고, 본환을 지키는 나가마사와 소환을 지키는 나가마사의 아버지 아자이 히사마사를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다.[9][10]

3. 2. 3. 고마루(小丸)

오다니성의 고마루는 아자이 히사마사가 할복한 곳으로, 좌우 2단의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쿄고쿠마루 북쪽에 있다.

3. 2. 4. 산노마루(山王丸)

산노마루(山王丸)는 혼마루(本丸)부의 가장 북쪽에 있는 구역이다. 신사가 모셔져 있었다고 생각되며, 현재는 오타니 신사(小谷神社)로 이름이 바뀌어 오타니 사의 일부로 옮겨졌다. 4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츠메노 구루와(詰めの曲輪, 최후 방어 구역)이기도 하다. 산노마루 동쪽에는 높이 5m의 큰 돌담이 있으며, 각 구루와(曲輪)의 호구치에서도 돌담이 확인된다.

『전국의 견성』에서는 이러한 돌담이 아자이 씨 권력의 상징이 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조총이 전래되면서 돌담이 급속히 확산되었지만, 전국 시대 말기에는 구니진의 사적인 권력으로는 구축하기 어려웠고, 사찰에 속한 석공 집단을 동원해야 했다. 오미 국에서는 롯카쿠 씨와 같이 슈고에 가까운 권력이 필요했다. 아자이 씨는 자신의 권력을 휘하의 구니진들에게, 그리고 고호쿠(湖北, 호수 북쪽)에서의 정당성과 우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며, 돌담 축조를 통해 구니진에서 센고쿠 다이묘가 되었음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3. 2. 5. 기타 구역

오다니 산 일대의 능선과 골짜기를 그대로 활용한 남북으로 긴 산성으로, 축성 당시에는 현재의 혼마루 터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오타케 성 부근에 혼마루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히사마사, 나가마사에 의해 대대로 확장되어 현재의 성곽이 되었다. 낙성 후 나가하마 성의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오다니 성은 해체되었지만, 산노마루 부근에 현존하는 큰 돌담을 보면 당시로서는 선진적이고 대규모의 성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성은 많은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혼마루(본성)와 그 뒤로 이어지는 나카마루(中丸, 중성) 사이에는 깊이 5~10m 정도의 호리키리(해자)가 있어 주로 남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구루와를 지키는 형태로 무가 저택 터가 점재하고 있으며, 시미즈다니(清水谷, 청수곡) 등의 요지에는 중신의 저택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차야시키 구루와는 반소(번소) 터 위에 있는 구루와로, 주곽부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 구루와는 하나의 구획으로 중앙에 낮은 토루가 있으며, "어차야시키"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군사 시설이다.

오마야시키 구루와는 혼마루를 방비하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삼면이 높은 토루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오마야시키 구루와의 시미즈다니(청수곡) 사면에는 몇 개의 세로 해자가 보인다. 이 근처에는 말 씻는 연못 터가 있으며, 남북 9m × 동서 6.6m의 석조 연못으로 중앙에 칸막이가 있다. 구로가네 문 터 앞에는 수거석이 있는데, 이마이 히데노부를 진쇼지(신조사)에서 살해하고 목을 이곳에 내걸었다는 전승이 있다.

본환 곡륜은 에도 시대 중기의 오다니 성 옛 그림에는 "종환(鐘丸) 공"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종환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40m×동서 25m의 규모이며, 상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쪽 기슭에는 토루가 있으며, 본환 아래의 센조시키 곡륜 방향으로는 돌담이 쌓여 있다. 『전국대공성전』에서는 이 본환터에 2층 천수가 세워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오다니 성의 천수가 나가하마성을 거쳐 히코네성 서쪽의 야구라로 이전되었다는 전승이 있지만, 1955년 해체 수리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1853년에 8할 가까이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의 건축물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북쪽에는 깊이 10m×폭 15m×길이 40m의 대규모 해자 터가 있는데, 상부와 하부를 명확하게 분단한다. 『전국의 견성』에서는 이 해자가 하부 곡륜의 방어력을 높이는 반면, 상하부 간 전력의 유연한 운용을 어렵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호리키리(해자) 북쪽에는 나카마루(中丸), 쿄고쿠마루(京極丸), 코마루(小丸), 산노마루(山王丸)가 이어진다. 나카마루는 오오호리키리(大堀切, 큰 해자) 북쪽에 있으며, 3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구루와(성곽)로, 각 단마다 요코야(横矢, 측면 공격)를 구축하고 있다.

쿄고쿠마루는 쿄고쿠 씨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쿄고쿠 다카쓰구(어머니는 아자이 히사마사의 딸 쿄고쿠 마리아)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아자이 스케마사가 옛 주군인 쿄고쿠 씨를 유폐했던 곳이라 하여 쿄고쿠마루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이 구루와는 『노부나가 공기』에 의해 동시대에도 이 이름으로 불렸다). 성내에서는 센조지키 구루와(千畳敷曲輪) 다음으로 두 번째로 넓은 구루와 터이다.

쿄고쿠마루 북쪽에는 코마루가 있다. 이곳은 아자이 히사마사가 할복한 곳으로, 좌우 2단의 구루와로 이루어져 있다.

혼마루(主郭, 본성)부의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 산노마루이다. 산노마루는 신사가 모셔져 있었다고 추정되며, 현재는 오타니 신사(小谷神社)로 명칭이 바뀌어 오타니 사의 일부로 옮겨졌다. 4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츠메노 구루와(詰めの曲輪, 최후 방어 구역)이기도 하다. 산노마루 동쪽에는 높이 5m의 큰 이시가키(돌담)가 있으며, 각 구루와의 호구치에서도 이시가키가 확인된다. 『전국의 견성』에서는 이러한 이시가키가 아자이 씨의 권력의 상징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시가키는 조총 전래와 함께 급속히 확산되었지만, 전국 시대 말기에는 구니진의 사적 권력으로는 구축이 어려웠고, 사찰에 속한 석공 집단을 동원해야 했다. 오미국에서는 롯카쿠 씨와 같은 슈고에 가까운 권력이 필요했다. 아자이 씨는 자신의 권력을 휘하의 구니진들에게, 그리고 아자이 씨의 고호쿠(湖北, 호수 북쪽)에서의 정당성과 우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며, 이시가키 축조를 통해 구니진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추정된다.

1525년 아사쿠라 소테키가 입성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롯카쿠 사다요리와의 조정을 위해 사용되었다. 능선에는 여러 개의 호리키리와 도루이가 남아있다.

3. 3. 오다케 성(大嶽城)

1573년(덴쇼 원년) 8월 8일, 야마모토 산 성의 수비장인 아베 사다유키가 하시바 히데요시(7월경에 성을 기노시타에서 하시바로 고침)의 책략에 따라 오다 측에 배신했다. 이 성을 얻게 되면서 오다 측은 오다니 성의 포위가 가능하게 되었고, 노부나가는 그날 밤에 기후 성을 출발하여 10일에는 에치젠에서 오다니 성으로 가는 북국 가도의 루트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원군을 향해 간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2만 명이라고 함)는 오다니 성에 들어갈 수 없었고, 요고나 기노모토 등에 포진했다. 이 혼란 속에서 야케오의 요새를 지키는 아사미 쓰시마노카미가 항복했다. 야케오는 오다니 성과 봉우리가 이어진 오다케의 요새 북쪽에 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오다니 성 공략의 의지를 더욱 굳혔다.[8]

8월 12일(그레고리력 9월 8일) 기나이 일대에 폭풍이 덮쳤다(교토 등에서도 피해 기록이 있다). 이 폭풍을 호기로 본 노부나가는 이날 스스로 아사미 쓰시마노카미의 안내로 오다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다음 날에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본 아사쿠라 군이 철수하려는 것을 일시에 강습하여 아사쿠라 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도네자카 전투).[8]

산노마루에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다시 산길을 올라가면 오다케 성이 있으며, 오다니 성의 지성 중 하나로 기능했다. 이곳은 오다니 성의 주곽부보다 100미터 이상 높으며, 오다니 산의 정상도 이곳에 있다(해발 495미터). 현재는 겐키 연간에 아사쿠라 군이 주둔했을 때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구루와(성곽 시설)·요코보리(해자)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유구는 직각으로 성형되어 있으며, 오다니 성의 주곽부보다 고도의 기술이 엿보인다.

아자이 스케마사의 축성 당시에는 오다니 성이 이 오다케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없지만, 롯카쿠 씨의 덴분 연간의 문서에는 확실히 "오다케"라는 단어가 몇 번 보인다.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2] 웹사이트 小谷城跡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5-25
[3]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4] 서적 Zinbun, Number 23 1989
[5]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s://gallica.bnf.[...] 1906
[6] 서적 Monumenta Nipponica, Volume 34 1979
[7] 웹사이트 Japan Castle Foundation https://web.archive.[...]
[8] 영상 7つの魅力でとことん楽しむ! 日本100名城めぐりの旅 学研プラス 2017-03-16
[9] 간행물 浅井長政最期の感状 1989
[10] 간행물 浅井長政の感状と主従関係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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