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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충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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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도 충무사는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수군 도독이 관우를 모시기 위해 관왕묘로 처음 건립된 사당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고, 정조는 등자룡을 함께 모시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훼손되었으나 해방 이후 재건되어 이순신과 그의 보좌관 이영남을 기리는 제례가 거행되고 있다. 충무사는 임진왜란 연합군의 상징이자 호국 정신과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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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충무사
지도
기본 정보
명칭충무사 (고금도)
위치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지정 번호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6호
시대조선
상세 정보
개요충무사(忠武祠)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으로,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에 위치한다. 이 사당은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이 고금도에 주둔하며 전진기지를 구축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역사1606년 (선조 39년): 이순신 장군의 충무공 시호 추증 후, 고금도에 '충무사'라는 이름으로 사당 건립.
1662년 (현종 3년): 사당을 확장하고 '사충사'로 개칭.
1668년 (현종 9년): '충무사'로 환원.
1682년 (숙종 8년): 어필 현판 봉안.
1976년: 사당을 보수하고 유물관 건립.
건축충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당 경내에는 내삼문, 강당, 유물관 등의 부속 건물이 있다.
문화재 지정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
추가 정보
관리완도군
참고 자료문화재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역사

충무사는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파견된 명나라 수군 도독이 자국의 군신 관운장을 모시고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관왕묘'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683년(숙종 9년)에 이르러 충무공 이순신을 함께 모시게 되었으며,[6][3] 1791년(정조 15년)에는 정조가 직접 '탄보묘(誕報廟)'[7]라는 현판을 내리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추가로 모시게 하는 등 국가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사당의 유물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바다에 버려지는 수난을 겪었다.[1][4] 1945년 광복 이후, 고금도 지역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옛 터에 사당을 재건하고 이름을 '충무사'로 바꾸었으며, 이순신을 주된 인물로 모시게 되었다.[8] 이후 1959년에는 이순신의 부관 이영남도 함께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충무공의 탄신과 순국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 1. 건립 초기 (1598년 ~ 1683년)

충무사의 본 건물은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수군 도독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며 그들의 군신(軍神, 전쟁의 신)인 관운장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관왕묘'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다.

이후 1666년(현종 7년)에 전라 우수사로 부임한 유비연(柳斐然)이 관왕묘를 중수하였으며, 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관왕묘 옆에 옥천사(玉泉寺)라는 절을 함께 건립하였다.

1683년(숙종 9년)에는 관왕묘 서쪽에 사당을 새로 지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시게 되었다. 이로써 사당은 동무(東廡)에는 관운장과 명나라 도독 진린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 장군을 함께 모시는 공간이 되었다.[6][3]

2. 2. 이순신 장군 배향 (1683년 ~ 1910년)

1683년(숙종 9년)에는 기존 관왕묘 서쪽에 사당을 새로 지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게 되었다.[6] 이로써 사당은 동무(東廡)에 관운장명나라 제독 진린을, 서무(西廡)에 이순신을 모시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6][3]

이에 앞서 현종 때에는 경칩상강 두 절기에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인근 6개 부군현의 관원들이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년)에는 정조가 친히 '탄보묘(誕報廟)'[7]라는 글씨를 써서 현판으로 하사하였으며, 이때부터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등자룡진린의 부장으로, 당시 70세의 노장이었으나 이순신과 같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다 전사하였다.

2. 3.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910년 ~ 현재)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충무사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관우의 상과 위패는 물론, 사당에 보관되어 있던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소중한 유물들이 강제로 바다에 버려지는 수난을 당했다. 다행히 옥천사불상만은 인근 백운사로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다.[1][4]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고금도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옛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다시 세웠다. 이때 현판을 '충무사'로 새로 달고, 충무공 이순신을 정전에 모셨다.[8] 이후 1959년에는 이순신 장군의 보좌관이었던 조방장 이영남을 동무에 추가로 모셨다.

현재 충무사에서는 매년 양력 4월 28일이순신 장군의 탄신을 기리는 탄신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음력 11월 19일에는 장군의 순국을 기리는 순국제를 지내고 있다.

3. 제향 인물

완도 충무사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처음에는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수군 도독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중국군신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로 건립되었다.[6][3] 이후 1683년(조선 숙종 9년)에 사당을 증축하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서무(西廡)에, 기존의 관우명나라 장수 진린을 동무(東廡)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6][3] 1791년(조선 정조 15년)에는 정조 임금이 직접 '탄보묘(誕報廟)'[7]라는 현판을 내리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6][1]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인해 관우상과 위패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바다에 버려지는 비극을 겪었다.[1][4] 1945년 광복 이후, 고금도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재건하고 이름을 '충무사'로 바꾸면서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을 정전(正殿)에 모셨다.[8][1] 이후 1959년에는 이순신 장군의 부관이었던 조방장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추가로 모셨다.[8]

현재 충무사에는 정전에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에 관우, 진린, 등자룡, 이영남 등이 함께 모셔져 있으며, 매년 충무공 탄신일과 순국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8]

3. 1. 이순신

숙종 9년(1683)에 기존의 관왕묘 서쪽에 사당을 새로 지으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시기 시작했다. 이때 동무(東廡)에는 관우명나라 장수 진린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6][3] 이후 정조 15년(1791)에는 정조 임금이 직접 '탄보묘(誕報廟)'[7]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했으며,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일제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충무사의 관우상과 위패, 그리고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소중한 유물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행히 옥천사의 불상만이 인근 백운사로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다.[1][4]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고금도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다시 세웠다. 이때 현판을 '충무사'로 바꾸고,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을 사당의 중심인 정전(正殿)에 모시게 되었다.[8] 1959년에는 이순신 장군의 보좌관이었던 조방장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추가로 모셨다. 현재 충무사에서는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 기념제와 음력 11월 19일 순국제(殉國祭)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3. 2. 관우

관우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후대에 동아시아에서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숭배받는 대상이 되었다. 특히 명나라에서는 관우군신(軍神)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강했다.

완도 충무사의 건립은 이러한 명나라관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에 참전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고금도관우를 모시는 사당, 즉 '관왕묘'를 처음 세웠다.[6][3] 이것이 완도 충무사의 시작이다.

초기 관왕묘는 관우만을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1683년(숙종 9년)에 사당 서쪽에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공간을 새로 마련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이때 동무(東廡)에는 관우진린을 함께 모시고, 서무(西廡)에는 이순신을 모시게 되었다.[6][3]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관우 관련 유물은 큰 수난을 겪었다.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에 따라 관우의 조각상과 위패를 비롯한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많은 유물이 강제로 바다에 버려졌다.[1][4]

1945년 해방 이후, 고금도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옛 관왕묘 터에 사당을 재건하고 이름을 '충무사'로 바꾸었다. 이때 충무공 이순신을 사당의 중심인 정전(正殿)에 모시게 되었다.[8][1][4]

3. 3. 진린

진린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수군 도독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 완도 충무사에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

1683년(숙종 9년), 충무사의 전신인 관왕묘 서쪽에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이 새로 건립되면서, 동쪽 건물인 동무(東廡)에는 관우와 함께 진린위패가 모셔졌다.[3][6] 이를 통해 충무사는 이순신, 관우, 진린 세 인물을 함께 기리는 사당이 되었다.

또한, 1791년(정조 15년)에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충무사에 추가로 모셔졌는데, 그는 진린의 부장이었다.[7]

3. 4. 등자룡

등자룡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장수로, 진린 도독의 부장으로 참전한 70세의 노장이었다. 그는 1598년 벌어진 노량 해전에서 조선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다 용맹하게 전사하였다.[6] 정조 15년(1791년), 정조는 '탄보묘(誕報廟)'[7]라는 글씨를 직접 쓴 현판을 하사하며 등자룡충무사에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3][1] 이로써 충무사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를 함께 기리는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3. 5. 이영남

이영남(李英男)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관인 조방장이었으며, 당시 가리포 첨사를 역임하였다.[8] 1945년 해방 이후 고금도 유림들이 충무사를 재건하여 이순신을 정전에 모신 데 이어, 1959년에는 이영남을 동무(東廡)에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8] 이후 충무사에서는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기념제와 음력 11월 19일 순국제(殉國祭)를 지내고 있다.[8]

4. 의의와 평가

완도 충무사는 단순한 사당을 넘어, 시대적 변화와 민족의 역사를 반영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처음에는 1598년 명나라 수군 도독이 정유재란 중 승전을 기원하며 세운 '관왕묘'로 시작하여[6][3],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후 조선 시대를 거치며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진린, 등자룡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양국 장수들을 함께 모시는 공간으로 변화하며[6][3], 조명 연합의 역사적 의미를 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인해 사당의 유물이 파괴되는 등 큰 수난을 겪었으나[1][4], 1945년 광복 이후 지역 유림들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다.[8] 이때 '충무사'로 이름을 바꾸고 이순신 장군을 정전(正殿)에 모시면서, 외세에 의해 훼손된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이순신 장군의 호국 정신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거듭났다. 현재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그의 부관이었던 이영남 장군도 모시며[8], 매년 탄신일과 순국일에 제례를 지내며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8]

따라서 완도 충무사는 임진왜란 당시 국제 협력의 현장이자,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과 극복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이순신 장군으로 대표되는 호국 정신을 기리고 전승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1. 임진왜란 연합군의 상징

완도 충무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승리와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단순한 사당을 넘어, 두 나라 군대의 협력과 희생을 함께 기리는 역사적 공간이다.

충무사의 시작은 1598년(선조 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명나라 수군 도독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그들의 군신인 관운장을 모시는 '관왕묘'를 이곳에 세웠다.[6]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적 협력이 이루어졌던 현장임을 보여준다.

이후 조선 왕조는 관왕묘의 의미를 확장하여 양국 장수들을 함께 기리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1666년(현종 7년) 전라우수사 유비연(柳斐然)이 관왕묘를 중수하고 옆에 옥천사를 지었으며,[6] 1683년(숙종 9년)에는 관왕묘 서쪽에 사당을 새로 지어 충무공 이순신을 모셨다. 이때 동무(東廡)에는 관운장과 명나라 장수 진린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6] 조선의 영웅 이순신과 명나라의 장수 진린을 나란히 기리는, 연합군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 되었다.

1791년(정조 15년)에는 정조가 직접 '탄보묘(誕報廟)'[7]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며,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노장 등자룡을 추가로 모시게 하였다.[6] 등자룡은 진린의 부장으로,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같은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순국한 인물이다. 정조가 직접 현판을 내리고 명나라 장수를 함께 모시도록 한 것은 명나라의 도움과 양국 장수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한 조치였다.

이처럼 충무사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조선과 명나라가 함께 싸웠던 역사를 기억하고, 이순신, 진린, 등자룡 등 양국 장수들의 공훈과 희생을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하였다.

4. 2. 민족 수난과 극복의 역사

일제강점기에 충무사는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인해 큰 수난을 겪었다. 당시 사당에 모셔져 있던 관왕상과 위패를 비롯하여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관련 유물들이 모두 바다에 던져지는 비극을 맞았다.[4][1] 옥천사에 있던 불상만이 인근 백운사로 옮겨져 보존되었다.[4]

1945년 해방 이후, 고금도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과거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였고, 현판을 '충무사'로 바꾸어 충무공 이순신을 정전(正殿)에 모시게 되었다.[8] 이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지역 사회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 3. 호국 정신과 문화유산

완도 충무사는 본래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그들의 군신인 관우를 모시고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관왕묘'에서 시작되었다.[6] 이후 1683년(숙종 9년)에는 사당을 새로 지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단순한 관왕묘를 넘어 호국의 성격이 더해졌다. 동무(東廡)에는 관우진린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6][3] 1791년(정조 15년)에는 정조가 직접 '탄보묘(誕報廟)'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7]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충무사는 큰 수난을 겪었다.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에 따라 사당에 모셔져 있던 관왕상과 위패, 그리고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소중한 유물들이 모두 바다에 버려지는 비극을 맞았다.[1][4] 다행히 옥천사에 있던 불상만이 인근 백운사로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다.[1][4]

1945년 광복 이후, 고금도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다시 세우고, 이름을 '충무사'로 바꾸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정전(正殿)에 모셨다.[8] 이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던 민족의 호국 정신을 되살리고,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1959년에는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조방장 이영남(李英男) 장군(당시 가리포 첨사)을 동무(東廡)에 추가로 모셨다.

오늘날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호국 영웅들의 넋을 기리는 중요한 공간이자, 그들의 숭고한 업적을 후대에 전하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 기념제와 음력 11월 19일 순국제(殉國祭)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의 호국 정신과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다.[8] 이러한 제례는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에도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참조

[1] 웹사이트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of the South Korea http://www.cha.go.kr[...]
[2] 웹사이트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http://korean.visitk[...]
[3] 학술지 고금도(古今島) 관왕묘(關王廟) 연구 http://www.earticle.[...] 韓瑞大學校 附設 東洋古典硏究所 2015-02
[4] 웹사이트 莞島 廟堂島 李忠武公 遺蹟 http://www.cha.go.kr[...]
[5] 웹사이트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http://korean.visitk[...]
[6] 저널 고금도(古今島) 관왕묘(關王廟) 연구 http://www.earticle.[...] 韓瑞大學校 附設 東洋古典硏究所 2017-06-15
[7] 문서 큰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
[8] 웹사이트 莞島 廟堂島 李忠武公 遺蹟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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