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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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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신은 전쟁과 군사에 관련된 신이나 인물을 의미하며, 일본에서는 다양한 신화 속 인물과 무사, 그리고 근대 이후 용감한 전사들에게 군신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일본 신화에서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니니기노미코토를 위원중국에 보낼 때 평정을 도운 다케미카즈치와 후쓰누시, 그리고 오쿠니누시와 다케미나카타 등이 군신으로 숭배받았다. 중세 시대에는 하치만 신이 무사들의 군신으로 널리 숭배되었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신군·신전사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러일 전쟁의 히로세 다케오, 다치바나 슈타, 사쿠마 쓰토무 등 용감한 군인들이 군신으로 추앙받았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는 9군신, 가토 다케오, 세키 유키오 등이 군신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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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군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한 군부의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부국강병 정책, 서구 열강 경쟁 의식, 대공황 등의 배경 속에서 내셔널리즘 고조, 사상 통제, 군부의 독립적인 권력 행사 등의 특징을 보이며 침략 전쟁을 일으켰으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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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

2. 전통적인 군신

전통적인 군신은 전쟁의 승리와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소원을 들어준다고 여겨지는 신을 가리킨다.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출진 전에 군신에게 생 희생을 바쳤으며, 여기서 "혈제"라는 단어가 생겨났다.[2]

서양에서는 그리스 신화아레스로마 신화마르스 등이 군신으로 여겨진다.

2. 1. 한국의 군신

중국에서는 치우(蚩尤)나 관우 등이, 하와이 신화에서는 쿠가 군신으로 여겨진다.

2. 2. 일본의 군신

일본에서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니니기노미코토를 위원중국에 내려보낼 때 다케미카즈치노카미와 후쓰누시노카미를 선발하여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신을 모시는 가시마 신궁과 가토리 신궁은 예로부터 군신으로 숭배받았다. 또한 위원중국을 건국한 오쿠니누시노카미와 그의 자식으로 다케미카즈치노카미와 싸운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대사의 제신) 역시 군신으로 여겨졌다.[7]

《간에이제가계도전》에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고헤이 5년(1062년)에 "싸움의 승패가 오늘에 달렸으니, 나는 군신께 절하겠다"라며 큰소리를 세 번 냈다는 구절이 있어, 홍의 성(鬨の声)과 비슷하게 세 번 반복하는 관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중세에 걸쳐 무가의 필두인 세이와 겐지이와시미즈하치만씨신으로 삼고,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을 비롯한 각지에 권청하면서 하치만신은 널리 무사들에게 군신으로 숭배되었다.

"사람들이 지상에서 싸울 때 천상에서도 신들이 똑같이 싸운다"는 '신군·신전사상(神軍・神戦思想)'은 가마쿠라 후기(13세기 말) 몽고 습래 때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7] 1세기 후의 《메이토쿠기》에도 같은 사상이 확인된다. 내용으로는 신사에 신찬이 모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승려가 꿈속에서, 메이토쿠의 난에 즈음하여 하치만신이 스와·스미요시신에게 명하여 서울[都]에 신들이 모인 까닭에 신이 부재한 신사는 제례도 신찬도 필요없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기술이 있다.[7]

중세에는 신불습합의 영향으로 군신은 육식을 싫어한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가미이즈미 노부쓰나전의 《훈열집》(오에씨병법서를 전국풍으로 고친 병서)에는 "군신은 제육(諸肉)을 싫어한다", "진중에서는 금(禁)육식"이라는 기술이 보인다. (단, 스와 대사의 제신은 육식을 허한 수렵의 신으로서 널리 신앙되어 예외이다.) 또한 〈실험〉에는 개의 성(凱の声)은 군신을 권청하는 것이며, 승개(勝凱)를 만드는 것은 군신을 돌려보내드리는 소리라는 기술이 있다.

전장에서 군신은 깃발에 내린다고 생각되어, 《오다와라호조기》에는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아버지를 사별하고 백일재도 채 치르지 않았건만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신은 청정한 곳에 몸을 유하고 오탁에서 모습을 감춘다. 도대체가 더러움에 물들여진 깃발 위에 어찌 수호의 군신이 모습을 비추냐는 말인가"라는 구절이 있어, 군신이라 해도 상중의 더러움에는 질색한다는 주장이 만들어졌다.

전장에서 베어온 목은 수실검 후 군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간토고전록》에는 "우에스기 가게토라는 수실검을 하고 군신에 바칠 제물이 생겼다며 기뻐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근대에는 용맹한 전사자를 기리는 칭호로 쓰였다. 니시즈미 고지로 중위 이후로는 군이 직접 지정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신들이 군신으로 여겨졌다.

중세 무사의 시대가 되자 겐지이와시미즈 하치만을 씨족신으로 삼고, 각지의 겐씨도 하치만 신을 모시면서 하치만 신을 군신으로 삼았다.

2. 3. 그 외의 군신

서양에서는 그리스 신화아레스로마 신화마르스 등이 군신으로 여겨진다. 또한 중국에서는 치우관우 등이, 하와이 신화에서는 쿠가 군신으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다케미카즈치(가시마 신궁), 후쓰누시(가토리 신궁), 다케미나카타(스와 대사) - 스와 신앙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일본 제일의 군신"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중세 시대에 지위가 상승했다.[3], 오쿠니누시(이즈모 대사), 스사노오, 우마시마지, 야마토타케루 등이 군신으로 여겨졌다.

3. 일본 중세-근세의 군신

일본에서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니니기노미코토를 위원중국에 내려보낼 때 다케미카즈치노카미와 후쓰누시노카미가 선발되어 평정을 했다는 고사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두 신을 각각 모신 가시마 신궁·가토리 신궁은 예로부터 군신으로서 숭앙을 받았다. 또한 위원중국을 건국한 오쿠니누시노카미와 그 아들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대사의 제신) 역시 군신으로 취급되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중세에 걸쳐 무가의 필두인 세이와 겐지이와시미즈하치만씨신으로 삼아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을 비롯하여 각지에 권청함으로써 하치만신은 널리 무사에게 군신으로 숭배되었다.

"사람들이 지상에서 싸움을 벌일 적에 천상에서는 신들 역시 똑같이 싸우고 있다"는 '신군·신전사상(神軍・神戦思想)'은 가마쿠라 후기(13세기 말)의 몽고 습래 시에 가장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7]

중세에는 신불습합의 영향으로 군신은 육식을 싫어한다는 사고가 생겨났고, 가미이즈미 노부쓰나전의 《훈열집》(오에씨병법서를 전국풍으로 고친 병서)에는 "군신은 제육(諸肉)을 싫어한다", "진중에서는 금(禁)육식"이라는 기술이 있다. (단, 스와 대사의 제신은 육식을 허한 수렵의 신으로서 널리 신앙되어 예외이다.)

전장에서 군신은 깃발에 내린다고 생각되어 《오다와라호조기》에는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아버지를 사별하고 백일재도 채 치르지 않았건만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신은 청정한 곳에 몸을 유하고 오탁에서 모습을 감춘다. 도대체가 더러움에 물들여진 깃발 위에 어찌 수호의 군신이 모습을 비추냐는 말인가"라는 구절이 있어, 군신이라 해도 상중의 더러움에는 질색한다는 주장이 만들어졌다.

근대에 들면 용맹한 전사자에 대한 미칭으로 쓰였다. 니시즈미 고지로 중위 이후로는 군이 직접 지정하기도 했다.

3. 1. 부흥 군신

3. 2. 센고쿠 시대


  • 에치젠 아사쿠라 씨의 무장 '''아사쿠라 소테키'''는 군사 봉행으로서 아사쿠라 군을 이끌고 수많은 무훈을 세워 아사쿠라 가문의 위세를 높여 주변 제국에 두려움을 받아 군신으로 불렸다.
  • 분고 오토모 씨의 무장 '''다치바나 도세쓰'''는 대전 37회, 소전 100여 회로 거의 무패의 전적을 기록했으며, 그 군재와 용맹함은 제국에 알려져 두려움을 받아 규슈의 군신으로 칭송받았다.
  • 에치고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은 자신이 비사문천을 숭배하고, 뛰어난 전투 실력으로 인해 군신으로 불렸으며, 다른 다이묘들에게 두려움을 받았다.

4. 근대 일본의 군신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군인으로는 노기 마레스케 대장,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 외에 여러 인물들이 군신으로 추앙받았다. 처음에는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고, 주로 매스 미디어가 존칭으로 사용했다. 니시즈미 코지로 이후 군이 공식적으로 지정하게 되었고, 군신으로 지정된 군인의 생가에는 "군신의 집"이라는 표찰이 걸렸다. 군대 내에서도 정신적인 지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황실에 충성을 다한 일본사상의 인물도 군신의 상징으로 신격화되었다.

4. 1. [[히로세 다케오]] 중좌

러일 전쟁 중 여순항 폐색 작전에서 폐색선 후쿠이마루를 지휘하던 해군 소좌(전사 후 해군 중좌) 히로세 다케오는 적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행방불명된 부하 해군 일등병조(전사 후 해군 병조장) 스기노 마고시치를 찾기 위해 퇴각이 늦어져 러시아 해군포탄 직격을 받고 전사했다.[4]

결사적인 임무를 감행하고,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부하의 생명을 염려하여 전사했기 때문에, 전사 직후 군신으로 추앙받았다.[4] 이후 창가 히로세 중좌에서 "스기노는 어디, 스기노는 없나"와 같이 노래되었다. 현존하지 않는 도쿄 만세이바시역 앞에는 히로세(와 스기노)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4. 2. [[다치바나 슈타]] 중좌

러일 전쟁 중 랴오양 회전에서 보병 제34연대 제1대대장으로서 수산보 공략에 임하여 최전선에서 지휘를 맡아 온몸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했다.[1] 특히 이 날(8월 31일)은 과거 동궁무관으로서 가까이 모셨던 황태자 가라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수산보 공략에 힘썼다고 한다.[1] 그의 전사는 '다치바나 중좌'라는 창가로 불렸다.[1]

4. 3. [[사쿠마 쓰토무]] 대위

사쿠마 쓰토무 대위는 1910년(메이지 43년) 4월 15일 야마구치현 신미나토 해역에서 제6 잠수정이 가솔린 잠항 실험 중 침몰했을 때 함장이었다. 당시 제6 잠수정은 반잠항 훈련 중이었으며, 이 사고로 사쿠마 대위 이하 14명 전원이 순직했다.[1]

사쿠마 함장은 함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냉정하고 정확하게 지시를 내려 혼란이 발생하지 않았고, 승조원 대부분이 맡은 자리를 지키며 사망했다. 자리를 이탈한 승조원도 잠수정 수리를 위해 노력했다. 사쿠마 대위는 가스가 가득 차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39페이지에 달하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메이지 천황에게 잠수정 손실과 부하들의 죽음에 대해 사죄하고, 사고 원인을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유서는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오랫동안 수신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1]

4. 4. [[폭탄 삼 용사]]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국민혁명군 제19로군이 상하이 교외에 구축한 진지의 철조망에 대해 돌격로를 구축하기 위해 점화한 파괴통을 가지고 적진에 돌입하여 폭파하고 자신들도 폭사한, 독립공병 제18대대(구루메) 소속 3명의 일등병(전사 후 병장)을 가리킨다. 이들은 쇼와 시대에 들어 처음 등장한 군신(軍神)으로 불렸다.

  • '''에구사 타케지''' 병장
  • '''키타가와 스스무''' 병장
  • '''사쿠에 이노스케''' 병장


도쿄 시바의 쇼쇼지에는 이들의 동상 일부가 남아 있다.

타가와 스이호의 작품 "노라쿠로"의 『소년구락부』 1932년 5월 게재분에는 이를 모티브로 한 묘사가 있다. 노라쿠로 부대도 참가한 전투에서 철조망 파괴 작전에 지원한 3명이 등에 폭탄을 짊어지고 철조망을 향해 가서 그대로 폭사한다는 내용이다. 노라쿠로는 그 전투의 공적(적 대장을 생포)으로 상등병으로 승격했지만, 전사한 결사대 3명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드문 작풍으로 마무리되었다. 후에 간행된 단행본 『노라쿠로 상등병』에서는 3명이 파괴통을 휴대하고 가는, 실제 "삼 용사"에 가까운 묘사로 변경되었다.

4. 5. [[아라키 가쓰요]] 대위

만주 사변 이후, 쑨쉐량(張學良) 군 출신의 군인들이 만주국 건국에 반발하여 일본인을 인질로 잡은 하일라얼 사건에서, 철도 제1연대 소속이었던 아라키 가쓰요 중위(사후 대위로 추서)는 추격대의 선두에 섰다. 도중에 적이 발사한 돌방 화차의 탈선을 시도했으나, 탈선기의 장착 상황을 확인하느라 퇴피가 늦어져 전사했다. 사후, 조루리(浄瑠璃)와 나니와부시(浪花節)로 다루어졌으며, 철도 제1연대 부지 내에는 동상이 제작되었다.

4. 6. [[스기모토 고로]] 중좌

스기모토 고로 중좌(사후 추서)는 산시성 광링 현에서 중대장으로 종군했으며, 적진으로 돌격하여 중상을 입고 부동자세로 궁성 방향으로 경례를 한 채 절명했다.[1]

그의 유서 "대의"는 국수주의적인 내용으로 종전에 이르기까지 판을 거듭하여 29판,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

4. 7. [[니시즈미 코지로]] 대위

니시즈미 코지로 중위(사후 대위로 승진)는 구루메 전차 제1연대 소대장으로, 제2차 상해 사변부터 쉬저우 회전 중이던 1938년(쇼와 13년) 5월 17일 유탄에 맞아 전사할 때까지 30회 이상의 전투에 참가했다. 기쿠치 칸의 소설 "니시즈미 전차장전"이 도쿄일일신문·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었고, 1940년(쇼와 15년) 쇼치쿠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우에하라 켄이 니시즈미 역을 연기했다.

니시즈미는 군에서 공식적으로 "군신"으로 지정된 최초의 인물이었다.

4. 8. [[구군신]]

구군신


대동아 전쟁 중 하와이 해전(진주만 공격)에서 갑표적에 탑승하여 미귀환한 해군 대위(전사 후 해군 중좌) 이와사 나오지 등 9명이 "특별공격대의 위훈"으로 군신으로 추앙되었다[5].(1942년 3월 6일 해군성 발표)

계급이름
중좌이와사 나오지
소좌요코야마 마사하루
소좌후루노 시게미
대위히로오 아키라
특무 소위사사키 나오키치
특무 소위요코야마 구니노리
병조장우에다 사다무
병조장가타야마 요시오
병조장이나가키 기요시



잠항정은 1척 2인승으로, 생존자인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포로가 되었지만, 대본영 발표에서는 이 사실을 숨겼다. 다만 VOA의 보도에 의해 실태는 은밀하게 유포되었다.

갑표적 훈련이 행해진 미쓰쿠에 만(에히메현이카타정)에는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다.

구군신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으로는,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 소설 『진주』가 있으며, 시인 사토 하루오, 사이토 모키치, 다카하마 교시도 다음과 같은 헌구를 썼다.

: 장부의 원수 갚는 마음에

: 전부터 물에 잠겨 죽기를

: 바라고 때가 이르기를 기다렸거늘

: 친구 아홉 명, 소원은 하나

: — 사토 하루오 "특별공격대 군신의 송의 (1)"

: 아홉 군의 신의 모습 천황께서 보시네

: 더러움 없이 한결같이 바친 아홉 목숨 어찌 슬퍼하지 않으리

: 그 마음 극에 달했으니 아 특별공격대의 이름을 길이 빛내리

: — 사이토 모키치

: 그 이름이야말로 봄 동틀 녘 눈에 뚜렷이

: 새싹에 늙은이 눈물은 더러워 원추리

: 그 아이의 어머니도 웃으며

: — 다카하마 교시 "군신 구주"

4. 9. [[마쓰오 게이우]] 중좌

마쓰오 게이우는 시드니 항 공격에 특수 잠항정 정장으로 참가했다. 어뢰 발사관 고장으로 공격에 실패하자, 정을 적함에 충돌시켜 어뢰를 폭발시키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 부하와 함께 자결했다. 사후 2계급 특진했으며, 호주 해군에 의해 정중하게 장례가 치러졌다(특수 잠항정 시드니 항 공격#해군장 참조). 마쓰오 등 4명의 전사는 당시 일본에서 미담으로 여겨졌지만, 1942년 10월 5일, 유골이 일본으로 송환되었을 때 해군은 보도 각사에 "특수 잠항정 4용사는 군신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6] 이는 진주만 공격 때 특수 잠항정에서 전사한 "9군신"의 희소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는 배려로 보인다.

4. 10. [[가토 다케오]] 소장

1942년 벵골 만 상공에서 영국 공군기와의 공중전에서 피탄되어 전사한 육군 중좌(전사 후 육군 소장) 가토 다케오는 군신으로 추앙받았다. 가토는 일본군 역사상 최다인 7장의 감상(개인 감상·부대 감상 합계)을 수상한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고결하면서도 애교가 있고, 누구에게나 신뢰받는 인품과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가토 하야부사 전투대로 유명한 일본 제국 육군 비행 제64전대 전대장이었으며, 후에 가토와 부하 전대 대원들의 활약과 최후를 그린 전쟁 영화 "가토 하야부사 전투대"가 제작되었고, 해당 부대의 부대가도 유명해졌다.[1]

4. 11. [[세키 유키오]] 중좌

태평양 전쟁1944년 레이테 만 해전에서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시키시마 부대 대장으로 참전하여, 미국 함선에 돌입하여 전사한 특공대 전사자 제1호로 유명한 해군 대위(전사 후 해군 중좌)이다.[1] 10월 25일 4번째 출격에서 시키시마 부대 1기(일설에는 2기)가 호위 항공모함 센트 로에 돌입하여 격침시켰으며, 이를 관기(関機)라고 불렀다.[1] 세키 유키오는 이 공격으로 전사했다.[1] 실제 특공대 전사자 제1호는 야마토 부대 대장 구노 요시후미 중위이지만, "해군병학교 출신자를 특공 제1호로"라는 상층부의 의향으로 세키가 특공 제1호로 공표되었다.[1]

5. 군신 관련 사상 및 관습 (일본)

일본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니니기노 미코토를 아시하라노 나카츠쿠니에 내려보낼 때, 타케미카즈치노 카미와 후츠누시노 카미가 선발대로 파견되어 평정했다는 고사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두 신을 각각 모신 가시마 신궁・가토리 신궁은 옛날부터 군신으로 숭배받았다. 또한, 아시하라노 나카츠쿠니를 건국한 오쿠니누시노 카미와, 그 아들로 타케미카즈치노 카미와 싸운 타케미나카타노 카미 (스와 대사의 제신)도 군신으로 여겨진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고헤이 5년(1062년)에 "명하여, 합전의 승부를 오늘에, 내가 군신을 배례한다, 라고 읊으며, 높이 소리를 지르는 것 3번"이라고 『간에이 제씨 계도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홍의 성과 비슷하게 3번 반복하는 관례가 있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중세에 걸쳐, 무가의 으뜸이었던 세이와 겐지가 이와시미즈 하치만을 씨족신으로 삼고, 가마쿠라의 쓰루오카 하치만구를 비롯해 각지에 권청한 데서, 하치만 신은 널리 무사들에게 군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사람들이 지상에서 싸움을 벌이는 동안, 천상에서는 신들도 똑같이 싸우고 있다"는 '신군・신전 사상'은 가마쿠라 후기(13세기 말)의 몽골 침략 때 가장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7] 1세기 후의 『메이토쿠기』에서도 비슷한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메이토쿠의 난 당시, 하치만 신이 스와・스미요시 신에게 명하여, 도읍에 신들이 모였기 때문에, 신이 부재한 사당에서는 제례도 신찬도 필요 없다고 승려가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기술이 있다.[7]

중세에는 신불습합의 영향으로 군신은 육식을 싫어한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가미이즈미 노부쓰나 전의 『군열집』(오에 가의 병법서를 전국 시대풍으로 고친 병서)에는 "여러 고기를 군신이 싫어한다", "진중에서는 육식 금지"라는 기술이 보인다. 다만, 스와 대사의 제신은 육식을 허용하는 수렵의 신으로서 널리 신앙되어 예외였다.

군신은 전장에서 깃발에 강림한다고 여겨졌다. 『오다와라 호조기』에는 "우에스기 토모사다는 아버지가 사별한 지 백 일이 채 되지 않았는데, 오로지 합전에 몰두했다. 신은 청정한 곳에 몸을 숙이고, 오염으로부터 모습을 감춘다. 도대체, 부정에 물든 깃발 위에, 어찌하여 수호의 군신도 모습을 숙이겠는가"라는 기술이 있다.

전장에서 벤 머리는 수급 검사 후, 군신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 『간토 고전록』에는 "우에스기 가게토라는 수급 검사를 하고 군신에게 생 희생이 생겼다고 기뻐했다"라는 기술이 있다.

근대 이후에는 용맹한 전사자의 미칭으로도 사용되게 되었다. 니시즈미 코지로 중위 이후에는 군이 공식적으로 지정하게 된다.

참조

[1] 서적 日本の歴史12 室町人の精神 講談社 2001
[2] 문서 広辞苑 第六版 岩波書店
[3] 서적 前橋市史 第一巻
[4] 간행물 征露戦報 1904-04
[5] 간행물 写真週報
[6] 서적 日米交換船 新潮社 2006-03
[7] 서적 日本の歴史12 室町人の精神 講談社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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