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미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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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미 요시아키는 1946년 야마구치현 출생의 일본사학자로, 도쿄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전공했다. 그는 쇼와 시대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의 전쟁 범죄, 특히 위안부 문제와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요시미는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위안소 관련 문서 증거를 발견하여 일본군의 조직적인 위안소 운영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그의 연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한 비판, 위안부 합의 부정 등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요시미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관련 소송에서 날조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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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미 요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출생 | 1946년 |
국적 | 일본 |
직업 | 역사 학자 |
소속 | 주오대학교 상학부 교수,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대표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정보 없음) |
경력 | 주오대학교 상학부 교수,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대표 |
기타 정보 | |
종교 | (정보 없음) |
배우자 | (정보 없음) |
상훈 | (정보 없음) |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서명 | (정보 없음) |
2. 약력
- 1946년 : 야마구치현 출신.
- 1970년 : 도쿄대학교 문학부 국사학과 졸업.
- 1972년 :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국사학 전공 석사 과정 수료.
- 1973년 : 도쿄대학교 문학부 조수(助手). 같은 해 도쿄대학교 박사 과정 중퇴.
- 1976년 : 주오대학교 상학부 전임강사.
- 1977년 : 주오대학교 조교수.
- 1988년 : 주오대학교 교수.
- 2017년 : 주오대학교 명예 교수.
3. 주요 연구
요시미 요시아키는 쇼와 시대 전반기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주로 연구했다. 특히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명령에 따른 일본의 화학 무기 사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1]
3. 1.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
요시미 요시아키는 쇼와 시대 전반기에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주로 연구했다. 특히 위안부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 제국 육군이 "위안소"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최초의 문서 증거를 발견했다. 그는 약 2,000개의 위안소에서 최대 20만 명의 한국,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버마, 네덜란드, 호주, 일본 여성들이 구금되어 일본군에게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많은 문서와 증언을 발견했다.[1]그 중 하나는 1938년 3월 4일에 일본군 중지나 파견군과 북지나 방면군 참모총장 보좌관이 작성한 "군 위안소 여성 모집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통지였다. 해당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많은 대리인들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군대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군대의 이름을 강조했고, 다른 일부는 종군 기자나 연예인을 통해 통제 없이 여성을 모집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납치 방식을 사용하여 여성을 모집하는 잘못된 대리인을 선택하여 경찰에 체포되었다. 앞으로 야전군은 모집을 통제하고 신중하고 적절하게 대리인을 선택해야 하며, 모집 과정에서 지역 경찰 및 헌병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군대의 신뢰도를 훼손하거나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라."[2]
이러한 문서의 출판은 1993년 1월 12일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과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의 성명을 이끌어냈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서 특히 중요했다. 그는 전 아베 신조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군의 개입을 부인했을 때 사실을 부인했다고 비난했다.[3]
2007년 4월 17일, 요시미와 동료 역사학자 하야시 히로후미는 기자 회견에서 도쿄 재판 기록 보관소에서 ''특고'' 요원이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중국 여성들을 강압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성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5]
요시미는 "과거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일본인의 새로운 자신감과 긍지로 이어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으며,[7]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군에 의한 독가스전 등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목소리를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8]
그는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의한 성 노예 제도", "(그것들은)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이다"라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그 운동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일어난 성폭행 문제의 해명을 촉진하고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등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또한, 위안부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신청하도록 노력하고 있다.[9]
요시미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논쟁에서, 대본영 발표와 같은 신뢰성이 낮은 공문서에 기반한 접근 방식은 의미가 옅다고 보고, 피해자의 "증언"(구술사)으로부터 증명을 시도하는 접근 방식도 취하고 있다.[17][18]
3. 2. 화학 무기 사용 연구
요시미 요시아키는 쇼와 시대 전반기에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주요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명령에 따라 일본의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1]2004년 7월, 요시미와 역사학자 다나카 유키는 호주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청산가리 가스가 1944년 11월 카이 제도에서 호주 및 네덜란드 포로에게 실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4]
3. 3. 기타 연구
요시미 요시아키는 쇼와 시대 전반기에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주요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명령에 따라 일본의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1]요시미는 주로 위안부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 제국 육군이 "위안소"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최초의 문서 증거를 발견했다. 그는 약 2,000개의 위안소에서 10대, 심지어 14세 소녀도 포함해 최대 20만 명의 한국,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버마, 네덜란드, 호주, 일본 여성들이 구금되어 일본군에게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많은 문서와 증언을 발견했다.[1]
그 중 하나는 1938년 3월 4일에 일본군 중지나 파견군과 북지나 방면군 참모총장 보좌관이 작성한 "군 위안소 여성 모집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통지였다. 해당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많은 대리인들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군대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군대의 이름을 강조했고, 다른 일부는 종군 기자나 연예인을 통해 통제 없이 여성을 모집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납치 방식을 사용하여 여성을 모집하는 잘못된 대리인을 선택하여 경찰에 체포되었다.
> 앞으로 야전군은 모집을 통제하고 신중하고 적절하게 대리인을 선택해야 하며, 모집 과정에서 지역 경찰 및 헌병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 군대의 신뢰도를 훼손하거나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라."[2]
이러한 문서의 출판은 1993년 1월 12일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과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의 성명을 이끌어냈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서 특히 중요했다. 그는 전 아베 신조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군의 개입을 부인했을 때 사실을 부인했다고 비난했다.[3]
2004년 7월, 요시미와 역사학자 다나카 유키는 호주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청산가리 가스가 1944년 11월 카이 제도에서 호주 및 네덜란드 포로에게 실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4]
2007년 4월 17일, 요시미와 동료 역사학자 하야시 히로후미는 기자 회견에서 도쿄 재판 기록 보관소에서 ''특고'' 요원이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중국 여성들을 강압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성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5]
4.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주장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주장하며,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시미는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 제국 육군이 "위안소"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최초의 문서 증거를 발견했다.[1] 그는 이를 통해 한국,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버마, 네덜란드, 호주, 일본 등에서 최대 20만 명의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한다.
1938년 3월 4일, 일본군 중지나 파견군과 북지나 방면군 참모총장 보좌관이 작성한 "군 위안소 여성 모집에 관하여"라는 통지에는 "군대의 신뢰도를 훼손하거나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군이 모집을 통제하고 대리인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2] 요시미는 이 문서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근거로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 개입을 주장했다.
이러한 요시미의 연구와 주장은 1993년 고노 담화 발표에 영향을 미쳤다.[3]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을 담은 중요한 성명이다.
요시미는 아사히 신문과의 협력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다.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은 요시미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위안소,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이 기사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의 방한 직전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요시미의 주장은 니시오카 쓰토무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요시미가 "발견했다"고 보도된 자료가 실제로는 "선의의 관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미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에 의한 성 노예 제도"이자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로 규정하고,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9] 또한, 한일 기본 조약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38]
4. 1. 강제성의 정의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논쟁에서 군 정책으로서의 "강제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요시미는 "강제성"에 대해, "1910년에 일본이 체결한 『부녀 매매에 관한 국제 조약』 제2조의 '사기·폭행·협박·권력 남용 등에 기타 일체의 강제 수단' 및 전시 형법 제33장 『략취 및 유괴의 죄』 제226조의 '국외 이송 목적 략취죄', '국외 이송 목적 유괴죄', '국외 이송 목적 인신매매죄', '국외 이송죄' 4가지 범죄에 위반하는 행위"[19]라고 정의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속아서 끌려가 폭행과 강간을 당했다"는 것은 사기에 의한 강제이며, "그 후에도 구속되어 자유를 빼앗긴다면 그것도 강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20] 더욱이, 자유 의지로 위안부가 된 여성에 대해서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위안부가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빈곤이나 실업, 식민지 지배와 같은 강제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21]
2007년 4월 17일, 하야시 히로시와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 "위안소는 사실상 조직적인 '성노예'다. 위안부들은 강압에 의한 납치나 유괴로 모집되어 감금되었다"고 하였다.[32]
4. 2. 일본군의 관여
요시미는 쇼와 시대 전반기에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주요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명령에 따라 일본의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요시미는 주로 위안부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 제국 육군이 "위안소"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최초의 문서 증거를 발견했다. 그는 약 2,000개의 위안소에서 10대, 심지어 14세 소녀도 포함해 최대 20만 명의 한국,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버마, 네덜란드, 호주, 일본 여성들이 구금되어 일본군에게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많은 문서와 증언을 발견했다.[1]
그 중 하나는 1938년 3월 4일에 일본군 중지나 파견군과 북지나 방면군 참모총장 보좌관이 작성한 "군 위안소 여성 모집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통지였다. 해당 문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많은 대리인들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군대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군대의 이름을 강조했고, 다른 일부는 종군 기자나 연예인을 통해 통제 없이 여성을 모집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납치 방식을 사용하여 여성을 모집하는 잘못된 대리인을 선택하여 경찰에 체포되었다. 앞으로 야전군은 모집을 통제하고 신중하고 적절하게 대리인을 선택해야 하며, 모집 과정에서 지역 경찰 및 헌병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군대의 신뢰도를 훼손하거나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라."[2]
이러한 문서의 출판은 1993년 1월 12일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과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의 성명을 이끌어냈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서 특히 중요했다. 그는 전 아베 신조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군의 개입을 부인했을 때 사실을 부인했다고 비난했다.[3]
2004년 7월, 요시미와 역사학자 다나카 유키는 호주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청산가리 가스가 1944년 11월 카이 제도에서 호주 및 네덜란드 포로에게 실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4]
2007년 4월 17일, 요시미와 동료 역사학자 하야시 히로후미는 기자 회견에서 도쿄 재판 기록 보관소에서 ''특고'' 요원이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중국 여성들을 강압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성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5]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 전시 하의 민중 사회 및 그 전쟁 체험 수용의 역사 등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과거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일본인의 새로운 자신감과 긍지로 이어진다"는 것이 지론이며[7],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군에 의한 독가스전 등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목소리를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8]。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의한 성 노예 제도", "(그것들은)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이다"라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그 운동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일어난 성폭행 문제의 해명을 촉진하고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등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 위안부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신청하도록 노력하고 있다.[9]。
'''방한 직전 아사히 신문 보도 관여'''
요시미가 위안부 문제로 각광을 받은 것은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열람한 위안부에 관한 자료를 복사하여 아사히 신문 기자 다쓰노 테쓰로에게 건넨 것에서 시작된다. 아사히 신문은 1992년 1월 11일 조간 1면에 「위안소에 대한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 방위청 도서관에 구 일본군의 통달·일지」라고 요시미의 자료에 의한 기사를 게재했고, 요시미도 "군의 위안소가 설치된 것은 상하이 전투에서 난징 전투에 걸쳐 강간 사건이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하며, 38년의 통첩류는 이것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당시 군 부대나 지대 단위로 위안부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알 수 있는 자료로, 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전 위안부가 증언을 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 '관여'를 부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한일 협정으로 배상 청구권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배상과 개인 대 국가의 배상은 다르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사죄는 물론 배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당시)의 방한 직전이라는 타이밍에 게재된 이 기사는 1면에서 「위안소,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부대에 설치 지시 모집 포함 통제·감독」「정부 견해 흔들려」라고 보도했으며, 또한 요시미가 자료를 "발견"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자료는 이미 주지된 것이었다.[10]。아사히는 이 자료에 대해 요시미의 해석만을 싣고, 요시미는 지면상에서 "군의 관여는 명백하며, 사죄와 배상을"이라고 논평했다. 이 기사의 설명과 같은 날의 사설에는 「조선인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연행했다」「그 수는 8만 명, 20만 명이라고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다음 1월 12일 아사히 신문 사설에서는 "역사에서 눈을 돌리지 말자"며 미야자와 총리에게 "긍정적인 자세를 바란다"고 보도하고, 1월 13일,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당시)이 "사과와 반성" 담화를 발표, 1월 14일, 미야자와 총리는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장에 대한 비판'''
요시미가 "발견했다"고 보도된 이 자료는 "육지밀대일기"에 묶여 있던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쇼와 13년 3월 4일, 육군성 병무국 병무과 기안, 북지나 방면군 및 중지나 파견군참모장 앞으로)이라는 것으로, 내용은 "'''내지에서 이것의 종업부 등을 모집함에 있어, 특별히 군부 양해 등의 명의를 이용함으로 인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 민의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헌병 및 경찰 당국과의 연계를 긴밀히 하여 군의 위신 유지상 및 사회 문제상 유루가 없도록 배려하시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요시미는 "군의 관여는 명백하다"고 주장했다.[11]。
이에 대해, 이 자료가 나타내는 "관여"란, 아사히 신문이 보도하는 것과 같은 "관여"와는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니시오카 쓰토무나 고바야시 요시노리, 다카하시 시로 등으로부터, "'''악질적인 업자가 불통제적으로 모집하여 '강제 연행'하지 않도록 군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의의 관여'이다'''"라는 비판과 요시미와는 다른 해석이 나왔다.[12][13]。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요시미는, (1) 통달의 취지는 파견군이 업자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단속의 권고가 아니다, (2) 조선과 대만에서 이러한 서류가 발견되지 않은 것을,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은 알지 못하고, 조선과 대만에서도 이 통달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14]。
'''아사히 신문에서의 위안부 보도 이후'''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에서의 보도 이후부터 전 위안부에 의한 소송, 한일 간의 정치 문제화, 교과서 문제 등 위안부 문제가 한일에서 크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요시미는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그 후에도 위안부 관계의 연구를 계속했고, 저작·발언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니시노 루미코나 하야시 히로시 등과 공동으로 전쟁과 여성의 인권 박물관의 발기인[15]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긴급 120만명 서명』의 찬동인 등을 맡고 있다.[16]。
2019년 공개된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에 출연했다.
요시미는 경찰 자료, 탁무성·내무성의 일부 자료, 종군 일지 및 군의 업무 일지류, 법무성·외무성의 전범 재판 자료, 후생성의 복원·원호 관계 자료 등이 비공개되어 있어 사실 규명에 제약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2]
요시미 요시아키는 군의 관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 1932년 3월: 상하이 파견군은 상하이에 위안소를 만들었으며, 오카무라 야스지 상하이 파견군 참모 부장과 오카베 나오사부로 고급 참모가 위안소 설치 지시를 내리고 나가미 토시노리 참모가 설치를 진행했다.[23][24]
- 1937년 12월: 중지나 방면군은 위안소 설치 지시를 내렸다. 이를 받은 상하이 파견군에서는 참모 제2과가 안을 작성하고, 나가이 유 참모가 설치를 담당했다.[25]
- 1937년 12월: 제10군 참모 테라다 마사오 중좌는 헌병을 지휘하여 후저우에 위안소를 설치했다.[25]
- 1938년 6월: 북지나 방면군 참모 오카베 나오사부로 중장은 지휘 하의 구부대에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다.[26]
- 센다 나츠코는 자신의 저서 『종군 위안부』(1978년)에서, 1941년 7월: 관동군은 2만 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징모하려 계획, 하라 젠시로 참모는 조선 총독부에 의뢰하여 8천 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모아 만주로 보냈다고 썼다. 처음에는 하라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지만, 이후 『관동군』(시마다 토시히코 저)을 출처 원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해당 책에는 인물이나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센다 나츠코의 저작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 1939년: 하이난 섬의 해군 부대를 위해 위안소 설치를 계획, 해군 제4근거지대 사령부가 대만 총독부 해군 무관에게 50명의 징모를 요청. 대만 총독부의 무관으로부터 특요원 50명을 보내겠다는 전보가 왔다.[27]
다만,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군의 관여에 대해 처음부터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었으며, 영화 등에서도 군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말하며, 정부가 "국가로서의 관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의 보도를 비판하고 있다.[28]
4. 3. 피해자 수
대한민국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의 영문판 Q&A에서 요시미는 위안부 피해자 총수를 8만~2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33]요시미는 육군 병사 100명당 위안부 1명 비율로 추측하고, 해외 병력이 최대 350만 명이므로 위안부는 약 3만 명, 교대 수를 합쳐 6만 명, 그 사이를 취해 4만 5000명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지 군이 독자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수가 있어 더 늘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위안부의 수는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고 있다. 일본인 위안부의 비율은 전체의 약 12%로 추정하고 있다.[34]
4. 4. 일본의 배상 책임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 전시 민중 사회 및 전쟁 체험 수용의 역사를 연구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일본인의 새로운 자신감과 긍지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7]요시미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에 의한 성 노예 제도",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로 규정하고,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9]
1992년 1월 11일, 요시미는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열람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아사히 신문에 제공했고, 아사히 신문은 이를 1면에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요시미는 "군의 위안소가 설치된 것은 상하이 전투에서 난징 전투에 걸쳐 강간 사건이 잇따랐기 때문"이라며, "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전 위안부가 증언을 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 '관여'를 부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한일 협정으로 배상 청구권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배상과 개인 대 국가의 배상은 다르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사죄는 물론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당시)의 방한 직전이라는 시점에 맞춰 보도된 이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사히 신문은 요시미의 자료를 "발견"했다고 보도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자료였다.[10] 요시미는 "군의 관여는 명백하며, 사죄와 배상을"이라고 논평했고, 아사히 신문은 사설을 통해 미야자와 총리에게 "긍정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이후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당시)은 "사과와 반성" 담화를 발표했고, 미야자와 총리는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시미가 "발견했다"고 보도된 자료는 "육지밀대일기"에 묶여 있던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이었다. 이 문서는 "'''내지에서 이것의 종업부 등을 모집함에 있어, 특별히 군부 양해 등의 명의를 이용함으로 인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 민의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으로, "헌병 및 경찰 당국과의 연계를 긴밀히 하여 군의 위신 유지상 및 사회 문제상 유루가 없도록 배려하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요시미는 이를 "군의 관여는 명백하다"고 주장했다.[11]
그러나 니시오카 쓰토무, 고바야시 요시노리, 다카하시 시로 등은 이 자료가 "'악질적인 업자가 불통제적으로 모집하여 '강제 연행'하지 않도록 군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의의 관여'이다'"라고 비판했다.[12][13] 요시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통달의 취지는 파견군이 업자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단속의 권고가 아니라고 반박했다.[14]
요시미는 한일 기본 조약이 "청구권 문제를 정리한 조약"이며, 일본이 식민지 지배의 책임 문제를 인정하지 않은 불완전한 내용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한일 기본 조약 제3조에 의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논리적으로 명백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38]
5. 논쟁 및 비판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논쟁과 비판의 중심에 있었다.
요시미는 1992년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입수한 자료를 아사히 신문에 제공하여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의 관여를 주장하는 기사가 보도되도록 하였다.[10] 이 기사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의 방한 직전에 보도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요시미는 이 자료를 통해 "군의 관여는 명백하다"고 주장하며,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시미가 "발견했다"고 보도된 자료는 "육지밀대일기"의 일부로, "'''내지에서 이것의 종업부 등을 모집함에 있어, 특별히 군부 양해 등의 명의를 이용함으로 인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 민의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11] 니시오카 쓰토무,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은 이를 "악질적인 업자가 불통제적으로 모집하여 '강제 연행'하지 않도록 군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요시미의 해석을 비판했다.[12][13]
요시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통달의 취지는 파견군이 업자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단속의 권고가 아니라고 반박했다.[14] 또한 조선과 대만에서는 이러한 서류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주장을 옹호했다.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보도 이후, 요시미는 전쟁과 여성의 인권 박물관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15] 2019년에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에 출연하기도 했다.
요시미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그는 "군이 솔선하여 이러한 제도를 만들고 유지·관리해 간 것은, 확인되는 한, 일본군과 독일군밖에 없습니다"[39]라고 주장하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성 노예제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케다 노부오는 요시미의 주장에 대해 나치 독일, 소련, 영국 연방군, 전후 일본의 미군용 매춘 시설 등을 언급하며 "거짓말"이라고 비판한다.[43]
일본유신회 공동 대표였던 하시모토 도루는 2013년 위안부 제도에 대해 "다른 나라도 비슷한 일을 했다"고 발언했는데, 요시미는 "군 시설로서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만든 나라는 다른 데 없다"며 하시모토의 발언을 비판했다.[49]
요시미는 2015년 12월 28일에 이루어진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에 대해서도 백지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5. 1.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한 비판
아시아 여성 기금 설립에 대해 "위안부에 대한 배상금에 정부 예산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방침을 비판하며 참여를 거부했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 "위안부에 대한 배상금은 정부 예산이 아닌 민간 모금으로 이루어졌고, 정부 예산은 의료비 지원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위안부에 대한 배상금은 정부 예산으로 지급하고, 민간 모금으로 의료비 지원 등을 해야 했다. 정부는 피해자가 원하는 구제를 생각하기 전에 일본 정부의 책임으로서 피해자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아시아 여성 기금의 노력을 비판했다.[1]5. 2. 일본군 위안소 특이성 주장과 비판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와 전시 민중 사회, 그리고 전쟁 체험 수용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과거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일본인의 새로운 자신감과 긍지로 이어진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으며[7],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군에 의한 독가스전 등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목소리를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8]。요시미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에 의한 성 노예 제도",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이러한 운동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일어난 성폭행 문제의 해명을 촉진하고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등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며, 위안부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신청하도록 노력하고 있다[9]。
'''방한 직전 아사히 신문 보도 관여'''
요시미가 위안부 문제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열람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복사하여 아사히 신문 기자 다쓰노 테쓰로에게 전달한 것이다.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은 조간 1면에 「위안소에 대한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 방위청 도서관에 구 일본군의 통달·일지」라는 제목으로 요시미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를 게재했다. 요시미는 이 기사에서 "군의 위안소가 설치된 것은 상하이 전투에서 난징 전투에 걸쳐 강간 사건이 잇따랐기 때문이며, 38년의 통첩류는 이것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당시 군 부대나 지대 단위로 위안부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알 수 있는 자료로, 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전 위안부가 증언을 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 '관여'를 부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한일 협정으로 배상 청구권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배상과 개인 대 국가의 배상은 다르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사죄는 물론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당시)의 방한 직전이라는 시점에 게재된 이 기사는 1면에서 「위안소,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부대에 설치 지시 모집 포함 통제·감독」「정부 견해 흔들려」라고 보도했으며, 요시미가 자료를 "발견"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자료는 이미 알려진 것이었다[10]。아사히 신문은 이 자료에 대해 요시미의 해석만을 싣고, 요시미는 지면상에서 "군의 관여는 명백하며, 사죄와 배상을"이라고 논평했다. 이 기사의 설명과 같은 날의 사설에는 「조선인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연행했다」「그 수는 8만 명, 20만 명이라고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다음 1월 12일 아사히 신문 사설에서는 "역사에서 눈을 돌리지 말자"며 미야자와 총리에게 "긍정적인 자세를 바란다"고 보도하고, 1월 13일,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당시)이 "사과와 반성" 담화를 발표, 1월 14일, 미야자와 총리는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장에 대한 비판'''
요시미가 "발견했다"고 보도된 자료는 "육지밀대일기"에 묶여 있던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쇼와 13년 3월 4일, 육군성 병무국 병무과 기안, 북지나 방면군 및 중지나 파견군참모장 앞으로)이라는 것이다. 이 문서는 "'''내지에서 이것의 종업부 등을 모집함에 있어, 특별히 군부 양해 등의 명의를 이용함으로 인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 민의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며, "헌병 및 경찰 당국과의 연계를 긴밀히 하여 군의 위신 유지상 및 사회 문제상 유루가 없도록 배려하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요시미는 이를 근거로 "군의 관여는 명백하다"고 주장했다[11]。
그러나 이 자료가 나타내는 "관여"는 아사히 신문이 보도한 "관여"와는 의미가 다르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니시오카 쓰토무, 고바야시 요시노리, 다카하시 시로 등은 "'''악질적인 업자가 불통제적으로 모집하여 '강제 연행'하지 않도록 군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의의 관여'이다'''"라고 비판하며 요시미와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12][13]。
이에 대해 요시미는 (1) 통달의 취지는 파견군이 업자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단속의 권고가 아니다, (2) 조선과 대만에서 이러한 서류가 발견되지 않은 것을,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은 알지 못하고, 조선과 대만에서도 이 통달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14]。
'''아사히 신문에서의 위안부 보도 이후'''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의 보도 이후, 전 위안부들의 소송, 한일 간의 정치 문제화, 교과서 문제 등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에서 크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요시미는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위안부 관련 연구를 계속했고, 저술 및 발언 활동을 이어갔다. 현재는 니시노 루미코, 하야시 히로시 등과 공동으로 전쟁과 여성의 인권 박물관의 발기인[15] 및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긴급 120만명 서명』의 찬동인 등을 맡고 있다[16]。
2019년 공개된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에 출연했다.
요시미는 일본 이외의 전시 매춘업소에 관해서는 "군이 솔선하여 이러한 제도를 만들고 유지·관리해 간 것은, 확인되는 한, 일본군과 독일군밖에 없습니다"[39]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같은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성 노예제를 가지고 있던 것은, 일본과 나치 독일뿐이었다." "당시, 처음부터 공창제가 없었던 미국이나, 영국 등과 같이 공창제를 폐지했던 나라가 많았고, 장병이 민간 매춘업소를 이용하는 일은 있었다 하더라도, 군이 조직적으로 관리 운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던 나라가 많았다." "여러 외국 군인에 의한 성폭력도 있었지만, 그것은 '위안부' 제도와는 별개의 것이며, 그것들을 혼동시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면죄할 수는 없다."[40][41]고 주장한다. (다만, 2007년 3월 31일, 뉴욕 타임스에서 오오니시 노리미츠로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매춘 시스템을 운영한 것은 일본뿐이며,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 매춘업소나 국방군 매춘업소, 미군 대상 한국 위안소 등은,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매춘 시스템이 아니라, 이용하는 병사가 있던 매춘업소에 불과하다"고 답변하고 있다[42].).
이케다 노부오는 요시미의 주장에 대해 나치 독일에서의 국영 매춘 시설, 소련과 영국 연방군의 군용 매춘 시설, 전후 일본에서 RAA라고 불리는 미군용 매춘 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을 지적하며, '''요시미의 발언은 거짓말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43] .
5. 3. 하시모토 도루 발언에 대한 비판
일본유신회 공동 대표 하시모토 도루는 2013년 6월 4일 위안부 제도에 대해 "다른 나라도 비슷한 일을 했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요시미는 "군 시설로서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만든 나라는 다른 데 없다. 일본의 위안부 제도는 특이했다"고 주장하며 비판했다.[49]5. 4. 위안부 합의 부정
吉見義明|요시미 요시아키일본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의한 성 노예 제도",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라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9] 2015년 12월 28일에 이루어진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에 대해서는 백지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2016년에는 와다 하루키로부터 "합의를 받아들인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된다", "1990년 이후부터 이어져 온 화해를 위한 관계자들의 노력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등의 비판을 받았다.[16]
5. 5. 날조 비판 소송과 기각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은 조간 1면에 요시미가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열람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복사하여 다쓰노 테쓰로 기자에게 건넨 것을 바탕으로 "위안소에 대한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 방위청 도서관에 구 일본군의 통달·일지"라는 기사를 게재했다.[10] 이 기사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의 방한 직전이라는 시점에 보도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2013년 5월, 일본유신회 소속이었던 사쿠라우치 후미키 전 중의원 의원은 요시미의 저서 『종군 위안부』에 대해 "이것은 이미 날조라는 것이 여러 증거에 의해 밝혀졌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요시미는 명예훼손을 이유로 1,200만 엔의 손해 배상 등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16년 1월 20일 도쿄 지법은 "공익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논평의 범위 내이며, 위법성은 없다", "사회자의 말에 짧게 코멘트한 것에 불과하며, 교수의 사회적 평가는 저하시키지만, 논평에 해당하므로 배상 책임은 지지 않는다"라며 청구를 기각했다.[44][45][46] 같은 해 12월 도쿄 고등법원도 "'일본군이 여성을 성 노예로 삼았다'라는 사실은 날조다"라는 발언으로 이해할 수도 충분히 있다"라며 기각했다.[46] 2017년 6월 29일, 최고 재판소의 상고 기각 결정으로, 도쿄 고등법원 판결이 확정되어, 사쿠라우치의 패소로 결론났다.[47]
6. 저작
- 요시미 요시아키, 毒ガス戦と日本軍일본어 (이와나미 쇼텐, 2004년)[1]
- Comfort Women: Sexual Slavery in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World War II|위안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성 노예영어 (컬럼비아 대학교 출판부, 2000년)[2]
- 요시미 요시아키, 마쓰노 세이야 공저, 毒ガス戦関係資料 II일본어 (해설, 호칸 2,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후니 슛판칸, 1997년)[3]
- 요시미 요시아키, 아와야 겐타로 공저, 毒ガス戦関係資料일본어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18, 후지 슛판, 1989년)[4]
6. 1. 단독 저서
- 《독가스전과 일본군》 (이와나미 쇼텐, 2004년)
- Comfort Women: Sexual Slavery in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World War II|위안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성 노예영어 (컬럼비아 대학교 출판부, 2000년)
- 요시미 요시아키, 마쓰노 세이야 공저, 《독가스전 관계 자료 II》 (해설, 호칸 2,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후니 슛판칸, 1997년)
- 요시미 요시아키, 아와야 겐타로 공저, 《독가스전 관계 자료》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18, 후지 슛판, 1989년)
- 《새로운 세계사(7) 풀뿌리 파시즘》 (도쿄 대학 출판회, 1987년)
- 《종군 위안부》 (이와나미 쇼텐 이와나미 신서, 1995년)
6. 2. 공저
- 이와나미 서점 ''독가스전과 일본군''(毒ガス戦と日本軍), 2004년
- 요시미 요시아키, 마츠노 세이야 공저, ''독가스전 관계 자료 II''(毒ガス戦関係資料 II), 해설, 호칸 2,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후니 슛판칸, 1997년
- 요시미 요시아키, 아와야 켄타로 공저, ''독가스전 관계 자료''(毒ガス戦関係資料),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18, 후지 슛판, 1989년
- 신미 아키라 저, 『필리핀 전선 도피행 - 증언 쇼와사의 단면』(이와나미 쇼텐 이와나미 북클릿, 1993년)
- 이카 슌야 저, 『731부대와 천황·육군 중앙』(이와나미 쇼텐 이와나미 북클릿, 1995년)
- 하야시 히로시 저, 『공동 연구 일본군 위안부』(오쓰키 서점, 1995년)
- 가와다 아야코 저, 『"종군 위안부"를 둘러싼 30가지 거짓과 진실』(오쓰키 서점, 1997년)
- 가사하라 도쿠시・요시다 유 편, 『현대 역사학과 난징 사건』(하쿠쇼보, 2006년)
6. 3. 편찬 사료
- 《독가스전과 일본군》(毒ガス戦と日本軍), 이와나미 쇼텐, 2004년
- 요시미 요시아키, Y. Yoshimi영어, S. O'Brien영어, 《위안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성 노예》, 컬럼비아 대학교 출판부, 2000년
- 요시미 요시아키, 마츠노 세이야, 《독가스전 관계 자료 II》(毒ガス戦関係資料 II), 해설, 호칸 2,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후니 슛판칸, 1997년
- 요시미 요시아키, 아와야 켄타로, 《독가스전 관계 자료》(毒ガス戦関係資料), 쥬고넨 센소 고쿠히 시료슈, 18, 후지 출판, 1989년
- 《자료 일본 현대사 (4) 익찬 선거 1》(오오츠키 서점, 1981년)
- 《자료 일본 현대사 (5) 익찬 선거 2》(오오츠키 서점, 1981년)
- 《자료 일본 현대사 (10) 중일 전쟁 시기의 국민 동원 1》(오오츠키 서점, 1984년)
- 《자료 일본 현대사 (11) 중일 전쟁 시기의 국민 동원 2》(오오츠키 서점, 1984년)
- 《15년 전쟁 극비 자료집 제18집 독가스전 관계 자료》(후지 출판, 1989년)
- 《종군 위안부 자료집》(오오츠키 서점, 1992년)
- 《15년 전쟁 극비 자료집 보권 2 독가스전 관계 자료 2》(후지 출판,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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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歴史教科書への疑問
展転社
[36]
뉴스
「軍、慰安所に到着した女性をチェック…日本 国家の責任は避けられない」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新聞
2014-06-26
[37]
서적
日本軍「慰安婦」制度とは何か
岩波ブックレット
[38]
뉴스
“군, 위안소 도착한 여성 체크…일 국가책임 피할 수 없어”
ハンギョレ新聞
2014-06-25
[39]
서적
日本軍「慰安婦」制度とは何か
岩波ブックレット
2010
[40]
웹사이트
日本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声明
http://space.geociti[...]
2013-06-09
[41]
웹사이트
Q&A 0-9 特殊慰安施設協会は米軍の国営だった?
http://fightforjusti[...]
[42]
뉴스
In Japan, a Historian Stands by Proof of Wartime Sex Slavery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
2007-03-31
[43]
블로그
吉見義明氏の偽造する歴史
http://ikedanobuo.li[...]
2013-06-04
[44]
뉴스
「慰安婦=性奴隷説は捏造」発言の桜内前議員、吉見教授に勝訴(1/2ページ)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6-01-20
[45]
뉴스
吉見教授の請求を棄却 桜内前議員の発言めぐる訴訟
http://www.asahi.com[...]
朝日新聞デジタル
2016-01-21
[46]
뉴스
吉見教授の控訴棄却 桜内元議員の発言めぐり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21-11-01
[47]
뉴스
慰安婦著書「捏造」 著者の中央大名誉教授の敗訴確定
産経新聞
2017-07-03
[48]
뉴스
“군, 위안소 도착한 여성 체크…일 국가책임 피할 수 없어”
ハンギョレ新聞
2014-06-25
[49]
뉴스
「日本の慰安婦制度は特異」 歴史学者が橋下氏批判
http://www.47news.jp[...]
47NEWS
2013-06-04
[50]
뉴스
和田春樹教授、徐京植教授の公開書簡に答える(上)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新聞
2016-03-26
[51]
웹인용
'위안부 문제' 외길 20년, 日 요시미 교수를 만나다
http://news.mt.co.kr[...]
머니투데이
201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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