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쓰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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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다 쓰네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07년에 태어나 1977년에 사망했다.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장성 관료로 시작하여, 경제안정본부 국장 등을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자유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후생상, 경제기획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76년에는 자민당 간사장을 맡았으나, 당내 분열을 겪은 후 선거 패배로 인해 사임했다. 온건한 성품으로 당내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1977년 현직 의원 중 사망하여 훈1등 욱일대수장과 정3위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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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쓰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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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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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우치다 쓰네오 |
원어명 | 内田 常雄 |
로마자 표기 | Uchida Tsuneo |
출생 | 1907년 6월 30일 |
출생지 | 일본 야마나시현 고후시 |
사망 | 1977년 12월 29일 |
학력 | 도쿄대학 경제학부 |
직업 | 국가공무원 (대장성) |
소속 정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오히라파) |
배우자 | 우치다 에치노 (고우다 아키라의 장녀) |
칭호/훈장 | 정3위, 훈1등욱일대수장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
중의원 의원 | 야마나시현 전현구 |
당선 횟수 | 9회 |
임기 시작 | 1952년 10월 2일 - 1953년 3월 14일, 1955년 2월 28일 |
임기 종료 | 1977년 12월 29일 |
경제기획청 장관 | 제24대 |
내각 |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 1973년 11월 25일 |
임기 종료 | 1974년 11월 11일 |
후생대신 | 제47대 |
내각 | 제3차 사토 내각 |
임기 시작 | 1970년 1월 14일 |
임기 종료 | 1971년 7월 5일 |
주요 당직 |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제18대 |
총재 | 미키 다케오 |
임기 시작 | 1976년 9월 |
임기 종료 | 1976년 12월 |
자유민주당 세제조사회 회장 | 제8, 13대 |
총재 | 사토 에이사쿠 |
임기 시작 | 1966년 9월 - 1967년 3월, 1972년 7월 |
임기 종료 | 1973년 12월 |
2. 생애
1907년 6월 30일에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대장성 관재국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전후에 경제안정본부 재정금융국장, 관재국장 등을 거쳐 1952년 총선에 자유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돼 정치인이 되었다. 1955년 보수합동 이후 자유민주당 소속이 되었으며 파벌은 굉지회였다.[2]
1970년 1월 제3차 사토 내각에서 후생상으로 처음 입각하여 1년 6개월을 재임했다가 1973년 11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1년 동안 경제기획청 장관을 역임했다. 1976년 9월 자민당 내에서 미키 끌어내리기가 한창일 때 우치다는 자민당 정조회장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마쓰노 라이조가 간사장 후보로 내정되면서 잡음이 생겼다. 마쓰노는 반주류파인 후쿠다파에 속했지만 당시 후쿠다와는 거리를 두고 미키에 접근하고 있었기에 반주류파는 마쓰노의 간사장 취임에 반대했고 결국 마쓰노는 총무회장이 되고 대신 우치다가 간사장이 되었다(정조회장엔 사쿠라우치 요시오가 취임했다).[4]
그런데 당무 경력이 거의 없던 우치다는 갑자기 집행부를 대표하는 간사장 지명에 굉장히 당혹해했다. 언론도 우치다의 간사장 취임을 예상외의 인사로 표현했다. 더욱이 미키 끌어내리기가 한창이었기에 미키파와 반미키파의 대립이 굉장히 격렬했다. 우치다 본인이 반주류파인 오히라파에 속해 있는 상황 속에서 미키파와 반미키파의 대립을 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우치다는 간사장직을 거절하고자 했으나 설득에 못 이겨 받아들이고 말았다. 취임 기자회견 때 "길을 걷다가 맨홀에 빠진 기분이다"라고 본심을 말했다가 맨홀 간사장이라는 조롱도 받았다.
간사장이 된 우치다는 당내 분열을 막기 위해 미키의 원만한 퇴진을 모색하고자 사무국에 당칙과 의원총회규칙 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중의원 해산 없이 임기 만료 총선을 치른 뒤에 미키가 물러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기에 1976년 12월에 치러진 총선은 자민당이 사실상 분열된 상태에서 진행됐고 그 결과 의석수도 크게 줄었다. 자민당이 분당될 수 있는 최악의 위기는 넘겼지만 미키는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임했고 우치다를 포함한 자유민주당 집행부도 모두 퇴진했다.
1977년 12월 29일에 현직 의원인 채 사망했다. 향년 70세. 추도 연설은 같은 지역구인 일본사회당의 스즈키 쓰요시가 맡았으며 사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증되고 정3위에 추서됐다.[5],[6] 원래 생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받을 예정이었으나 우치다가 "오늘의 내가 있는 건 지원자 분들 덕분이다. 나 혼자서 훈장을 받아도 지원자 분들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라며 거절했었는데 사후에나마 추증된 것이다.[7]
우치다의 지지 기반은 호리우치 미쓰오가 물려받았다. 우치다가 출마한 마지막 총선인 1976년 선거에서 호리우치는 처음 당선되었는데 이때 자민당 무파벌로 있다가 우치다 사후 굉지회에 들어가 그의 지지 기반을 물려받았다.
2. 1. 정계 입문
1907년 6월 30일에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대장성 관재국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전후에 경제안정본부 재정금융국장, 관재국장 등을 거쳐 1952년 총선에 자유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돼 정치인이 되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자민당 소속이 되었으며, 굉지회(이케다 하야토 → 마에오 시게사부로 → 오히라 마사요시 파)에 소속되었다.2. 2. 주요 정치 경력
우치다 쓰네오는 1970년 1월 제3차 사토 내각에서 후생대신으로 첫 입각하여 1년 6개월 동안 재임했다. 1973년 11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을 역임하며, 약 1년 동안 경제 정책을 총괄했다. 1976년 9월, 자민당 내 '미키 끌어내리기' 정국에서 정조회장으로 내정되었으나, 마쓰노 라이조 간사장 내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우치다가 간사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길을 걷다가 맨홀에 빠진 기분이다"라는 취임 소감으로 '맨홀 간사장'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간사장이 된 우치다는 당내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1976년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자민당이 의석수를 크게 잃으면서,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미키 총리와 함께 퇴진했다.
2. 3. 사망
1977년 12월 29일, 현직 일본 중의원 의원인 채로 사망했다. 향년 70세. 사후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증되고 정3위에 추서됐다. 원래 생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받을 예정이었으나 "오늘의 내가 있는 건 지원자 분들 덕분이다. 나 혼자서 훈장을 받아도 지원자 분들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라며 거절했었는데 사후에나마 추증된 것이다.추도 연설은 같은 지역구인 일본사회당의 스즈키 쓰요시가 맡았다. 우치다의 지지 기반은 호리우치 미쓰오가 물려받았다. 우치다가 출마한 마지막 총선인 1976년 선거에서 호리우치는 처음 당선되었는데 이때 자민당 무파벌로 있다가 우치다 사후 굉지회에 들어가 그의 지지 기반을 계승했다.
3. 평가
우치다 쓰네오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당내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특히 1976년 '미키 내리기' 당시, 자유민주당 내 격렬한 파벌 갈등 속에서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4][5][6][7]
1976년 9월, 당내 항쟁 "미키 내리기" 와중에, 당 임원 개편에서 정무조사회장으로 내정되었으나, 간사장 후보로 제시된 마쓰노 라이조가 반주류파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 우치다가 횡류하여 간사장에 취임한다.[4] 우치다는 당무 경력이 부족하여, 간사장 자리에 지명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간사장이 되면 집행부 대표로서 스스로 속한 반주류파인 오히라 파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취임에 대해 강하게 난색을 표했다. 결국 설득에 의해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취임 기자 회견에서 "길을 걷다가 맨홀에 떨어진 기분이다"라고 무심코 심경을 토로하여, "'''맨홀 간사장'''"이라고 조롱받았다.
간사장이 된 우치다는 당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간사장으로서 미키의 원만 퇴진을 모색, 사무국과 당칙 및 의원 총회 규칙 등을 연구했다. 결국, 차기 총선거 후의 협의에 의한 신 총재 선출이라는 방침으로 당내를 통일했다.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록히드 선거)를 간사장으로서 주관했지만 분열 선거에 시달려 의석을 줄였기 때문에 미키는 퇴진, 함께 집행부에서 물러났다. 최종적으로, 자민당의 분열이라는 사태는 회피되었다.
4.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선거일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2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당 | 44,297표 | 12.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3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당 | 38,314표 | 10.7% | 6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5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당 | 41,741표 | 11.6%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8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45,431표 | 11.7%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0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59,522표 | 15.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3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70,824표 | 18.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7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5,635표 | 16%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9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83,607표 | 20.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2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6,213표 | 17.6%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6년 |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1,489표 | 12.9%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4. 1.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야마나시현 전현구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44,297표(12.4%)를 얻어 3위로 당선되었다.4. 2.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53년에 실시된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야마나시현 전현구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38,314표(10.7%)를 얻어 6위로 낙선하였다.4. 3. 1955년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55년에 실시된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41,741표(득표율 11.6%)를 얻어 5위로 당선되었다.4. 4.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58년에 실시된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45,431표(11.7%)를 득표, 5위로 당선되었다.4. 5. 1960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60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59,522표(15.4%)를 얻어 3위로 당선되었다.4. 6.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63년에 실시된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70,824표(18.1%)를 얻어 2위로 당선되었다.4. 7. 1967년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67년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서 출마하여 65,635표(득표율 16%)를 얻어 4위로 당선되었다.4. 8.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83,607표(20.8%)를 얻어 1위로 당선되었다.4. 9. 1972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72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서 출마하여 66,213표(17.6%)를 득표, 2위로 당선되었다.4. 10. 1976년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우치다 쓰네오는 1976년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61,489표(12.9%)를 획득, 5위로 당선되었다.참조
[1]
서적
人事興信録 第25版 上
人事興信所
1969
[2]
서적
旧制高等学校物語 第12
財界評論社
1967
[3]
서적
日本官僚制総合事典
東京大学出版会
2001-11
[4]
문서
[5]
회의록
衆議院会議録情報 第084回国会 本会議 第7号
https://kokkai.ndl.g[...]
[6]
간행물
官報 第15302号
1978-01-18
[7]
서적
回想 内田常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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