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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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병은 외적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간 군대를 의미하며, 조선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에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정부군의 무력화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일본군에 저항했으며, 병자호란 때도 청나라에 맞서 싸웠지만 그 규모는 임진왜란에 비해 미미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이 일어났으며, 13도 창의군이 조직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동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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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의병 |
한자 표기 | 義兵 |
로마자 표기 | Uibyeong |
다른 로마자 표기 | Ŭibyŏng |
설명 | |
설명 | 한국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비정규 민간 군사 조직 |
역사적 배경 | |
활동 시기 | 다양한 외세 침입 시기 |
주요 활동 | |
활동 | 외세에 대한 저항 활동 수행 |
참고 자료 | |
ISBN | 9788992920162 8942815596 8957010521 895701053X |
2. 조선시대 이전의 의병
조선시대 이전에도 외적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다만, 대체적으로 조선시대 이전에는 의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조선 이전에는 개인이 지배하는 사병이 존재하였고 때로는 사병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활동하기도 하는 등 관군과 비관군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외세에 맞서 싸웠다.
고려 시대 삼별초는 고려가 항복하기 이전에는 최우의 사병 집단이었으며, 대몽항쟁에서 유명한 김윤후가 살리타를 무찌를 때 그의 신분은 승려였고 그가 이끈 군대는 노비가 주축이 된 민병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민병들을 의병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3. 조선시대의 의병
임진왜란(1592~1598) 때, 의병은 농민을 주축으로 전직 관료, 사림, 승려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유교의 충의 정신과 향촌 공동체의 전통을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향토 지리에 밝고 유격 전술에 능숙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했다. 일본군은 조선 백성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고, 의병들의 활약으로 보급에 큰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자발적인 저항은 일본의 침략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1]
의병장들은 대부분 지방 출신의 전직 관리였으며, 유교적 도덕 실천과 일본의 만행에 대한 민족적 분노를 바탕으로 의병을 이끌었다. 이들은 지역 주민과 친족을 보호하고,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백성들은 정부군보다 의병에 참여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조정에서도 의병을 인정하고 독려했다.
병자호란(1636~1637) 때에도 의병이 조직되어 청나라 군에 저항했으나, 임진왜란 때에 비해 그 활동은 미약했다.
3. 1. 임진왜란 시기 의병의 활동
임진왜란 초기, 정부군의 조직적 저항이 와해된 상황에서 의병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0] 의병은 농민이 주축이었으나, 전직 관료, 사림, 승려들이 의병을 조직하고 지도했다. 이들은 유교의 충의 정신을 바탕으로 향촌 공동체의 전통을 활용하여 의병 부대를 쉽게 조직할 수 있었다.[11]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그에 맞는 무기와 전술을 활용했다. 특히 매복, 기습, 위장 등 유격 전술을 통해 적은 병력으로도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다음은 주요 의병장과 활동 지역이다.
의병장 | 활동 지역 |
---|---|
조호익, 양덕록, 서산대사 | 평안도 |
정문부 | 함경도 |
이정암 | 황해도 |
사명당 | 강원도 |
김천일, 심대, 홍계남 | 경기도 |
조헌 | 충청도 |
곽재우 | 경상도 의령 |
김면 | 경상도 고령 |
정인홍 | 경상도 합천 |
권응수 | 경상도 영천 |
고경명, 김덕령 | 전라도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은 각 지방의 사회 상층부이자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중소 지주로서 농민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은 이들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였다.[2]
백성들은 명망 높고 신뢰할 수 있는 의병장 휘하에서 싸우기를 원했으며, 의병 참여가 가족을 보호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조정에서도 의병을 공인하고 독려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참여가 이어졌다.[2]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의병 부대는 관군에 편입되어 전투 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3. 2. 병자호란 시기 의병의 활동
병자호란 시기에도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청나라군의 주요 침공로를 중심으로 크게 저항하였다.[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는 정규군의 패배로 인해 발생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의병은 국왕을 지키기 위한 근왕병이었다.[3]호란 시기 의병은 침략 지역뿐만 아니라 후방 지역에서도 일찍 일어났다. 침략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적과 직접 싸워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고, 후방 지역에서의 활동은 모집된 의병을 한 곳에 모아 전장으로 가서 정부군의 약한 전력을 보강하는 것이었다.[3]
그러나 전반적으로 호란 시기 의병의 활동은 임진왜란 시기 의병의 활동에 비해 매우 미약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혼란, 경제적 붕괴,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어 왕조를 중심으로 정부와 백성 사이에 통합된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3]
실제로 침략 당시 의병은 적이 침략한 지역에서 큰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호남과 영남 후방 지역에서 소규모 활동이 있었지만, 인조가 북쪽 전장으로 향하는 중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해산되었다.[3]
예를 들어, 연안현에서는 광산 김씨를 중심으로 연안현의 선비들이 향교에서 활동했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연안현의 선비들은 의병청(義兵廳)을 중심으로 임무에 따라 의병을 조직하고 분담했으며, 대부분 군사 동원보다는 군수품 조달에 집중했다. 따라서 실제 군사 활동은 거의 없이 지원군이 증강되면서 의병은 해산되었다.[3]
4.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대한제국 시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민병들이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결국 국권 회복에는 실패하고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거나 해산되었다.[12]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독립군과 광복군에 참여하여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13]
대한제국 시기 의병은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 이후의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대표적이다. 1907년과 1910년 사이의 의병 투쟁은 매우 격렬하여, 일본 측 공식 통계로도 봉기 15만여 명, 충돌 2,851회, 의병 사상자 5만 3천여 명(사망 1만 6,700명, 부상 3만 6,770명)이 발생했다.
당시 의병 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은 전남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일본인 지주가 의병 활동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1909년 일제는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을 벌여 국내 의병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의병들은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으로 성장하였다.[17]
이 시기 유명한 의병 활동가로는 홍범도, 김상한, 신돌석, 안중근 등이 있다.
말기 대한제국 시대 한국 민족주의는 동학 운동을 넘어섰고,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탄압 정책에 따라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일본군은 소총, 대포,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밀고자와 범죄자 계급을 이용했다. 반면, 한국 의병들은 낡은 화승총, 몽둥이, 쇠막대기 등으로 싸웠으며, 현대식 무기는 거의 없었다.
1905년 이후 13년 동안 의병들은 일본 경찰, 군대, 일본 상인들과 교전을 벌였다. 일본 기록인 ''보토 토바츠시''(의병 토벌사)에 따르면, 1907년 10월부터 1908년 4월 사이에 한국인들은 1,908건 이상의 공격을 감행했다.
의병들은 대부분 낡은 무기나 맨손으로 싸웠지만, 일부 국제 무기상들이 이익을 위해 의병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기도 했다.
4. 1. 을미의병 (1895)
1895년 의병은 흔히 을미의병이라 하며 지방의 명망있는 유생을 중심으로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하여 일어났다.[14]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일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퇴조하자 을미의병은 대부분 해산하였다.[14]1895년, 일청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고, 대한제국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왕비인 민비가 살해당한 을미사변과 그 후 12월에 단발령이 반포되자, 같은 해 연말부터 의병이 발생하였다. 1895년이 간지로 을미년이었기 때문에, '''을미의병'''이라고 한다. 충청북도의 유학자 유인석과 경기도의 이춘영, 그리고 전 동학당이었던 경상북도의 이강년 등이 의병을 일으켜 각지에서 일본군과 친일파 정부군 등과 싸웠다. 이듬해 3월경에는 의병의 활동이 조선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나, 그 이전 2월에 정변(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일파의 실각이 잇따랐기 때문에 의병은 명분을 잃고 해체되어 갔다. 10월에는 끝까지 저항하던 유인석과 이강년도 만주로 망명하였다(이후 특사로 귀국). 이로써 을미의병은 종식되었다.
주요 의병장은 다음과 같다.[14]
4. 2. 을사의병 (1905)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이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를 을사의병이라 한다. 이 시기 의병은 초기에는 최익현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이 주도하였으나, 곧 투쟁 대열에서 탈락하였다. 최익현은 관군이 진압하자 국왕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는 봉건 윤리에 따라 스스로 투항하였고, 이후 무명의 유생과 농민이 의병의 주축이 되었다.[14]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국가 존립 위기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1905년 봄부터 양반과 유생 사이에서 의병 재건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05년 8월 강원도의 원용팔이 거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되어 한국이 보호국화되자 국내는 혼란에 휩싸였고, 전직 정부 고관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었다. 1906년 5월 충청남도 홍성에서 민종식이, 그 다음 달 전라북도에서 최익현이 거병하자, 경상도에서는 유인석, 충청도에서는 신돌석 등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사회적 불안을 겪던 민중들도 가담하면서 대규모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신돌석은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최대 3000명이 넘는 의병을 모아 활약하며 의병 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군사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패퇴하면서 일단 의병 운동은 진압되었다.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되었고, 단식 끝에 1906년 순국하였다. 무학의 농민 출신인 신돌석은 3,000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하였다. 그의 부대에는 전직 관군, 빈농, 어부, 사냥꾼, 광부, 상인,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요 의병장은 다음과 같다.
4. 3. 정미의병 (1907)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 시기 의병은 을미의병의 위정척사 명분보다는 공평한 토지 분배와 같은 봉건 수탈 해소를 요구했다.[15] 당시 의병장으로는 홍범도, 차도선, 김수민, 민긍호 등이 있었다.1907년부터 1910년 사이의 의병 투쟁은 매우 격렬하여 일본 측 공식 통계로도 봉기 15만여 명, 충돌 2,851회, 의병 사상자 5만 3천여 명(사망 1만 6,700명, 부상 3만 6,770명)이 발생했다.[16]
1907년 7월,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군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불복한 한국군 부대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1907년 말, 유학자 이인영은 각지의 의병들을 모아 경기도 양주시에 1만 명의 병력(그중 구 한국군 출신이 3,000명)을 집결시키고, 의병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13도창의군을 결성했다. 같은 해 12월, 허위를 사령관으로 하여 서울 탈환을 목표로 서울로 진격하였다.[5][6] 동대문에서 일본군에 의해 격파되었지만, 이 소식은 각지의 의병 세력을 고무하여 1909년까지 각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이 이어졌다.
4. 4. 13도 창의군 (1908)
1907년 말 유학자 이인영이 각지에서 싸우던 의병들을 규합하여 경기도 양주에 1만 명의 병력(그중 구 한국군 출신이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을 모아 그를 의병 총대장으로 하는, 한국 13도를 모두 결집한 의병군이라는 의미의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다.[5][6] 같은 해 12월 허위(호: 망산)를 사령관으로 하여 서울 탈환을 목표로 서울로 진격하였다.[5]13도 창의군은 전국 의병 연합 부대로,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의병들은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1907년, 이인영의 지휘 아래 의병 1만 명이 서울을 해방하고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집결하였다. 서울에서 12km까지 접근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군함의 지원을 받는 2만 명의 일본군 2개 사단을 의병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의병은 서울에서 후퇴하였고, 이후 2년 간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1만 7천 명 이상의 의병이 전사하였고, 3만 7천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던 의병들은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중국, 시베리아, 백두산에서 항일 전쟁을 계속하였다.
13도 창의군의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5. 일제강점기 의병 활동과 독립 투쟁
1907년 7월,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다. 이에 불복한 한국군 부대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매켄지[4]가 촬영한 사진에는 다양한 무기를 소지하고 지휘관 없이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의병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07년 말, 유학자 이인영은 각지의 의병들을 모아 경기도 양주시에서 1만 명 규모의 "십삼도창의군"을 결성했다. 이 중 3,000명은 구 한국군 출신이었다. 12월, 허위(호: 망산)[5]을 사령관으로 하여 서울 탈환을 목표로 진격했으나,[5][6] 동대문에서 일본군에 패배했다. 하지만 이 소식은 각지의 의병들을 고무시켜 1908년 제2차 서울 탈환 작전 등 1909년까지 일본군과의 교전이 이어졌다.
한국주둔군 사령관 장월정은 "남한 토벌 대작전"을 통해 초토화 및 포위 작전으로 의병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의병 측 사망자는 1만 7천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일부 의병들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도 저항을 계속했으나, 1914년경 진압되었다. 생존한 의병들은 만주(간도 등)나 연해주로 망명하여 한국 독립 운동을 이어갔다.
참조
[1]
웹사이트
문화재청-흐트러진 마음을 가담고 각궁으로 활을 쏘다
https://www.cha.go.k[...]
[2]
웹사이트
righteous army 의병-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3]
웹사이트
righteous army 의병-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4]
웹사이트
Frederick Arthur McKenzie(英語)
:en:Frederick Arthur[...]
[5]
뉴스
서대문형무소 사형 제1호의 의병장 「왕산·허위」 EBS가 특집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6]
문서
天安市 외곽에 있는 독립기념관에는 「13도창의군 서울진격작전」의 대디오라마가 있다. 당초 진격계획 루트상의 동대문~청량리 구간은 현재 「왕산로」라고 불리고 있다.
[7]
서적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8]
서적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9]
서적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 2
중명출판사
[10]
뉴스
형제의병장 마을 쌍의사에 가보셨나요? - 진주 공방전에 참전한 형제 의병장을 기리는 쌍의사 관련 기사.
http://www.korea.kr/[...]
[11]
웹사이트
임진왜란 - 수군과 의병의 항쟁
[12]
서적
앞의 책
[13]
서적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4]
서적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5]
서적
앞의 책
[16]
서적
조선통감부연구 2
국학자료원
[17]
서적
한국사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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