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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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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응은 조선 장조의 서자 은전군 이찬의 양 손자이자, 경창군 이주의 8대손인 이도식의 아들로, 풍계군 이당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836년에 태어나 1860년 철종의 명으로 이당의 양자가 되었으며, 완평도정에 봉해진 후 완평군으로 진봉되었다. 고종 시대에 음직으로 참판을 지냈고,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이름이 승응으로 개명되었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는 궁내부 특진관, 홍릉제조, 판돈녕원사 등을 역임하며 황실 관련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09년 사망 후 효헌의 시호를 받았으며, 경기도 안산시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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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승응
작위완평군
초명이병
신덕
시호효헌
출생일1836년 7월 21일
사망일1909년 10월 3일 (74세)
사망 장소한성부 (지병)
묘소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67번지
가문
씨족전주 이씨
가족 관계
양아버지풍계군 이당
생부이도식
양할아버지은전군 이찬
양고조부영조
법적 삼종조부은신군 이진
법적 5촌 종숙전계대원군 이광
법적 족제이낙응
자녀안양군 이재근(장남)
칙임관 이재현(차남)
의양군 이재각(3남)
예양정 이재규(4남)

2. 생애

이승응은 선조의 아홉 번째 서자 경창군 이주의 8대손이자 하계군 이구의 6대손인 참판 이도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당의 양자였던 이세보가 안동 김씨 세도를 비판하다 처벌받고 유배되자, 1860년 11월 철종의 명으로 이당의 양자로 간택되었다. 같은 해 완평도정에 임명되었고, 2개월 후 완평군으로 승진했다. 이후 조선 왕실의 일원으로서 왕실 행사에 참여했으며, 왕실 연장자로서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1868년 3월 6일,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덕흥대원군 자손들의 이름 행렬자를 통일하면서, 이름을 병(昺)에서 승응(昇應)으로 고쳤다.

사망 후 유해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67번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활동

李昇應중국어은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자이자 다섯째 아들인 은전군 이찬의 양손자이며, 양아버지는 풍계군 이당이다. 생부는 선조의 9남 경창군 이주의 8대손이자 하계군 이거의 6대손인 참판의정부영의정 이도식이며, 생모는 여흥 이씨로 이치한의 딸이다.

1836년(헌종 2) 이도식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1860년(철종 11) 11월 경평군 이세보가 파양, 유배되면서 풍계군 이당의 양자로 지명되어 완평도정(完平都正)에 봉해졌다. 1861년 1월 8일 완평군(完平君)으로 진봉되고 소의대부가 되었다. 2월 22일 선원보략찬수감인교관(璿源譜略纂修監印校正官), 3월 4일9월 5일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 12월 23일 승헌대부, 1862년(철종 13) 1월 12일 숭헌대부, 3월 14일 가덕대부, 5월 2일 사옹원 제조, 12월 5일 인의 인헌관 등을 지냈다.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8일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고, 수릉관(守陵官)에 제수되었다.

고종 즉위 초 연간에 음직으로 참판을 지냈다. 그는 선조의 아홉 번째 서자 경창군 이주(李珘)의 8대손이자 하계군 이구(李椐)의 6대손인 참판 이도식의 아들이다. 이당의 양자였던 이세보가 안동 김씨 세도가를 비판하다가 처벌받아 강제 이혼당하고 유배되자 1860년 11월, 철종의 명으로 이당의 양자로 간택되었다. 같은 해 11월, 이당의 양자 자격으로 완평도정에 임명되었고, 2개월 후 완평군으로 승진했다. 이후 여러 조선 왕실 행사에 왕실의 일원으로서 참여했으며, 비교적 조선 왕실의 연장자로서 왕실 행사를 주관했다.

1868년 3월 6일,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의 이름에 행렬자를 통일하도록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명령으로, 그의 이름을 병(昺)으로 승응(昇應)으로 개명했다.

2. 2. 관료 생활

1866년(고종 3) 5월 9일 판의금(判義禁)에 임명되었고, 6월 7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 9월 판종정경(判宗正卿), 지종정경(知宗正卿)을 거쳐 12월 21일 다시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867년(고종 4) 1월 11일 지종경(知宗卿)으로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묘소에 봉심하였다. 2월 15일 사옹제조(司甕提調), 8월 11일 도총관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3월 6일 명(名)을 병(昺)에서 승응(昇應)으로 개명하였고, 7월 5일 종묘·영녕전 추향대제(宗廟·永寧殿 秋享大祭) 때 인의인헌관(引儀引獻官)으로 봉무하였다.

1869년(고종 6)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고, 1872년(고종 9) 12월 25일 옥보 전문 서사관을 거쳐 1874년(고종 11) 2월 14일 왕대비에게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리고, 백관가(百官加)를 친수(親授)하였다. 5월 6일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정사(陳賀正使)로 베이징에 다녀왔다.

1875년(고종 12) 2월 23일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 겸 사은정사(陳賀兼謝恩正使)로 베이징을 다녀왔다. 1896년 1월 24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김세균(金世均)을 대신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1878년 수릉관(守陵官)이 되었고, 1882년 6월 11일 종척 집사(宗戚執事)가 되고, 수릉관(守陵官), 재궁상자서사관(梓宮上字書寫官)에 제수되었다.

1890년 4월 17일 종척 집사(宗戚執事)가 되고, 1892년 9월 24일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외진찬(外進饌)을 행할 때 여덟 번째 잔을 올렸다. 9월 25일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내진찬(內進饌)을 행할 때 종친의 반수로 여섯 번째 잔을 올렸다. 1893년 9월 13일 진찬(進饌) 때에 술잔을 올릴 재신(宰臣)으로 낙점되고, 계조당(繼照堂) 진찬(進饌) 때에도 낙점되었다. 10월 5일 근정전(勤政殿)에서 외진찬(外進饌)에 행할 때 여덟 번째 잔을 올렸다. 11월 8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894년(고종 31) 7월 21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었고, 1895년 10월 15일 종척 집사(宗戚執事)가 되었다.

2. 3. 대한제국기 활동

1896년(고종 33, 대한 건양 1) 1월 16일 혼전(魂殿)의 향관(享官)이 되고, 8월 30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되고, 산릉 수릉관(山陵守陵官)으로 삼았다.[1]

1898년(광무 2) 10월 5일 홍릉제조(洪陵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1] 11월 28일 영릉헌관(英陵獻官)으로 봉무하였다.[1] 1899년(광무 3) 8월 25일 추숭도감(追崇都監)과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 서사관에 임명되었고, 12월 13일 신정왕후의 금보전문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임명되었고, 12월 26일 황제의 옥보전문 서사관에 임명되었다.[1]

1900년(광무 4) 7월 23일 목릉에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였고, 8월 4일 헌릉(獻陵)에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였다.[1]

1901년(광무 5) 1월 21일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1] 1월 26일 홍릉제조(洪陵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1] 9월 8일 중화전(中和殿)에서 외진연(外進宴)을 할 때 다섯 번째 술잔을 올렸다.[1] 9월 9일 함녕전(咸寧殿)에서 내진연(內進宴)을 할 때 종친의 반수로 일곱 번째 술잔을 올렸다.[1] 9월 11일 내진연 때 술잔을 올린 것에 대한 포상으로 내하 대표피(內下大豹皮) 1영(令)을 하사받았다.[1] 10월 4일 책비시정사(冊妃時正使)로 임명되었고, 12월 26일 명헌태후 옥보 전문 서사관에 임명되었다.[1]

2. 4. 생애 후반

1902년 5월 30일 함녕전(咸寧殿)에서 외진연(外進宴)을 행할 때 다섯 번째 술잔을 올렸다. 같은 해 5월 31일 함녕전에서 내진연(內進宴)을 행할 때 종친의 반수(班首)로 여덟 번째 잔을 올렸다. 같은 해 12월 3일 중화전(中和殿)에서 외진연을 행할 때 다섯 번째 잔을 올렸고, 같은 해 12월 7일 관명전(觀明殿)에서 내진연을 행할 때 종친 반수(班首)의 반수로 일곱 번째 잔을 올렸다.

1903년(광무 7) 책황귀비시정사(冊皇貴妃時正使)에 임명되었고, 1904년(광무 8) 1월 3일 하현궁 명정 서사관(下玄宮銘旌書寫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월 18일 재궁(梓宮)위의 상자 서사관(上字書寫官), 같은 해 9월 16일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인 금척장(金尺章)을 받았고, 같은 해 10월 5일 황실제도정리국총재(皇室制度整理局總裁)를 겸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5일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 11월 8일 종정원경(宗正院卿)을 겸임하였다.

1907년(융희 1)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봉(追封) 할 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27일 완왕을 추봉할 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1일 완화군을 완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치제(致祭)를 주관하였다.

1909년(융희 3) 10월 3일 향년 74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선조의 아홉 번째 서자 경창군 이주(李珘)의 8대손이자 하계군 이구(李椐)의 6대손인 참판 이도식의 아들이다. 이세보가 안동 김씨의 세도가를 비판하다가 처벌받아 강제 이혼당하고 유배되자 1860년 11월, 철종의 명으로 이당의 양자로 간택되었다.

1868년 3월 6일,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의 이름에 행렬자를 통일하도록 하면서 그의 이름을 병(昺)에서 승응(昇應)으로 개명했다.

사망 후 그의 유해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67번지에 안장되었다.

3. 사망 이후

1909년(융희 3) 10월 3일 순종은 이승응이 황실의 중요한 친척이며, 평소 나라를 걱정하는 곧은 마음을 가졌기에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이었다고 언급하며,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픔을 표하는 조령(詔令)을 내렸다. 순종은 이승응의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궁내부(宮內府)에서 넉넉하게 지원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시종(侍從)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한, 직접 제문(祭文)을 작성하고, 시호(諡號)는 시장(諡狀)이 올라오기 전에 미리 의논하여 정하도록 지시했다.

시신은 그의 양아버지 풍계군의 묘가 있는 경기도 안산군 군내면 동곡리 동막동 근처인 안산군 군내면 장상리(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 67번지에 매장되었으며, 훗날 그의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었다. 양아버지 풍계군의 묘는 원래 근처 군내면 동곡리 동막동에 있었으나, 후대에 그의 양조부 은전군 내외의 묘소가 있는 과천군 북면 당정리(현, 군포시 당정동)로 옮겨졌다.

1909년 10월 5일 태황제(太皇帝)는 이승응의 장례에 승녕부(承寧府) 시종(侍從)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직접 제문(祭文)을 짓겠다고 하며,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원하라는 조령(詔令)을 내렸다. 이날 慈惠愛親曰孝, 行善可紀曰憲이라 하여 효헌(孝憲)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였다. 이와 함께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 영종정경부사에 추증되었다.

1910년(융희 4) 3월 16일 순종과 고종태황제는 이승응의 면례(緬禮) 때에 각각 예관(禮官)과 시종관(侍從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제문(祭文)은 자신이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고 명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 67번지에 있다. 그의 묘소 위치는 한동안 잊혔다가 2013년 이후 안산시의 안산향토사연구소에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4. 가족 관계

(법적 8촌 삼종형)익평군 이희1824년1863년상계군 이담에게 출계생부이도식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이자 하계군 이거[2]의 6대손생모여흥이씨(驪興李氏)이치한(李治漢)의 딸친동생이낙응부인진주류씨(鎭州柳氏)1832년 9월 27일?류원기(柳遠綺)의 딸장남인양군 이재근1857년 9월 21일1896년 12월 6일며느리연일정씨(延日鄭氏)1859년 11월 3일1890년 10월 13일정해년(鄭海年)의 딸며느리해주오씨(海州吳氏)1872년 5월 7일?첩며느리이름 미상장남 인양군 재근의 첩서손자이헌용1886년 8월 12일?음서로 참봉 역임2남이재현1870년?본가 숙부 종정원경 이낙응에게 출계3남의양군 이재각1874년 2월 18일1935년며느리정부인 유씨(貞夫人 柳氏)1871년 9월 29일?도사 유덕수의 딸며느리이름 미상손자이덕용1923년1952년딸풍천임씨 임헌재(任軒宰)에게 출가소실이름 미상서자예양정 이재규1877년 4월 8일?서자부광산김씨목사 김유현(金有鉉)의 딸


참조

[1] 문서 본래는 친동생
[2] 문서 경창군의 서장남이자 의창군 (이광)의 양자인 창림군(昌臨君)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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