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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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징옥의 난은 1453년(단종 1)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수양대군에 의해 파직된 후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징옥은 김종서 계열로 분류되어 파직되었고, 김종서의 죽음과 수양대군의 부름에 반발하여 종성에서 대금황제를 칭하며 여진족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며, 훗날 이시애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징옥의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으로 평가되며, 단종 복위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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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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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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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일시 | 1453년 음력 3월 |
발생 장소 | 함길도 |
원인 | 계유정난 이후 공신 책봉에 대한 불만, 중앙 정부의 함길도에 대한 차별 대우 |
주요 인물 | 이징옥 이현로 조극관 |
결과 | 진압, 이징옥 등 주동자 처형 |
배경 | |
계유정난 | 계유정난 이후 이징옥은 공신에 책봉되지 못함. |
함길도 차별 | 중앙 정부의 함길도에 대한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됨. |
전개 | |
거병 | 1453년 음력 3월, 이징옥은 길주에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킴. |
세력 확장 | 이징옥은 함흥, 영흥 등 함길도 주요 지역을 장악함. |
관군과의 전투 | 조선 조정은 토벌군을 파견하여 이징옥의 군대와 전투를 벌임. |
진압 | |
이징옥의 죽음 | 이징옥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됨. |
반란 진압 완료 | 이징옥의 죽음 이후 반란은 진압됨. |
영향 | |
함길도에 대한 통제 강화 | 조선 조정은 이징옥의 난 이후 함길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 |
세조의 왕권 강화 | 이징옥의 난 진압을 통해 세조는 왕권을 강화함. |
2. 배경
2. 1. 정치적 배경
2. 2. 사회적 배경
3. 전개 과정
수양대군이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후, 김종서를 도와 육진 개척에 공을 세운 이징옥을 김종서 계열의 인물로 여겨 파직하고 박호문을 후임으로 임명했다.[1]
박호문이 어명을 전했지만, 이징옥은 김종서가 도성에 큰일이 있기 전에는 부르지 않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의심했다. 박호문에게서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하고, 황보인이 효시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징옥은 크게 당황한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 병력과 함께 상경하던 중, 김종서가 죽고 수양대군이 자신을 부르는 것은 죽이려는 의도라고 판단하여 회군했다.
이징옥은 성문을 돌로 막고 숨은 박호문을 화살로 쏴 죽이고, 그의 아들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다. 1453년(단종 1) 10월, 군사를 이끌고 종성(鍾城)에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자칭하며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1]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 각 읍에 후원을 요청했다. 일설에는 이징옥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설도 있다.[1]
채제공은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단종 복위가 목적이며, 단종실록의 내용처럼 대금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1]
그러나 이징옥은 오랫동안 변방에 근무하며 여진족 사회에 명성을 알렸고, 일이 틀어질 경우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다.[1] 하지만 10월 20일 두만강을 건너려 종성(鐘城)에 머물던 중, 종성 판관(判官) 정종(鄭種)과 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의 배신으로 습격을 받아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1]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훗날 이시애의 난을 유발하는 선구가 되었다.[1]
3. 1. 박호문의 부임과 이징옥의 의심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정치와 군국(軍國)의 대권을 한 손에 쥔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도와 육진개척(六鎭開拓)에 공을 세운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 그를 파직하고 박호문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였다.박호문이 어명을 전하자, 이징옥은 자신이 아버지로 따르는 김종서가 도성에 큰일이 있기 전에는 부르지 않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자신이 병조참판으로 제수받은 것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박호문은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참살당하고, 황보인이 효시되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3. 2. 거병과 초기 상황
수양대군이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후, 김종서를 도와 육진 개척에 공을 세운 이징옥을 김종서 계열의 인물로 여겨 파직하고 박호문을 후임으로 임명했다.[1]박호문이 어명을 전했지만, 이징옥은 김종서가 도성에 큰일이 있기 전에는 부르지 않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의심했다. 박호문에게서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하고, 황보인이 효시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징옥은 크게 당황한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 병력과 함께 상경하던 중, 김종서가 죽고 수양대군이 자신을 부르는 것은 죽이려는 의도라고 판단하여 회군했다.
이징옥은 성문을 돌로 막고 숨은 박호문을 화살로 쏴 죽이고, 그의 아들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다. 1453년(단종 1) 10월, 군사를 이끌고 종성(鍾城)에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자칭하며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1]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 각 읍에 후원을 요청했다. 일설에는 이징옥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설도 있다.[1]
채제공은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단종 복위가 목적이며, 단종실록의 내용처럼 대금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1]
3. 3. 진압 과정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도와 육진개척(六鎭開拓)에 공을 세운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 그를 파직하고 박호문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박호문이 어명을 전했으나, 이징옥은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참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김종서가 죽고 수양대군이 자신을 부르는 것은 죽이려는 의도라고 판단, 남쪽으로 가다가 회군하여 박호문을 활로 쏴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1453년(단종 1) 10월, 이징옥은 종성(鍾城)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오국성(五國城)에 도읍을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 각 읍에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일설에는 단종 복위를 꾀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채제공은 이징옥의 거병 목적이 단종 복위에 있었으며, 대금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징옥은 오랫동안 변방에 근무하며 여진족 사회에 명성을 알렸고, 일이 틀어질 경우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다. 하지만 10월 20일 두만강을 건너려 종성(鐘城)에 머물던 중, 종성 판관(判官) 정종(鄭種)과 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의 배신으로 습격을 받아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훗날 이시애의 난을 유발하는 선구가 되었다.
4. 이징옥의 성향과 [[여진족]]과의 관계
이징옥은 오랫동안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군관으로 지내면서 변방 수비와 4군과 6진 개척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자신이 역적으로 몰리고,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자 이에 반발하였다. 이징옥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그의 형제 이징석은 한명회, 홍윤성, 양정 등의 편에 가담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였다.
황제를 칭하고 여진족과의 연합을 꾀했다는 점이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황제를 칭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거병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5. 평가 및 영향
이징옥의 난은 북방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이자,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었다.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하여 후일 이시애 난의 선구가 된 점, 황제를 칭하고 여진족과 연합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일파를 죽이고 집권한 것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된다.
1402년 11월에 발생한 조사의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도 평가된다. 한편 조선 정조 때의 정승 채제공은 후일 자신의 저서 ≪번암집≫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 하였다.
5. 1. 역사적 평가
이징옥의 난은 북방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이자,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었다.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하여 후일 이시애 난의 선구가 된 점, 황제를 칭하고 여진족과 연합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일파를 죽이고 집권한 것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된다.1402년 11월에 발생한 조사의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도 평가된다. 한편 조선 정조 때의 정승 채제공은 후일 자신의 저서 ≪번암집≫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 하였다.
5. 2. 이시애의 난과의 연관성
이징옥의 난은 북방 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차별 대우에 대한 반발이자, 조선 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었다. 이 난은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켜 민심을 자극하여 훗날 이시애의 난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이징옥이 황제를 칭하고 여진족과 연합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이징옥의 난은 세조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집권한 것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된다. 이 난은 1402년 11월에 발생한 조사의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도 평가된다.
한편, 조선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채제공은 자신의 저서 《번암집》에서 이징옥이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접 알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 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고 주장했다.
5.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6. 기타
이징옥은 오랫동안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군관으로 지내면서 변방 수비와 4군과 6진 개척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역적으로 몰리고,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자 이에 반발하게 되었다. 이징옥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그의 형제 이징석은 한명회, 홍윤성, 양정 등의 편에 가담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였다.
황제를 칭하고 여진과의 연합을 꾀했다는 점이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황제를 칭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거병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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