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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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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유정난은 1453년, 조선 단종의 즉위 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이다. 단종의 어린 나이로 인해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이 섭정하던 시기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대립하며 세력을 키웠다. 한명회, 권람 등 책사들의 도움을 받아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안평대군을 유배 후 사사했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고 사육신이 처형되는 등, 계유정난은 조선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훈구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림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조는 야심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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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계유정난
조선 국새
조선 국새
사건 개요
발생 시기1453년 음력 10월 10일 (양력 11월 2일)
발생 장소조선 한성
주요 인물수양대군 이 유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이 용
관련 인물한명회
권람
홍윤성
양정
유수
이징옥
정분
조극관
조번
이양
민신
원인 및 배경
원인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단종의 어린 나이로 인한 왕권 불안정
수양대군의 왕권 찬탈 야욕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들의 권력 장악
배경세종의 장남 문종의 갑작스런 죽음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의 허약한 왕권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한 왕권 찬탈 세력의 성장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 세력의 권력 남용
왕실 외척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반수양대군 세력 형성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의 갈등 심화
경과
주요 사건수양대군이 자신의 측근들과 모의하여 김종서와 황보인을 살해
안평대군을 유배시킨 후 살해
반대 세력 제거 및 권력 장악
단종 폐위 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름 (세조)
결과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름 (세조)
단종 폐위 및 죽음
수많은 반대파 숙청
조선 전기 정치 세력의 재편
훈구 세력의 등장
사림 세력의 몰락
관련 사건
관련 사건이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생육신
영향
영향조선 왕조 초기 권력 투쟁의 정점
훈구 세력의 대두와 사림 세력의 몰락
왕권 강화 및 중앙 집권 체제 강화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큰 영향
조선 왕조의 안정화와 발전의 토대 마련
참고 문헌
참고 문헌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동국통감
국조보감

2. 배경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사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를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수렴청정을 할 대비대왕대비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가 섭정을 하였다.

세종의 아들들은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하며 각자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수양대군안평대군의 세력이 강성했으며, 조정 신료, 왕실,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수양대군은 양녕대군, 임영대군, 계양군 등을, 안평대군은 혜빈 양씨의 세 아들과 금성대군의 지지를 받았다. 김종서 등은 이들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대군들을 견제하였다.

2. 1. 수양대군의 정변 기도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신의 사후,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은 즉위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통해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해야 할 대비대왕대비가 부재(不在)한 상황에서, 고명대신 김종서가 섭정을 하였다.[1]

세종의 아들들은 세종대에 각종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으며,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1]

수양대군은 양녕대군과 자신의 동생 임영대군 그리고 계양군 등을 우군으로 두었고, 안평대군은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세 아들과 금성대군의 지지를 받으며 수양과 대립했다. 이들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김종서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또한 막강한 세력을 이루며 대군들을 견제하고 있었다.[1]

〈'''세조어진초본'''〉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수양대군의 책사 신숙주


정치적 입지에 위험을 느낀 수양대군은 자신의 뜻을 뒷받침해 줄 수하 책사로 권람, 한명회 등을 맞이하게 된다. 수양대군은 모신(謨臣) 권람을 통하여 당시 경덕궁직으로 있던 한명회를 얻고 한명회를 통해 다시 홍달손, 양정 등의 유능한 무인(武人)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았다.[2]

한명회, 권람의 합류 이후 수양대군의 정치적 세력 확대에 가속도가 붙어, 평소 절친한 관계였던 집현전 학사 출신의 소장파 관료 신숙주, 무예에 정통한 문관 홍윤성, 무관 양정, 황희의 아들 황수신, 김종서의 최측근 이징옥의 형과 아우인 이징규, 이징석 등이 그 세력으로 합류하게 되며, 왕실 인물들의 포섭에도 노력을 기울여 양녕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그리고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소생인 계양군 이증 등의 주요 종친도 그의 세력이 되었다.[2]

한명회, 권람는 세상을 읽는 능력이 있는 인물로 수양대군의 책사로 활동한다.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한명회와 권람은 왕권의 추락과 신권의 막강함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들어 정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2]

1452년 5월, 문종이 즉위 2년여 만에 병사하고, 왕세자였던 단종이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단종에게는 유력한 후궁의 지원이 없었기에, 문종은 임종 시 집현전의 학자와 관료들에게 국왕 보필을 부탁했다.

당시 정치 세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황보인, 김종서 등의 척신(顧命大臣)과 정치적 능력도 뛰어났던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척신들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을 후원하며 수양대군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사은사(謝恩使)로 에 갈 것을 청하여, 1452년 9월부터 이듬해 봄에 귀국할 때까지 국내 정치에서 멀어졌다. 이 수양대군의 파견은 그의 권력 야망을 감추기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수행했던 신숙주와 집현전의 정린지, 권람 등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명에서 돌아오자마자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했다.

준비가 완료되자, 계획의 발각을 우려하여 1453년 10월 10일 심야에 쿠데타 실행이 결정되었다. 수양대군은 먼저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김종서를 그의 집으로 찾아가 현장에서 살해하고, 동시에 그의 부하들은 궁정에 대신들을 소집하여 황보인 등 주요 대신들을 일시에 살해했다. 한편 배후였던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된 후 사약(死藥)으로 살해되었다.

3. 경과

1452년 5월,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여 만에 병사하고, 왕세자였던 흥의(훗날의 단종)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단종은 후궁의 지원이 없었기에, 문종은 집현전 학자와 관료들에게 국왕 보필을 부탁했다.

당시 정치 세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황보인, 김종서 등의 척신(顧命大臣)과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척신들은 안평대군을 후원하며 수양대군을 견제했다.

수양대군은 1452년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사은사(謝恩使)로 에 다녀오면서 국내 정치에서 멀어졌고, 이는 그의 권력 야망을 감추는 기회가 되었다. 신숙주, 정인지, 권람 등을 휘하에 두고, 명에서 돌아오자마자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했다.[1]

1453년 음력 10월 10일 심야,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살해하고, 부하들은 궁궐에 대신들을 소집하여 황보인 등 주요 대신들을 살해했다. 안평대군강화도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았다.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쿠데타 공신들을 등용했고(이들은 후에 훈구파가 된다), "계유정난"에 불만을 가진 왕족과 신하들을 압박했다. 1455년 윤6월, 단종은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고, 수양대군이 제7대 국왕(세조)으로 즉위했다.

1456년 6월, '단종복위 사건'이 발각되어 성삼문, 박팽년 등이 처형되었다. 이듬해 6월, 상왕 단종은 사사되었고, 금성대군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3. 1. 김종서와 조정 대신 제거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계략을 꾸몄는데, 첫 시도는 김종서, 황보인, 민신 등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는 안평대군이 자청했던 일이나, 수양대군이 세력을 동원해 저지하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다. 이 사행길을 통해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고,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한다.[1]

귀국 후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조정 중신들을 제거할 살생부를 작성하고 쿠데타 계획을 서둘렀다. 거사일은 음력 10월 10일, 첫 목표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수양대군은 병력 동원이 가능했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경복궁을 점령하기로 하고, 자신은 직접 종 임운, 양정 등과 함께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신숙주, 최항, 거사 당일 권람의 방문을 받았으나,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 무방비 상태였다. 수양대군은 종 임운에게 철퇴를 가지고 있다가 자신이 신호를 내리면 즉시 김종서를 내려치라는 명을 내렸다.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고, 김종서는 들어가 담소를 청했으나 수양대군은 핑계를 대면서 주저하였고, 미리 준비한 유인용 편지를 김종서에게 전달했다.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임어을운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그 동료들을 철퇴로 내리치니, 계유정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준비한 행동을 착실히 실행에 옮겼다.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을 장악한 뒤, 경혜공주 집으로 들어가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했다.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했다. 대신들이 들어올 때 겸종은 제거하고 홀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시좌소에 입궐시킨 뒤 수양대군의 반대되는 대신들은 홍윤성과 함귀, 구치관 등 무뢰배가 철퇴로 내려치는 것이었다.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판중추원사 정인지, 이계전, 이순지 등은 무사했던 반면에, 김종서 일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살해되었다. 이명민, 조번, 김대정, 하석 등은 자택에서 수양이 보낸 자객들에게 죽고,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민신을 현릉에서 창살하였고, 정분과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 등을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임운의 철퇴에 맞은 김종서는 가까스로 일어나 입궐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가마를 타고 도성의 사대문을 돌았지만 모두 문을 열어주지 않자 차남 김승벽의 처가로 피신했다. 몇몇 행인들에 의해 다음날 아침 양정이 다시 베러 가는데 대신들이 죽은 것을 몰랐던 김종서는 죽기 전 순진하게도 자신이 투옥되는 줄 알고 "정승이 어찌 걸어가느냐? 초헌을 내오너라."라고 말하는 그 순간, 양정은 가차 없이 김종서의 목을 베었다.

김종서가 철퇴를 맞고 깨어난 것처럼, 선공부정 이명민이 집에서 자객에게 철퇴를 맞았으나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김종서 집에 갔다. 이때 김종서가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기에 다시 집으로 가던 중, 소식을 들은 홍달손은 호군 박제함을 보내 죽였다.

4. 결과

계유정난이 성공하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렸다. 살해된 조정 중신들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정난공신 1등에 자신과 정인지, 한확 등을 임명하고,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을 독점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왕위에 오를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역적으로 단죄된 안평대군 등은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다가 훗날 숙종 때 복권된다.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짓게 하는 등 집권 태세를 굳혀갔다. 이렇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4. 1. 이징옥의 난

김종서의 참모 이징옥이 일으킨 이징옥의 난은 계유정난과 아주 밀접한 반란이었다. 이징옥은 김종서를 죽였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지만, 칭제건원을 하였다. '대금'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남만주의 오국성을 도읍으로 황제에 즉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난도 얼마 못 가 종성(鐘城) 판관(判官) 정종(鄭種)과 대호군 이행검의 밀사로 살해당했고, 허무하게 정리되었다.[1]

4. 2. 단종 복위 운동과 사육신

1456년 6월, ‘단종복위 사건’이 발각되어 성삼문, 박팽년 등 이후 ‘사육신’으로 불리게 되는 문신들이 처형되었다. 이듬해 6월,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4개월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단종이 공식적으로 왕위를 회복한 것은 제19대 국왕 숙종 때였다). 같은 시기, 단종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유배 중이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5. 영향

계유정난 이후 집중적으로 형성된 훈구 공신들은 정치 권력과 경제적 부를 독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반대급부로 사림은 지방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15세기 이후 조선 성종 때에는 중앙 정치 무대에 대거 등장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것이 훗날 기호학파, 영남학파로 나뉘고 붕당정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2]

6. 평가

사림파 등장 이후, 유교 명분론에 따라 계유정난은 왕위 찬탈 사건으로 조선 왕조 내내 비난받았다. 세종이 성왕으로 추앙받는 것과 달리, 세조는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야심가 이미지로 인해 평가가 높지 않다.

6. 1. 부정적 평가

이후 사림파의 등장과 함께 유교 명분론의 입장에서 이 "왕위 찬탈 사건"은 조선 왕조 내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 세종이 "성왕"으로 추앙받는 것과 달리, 세조는 그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야심가의 이미지 때문에 평가가 높지 않다.

7. 희생된 인물 명단

희생된 인물


8.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좌익원종공신녹권 1459-00-00 # 세조 5년이므로 연도만 기록
[2] 뉴스 [경북의 혼] 제3부-선비정신 3)경북 선비의 개혁정신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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